사막을 건너는 법(1975)

-서영은-  

◆ 소설 읽기  

● 줄거리

원래 미술학도(화가 지망생)였으나 월남전에 참전하여 을지무공훈장을 받고 돌아온 '나'는 제대 후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이게 된다. 죽음의 고비를 넘던 전장에서의 긴박한 순간에 대한 얘기를 애인인 나미에게 실감나고 절실하게 들려주는데, 정작 나미는 건성으로 들으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 여기며 실망하기도 한다.

극도의 무력감에 빠져 있던 나는 어느 날 창 밖으로 공터를 내려다보다가 뽑기 과자를 만들어 파는 한 노인을 발견하는데, 그는 쓰레기와 물웅덩이 속을 헤치며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이 그토록 뭔가를 열심히 찾는다는 일 자체가 나의 무기력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느낀 나는 견디다 못해 노인에게 접근한다.

노인은 월남전에서 죽은 아들이 받은 을지 무공 훈장을 손녀에게 가지고 놀라고 주었는데, 손녀가 훈장을 이 물웅덩이에서 잃어 버렸다고 말한다. 노인의 희망과 의지를 꺾어 버리고 노인에게 삶이란 결국 허무한 것이란 점을 알려 주고 싶었던 '나'는 내가 받은 을지 무공 훈장을 웅덩이에 몰래 숨기고 노인이 찾아내길 기다리지만 며칠이 걸려도 노인이 발견하지 못하자 나는 도와 주겠다며 직접 웅덩이에 들어간다. 웅덩이를 뒤지는 척하다가 훈장을 찾아 들고 노인에게 건네지만, 노인은 노여움과 차가운 경멸로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곤 돌아서서 가 버린다. 맥이 풀린 '나'는 이제껏 노인이 했던 이야기들, 즉 훈장을 실수로 잃어 버렸다는 것, 어린 손녀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아들의 개를 기르고 있다는 것 등이 모두 거짓말임을, 훈장을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어떤 소년에게 들어서 알게 된다. 그제야 '나'는 자신이 정말 바보였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나는 침묵 속에서 나미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나미는 내가 월남에 갔다 온 뒤부터 딴 사람이 된 것 같고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인생을 포기한 듯한 태도에 대한 이유를 알기 전엔 갈 수 없다고 했다. 나미의 손에는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날 밤 끼워 준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때 우리는 똑같이 졸업을 이 년 남겨두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우선 눈빛을 고치고 무언가를 해 보라고 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반지를 끼워 주자, "다른 남자랑 말도 하지 말고 보지도 말고 웃지도 말라는 약속으로 주는 거야."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기다릴 수 있겠다고 했지만 내 말문은 더욱 막히고 말았다. 나미는 뛰쳐 나갔고, 나는 그녀가 같은 걸 요구해 와도 대답을 줄 수 없기에 따라 나가려다 그만두었다. 식구들이 나를 지겹게 여기고 있는 눈치가 보였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일년이 가까워 오니까.

처음 제대증을 휴대하고 부산항을 닿을 때까지도 몰랐는데 서울에선 낯선 땅으로 뒷걸음쳐 가는 성싶었다. 나는 집에 도착한 순간 내 몸에 밴 전쟁 냄새, 긴박감이 모든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차단된 것 같았고 그것들에 대한 흥미도 없었다. 나는 내 안의 긴장, 진실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햇으나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며칠 전 다방에서의 일이 이제 생각난다. 어쩌다 그런 얘기를 나미에게 들려주었을까?

D고지에서 전투 중인 OO연대 근처까지 물을 실어다 주라는 명령을 받고 나와 한 병장은 밤중에 급수차를 몰아 T를 떠났어. 적이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 한 병장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나는 적보다 무서운 건 무감각이라는 걸 깨달았어. 중간에 엔진이 고장나 몇 시간을 지체하니 동이 텄어. 전속력으로 달려 목적지를 8km 남겼을 때 우리는 적에게 발견되어 사격을 받았지. 내 맘 속엔 내 생명보다 물을 기다리는 수천의 생명들에 대한 의지가 뭉쳐져 있었어. 차창이 박살나며 한 병장이 고꾸라졌고, 나도 오른팔에 부상을 당했지. 차를 달려 아군의 보초 막사가 보이는 순간 정신을 잃었어.

