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벽(1971)                                                  -이청준-

<전략>

소설은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여인(소설을 가지고 찾아온 박준의 여동생)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나는 그 소설을 내가 맡을 작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에서 그 원고를 사 주고 안 사주고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자기가 미친 다음에나 팔아 보라고 마지막 남기고 간 소설이었다.(관련 속담-말이 씨가 된다) 그가 누이에게 농담처럼 했다는 말을 보면 그는 그 소설을 쓸 때부터 자신이 언젠가는 정말 미친 사람이 되어 있거나, 적어도 그렇게 알려지게 될 것을 점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弄假成眞-장난삼아 한 것이 진심으로 한 것 같이 됨. 박준이 오래 전부터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박준은 그가 했던 말처럼 현재 정신적인 문제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소설을 섣불리 놓칠 수가 없었다.

나는 일단 소설을 맡기로 하고 나서 여인을 들려보냈다. 원고료는 며칠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되, 병원 일은 내가 급한 대로 양해를 구해 놓겠으니 언제라도 맘 내킬 때 찾아가 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곧 박준의 소설을 안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이제는 인터뷰 기사를 읽어 보기 위해 신문사를 찾아가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급할 것이 없었다.('나'는 박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신문사까지 찾아가 인터뷰 기사를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박준이 지은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되자, 그러한 노력을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이는 문학 작품에는 작가의 삶과 가치관이 형상화되어 있다는 '나'의 시각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나'의 시각은 문학 작품 감상 방법 중 '표현론적 관점'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원고부터 읽어 보고 싶었다. 점심도 사무실로 시켜 오게 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사무실로 올라오자 곧장 원고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박준의 소설이 이번에는 정말로 나에게 신문사를 갈 필요가 없게 만들고 있었다.(소설에 박준의 심리적 상처의 원인이 드러남.) 전짓불(박준이 지은 세 번째 소설의 중심 소재 ― 시대적 폭력과 억압을 상징함. 박준이 느끼는 공포감의 원인임. 자기 진술 욕망을 좌절시키는 권력이 감시 장치를 의미함. 6·25 전쟁 당시 박준의 경험과 성처를 상기시켜 줌.)이 ――바로 그 소설 속에 박준의 전짓불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상스럽게도 박준은 2년쯤 전에 말한 그 전짓불을 소설 속에서 직접 이야기하고 있다. 전짓불은 소설의 곳곳에서 무섭게 번쩍이고 있었다.(전짓불을 통한 박준의 상처가 소설의 곳곳에 형상화됨) 아니, 박준의 이번 소설은 바로 그 전짓불을 위해서, 그리고 전짓불에 의해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어 나가고 있는 형국이었다.(박준의 소설은 전짓불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지어졌으며, 전짓불을 중심으로 사건이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함.) 어찌 보면 박준 자신이 전짓불 아래 앉아 끊임없이 그 전짓불의 강한 조명을 받으면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전짓불과 관련된 과거의 상처가 담긴 소설을 쓰고 있음을 뜻함.)

―― 아마 이건 제(박준 소설의 주인공 G)가 국민학교 4학년쯤 되었을 때의 일 같군요. 국민학교 4학년 때라면 그러니까 6 · 25 전란(박준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마을 청년들이 한창 군대들을 나가던 때였지요. 그 무렵에는 순경들이 마을로 들어와서 징집 영장을 받지 않은 청년들도 마구 붙잡아다 입영을 시키는 수가 있었어요.(소설 속 시간적 배경인 전쟁 당시 국가 권력의 폭력적인 면모가 나타나 있다. 이는 박준이 실제 겪었던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마을에서는 가끔 가다 한번씩 소동이 일어나곤 했지요. 쫓고 쫓기고 하느라고 말예요.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중략>

어머니가 막 문을 고쳐 닫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과연 또 하나의 발소리가 급히 뒤를 쫓아오더군요. 그러더니 그 발소리가 바로 우리들 방문 앞에 멈춰 섰어요.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날이 선 재촉 소리와 함께 백지 창문에 불빛이 번쩍거렸습니다.(폭력의 강렬함을 드러냄.) 저는 가슴이 떨려 와서 정말 죽을 지경이었지요. 어머니는 그 소리에 막 잠이 깬 사람처럼 졸리는 목소리로 게 누구요, 하고 눈을 비적비적 부벼 대며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아, 바로 그 순간이었어요. 열어젖힌 문 밖에서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밝은 전짓불 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었어요. 그 불빛 때문에 뒤에 선 사람은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 불빛 뒤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는 물론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지요. 그 사람은 여전히 전짓불 빛을 방 안으로 쏘아 부으며 방금 청년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었어요. 청년들을 붙잡으러 나온 지서 순경이 분명했지요. 저는 그가 순경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 무시무시한 전짓불 때문에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어요.(순경은 경찰이므로 시민들에게 편안함과 안전감을 주는 직업이다. 그러나 순경임을 인식했음에도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는 것은 전짓불로 상징되는 시대적 폭력과 억압이 공권력을 통해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년을 안에 숨겨 두고 나서 그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서만이 아니었어요. 그 전짓불 빛 때문이었지요. 뒤에 선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전짓불(권력의 뒤에서 인간적 면모를 잃은 국가 권력) 말입니다 …….

