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잡히는 마을(1947)                               -최정희-

 

 

또 족제비가 닭을 물어 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느 새 헛간 모퉁이에 세워 놓은 살구 따는 긴 몽둥이를 집어 들고 닭장께로 내달렸다. 그새 벌써 족제비는 닭을 물고 채마밭 속을 달리고 있었다.

"깨애액 깨애액 깨애액……."

그 하얀 비둘기같이 고운 닭이 모가지를 잘깍 물린 탓으로 눈이 볼찐 나온 것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저걸…… 저걸 어쩌나 저눔의 족제비를…… 저걸 잡기만 했으면 그만 죽여 버리겠네……."

허둥지둥 족제비의 쏜살같이 내달리는 뒤를 쫓으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나 족제비는 털끝 하나 꽁지 한번 내 몽둥이 끝에 다치는 일 없이 채마밭을 빠져서 옆집 울타리 구멍으로 도망가 버렸다.

"깨애액 깨애액 깨애액……."

"아이 저걸 어쩌면 좋아……."

족제비의 거리가 멀어지고 또 닭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에 점점 적어져 가는 비명이 더 애처로웠다.

'아침에 물려 간 것두 저 모양새루 갔을 테지…….'

매암(제자리에 서서 뱅뱅 돎)을 돌아도 하는 수 없는 마음이었다.

나는 몽둥이를 들어 애매한 옆집 울타리 구멍을 힘껏 후려갈겼다. 이것은 족제비에게 가는 분풀이만은 아니었다. 강가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풍류(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 소리가 요란하지 않았더면 그다지 내 마음의 파동이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 악착한 족제비가 닭을 물어 가게 된 것은 그 미련퉁이 같은 목수 영감이 두 시간이면 끝막을 닭의 장문을 마저 해 달지 못한 것은 강가에 벌어진 서흥수네 회갑 잔치 놀이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놀이터에선 한창 흥에 겨운 양새납 소리, 징소리, 꽹과리 소리가 아까보다 분주하고 요란하였다.

――아무래두 견딜 수 없다―― 나는 이 몽둥이를 들고 가서 그놈의 놀이터를 산산히 쳐부수고 발로 막 짓밟고, 그리고 강 속에 마구 집어 동댕이치겠다―― 그 인간 아닌 그것들의 횡행천하(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세상을 나돌아다니다)하는 것을 가만둘 수 없다. 나는 꼭 가겠다. 단숨에 내달아 가겠다. 내 이 긴 몽둥이를 들고서…….

닭 두 마리가 족제비에게 물려 간 그만 일로 해서 남더러 인간 같지 않다느니 남의 회갑놀이를 쳐부순다느니 하는 나에게 평시부터 그들과 무슨 풀지 못할 숙감(오래 된 원한)이라도 있었던 게라고 이렇게 독자는 말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사는 데와 서흥수네와는 거리가 좀 먼 탓인지 나는 그 집 식구들의 어느 하나와도 안면조차 없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남더러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함부로 말하는 거며 또 육십여 세의 긴 세월을 무사히 복되게 잘 먹고 잘 쓰며 살아온 것이 좋다고 축하하는 마당에 쳐부수려고 하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기어이 따지고 든다면 나는 그 이유를 먼저 밝힌 연후에 나의 손에 들린 긴 몽둥이를 들고 그리로――강가 놀이터――서흥수의 회갑 잔치 마당으로 내달리겠다. 그런데 나는 진실로 그들과 평시부터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여기서 말해 둔다.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서 그 집의 누구 한 사람과 안면조차 없지마는 나는 그들의 일을 내가 여기 오던 해――오 년 전――부터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방되기 훨씬 전부터였다.