나는 당시의 긴장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래서 훈장을 타게 됐느니, 베트콩은 죽여 봤느니 하는 것이나 물었고, 나는 불쾌해져 나와 버렸다. 이것이 그날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지금 을지 무공 훈장을 바라보고 있다. 한낱 작은 그 쇠붙이 조각을. 나는 의자를 공터가 내다보이는 북쪽 창으로 끌어갔다. 웅덩이엔 늘 물이 고여 있고 쓰레기가 뒹굴고 있다. 한쪽 편엔 어설프게 펼쳐진 비치 바라솔 밑에 지금은 비어 있지만 뽑기 과자를 파는 노인이 있다. 물웅덩이 있는 곳에서 노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노인은 누렁개의 목줄을 끌고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 버린 듯 무언가를 찾고 있다. 아이가 노인에게 뽑기를 해 달라고 했고 돌아서는 노인의 얼굴엔 실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대수롭지도 않은 광경에 빠져 있는 내가 어처구니 없었다. 한데 소년이 돌아가자 노인은 다시 그 장소로 되돌아갔고, 나는 다시 노인의 모습을 쫓고 말았다. 노인이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다는 그 일 자체가 나의 무기력에 대한 도전같이 여겨졌다.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라 아틀리에로 내려가 성급하게 캔버스 앞에 앉았지만 꽉 막힌 기분이었다.

어느 사이 어두워져 나는 힘겹게 걸어가 스위치를 올리고 메마른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내 시선이 내가 대학 2학년 때 제작한 L교수의 흉상에 머물렀다. 나는 지금까지 그를 존경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그 흉상을 보는 순간 거짓을 발견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고 의자를 들어 그것을 향해 내던졌다.

아까부터 나는 창 옆에서 노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노인이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나는 계속 도전을 받는 셈이기에 나의 생활은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모른다. 나는 사실을 좀더 명확히 판단하기 위해 그와 얘기라도 나눠 봐야할 것 같다. 드디어 노인이 나타나더니 물웅덩이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노인에게는 끈질긴 어떤 힘이 나오는 듯하다.

나는 방에서 뛰쳐 나왔다. 나는 뽑기를 주문했고 잠시 후 노인의 손에서 비행기 무늬의 얇은 과자가 만들어져 나왔다. 나는 다섯 개를 더 주문했고 노인에게 뭘 잃어 버렸는지 물었다. 그는 아들이 월남전에서 받은 훈장을 잃어 버렸다고 했다. 아들 자랑을 늘어놓더니 앙케 고지 탈환 작전에서 죽었다는 말을 할 때는 풀이 죽어 있었다. 훈장은 아들 생각이 날 때 보려고 지니고 다니다가 꼬마 녀석의 보자기에 꺼내주었고 그 녀석이 물웅덩이에서 놀다가 잃어 버렸다고 했다. 그 훈장은 을지 무공 훈장, 내 방의 한낱 쇠붙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노인은 그것을 절대에 가까운 의미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을 희롱하는 기분으로 누구와 사는지 물으니 아홉 살짜리 손녀딸과 살며 개는 아들이 얻어와 기르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값을 치르자 노인은 다시 웅덩이로 갔다.

노인은 벌써 내가 표적을 해둔 곳에서 그냥 지나치곤 한다. 나는 어제 내 훈장을 물웅덩이에 던져 버리고 표시를 해두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보잘것없는 훈장을 노인에게 들이대며 노인의 그 끈질긴 힘이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케 하고 싶었다. 노인의 눈 속에서 허무의 모습이 비치는 광경을 보아야 나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다섯 번째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내가 공터에 당도했을 때 자전거에 간장 단지를 매고 팔러 다니는 소년이 왔다. 나는 노인에게 도와드리겠다고 하고 웅덩이를 뒤척거리는 척하다가 표적 앞에 와 쇠붙이 조각을 끌어 올려 노인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나는 노인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그때 소년이 끼어 들어 훈장을 집으려 하자 녀석의 손을 밀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척했다. 그러나 노인은 노여움과 차가운 경멸로 흉악하게 일그러져 돌아서더니 포장 쪽으로 가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맥이 탁 풀렸다. 그때 소년이 다시 훈장을 빼앗아가며 할아버지는 훈장이 아무 소용없으니 자기를 달라고 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아버지의 옆방에 산다는 그 소년을 통해, 할아버지가 훈장 같은 게 무슨 소용이냐고 하시다가 웅덩이에 갖다 버렸다는 얘길 들었다. 그리고 소용 없어 버렸으면 왜 찾느냐고 했다. 이렇게 되면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할아버지는 혼자 살며, 개 역시 병든 것을 주워 온 것이라고 했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노인은 죄다 알고 있었다. 이 세계를 덮고 있는 허망과 무의미, 그 밖의 모든 것을. 노인이 저만큼 떠나려는 것이 보인다. 몇 날 며칠 불러 모은 혼으로 집을 짓고 문턱을 넘어서려는 순간에 나타난 나를 증오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어딘가에선 다시 시작하겠지. 나는 정말 바보였다.