[박준의 소설은 이를테면 그런 식이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소설의 주인공인 G가 그의 환상 속에 나타난 심문관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있는 대목의 하나인데, G가 그런 식으로 환상의 심문관 앞에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이 소설의 바깥 이야기는 '나'가 박준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으므로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그러나 안 이야기는 박준이 G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으므로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이 서술자가 다른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청년 운동 단체의 간부 직원인 G는 어느 날 저녁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다 문득 이상한 환상에 빠져 든다. 집으로 돌아오는 좌석 버스 속에는 한결같이 무겁게 입을 다문 시민들이 피곤한 어깨를 기대고 앉아 있다. 그런데 G는 그 무거운 침묵과 얼굴이 보이지 않은 사람들(어두운 사회 분위기와 인간적 유대가 사라진 사회상을 알 수 있음)의 어깨 뒤에서 갑자기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문득 그 모든 사람들이 서로 무엇인가 침묵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침묵의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는 말할 수가 없다.(억압적 사회에 살고 있음) 그러나 G 자신도 그들과 함께 그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느낀다. 느낌 속에선 대화의 내용도 제법 확실한 듯싶다. ……G는 한동안 그런 환각에 빠져들다 이번에는 느닷없이 어떤 불온스런 음모의 피의자로 체포당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그 음모 사건에 관해 심문관의 취조를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심문관은 G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음모 사건이 모의되고 있었으며, 그것과는 G가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추궁하지 않는다.(심문관이 특별한 혐의 없이 G를 잡아들였음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증거나 객관적인 사실 없이도 개인을 구속하던 억압적인 권력을 의미한다.) G는 다만 자신의 생애에 관해 그가 기억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진술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 음모 사건이라는 것과 상관이 있거나 없거나, 또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나 않거나 기억해 낼 수 있는 모든 일을 가식 없이 진술하라는 것이다.(특별한 혐의 사실이 없기 때문임)  심문관은 G의 그런 진술로부터 그가 어떤 식으로 그 음모 사건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어떤 가공할 범죄인지를 가려낼 참이라는 것이다. G 역시 차라리 그편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그는 도대체 자신이 어떤 음모를 꾸민 기억이 없다. 심문관 앞에 서고 보니 잠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심문관 앞에서의 자격지심 같은 것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마저도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까마득했다. 살아 있는 기억 속엔 음모를 꾸민 사실이 결코 없었다. 심문관의 요구를 기피할 이유가 없었다. 진술한 진술이 자신의 혐의 유무를 정확하게 가려내 줄 수 있다면 이야말로 자기 쪽에서 먼저 바라고 나서야 할 바였다.

그러나 G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심문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데서 나타나는 불안감) 심문관(진술을 강요하는 존재, 전짓불의 추궁을 의미함,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권력과 억압을 상징함)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심문관은 한 번도 G가 본 일이 없는 제복을 입고 있다. 모자의 모양도 이상스럽고 제복에 달린 부착물이나 장신구의 풍속도 모두 눈에 선 것들뿐이다.(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 권력의 탈을 쓰고 개인을 억압하는 광경을 복장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상스러운 복장은 그 권력이 정당하지 못함을 암시한다.) 사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공연히 이쪽을 불안하게 해 온다. 공연히라기보다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에겐 어떤 식의 진술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데 가장 효과적일지 알 수 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 앞에 가장 정직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부터가 바로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G는 진술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결국 그 심문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스런 위구심 속에 진술을 시작한다. G가 자신의 과거를 심문관 앞에 고백하게 된 경위는 대략 그러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시작된 G의 과거는 어찌 된 셈인지 온통 그 전짓불하고 상관된 일뿐이다.(인물의 심리적 병인의 근원에는 전짓불로 상징되는 충격적 경험이 내재해 있음) 첫 대목부터가 앞에서 보인 것과 같은 식이었다. 아니, 앞에서 본 것은 그 진술의 첫 대목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번째였다. G의 첫 번째 진술은 마침 박준이 그의 인터뷰 중에서도 말한 바 있는 그 어린 시절의 봉변에 관한 것이었다. 아는 바와 같이 그것도 물론 전짓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앞서 소개한 대목보다 1년쯤 전 일이 되는 셈인데(그래서 박준도 소설 속에서 그것을 두 번째로 고백시키고 있었지만), 그때 일에 대한 G의 진술도 이렇게 되어 있었다.

―― 저의 고향 마을은 남해안 어느 조그만 포구 근처였습니다. 때는 6 · 25 사변이 터지고 나서 3개월 남짓 지난 1950년 가을 무렵이었어요 …….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