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대(1931)                                                  -염상섭-

 

 

[전체 줄거리]

대지주인 조부 조의관은 양반 행세를 하기 위해 족보를 사들일 정도로 명분과 형식에 얽매인 구세대의 전형이고, 아버지 상훈은 신문물을 받아들였으나 이중 생활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과도기적 인간형이다. 아들 덕기는 선량한 인간성의 소유자이나, 조부와 아버지의 갈등 속에서 적극성을 잃은 우유부단한 인간형으로 그려진다.

덕기의 조부 조의관은 고루한 봉건의식의 소유자이다. 어렵사리 모은 거액의 재산으로 집안의 크고 작은 제사를 받들고 가문의 명예를 키워나가는 것을 가장 큰일로 삼는다. 칠순 노인이면서 부인과 사별 후 서른을 갓 넘긴 수원댁을 후취로 들여 네 살배기 딸까지 두고 있다. 조의관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아들 조상훈이다. 맏아들이면서도 집안일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교회 사업에 골몰해 집안의 돈을 바깥으로 빼돌리는 데만 혈안이 된 것으로 여긴다. 더구나 조의관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봉제사를 조상훈은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고 반대하고 전혀 돌보지 않아서 조의관은 아들보다도 손자인 덕기와 의논해서 결정하고, 자신이 죽고 난 후 재산 관리도 덕기에게 일임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덕기의 부친인 조상훈은 위선자다. 미국 유학까지 마친 지식인이자 신실한 기독교 신자요 교회 장로인 그는 교회를 통한 사회 운동과 교육 사업에 큰 뜻을 품고 집안의 재산으로 그런 사업에 직접 투자하기도 하고 민족 운동가의 가족을 돌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실생활은 축첩과 노름, 그리고 술로 얼룩진 만신창이 난봉꾼의 생활이다. 그는 자신이 보살피던 운동가의 딸인 홍경애와 관계를 맺어 아이까지 낳고도 무책임하게 내동댕이치는가 하면, 매당집이란 곳에 드나들면서 나이어린 여자들과 불륜의 관계에 빠진다.

덕기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다른 신세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친구 김병화처럼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병화가 하는 일에 심정적으로 동조를 하기는 해도 그 자신은 법과를 마치고 판사나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품고 있다. 자신의 그런 꿈이 가끔 운동가인 병화의 조소를 받아도 크게 개의하지 않는다. 병화는 목사인 아버지와 사상 대립으로 가출해서는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기식하는 형편이지만 자신의 뜻은 절대 굽히지 않는 반면, 덕기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정면 충돌하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세대를 달리하는 그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을 이해하고 동정하기도 한다.

잠재되어 있던 조 씨 가문의 불화와 암투가 전면에 드러난 것은 조부의 임종을 앞두고 생긴 재산 분배 과정에서였다. 조의관의 후취인 수원집과 그를 조의관에게 소개해 준 최참봉 등은 재산을 가로챌 욕심으로 유서 변조를 계획하고 조의관을 독살한다. 의사들의 배설물 검사로 비소 중독이 판명되자 상훈은 더 명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 사체 부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집안 어른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범인 찾기도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나 덕기 때문에 수원집 일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재산 관리권은 덕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상훈은 법적 상속자인 자신을 건너뛰고 아들인 덕기에게 그 권리가 넘어가자 유서와 토지 문서가 든 금고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힌다.

한편, 상훈에게 농락당하고 아이까지 낳은 후 버림받았던 홍경애는 비록 표면적으로는 술집 여급으로 나가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지만 해외의 독립 운동가인 이우삼과 연계하여 뒤에서 도와주며 과거에 묶이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홍경애는 병화와 자주 만나는 사이에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조그마한 잡화상을 경영하며 경찰의 눈을 속이지만 그것이 다른 운동가인 장훈 일파들의 오해를 사게 되어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한편, 이우삼이 국내를 다녀간 뒤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닥친다. 비밀 조직인 장훈 일파는 물론, 가게를 운영하며 경찰의 눈을 피해 있던 병화와 경애도 검거된다.