● 이해와 감상

이 소설은 월남전에 다녀온 후 극도의 허무에 시달리는 주인공 '나'와, '나'가 우연히 알게 된 한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허무와 그 극복에 대한 주제 의식을 담아 낸 작품이다. 삶의 허무를 노인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나'와, 이 세계가 사막처럼 황량한 곳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거짓말을 허무 극복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던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인간 삶의 실존적 문제에 관한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서영은의 실존주의 → 서영은은 자아의 갈등을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수법으로 그려내는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현실에서의 삶의 조건에 대한 보다 인간적인 관찰을 거쳐 초월적 입장에서 어떤 절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우리 인간성 자체 속에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많이 혼재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정직하게 직시할 때, 우리가 서로 진정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직시하는 상태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읽어가기에 참 거북하고 스스로 인간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기도 하고 불편함을 주지만, 거기에는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이 엿보이고 실존을 통해서 다시 삶을 출발할 수 있는 거점이 정직한 선에서 마련되는 것입니다.(2001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인터뷰에서)'

서영은의 소설들은 대체로 일상으로부터 탈피하려고 노력하는 인물들의 절박한 욕망 위에서 출발한다. 그녀의 작품들에서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일상성, 속물 근성, 타성, 상식적 세계의 부정적 성격은 그 반대편에 긍정적인 그 무엇을 가정하고 있다. 또한 그녀의 작품에는 안락한 일상에 대한 거부, 소모적 자기 희생, 금기된 사랑에 대한 이끌림 등 자발적으로 고통을 추구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고통에의 기울어짐은 인물들이 고통을 수단으로 인식, 고통을 대가로 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서 기인한다. 서영은은 오랫동안 진지하게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을 극한의 고통으로 내몰고서라도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인물을 형상화해 왔다.

실존주의에 관련된 공식 하나를 살펴보면, '존재 = 실존 + 본질'이다. 실존이란 인간이 태어났을 때 누구나 가지는 육체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육체의 덩어리는 다른 육체의 덩어리, 다른 사물의 덩어리와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 육체의 덩어리를 다른 덩어리와 구분해 주는 것이 바로 본질이다. 말하자면 개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실존주의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 및 문예사조이다.

● 핵심사항 정리

갈래 : 현대 소설, 단편 소설, 실존주의 소설

배경

* 시간적 배경 → 1970년대 중반 이후(월남전 이후)

* 공간적 배경 → 서울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주제삶을 가득 채운 허무의 본질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

● 더 읽을거리

◆ 제목 '사막을 건너는 법'

'사막'은 세상이다. '사막을 건너는 법'을 다시 말하면, '노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노인은 아무 것도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해서 잃어 버린 삶의 의미를 억지로 되찾는다. 그것이 바로 노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즉 사막을 건너는 법이다. 그런데 '나'가 비틀린 감정으로 노인의 삶에 개입해 그의 환상을 파괴해 버린다. 아무것도 없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 노인은 훈장을 찾아 주었음에도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그 이유를 모르던 '나'는 아이 덕분에 노인의 환상을 알게 된다. 덕분에 '나'는 '나는 정말 바보였었다.'며 자신의 갈등이 노인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작품에 한정지어 말하면, 사막이란 자신의 존재와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무기력에 빠져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사막을 건너는 법이란 그런 무기력을 이겨내기 위해 자기 스스로 허구의 목적, 목표를 만들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하다고 느낀 상태가 사막이라면, 노인이 훈장을 찾는 일은 무의미함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막을 건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 노인의 거짓말

노인에게 있어서 현실은 혼자 외롭게 남겨진 쓸쓸한 세상. 노인이 한 거짓말은 그가 바라던 삶, 다시 말해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기게 해주는 가족과의 정 깊은 끈끈한 관계와 관련된 것들.