제일 처음 내가 서흥수네 일로 해서 눈을 크게 뜬 것은 우리가 이사 와서 서너 달 지낸 때였다. 양력설인데 서흥수네는 양력설 명절에 돼지 한 마리, 닭도 여러 마리를 잡을 뿐 아니라 쌀도 찹쌀, 멥쌀 합하여 다섯 가마니를 떡을 하고 술을 거른다고 하였다. 그 떡과, 술과 돼지고기, 닭고기는 서울 총독부에 다니는 서흥수의 아들 친구와 또 여기 주재소와 면직원들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다. 하여간 설을 며칠 앞둔 때부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서흥수네 설 잔치 이야기에 군침을 삼키는 것을 나는 보았고 설날인 정월 초하루 열한 시쯤 해서 세 대(나는 그 때 분명하게 헤일 수가 있었다)의 자동차에 참 총독부에도 어느 아랫도리에 앉을 인물들이 아닌 고관들이 우리 뒤꼍 싸리문 밖 큰길을 지나는 것을 보았다. 차 한 대에 기생이 꼭 하나씩 탔던 것도 기억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으리으리해서 구경조차 바로 하지 못하였다. 구경이라면 골을 싸매고 덤벼드는 그들이었지만 또 주재소 순사나 면직원 앞――소위 그들이 이르는 권리 있는 사람 앞――에서 도무지 꼼짝 못 하는 그들인 까닭이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총독부 관리들이 기생들과 함께 진탕만탕(지나치리만큼 만족하고 풍부하게) 먹고 춤추며 소리하며 밤이 밝기까지 놀았어도 마을의 누구 한 사람 구경꾼으로 그 마당에 발을 들이민 자가 없었다.

총독부를 먹인 뒤에는 이 곳 주재소와 면소를 불렀다. 총독부의 찌꺼기라고 불평불만을 품는 자 하나 없이 감지덕지해서 고기에 술에 떡에 잘 먹기만 할 뿐 아니라 색주가들까지 불러 주어서 역시 총독부만 못하지 않게 흥에 겨워 유쾌하였던 것이다. 이 날도 마을 사람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구경꾼으로선 그 마당에 발을 들이민 자가 없었다. 거저 군침을 삼키며 서흥수네 설 명절놀이를 옛날 이야기하듯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 고길 한 점 먹었으면 하고 침을 꿀꺽 삼키는 노인도 있었다. 그 술을 한 되 쭈욱 들이켰으면 하고 목을 길게 빼는 모주꾼(모주망태, 술을 늘 대중 없이 많이 마시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도 있었다. 아무렇거든 한번 진탕으루 먹어 봤으면 하는 젊은이도 있었다.

항상 배가 고파서 못 견디는 그들은 고기나 떡이 아니더라도 무엇이고 간에 정말 배부르게 단 한 번만이라도 먹을 수 있었으면 했다. 나는 그 때에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서흥수네가 이 부락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을 들었고 땅이 어떻게 많은지 이 부락에 몇 집을 내놓군 죄다 서흥수네 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들었다.

마을 사람들 중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서흥수의 딸 하나가 있는데 시집 갈 나이가 아직 되지 않았어도 시집 갈 차부새가 굉장해서 이부자리만 하더라도 양단, 법단, 모본단, 호박단, 수박단 이렇게 단자 붙는 것으로 칠팔 채를 헤인다고 하였다. 며느리, 시아버지, 아들, 어머니, 동생, 이렇게 몇 식구든 있는 대로 이불 하나면 족한 마을 사람들에겐 비단 이부자리가 아니더라도 이불 칠팔 채라면 놀라운 사실이었다.

또 마을 사람들 중엔 서흥수네가 밤이면 마차에 쌀을 싣고 강가에 내려다가 배에 싣고 서울로 팔러 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배고파 퉁퉁 부어오르는 자식들 생각을 하면 마차에 올라 달려 쌀 한 가마쯤 떼내고 싶으나 서흥수네 일이라면 주재소 순사들이 웃통을 벗고 덤비니 해낼 재주가 어디 있느냐고 탄식하는 이도 있었다.