그리고 덕기도 병화에게 자금을 대주었다는 혐의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다.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장훈은 비밀 유지를 위해 음독자살을 한다. 장훈의 자살로 갑자기 조사가 미궁에 빠지자 연행되거나 검거되었던 사람들은 다 풀려 나오게 된다. 가짜 형사를 등장시켜 금고와 문서를 훔쳐냈던 결국 훈방 조치로 풀려난다. 덕기는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공백을 느끼면서 이제 자신의 어깨 위에 내려 얹힌 조 씨 가문의 유업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 망연해 한다.

 

<전략>

'돈 주고 양반을 사!'

이것이 상훈이에게는 일종의 굴욕이었다.

그러나 조의관으로서 생각하면 이때껏 자기가 쓴 돈은 자기 부친이 물려준 천 냥에서 범용한 것이 아니라 자수로 더 늘린 속에서 쓴 것이니까 그리 아깝지도 않고 선고(先考,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의 혼령에 대하여도 떳떳하다고 자긍하는 것이다. 저 잘나면 부조(父祖)의 추증(죽은 뒤에 벼슬을 받는 것)도 하게 되는 것인데 있는 돈 좀 들여서 양반 되기로 남이 웃기는새로에 그야말로 이현부모(부모를 드러나게 함)가 아닌가 하는 요량이다.어쨌든 사천 원 돈을 바치고 조상 신주 모시듯이 ×× 조씨 대동보소(족보를 만드는 곳)의 문패를 모셔다가 크나큰 문전에 달고 ×× 조씨 문중 장손파가 자기라는 듯싶이 버티고 족보까지 박게 되고 나니 이번에는 ×× 조씨 중시조인 ○○당(堂) 할아버지의 산소가 수백 년래에 말이 아니 되었으니 다시 치산(治山, 산소를 단장하는 일)을 하고 그 옆에 묘막보다는 큼직한, 옛날로 말하면 서원 같은 것을 짓자는 의논이 일어났다.

지금 상훈이가 창훈이(재종형, 육촌)더러 일거리가 없어져 가니까 또 새판으로 일을 꾸민다고 비꼬는 말이 (묘막을 짓고 치산하는 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제절(祭砌, 자손들이 늘어서서 절할 수 있도록 산소 앞에 마련된 널찍하고 평평한 부분) 앞의 석물도 남 볼썽사납지 않게 일신하게 하여야 하겠고, 묘막(묘지기가 머무는 움막집)이니 제위답(祭位畓, 추수한 것을 조상의 제사 비용으로 쓰기 위하여 마련한 논)이니 무엇무엇…… 모두 합하면 한 만 원 예산은 있어야 할 터인데 반은 저희들이 부담하겠지만 절반 오천 원은 아무래도 조의관이 내놓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양자를 들어가면 재산 상속을 받을 권리도 있지만 없는(가난한) 양부모면야 벌어서 봉양할 의무도 지는 것이다. 조씨 문중에 돈 낼 만한 사람이 없고 또 벌이지 않았으면 모르거니와 벌인 일인 바에야 시종이 여일하게(한결같이) 깡그러뜨려야(마무리를 지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오천 원을 저희가 분담한 대야 그것은 이 영감에게서 울궈 내려는 미끼로 하는 헛말임은 물론이요, 이 영감이 내놓은 오천 원에서 뜯어먹으려고나 안 했으면 다행이나, 원체가 뜯어먹자는 노릇인 다음에야 더 말할 것도 없는 일, 어쨌든 뭇놈이 드나들며 굽실거리고 노영감을 쑤석대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못 하겠다는 말이 입에서 아니 나와서 울며 겨자먹기로 추수나 하면 내년 봄쯤 어떻게 해 보자고 아직 밀어 나오는(미루고 있는) 판이다. 내년 봄이래야 음력 설만 쇠면 석 달이 못 가서 한식이다.