니체는 삶은 논증이 아니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된 판단을 단념하는 것은 삶을 단념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거짓을 삶의 조건으로 인식하는 것, 그것은 관습화된 가치에 저항하는 것이다.

니체에게서 거짓은 어쩌면 진리보다 더 가치 있고 유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은 거짓으로 삶의 동기와 의미를 부여하면서 신앙처럼 거짓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상적인 삶에 대한 비전이 없을 때에는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지혜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세계 속에서 비전에 따른 거짓을 진실처럼 믿음으로써 현실의 허무를 전복시키는 삶이야말로 '사막을 건너는 법'임을 작가는 노인을 통해 전하고 있다.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노인의 거짓말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으며, 삶을 지탱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거짓말은 환상이면서 신념이었다.

◆ 시지프 신화와 노인

현명하고 교활한 인간이었던 시지프는 여러 묘안으로 죽음을 피하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지옥으로 가게 된다. 시지프를 괘씸하게 여겼던 신들은 그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가하는데,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올리면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리면 다시 떨어지고, 다시 올리는 형벌이 가혹한 이유는 시지프의 노동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지프는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을 다시 밀어올리고, 이렇게 신들을 향한 반항 자체가 그의 삶의 의미가 되게 한다. 즉, 시지프는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그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을 지탱한 것이다.

이렇듯 무의미한 삶에서 노인과 시지프는 피투(被投, 던져짐)의 존재였다. 그 둘은 당위성이 없는 존재이고 그들에게 주어진 선험적 의미는 없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피투의 존재에서 기투(企投,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방식)의 존재로 나아갔다. 자기 자신에게 허구의 당위성을 부여했고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되어 모든 무의미한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조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것에 주어진 정답은 애초에 없었다.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일 뿐이었다. 주인공은 '훈장'을 만들어낸 노인을 통해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 읽을 거리

<사막을 건너는 법>은 베트남 전장에서 돌아온 '나'의 현실에 대한 부조화 증상에서 시작된다. 이는 헤밍웨이나 노먼 메일러가 전장에서 돌아온 젊은이의 '내상'을 다루는 단편들에도 나오는 '보편적 증상'이다. 겉으로 보면 그는 멀쩡하다. 매우 얌전하고 충동적이지도 않고 사회 법규에도 어긋남이 없다. 다만, 감동이 없어졌다거나, 단조로운 일상에 심한 권태를 느기고 있다거나, 어떤 성공이나 출세나 자기 성취라든가, 아무튼 세속적인 어떤 일에도 열의가 없다거나, 매사에 무미건조해진 태도, 그것이 남들 눈에는 병적으로 보인다. 약혼자인 나미가 나에게 몰아대는 긴 대화는 모두 그러한 상대방의 일변한 심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전투하던 얘기를 늘어놓다가 후회하는 눈치, 갑자기 손을 뿌리치고 달아난다. 사뭇 딴 사람이 되었다."

"인생 전부를 포기한 듯하다."
등등이 그녀가 나를 낯설어 하는 징후들이다. 나는 사실 제대해서 집에 돌아온 아침부터 이상한 비현실감 속에서 눈을 뜬다.

"이런 전선에서 두부장수 종소리,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수돗물 소리가 웬일일까?"

나의 안에 있는 긴박감에 비해서 밖은 너무도 무의미하고 태평스럽고 어쩌면 패덕스럽기까지 하다. 나날이 권태스럽고 짜증스럽기만 했다. 이따금 나는 내 안의 긴장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려 애써보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베트남 전장에서 수송병으로서 동승한 병사가 전사할 정도로 위험한 사선을 뚫고 고립된 부대에 식수를 보급한다. 그 일로 나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전투 이야기를 끝내자 약혼자 나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베트콩은 한 명도 못 죽여봤느냐."
고 낭랑하게 물었고 나는 불쾌해져서 일어났으며 거리에서도 그녀의 팔짱 낀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버린다.