다음으로 내가 들은 서흥수네 소문은 서흥수의 손녀가 학교에서 파리를 잡아 오라는 때에 제일 좋은 성적이어서 교장의 상을 탔을 뿐 아니라 주재소 수석의 특별상까지 있었다는 것이었다. 파리를 많이 잡아서 상을 탄 것까지는 치하할 일이나 그 파리는 그 아이――서흥수의 손녀가 잡은 것은 한 마리도 없고 학교의 저희 반 동무들이 잡아다가 준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또 서흥수네 소작인 중에 농사의 성적이 불량한 작인을 서흥수가 추려서 면소와 주재소에 적어 보냈다는 것도 마을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적어 보내면 영락없이 징용장이 나왔다는 것도 들었다. 징용장이 나와서 징용을 떠나간 작인의 논은 농사지을 사람이 없으니까라는 구실로써 소작권이 다른 데로 옮아간다는 것도 알았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서흥수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머리를 쥐어짰다. 성적이 불량한 작인을 징용에 뽑혀 가게 만드는 한편 자기에게 굽신굽신하고 농사의 성적을 잘 내어 자기의 배를 불려 주는 자는 추려서 또 면소와 주재소에 보내었다는 말도 들었다. 서흥수네 일이라면 웃통을 벗고 덤비는 것이 이 곳 관리들이라는 말까지 듣는 면직원이요 주재소 순사들이라 서흥수의 청을 들어서 후자들에겐 농업 지도원이라는 명목을 붙여 주고 징용 징발 보국대에 빠지게 하였다는 말도 들었다. 마을에서 대글대글한 축들이 열이면 열이 다 나가야 하는 때에 그 길을 면하는 것만 해도 죽었다 산 목숨인데 그 위에 농업 지도원이라는 벼슬(?)까지 하게 되니 서흥수의 작인들은 기뻐서 말이 아니 나올 지경이라는 것도 들었다. 서흥수는 기뻐하는 작인에게 누구의 덕인 줄 아느냐고 이렇게 으름장을 놓게 되자니까 농업 지도원이 된 서흥수의 작인들은 전보다 서흥수에게 만만해지고 전보다 더 농사를 잘 짓고 전보다 더 닭이랑, 엿이랑, 곶감이랑 이런 온갖 선물을 서흥수를 위해서 바친다는 것도 알았다.

또 나는 서흥수의 막내아들이 경성 모 전문학교에 다니다가 학병제에 걸렸는데 서흥수는 총독부 고관들이며 면직원이며 주재소 순사들을 잔뜩 믿고 처음에는 심찍해하지 않다가 학병제는 총독부 고관들과 면직원과 주재소 순사로서는 풀어 놀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당황히 군수와 경찰서장을 찾고 또 그 위에 도지사를 찾아서 수없이 많은 뇌물로 아들을 학병에서 풀어 놓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들의 일이란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도 들었다. 백이면 백 가지가 다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온 마을이 주림(굶주림)에 우는 자로 가득 차고 징용과 징발과 보국대와 징병과 학병으로 눈물 아니 흘린 자 없을――마을 전체가 생지옥으로 화하였을 때에도 서흥수네만은 온 가족이 평화롭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웃으며 산다는 것도 들었다. 눈물과 한숨과 주림에 동서남북을 가릴 수 없으면서도 취(산나물인 취나물)를 뜯어 공출(일제강점기 때, 의무적으로 농산물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강제로 바치게 하던 일)해라 도라지를 캐서 공출해라 말먹이 풀을 베어 공출해라 고사리를 꺾어 공출해라, 벼락보다 무서운 면직원의 퍼런 서슬에 마을 사람들 거의 전부가 그 높은 산등성이에 올라 헤맬 적에도 서흥수네 식구의 아무도, 식모나 아이 보는 계집애까지도 그런 일은 전연 모르고 있다는 것도 들어서 알았다.

 

<중략>

 

"미안합니다…… 채독(한방에서 채소를 날것으로 먹어서 생기는 중독증을 이르는 말)을…… 올려 가지구…… 며칠째……."

말소리가 틀림없는 목수 영감이었다. 숨이 차서 끊을락 말락 겨우 이어 가며 말을 하였다.

나는 그저 침을 한 번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전연 모르고 어디 가기 전에 붙잡고 내려가려 한 것이 참 안 되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영감더러는 눕게 하고 그 옆에 있는 식구들에게 약을 썼느냐 채독엔 고기가 좋다는데 고깃국이나 대접했느냐 하고 물어보았다. 물어 보았으나 그들은 그저 벙벙하니 서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대답을 하는 일에 대해서 무슨 생각조차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얼빠진 사람들 같았다. 나는 문득 우리 이웃 사람들이 몹시 굶을 때에 하는 그런 버릇인 것을 깨닫고 더 별말 없이 집에 내려와서 고기 한 근 살 돈과 영감 약 살 돈과 쌀 한 되를 영감 집에 올려보내었다.

그런 뒤 한 일 주일을 지나서 목수 영감이 내려왔는데 일 주일 전 그 날 아침에 보던 때와는 또 아주 반대로 무서울 정도로 홀쭉해서 다리가 회회 내젓기었다. 그 뒤로 사흘인가 목수 영감은 내 고마운 공을 갚겠노라고 하면서 연거퍼 부지런히 내려오더니 또 며칠을 무소식이었다. 이렇게 되면 주선해 준 문 서방이 매우 딱해하는 얼굴색이었다.