이 영감에게 제일 신임 있는 창훈이를 앞장세우고 요새로 부쩍 조르고 다니는 것은 어서 급급히 착수할 준비를 하여 한식 다례를 잡숫게 하고 어울려 일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영감으로서는 이렇게 쌀값이 폭락하여서는 도저히 힘에 겨우니 좀 더 연기를 하였다가 추석에나 가서 착수를 하든지 또다시 내년 한식 때에 의논을 해 보자는 것이다.

영감도 결단코 어수룩한 사람은 아니다. 어수룩이라니, 거의 후반생을 산가지(막대를 일정한 방법으로 늘어놓아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 또는 그 막대)와 주판으로 늙은 사람이다.

속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나면서 천 냥 만 냥 판으로 돌아다니거나, 있는 집 사랑 구석에서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는 조가의 떨거지들이 다른 수단으로는 이 영감의 주머니끈을 풀게 할 도리가 없으니까 족보를 앞장세우고 삶고 굽고 하는 바람에 조츰조츰 쓰기 시작한 것이 삼천여 원, 근 사천 원을 쓰게 되고 보니 속으로는 꽁꽁 앓는 판에 또 ○○당 할아버지가 앞장을 서서 오천 원 놀래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오천 원을 부른 사람도 그만큼 불러야 삼천 원은 울궈 내려니 하는 것이요, 조의관도 오천 원의 반절은 아무래도 또 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죽을 날이 얄팍하여 가니까 ×× 조씨 문중에서 자기가 둘째 중시조나 되는 셈치고 이 세상에 남겨 놓고 가는 기념사업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아서 해 보려는 노릇이다.

그래서 요새로 부쩍 달고 치는 바람에 그러면 우선 천 원 하나를 내놓을 터이니 오백 원은 산역(시체를 묻고 묘를 만들거나 이장하는 일)에 쓰고 오백 원은 묘막을 짓되 부족되는 것은 묘하에 있는 조씨들이 금력으로 보태든지 돈 없는 사람은 부역으로 흙 한 줌, 떼 한 장씩이라도 떠다가 힘으로 보태라고 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제위답으로는 다소간 나중에 마련해 노마고 하였다. 조의관 생각에는 그렇게 하면 천 원 내놓고 이천 원 들인 생색은 나려니 속따짐(속셈)이었다.

"그래야 결국 아저씨께서는 돈 천 원, 하나밖에 안 내놓으신다니까 나중 뒷갈망(뒷감당)은 우리가 발바투(발빠르게) 돌아다니며 긁어모아야 할 셈이라네. 말 내놓고 안 할 수 있나! 이래저래 뼛골만 빠지고 잘못되면 시비(옳고 그름, 공과)는 우리만 만나고……."

창훈이는 한참 앉았다가 혼잣말처럼 이런 소리를 한다.

"장한 사업 하슈. ○○당 할아버지가 묘막 지어 달라고, 제절 앞에 석물이 없어서 호젓하다고 하―십디까?"

상훈이는 '합디까?'라고 입에서 나오는 것을 겨우 '하십디까'라고 존대를 하였다. ○○당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좀 어설프다. 예수교인이라 하여 자기 조상을 존경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부친이 새로 모셔온 십 몇 대조 할아버지라 하니 좀 낯 서투른 때문이다.

"그런 소린 아예 말게. 자네는 천주학을 하니까 이런 일에는 반대인지 모르지만 조상 없이 우리 손(자손)이 어떻게 퍼졌으며 조상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 조씨도 그렇게 해서 남에 빠지지 않고 자자손손이 번창해 나가야 하지 않겠나."

창훈이는 못마땅한 것을 참느라고 더욱 이죽이죽(밉살스럽게 짓궂게 빈정거리는 모양) 대거리를 한다.

"조가의 집이 번창하려고? 조상의 음덕을 입으려고? 하지만 꾸어 온 조상(돈을 주고 남의 족보에 이름을 올려서 받들게 된 조상)은 자기네 자손부터 돕는답니다……."