나는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다가 설탕과자 뽑기를 만들어 파는 노인을 발견한다. 노인은 장사를 마치고 늘 데리고 다니는 개를 끌고 물웅덩이로 들어가 꼬챙이로 이곳저곳을 쑤시며 뭔가 찾고 있었다. 노인과의 에피소드가 조금 더 명확해지기 전에 작가는 한 가지 복선을 마련한다.

화가 지망생인 내가 대학 시절에 모델로 삼았던 어느 교수의 흉상 이야기다. 그는 사학재단 이사장의 치우친 종교관에 맞설 정도로 양심적인 철학교수였다. 그는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묻는다. 두 마리의 황소가 끄는 수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황소입니다, 또는 바퀴입니다, 라고 학생들이 대답했지만 교수는 우마차에 대한 개념 즉, 청사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청사진이 마련된 연후라면 어떤 다리이든 수레를 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을 사물을 저장해두는 창고로밖에 사용하지 않는데, 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라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저 흉상을 보니 뭔가 참을 수 없는 거짓을 발견한 것만 같았다. 헛된 기교이며 조작이다. 흉상을 만든 나의 과장된 사실적 수법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형상화되기 이전의 실재 인물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인지 그 역겨움의 근본 원인은 나 자신 속에 있을 것이다. 나는 쇠의자를 집어던져 흉상을 부수고 화실 밖으로 나온다.

나는 뽑기장수 노인에게 접근해서 그가 물웅덩이 속에서 뭘 찾으려고 하는지 묻는다. 노인은 훈장을 찾으려 한다는 것, 그것은 아들이 월남전에서 받은 물건이라는 것, 아들은 월남에서 전투 중에 죽었다는 것 등을 얘기하고 아이들이 보여달라기에 내주었더니 갖고 달아나서 놀다가 거기 빠뜨렸다고 했다. 노인은 손녀와 산다고 그랬고, 데리고 다니는 개도 아들이 키우던 놈이라고 말한다. 나는 며칠 동안을 노인이 여전히 물웅덩이를 뒤지고 있는 광경을 내다보다가 내가 받은 훈장을 물웅덩이에 던져둔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찾아내어 그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물건인지 노인의 코앞에 직접 들이대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장화를 신고 꼬챙이까지 구해 가지고 노인에게 가서 그를 도와주겠다고 자청한다. 미리 빠뜨린 장소를 잘 알고 있던지라 나는 얼마 안 가서 쇠붙이 조각을 찾아낸다. 찾으시던 게 바로 이게 맞느냐고 흥분하는 척 다그치는 나에게 노인은 노여움과 차가운 경멸의 얼굴을 돌린다.

"바보 같으니라구!"
하면서 노인은 화를 내고 가 버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동네 소년과 둘이 남게 되었을 때 노인이 직접 아들의 훈장을 갖다 버렸다는 것, 훈장을 벽에다 걸어놓고 이까짓 게 무슨 소용이냐고 말해 왔다는 것, 손녀는커녕 혼자 산다는 것, 아들이 키우던 개가 아니라 동네를 떠돌던 버려진 개를 주워왔다는 것 등을 소년이 말해준다. 훈장, 손녀, 개에 관한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말이었다. 노인은 죄다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냉혹하게 알고 있었다. 이 세계를 덮고 있는 허망과 무의미와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이러한 허망과 무의미를 끝까지 밀어붙여 그 너머 어딘가에 도달하려는 마음을 그린 것은 서영은의 또다른 뛰어난 단편 <먼 그대>에서도 되풀이된다. 유부남의 아이를 낳아 기르다가 본처에게 빼앗기고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사내의 사업 교제비를 마련해주는 여자는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이기적으로 이용만 하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는 한 남자라기보다 그녀에게 더 한층 큰 시련을 주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여겨졌다."

