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단애(1957)                                                  -한말숙-

 

 

새까만 거리에는 헤드라이트의 행렬이 한결 뜸해졌다. 밴드는 다시금 왈츠로 바뀌었다. 시간은 마구 흘러간다. 진영은 별로 초조해지지도 않는다. 애당초에 댄서로 취직할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한 달 동안 일을 한 연후에야 겨우 월급을 탄다는 것은 안 될 말이다. 오늘 저녁을 먹고, 이 한 밤을 여관에서 자기 위한 돈이――그것도 단 돈 2천 환이면 되지만――필요한데 한 달 후가 다 무엇이냐.

이대로 서 있자. 지난 봄에도, 늦어서 오는 손님이 있지 않았던가. 그 때처럼, 한 열흘을 벌어서 또다시 반 년을 살고 보자.

춥다. 추워서 움츠러진 조그만 젖꼭지가 스웨터 위에 뾰조록이 솟아 버렸다. 그뿐만은 아니다. 배도 고프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거의 질식 상태다. 추위와 굶주림……. 진영은 그 속에서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스스로를 또렷이 깨닫는다.

'지금 나는 살고 있다.'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살고 있다." 하고 되씹어 본다.

5층 빌딩의 높은 창턱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밤은 아늑하고 다정스럽다.

"들어가실까요?"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돌아다보니 해멀쑥한 청년이 웃고 서 있다. 홀에는 자욱한 담배 연기에 샹들리에가 희미하다. 그 속에서 밴드는 흐르고, 춤꾼들은 마시고 웃고 떠들고 있다. 초만원이라 채 몇 발짝 떼기 전에, 다른 쌍과 맞부딪쳐 버린다.

리드(사교춤을 출 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춤을 이끌어 가는 것)는 서툴고 맘보는 재미 없었다. 그래도 진영은 밴드에 맞추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그렇게 해서, 추위나 덜어 볼까 하는 속셈이었다. 홀드(사교춤을 출 때 상대는 안는 것)는 차츰 가까워졌다. 술 냄새가 진영의 얼굴에 확 끼친다. 뺨에 남자의 수염이 까칠까칠 닿는다. 귀찮다. 팁은 얼마나 주려나.

"기피자(징집, 병역 등을 꺼리거나 싫어하여 피하는 사람)를 적발해야 할 텐데요."

청년은 술 때문에 조금 혀 꼬부랑 소리다.

"왜요?"

"직업상……."

"직업?"

"난 형사야."

"그러세요?"

진영의 말끝은 힘없이 흐려진다. 그처럼 어린 형사에게 돈이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 하나 잡았나 했더니…….'

짜장(과연 정말로) 구슬픈 블루스보다도 진영의 스텝은 맥이 없다. 카네이션 꽃잎 지던 밤.

스테이지에서는 가수가 앞가슴을 허옇게 드러낸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도 기피자인데 남을 잡으려니 양심이 찔리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내 목이 달아나고."

추억에 울던…….

"내일까지는, 꼭 하나 적발해야 할 텐데……. 자, 그러고 보니 모조리 기피자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후유……."

남자가 풍기는 술 냄새는 견딜 수가 없다. 진영은 스텝을 밟으며 무턱대고,

"저기 있지 않아요? 기피자."
하고 소리쳤다. 형사는 진영의 뺨에 대고 있던 얼굴을 번쩍 들며,

"어디?"
한다. 진영은 턱으로 아무 데로나 가리켜 보았다.

"저어기."

마침 저편에서 키 큰 청년이 깨끗한 뒤통수를 이쪽으로 보인 채, 멋있게 턴을 하고 있었다.

"정말?"

"으응."

진영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을 했다. 진영은 그 청년이 누구인지도 물론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기피자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 바가 못 되었다. 다만 술 냄새와 까칠까칠한 수염을 면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블루스는 멎었다. 진영은 위스키를 마셨다. 목에서는 차나 이내 몸은 후끈해진다.

마지막 곡이 시작되었다. 형사는 화장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진영은 담배 연기 속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르바이트?"
하며 눈이 어글어글한(
생김새나 성질이 너그럽고 부드러운) 청년이 진영의 앞에 우뚝 섰다. 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었는 걸."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센터로 나가는 청년의 뒤통수를 보자, 진영은 어쩐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까, 턱으로 아무렇게나 기피자라고 가리킨, 바로 그 깨끗한 뒤통수였기 때문이다.

리드는 멋있었다. 진영의 등에 얹혔던 팔이 차차로 내려와서 감긴다.

"멋진데?"

그의 눈은 정열적이면서 어딘지 냉랭하다.

"아까부터 허리가 좋다고 생각했었지."

"……."

"추면서, 남이 안고 있는 여자를 감정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야."

"……."

"학생……? 미스?"

진영은 연달은 질문에 대답 대신 웃고 있었다. 청년은 진영이가 둘 다 긍정한 줄로 알은 모양이다.

"1주일만 살까?"
하고 웃는다.

"10만 환이면 되지, 내일부터."

사뭇 뻐기는 어조다.

"흥!"