상훈이는 불끈하여 소리를 높이며 또 무슨 말을 이으려다가 마루 끝에서 영감님의 기침 소리가 나는 바람에 좌우 방 안은 괴괴하여졌다(쓸쓸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고요하다).

"왜들 떠드니?"

화를 참는 못마땅한 강강한 목소리와 함께 건넌방 문이 활짝 열렸다. 방 안의 젊은 애들은 우중우중 일어서며, 아랫목에 앉았던 상훈이는 윗목으로 내려섰다.

방 안에서는 더운 김이 서린 담배 연기가 뭉긋뭉긋 흘러나온다.

"이게 굴뚝 속이지, 젊은것들이 무슨 담배를 이렇게 피우며 주책없는 소리들만 씨부렁 대는 거냐?"

영감은 방 안을 들어서며 우선 나무래 놓고 아랫목으로 가서 앉으며 자기의 발끈한 성미를 속으로 진정시키려는 듯이 목소리를 가라앉혀서,

"어서들 앉아라."
하고 무슨 잔소리를 꺼내려는지 판을 차린다. 영감은 제청을 다아 배설해 놓고 시간을 기다리느라고 사랑으로 나오다가 종형제간의 말다툼을 가만히 듣고 섰다가 참을 수 없어 뛰어든 것이다.

"너 어째 왔니? 오늘은 예배당에 안 가는 날이냐?"

영감은 얼굴이 발끈 취해 올라오며, 윗목에 숙이고 섰는 아들을 쏘아본다.

"어서 가거라! 여기는 너 올 데가 아니야! 이 자식아, 나이 오십 줄에 든 놈이 젊은것들을 앞에 놓고 철딱서니 없이 무엇이 어째고 어째? 조상을 꾸어 왔어? 꾸어 온 조상은 자기네 자손만 도와? 배지 못한 자식……!"

영감은 금시로 숨이 넘어가려는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벌건 목에 푸른 힘줄이 벌렁거린다. 상훈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한 구석에 섰다.

"너두 내가 낳아 놓은 자식이면야 사람이겠구나? 부모의 혈육을 타고 났으면 조상은 알겠구나? 가사(설령) 젊은애들이 주책없는 소리를 하더라도 꾸짖고 가르쳐야 할 것이 되려 철부지만도 못한 소리를 텅텅 하니 이게 집안이 되려고 이러는 거란 말이냐, 안 되려고 이러는 거란 말이냐?"

여기서 영감은 한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목청을 돋는다.

"이 집안에서 나만 눈을 감아 보아라! 집안 꼴이 무에 되나? 가거라! 썩, 썩 나가거라! 조상을 꾸어 왔다니 너는 네 아비도 꾸어 왔겠구나? 꾸어 온 아비면야 조금도 네게는 도울 게 없을 게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띠일 생각도 말아라!"

오른손에 든 장죽(긴 담뱃대)을 격검대(검도 연습을 할 때에 칼 때신 쓰는 참나무로 만든 긴 막대기) 모양으로 들었다 놓았다 내밀었다 들이켰다 하며 펄펄 뛴다.

사천 원 돈이나 드는 줄 모르게 들인 것을 속으로 앓고 또 앞으로 돈 쓸 걱정을 하는 판에 앨 써 해 놓은 일에 대하여 자식부터라도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 귀에 들어오니 이래저래 화는 더 나는 것이다. 게다가 원래 못마땅한 자식이요, 또 오늘은 친기(親忌, 부모의 제사)라 제사 반대군을 보니 가만 있어도 무슨 야단이든지 날 줄은 누구나 짐작했지만 마침 거리가 좋아서 야단이 호되게 된 것이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아저씨께서 잘못 들으셨나 보외다."

창훈이는 속으로는 시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사치레로 한 마디 하였다.