이러한 사랑과 인과의 삭막한 허무에 관하여 그는 훨씬 나중인 1980년대 중반에 가서야 <황금 깃털>에서 조금 더 구체화한다. 소녀 시절 그녀가 바라보았던 어떤 등불은 환멸로 꺼져 사라지지만, 다시 혼자 남은 만년의 노작가에 이어지고, 그의 죽음과 세속적인 파란을 겪으면서 그녀 자신도 의연한 만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작품을 지키며 끝까지 함께 하려는 모든 작가는 천하장사다. (글 : 황석영)

 

◆ '사막' 위의 윤리  

<사막을 건너는 법>(1995)에서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테마와 마주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소설에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나 어쨌든 살아야만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무거운 질문이 주조저음으로 깔려 있다. 죽음의 근처에까지 가보았기에 모든 것이 허망해졌거나, 모든 것을 잃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이 세계를 덮고 있는 허망과 무의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작가가 던진 질문을 따라 이 답을 추적할 차례다.

<사막을 건너는 법>에는 '사막' 위의 작렬하는 태양빛 아래 내던져진 두 인물이 있다. 한 명은 관찰자이자 주인공인 '나'이다. '나'는 월남의 섬광과 포화 속에서 옆의 전우가 쓰러져가는 체험을 했다. 사지(死地)의 공포와 허망함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귀향한 그에게 일상의 모든 것은 권태롭고 허무하게 여겨진다. 이 세계의 한쪽에는 전장(戰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는 그와는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계―― 두부 장수 종소리와 텔레비전의 노랫소리와 수돗물 넘치는 지리멸렬한 세계 ――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도, 죽어 넘어진 전우도, 작렬하는 포화 소리"도, 그저 "활자화된 이야기 정도"로만 여기는 약혼녀가 있다. 그리하여 '나'는 "밖은 너무나 무미하고 태평스럽고 어쩌면 패덕스럽기까지" 하다고 여긴다. '나'의 삶은 그저 권태롭고 짜증스러울 뿐이다.

'사막' 위에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이 권태로운 '나'에게 포착된, 설탕 과자를 만들어 파는 노인이다. 그는 매일, 물웅덩이 속에서 월남전에서 전사한 아들의 훈장을 찾고 있다. '나'는 훈장을 한낱 '쇠붙이'로 여기지만, 노인은 똑같은 그것을 아들의 유품이자 "절대에 가까운 의미"로 여기고 있는 듯 보인다. '나'에게 노인의 행동이 어리석게 여겨졌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세상의 허무를 다 알아챘다고 자만하고 냉소하는 '나'는, 노인의 행동과 의지가 헛된 것임을 증명해 보여주기 위해 속임수를 쓴다. 노인이 발견하도록 '나'의 훈장을 몰래 물웅덩이에 빠뜨려놓는다. 기뻐하는 노인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때 반전이 일어난다. 노인은 나의 행동에 노여움과 경멸을 참지 못하며 "바보 같으니라구!" 라는 말을 내뱉고 짐을 꾸린다. 여기에서 뒤늦게 진실이 밝혀진다. 노인이 찾던 것이 훈장이 아니었다는 것. 훈장과 손녀와 개에 대한 노인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 즉 노인은 '나' 이상으로 삶의 무의미와 허망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고, 더 고단한 사막의 정중앙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막 위에서 권태와 환멸을 토로하며 그저 지리멸렬한 냉소를 띠고 있었던 반면, 이 노인은 자신의 사막 위에서 '신기루' 하나를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진지한 연기를 펼침으로써 자기의 조건을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이 노인의 거짓말은 '사막'에 비유된 이 세계에서 자포자기도, 섣부른 희망도 모두 거절하면서 만들어낸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리하여 결말에 나오는 '나'의 독백처럼, 노인은 사막을 건너는 시도를 "어딘가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자살도 희망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이제 '사막' 위에서 자기만의 방법을 고안하고 자기만의 윤리를 정초한다. 되돌아갈 수도, 모래 위에서 죽을 수도 없는 사막을 어쨌든 건너야만 한다면, 정면에서 맞서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소설에서 제안하는 '사막을 건너는 법'이고 '사막의 윤리'인 셈이다. 굴러 떨어지는 돌을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신화 속 인물의 고독과 당당함이, 짐을 챙겨 공터를 떠나려는 노인의 모습에서 이렇게 다시 확인된다. 그리하여 이 소설에서 던지는 질문은 기실 지금 우리를 겨냥하는 중이다. 우리는 자주 소설 속의 질문과 답들을 다시 우리의 것으로 만나게 된다.

*출처 : 『적도의 순례, 불 위의 춤』(2007) / 김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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