진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10만 환이 다 무엇이냐. 내게는 지금 당장에 단돈 2천 환만 있으면 충분한데. 그러나 웃음의 뜻을 잘못 알아차린 청년은,

"비싼데, 그럼 20만 환!"

"흥!"

진영은 더욱 답답하고 기가 막혔다.

"그러면, 30만 환."

밴드는 멎고 홀드는 풀렸다. 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일부터 1주일 간의 일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지금 생각할 여유가 없다. 오늘 밤을 어찌하나 그것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진영이 아닌가.

어느 사이엔가 진영의 손에 지폐가 쥐어져 있다. 620환이다.

"남은 게 그것밖에는 없어."

두 사람은 다른 춤꾼 둘 사이에 끼어 묵묵히 층계를 내려갔다.

거리는 추웠다. 이내 온몸이 오싹해지며 떨린다.

"내일, 호심으로 오시오. 9시 반."

청년은 말을 뚝 자르고 돌아섰다.

9시 반이라면 자고 일어나서 나오기가 꼭 알맞은 시간이라고 진영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오후나 저녁 몇 시라고 한다면 진영은 그것을 지킬는지가 의문이다. 그 동안의 시간에 혹시 하루를 살 수 있는 돈이 생긴다면 구태여 그를 기다려야 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진영도 돌아섰다. 몹시 배가 고팠다.

 

[중략]

 

택시 안에서 그는 진영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호텔의 현관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주홍빛 비로드의 양탄자가 눈부시었다. 기둥이랑 천장에 현대적인 감각이 확 끼친다. 수부에서 청년은 1주일 방값을 전불했다.

"309호실."
하고 사무원이 말하니까 보타이(
나비 모양으로 가로로 짧게 매는 넥타이. 나비 넥타이)를 맨 보이가 성큼 나선다.

진영은 손에 든 지폐의 무게와 그녀와 나란히 층계를 올라가는 청년의 로션 냄새와 주홍빛 양탄자를 인식했다.

층계의 커브를 돌 때다.

"여보."
하고 아래서 누가 소리를 쳤다. 형사라는 것이었다.

형사는 청년의 신분증을 조사하더니 가자고 한다. 기피자라는 것이었다. 지금 곧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은 형사를 비웃는 듯 싱긋 웃으며,

"갑시다!"
하고 늠름한 걸음으로 층계를 도로 내려간다. 깨끗한 뒤통수가 몹시 사랑스럽다. 진영은 당황하며 뛰어갔다.

"여보세요."

"……?"

"이것……."

진영은 돈 보따리를 내밀었다. 청년은 싱긋 웃었다.

"가지시우. 약속을 어기는 것은 이쪽이니까."

"너무 많아요."

"애당초에 30만 환은 너의 허리 때문이 아니야. 이걸 봐, 이렇게 죽음이 쫓아다니지 않아? 나는 1년을 살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우선 하루라도 살고 보아야 해. 살 시간이 없어 바뻐."
하고 빙긋 웃으며 돌아선다. 진영은 청년에게 바싹 다가섰다. 진영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졌다.

"가지 마세요."

청년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진영의 입에서도 앵무새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저도 사랑해요."

말을 하고 보니 진영은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말아요!"

"돈으로 안 되는 일 없지. 곧 온다."

그는 진영의 뺨을 슬쩍 쓰다듬고 호텔을 나가 버렸다. 형사가 뒤따라 나갔다. 그 때 수부에서 해말쑥한 청년이 담배를 피우며 진영에게로 다가왔다. 진영은 낯익은 얼굴이라 생각을 했다. 누구일까? 아차! 엊저녁의 그 형사로군!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모든 일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진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매섭게 쏘아붙였다.

"당신이군요! 비겁한."

"왜 그러슈! 남편?"

진영은 입을 한 일 자로 다문 채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그럼 애인?"

"아니."

"그러면?"

"남자!"
하고 진영은 돌아섰다. 형사는 뒤따라오며,

"내가 논산으로 갈 때엔 나도 프로포즈할 생각이야."

"어림없어."

"나는 1년은 넉넉히 살 수 있어!"

진영은 앞을 똑바로 본 채 층계를 올라갔다.

진영은 호텔의 그릴에서 치킨 스테이크를 먹었다. 맛있는 것을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인생은 한결 쓸쓸하리라고 생각하며.

오버와 구두를 샀다. 립스틱도 샀다. 이것을 바르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홀로 갈 날이 머지 않아 또 있으리라 생각했다. 백도 샀다. 그래도 돈은 남았다.

진영은 하숙으로 갔다. 주인 아주머니는 삯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셋이나 데린 전쟁 미망인이다. 밀린 밥값을 치렀는데도 진영의 마음 한 구석 어딘지 개운치 못한 데가 있다. 5만 환을 더 내어놓았다. 주인은 고맙다고 하며 이내 흑흑 흐느껴 운다. 30만 환을 얻은데도 고마운지를 몰랐던 진영은 하숙 주인이 오히려 우스꽝스럽다. 그녀를 도와 주는 것이 아니었다. 진영은 그 여자의 가난이 끼친 울적한 기분을 가시게 하고 싶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진영은 화구를 샀다. 모두 4만 환이다. 갑자기 붓이 들고 싶어진다. 어서 그려야지. 국전에서 모 장관상을 탄 경일의 그림이 생각난다. 그녀는 그 구성이 참 잘 되었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학교의 성적은 진영이 수석이나 국전에서는 낙선했던 것이다. 시기와 비슷한 불길이 몸 어느 곳에서부턴지 소리 없이 이는 것 같다.