"잘못 듣다니? 내가 이롱증(소리를 듣지 못하는 병)이 있단 말인가?"

"그만 해 두세요. 상훈 군도 달래 그렇겠습니까? 이 전황한(돈이 잘 융통되지 않아 귀한) 통에 꿈쩍하면 돈이니까 그것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지요."

창훈이는 이렇게도 변명해 주었다. 그러나 상훈이로서는 때리는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이 더 미웠다.

"누가 돈 쓰는 것을 아랑곳하랬나? 누가 저더러 돈을 쓰라니 걱정인가? 내 돈 가지고 내가 어떻게 쓰든지……."

"아버님께서 하시는 일에……."

조금 뜸하여지며 부친이 쌈지를 풀어서 담배를 담는 동안에 상훈이는 나직이 말을 꺼냈다.

"……돈 쓰신다고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마는 어쨌든 공연한 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첫째 잘못이란 말씀입니다."

"무에 어째 공연한 일이란 말이냐?"

부친의 어기는 좀 낮추어졌다.

"대동보소만 하더라도 족보 한 길에 오십 원씩으로 매었다 하니 그 오십 원씩을 꼭꼭 수봉하면 무엇 하자고 삼, 사천 원이 가외로 들겠습니까?"

"삼, 사천 원은 누가 삼, 사천 원 썼다던?"

영감은 아들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였으나 실상 그 삼, 사천 원이란 돈이 족보 박는 데에 직접 들어간 것이 아니라 ○○ 조씨로 무후(無後, 후사가 없음)한 집의 계통을 이어서 일문일족에 끼려 한즉 군식구가 늘면 양반의 진국이 묽어질까 보아 반대를 하는 축들이 많으니까 그 입들을 씻기기 위하여 쓴 것이다. 하기 때문에 난봉 자식이 난봉 핀 돈 액수를 줄이듯이 이 영감도 실상은 한 천 원 썼다고 하는 것이다. 중간의 협잡배는 이런 약점을 노리고 우려 쓰는 것이지만 이 영감으로서는 성한 돈 가지고 이런 병신 구실 해 보기는 처음이다.

"그야 얼마를 쓰셨던지요, 그런 돈은 좀 유리하게 쓰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재하자 유구무언'(아랫사람은 웃어른에 대하여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지냄을 이르는 말)의 시대는 지났다 하더라도 노친 앞이라 말은 공손했으나 속은 달았다.

"어떻게 유리하게 쓰란 말이냐? 너같이 오륙천 원씩 학교에 디밀고 제 손으로 가르친 남의 딸자식 유인하는 것이 유리하게 쓰는 방법이냐?"

아까부터 상훈이의 말이 화롯가에 앉아서 폭발탄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아서 위태위태하더라니 겨우 간정되려던 영감의 감정에 또 불을 붙여 놓고 말았다.

상훈이는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벌개진다.

부친의 소실 수원집과 경애 모녀와는 공교히도 한 고향이다. 처음에는 감쪽같이 속여 왔으나 수원집만은 연줄연줄이 닿아서 경애 모녀의 코빼기라도 못 보았건마는 소문을 뻔히 알고, 따라서 아이를 낳은 뒤에는 집안에서 다 알게 되었던 것이다. 덕기 자신부터 수원집의 입에서 대강 들어 안 것이다. 그러나 상훈이 내외끼리 몇 번 싸움질이 있은 외에는 노 영감님도 이때껏 눈감아 버린 것이요, 경애가 들어 있는 북미창정 그 집에 대해서도 부친이 채근(어떤 일의 원인이나 근원을 캐서 알아냄)한 일은 없는 것이라서 지금 조인광좌중(稠人廣座中, 빽빽이 사람이 모인 넓은 좌중)에서 아들에게 대하여 학교에 돈 쓰고 제 손으로 가르친 남의 딸 유인하였다는 말을 터놓고 하는 것을 들으니 아무리 부친이 홧김에 한 말이라 하여도 듣기에 괴란쩍고(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러운 느낌이 있다) 부자간이라도 너무 야속하였다.