'그려야 한다.'

진영은 거리의 책점에 들렀다.

'고흐'의 소묘집이 있다. 진영은 책장을 들춰 보았다. 까마귀가 날고 있다. 사육(죽은 시체의 고기)을 파 먹고 산다는 날짐승……. 금시에라도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며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진영은 자기 자신이 까마귀 같다는 느낌이 온다. 팁으로 해서 살아 있는 그녀의 살이 까마귀의 살만 같다. 진영은 진저리를 치며 몸을 흔들어 본다. 불퉁한 젖가슴이 육중하게 흔들린다. 진영은 다만 그녀의 실존을 재확인할 따름이다.

진영은 위스키를 한 병 사들고 호텔로 갔다. 더블 베드는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그녀는 1주일 여기서 홀로 사는 것이다. 고요 속에서 붓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이 온다면? 돈으로서 안 되는 일이 있겠는가고 하였는데……. 오면 오는 것이고, 그 때 일을 지금 생각지 말자.

진영은 위스키를 더블로 해서 마셨다. 이내 몸이 상쾌해진다. 푹신한 베드에 엎드려 본다. 기분이 여간 좋지 않다. 그녀는 귀신이라도 농락해 보고 싶을 정도로 삶에 대한 자신이 강력히 솟구친다. 무서울 것도 꺼릴 것도 없다. 오로지 그려야 한다는 의욕만이 파랗게 불탈 뿐이다.

진영은 준섭에게 편지를 썼다. 베드가 부드러우니 그 색시와 하룻밤 자러 오라는 얘기를 썼다. 그저께 한 밤 따뜻이 재워 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다. 다음은 경일에게 글을 썼다. 사랑해요―하고 쓰기 시작했으나, 도시 펜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사랑 사랑……. 진영은 그 말의 감각을 느겨 보려 하였으나 그 추상 명사가 마치 숫자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열될 따름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필요치 않았다. 다만 진영은 지금 경일을 포옹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진영은 '……경일 씨, 어서 오세요, 보고 싶어요.'라고 편지의 끝을 맺었다.

진영은 베드에서 일어나서 높은 창가에 스케치북을 들고 앉았다.

창 밖은 밤이었다.

무수한 별빛이 어둠 속에서 별빛처럼 명멸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1950년대 소설의 특징은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생각이 공적인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공적인 구속과 억압의 의미는 인간 존재의 상황에서는 2차적인 문제에 해당된다.

한말숙의 소설은 본래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과 자유로움, 현실의 어려움과 억눌림을 무시하는 가벼움으로 요약된다. 특히 <신화의 단애>에서 전쟁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를 비웃는 방법으로 거액의 돈을 쓰는 행동의 의미 없음을, 하룻밤을 따뜻한 호텔에서 보내는 행위의 가벼움처럼 '가지고 있지 못한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법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로 표현할 수 있는 2차적인 현상에 대한 무의미를 보여 주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단체의 규칙이나 사상, 집단의 광기는 개인의 삶을 억누르고 망가뜨릴 뿐이고, 사람의 삶에서 그 사람 자체의 의미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억지스런 규칙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사상은 늘 개인에게 희생과 복종을 요구하며 개인보다 사회를 우선으로 여기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신화의 단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이러한 '공적인 것'에 대한 후회와 의심을 지니고 있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1957년 6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한말숙의 단편소설이다. 작가의 문단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며, 1950년대 말에 일었던 실존주의 문학 논쟁의 주요 대상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의 주인공은 가난한 미술학도인 '진영'이다. 그녀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파격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신세대 여성이다. 즉, 한국 전쟁 전까지 이어 온 사회의 기존 윤리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여성인 것이다. 그녀는 하루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댄서로 일하며 외간 남자와 잠을 자고, 하룻밤의 잠을 위해 남자 친구의 하숙방을 빌리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주일 간의 계약 결혼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그러한 순간에도 "죽으면 썩는 몸이다. 살아 있는 이 순간, 다시는 없을 이 지극히 소중한 순간을 나는 내 몸을 하필이면 얼려 재워야만 한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현재의 순간을 즐기려 한다. 그녀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진정하고 순결한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한 사랑을 단지 막연한 추상명사로 여길 뿐인 것이다. 작가는 사랑도 윤리도 거부한 채 순간의 의미만을 찾아 방황하며 살아가는 이러한 인물이 전후세대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화의 단애>는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결국 한국전쟁 직후에 나타난 물질적 · 정신적 황폐화 속에서 삶의 목표를 상실한 채 방황하는 인간형을 나타내고 있다. 전통적인 윤리에 얽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유스러운 것이 삶을 지탱하는 방편이라고 합리화하는 전후세대의 가치관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