"아버님께서는 너무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마는 어쨌든 세상에 좀 할 일이 많습니까. 교육 사업, 도서관 사업, 그 외 지금 조선어 자전 편찬하는 데……."

상훈이는 조심도 하려니와 기를 눅이어서 차근차근히 이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할 말은 다 하겠다는 듯이 말을 이어 나가려니까 또 벼락이 내린다.

"듣기 싫다! 누가 네게 그 따위 설교를 듣자든? 어서 가거라."

"하여간에 말씀입니다. 지난 일은 어쨌든, 지금 이 판에 별안간 치산이란 당한 일입니까. 치산만 한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서원을 짓고 유생들을 몰아다 놓으시렵니까? 돈도 돈이거니와 지금 시대에 당한 일입니까?"

상훈이는 아까보다 좀 어기를 높여서 반대를 하였다.

"잔소리 말아! 그놈 나가라니까 점점 더하고 섰고나. 내가 무얼 하든 네가 총찰이란 말이냐. 내가 죽으면 동전 한 닢이라도 너를 남겨 줄 테니 걱정이란 말이냐. 너는 이후로는 아무리 굶어 죽는다 하여도 한 푼 막무가내다. 너는 없는 셈만 칠 것이니까……, 너희들도 다 들어 두어라."
하고 좌중을 돌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내 재산이라야 얼마 있는 게 아니다마는 반은 덕기에게 물려 줄 것이요, 그 나머지로는 내가 쓰고 싶은 데 쓰다 남으면 공평히 나누어 주고 갈 테다. 공증인을 세우든 변호사를 불러 대든 하여 뒤를 깡그러뜨려 놀 것이니까 너는 이제는 남 된 셈만 쳐라. 내가 죽으면 네가 머리를 풀 테냐, 거상을 입을 테냐?"

영감은 사실 땅문서도 차츰차츰 덕기의 명의로 바꾸어 놓아가는 판이요, 반은 자기가 쓰다가 남겨서 막내딸의 명의로 물려줄 생각이다. 만일에 십오 년 더 사는 동안에 아들 하나를 더 본다면, 물론 그 아들을 위하여 물려줄 요량도 하고 있는 터이다.

이 때까지 술이 취하면 주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기도 많이 하였지만, 오늘은 친기라 하여 술 한 잔 안 한 자신이 영감이 맑은 정신으로 여러 젊은 애들 앞에서 이런 말을 떠들어 놓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야 이 방중은 고사하고 이 집안 속에서 자기 편을 들어 줄 사람이라고는 하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상훈이는 새삼스러이 고독을 느끼고 모든 사람이 야속하였다.

"애비, 에미도 모르고 계집, 자식도 모르는 너 같은 놈은 고생을 좀 해 봐야 한다. 내가 돈이 있으니까 네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는 것이지 내가 아무것도 없어 보아라, 돌아다보기는커녕 고려장이라도 족히 지낼 놈이 아니냐. 어서 나가거라. 이 자식, 조상을 꾸어 왔다는 자식은 조가가 아니다."
하고 노인은 별안간 벌떡 일어나서 아들을 떼밀어 내쫓으려는 듯이 덤벼든다. 젊은 사람들은 와아 달려들어서 가로막는다.

"상훈이 어서 나가게. 흥분이 되셔서 그러시니까……."

창훈이는 상훈이를 끌고 마루로 나왔다.

부친이 망령이 나느라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젊은 사람들이나 자식 보는 데 창피도스러웠다. 상훈이는 안방으로 들어가는 수도 없고 아랫방에도 덕기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있으니 그리 들어갈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모자를 집어 쓰고 축대로 내려오니까 덕기가 아랫방에서 나와서 뜰로 내려온다.

"아랫방으로 들어가시지요."

덕기는 민망한 듯이 이렇게 부친에게 말을 걸었으나, 부친은 잠자코 나가 버렸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