"그렇게 공전(물건을 만드는 품삯)을 다 주지 마시래는 건데요. 배고파 쓰러지면서두 돈 받아 갈 욕심에 일을 하게 되거든요. 댁에서 주신 빚은 빚쟁이들이 들어서 고냥 털렸다는군요."

문 서방은 딱한 표정을 지은 뒤에는 으레 이렇게 한 마디 하는 것이 버릇같이 되었다. 이번엔 문 서방이 영감 집에 올라갔다. 영감더러 아주 막 해대겠다고 벼르고 올라갔다 내려온 문 서방이 맥이 풀린 어조로,

"영감네두 떨어졌는대는군요." 하였다.

"뭣이 떨어져요?"

"땅입죠."

"얼마나?"

"다지요. 그 영감은 닷 마지길걸입쇼."

"그건 누구건데?"

"누구겠어요, 나리댁 겁죠."

나리댁이라 함은 서흥수네를 가리킴이었다.

"온 식구가 다들 울었더군요. 울면 뭘 해요……."

문 서방도 떨어져 나간 축에 한몫 끼인 터라 남의 일 같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날 비로소 목수 영감이 서흥수네 작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영감은 그 이튿날 아침에 일찍이 내려와서 하루 종일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땅이 떨어진 데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눈이 붓기까지 울었다면서 아무 소리 없는 것은 너무 아프거나 비참한 것은 다치기 싫은 법이라 목수 영감도 그래서 그러는 거라고 짐작하고 내 쪽에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가려고 할 적에 양식이 떨어져서 그러노라고 하면서 내게 양옥수수 한 말 사 올 돈 일백칠십 원을 취해 달라고 하였다. 가을에 양식으로 주든지 돈으로 갚든지 하겠노라고 하였다. 나는 무엇으로 받고 안 받는 것은 둘째로 그가 달라는 대로 얼른 주었다.

그랬더니 목수 영감은 그 이튿날도 그 사흗날도 또 오지 않았다. 닭이 더워서 점점 더 축 늘어뜨린 것이 초조하고 또는 그 영감이 자기에게 동정하는 나를 되레 넘보는 것이 아닌가고 다시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나는 또 목수 영감 집으로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영감은 그 날도 누워 있었다. 홀쭉한 영감은 더 홀쭉해졌었다. 그는 또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내가 준 것으로 서울 가서 양옥수수를 사다가 갈아서 밥을 해 먹은 것이 얹혀서 설사만 나흘째 내리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웃 사람들 중에도 이 양옥수수를 사다 먹고 설사를 하는 것을 보아 알기 때문이었다.

이 양옥수수라는 것은 미국서 들어오는 것으로 서울 시민에게 배급해 주는 것이라 하였다. 배급품이 어디서 어떻게 들어오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서울 시장에서 한 말에 일백칠팔십 원에 매매되어 우리 이웃 사람들도 사다 먹었다. 배탈이 잘 나느니 똥병에 잘 걸리느니 땠겨 버리면 보리 두 되 폭도 못 되느니 하고 나무람질들을 하지만 실상은 이 양옥수수 사다 먹는 집도 드물었다.

"나 양옥수수 밥 해 먹었다."

"나 양옥수수 풀떼기 먹었다."

아이들이 만나서 하는 이야기였다. 자랑이 지나쳐서 노래가 되어 버리었다. 못 먹은 놈도 먹었노라고 눈을 껌벅 장단을 맞추는 것이었다. 하긴 그들이 먹은 것 중에서 가장 상등인 까닭이었다. 해바의 덕택이라 할까.

참으로 농민들에게 있어서 해방의 덕이라면 양옥수수를 서울 가서 수월하게 사다 먹는 것 외엔 다른 것이 없었다. 해방 전이나 마찬가지로 쌀은 이 고장에서 한 되를 구해 낼 수가 없었다. 해방 전엔 그래도 쌀을 꾸어 먹을 수가 있었고 또 장리로 쌀을 얻어다 먹을 수도 있었지만 해방 후엔 쌀값이 자꾸 올라가기만 하는 바람에 쌀 가진 자가 쌀을 장리로 주는 것보다 파는 것이 낫기 때문에 꿔 주지 않았다. 서흥수네도 해방 전과 마찬가지로 쌀을 배에 실어서 서울 가 판다고 하였다. 해방 직후 일본 순사가 쫓겨가고 면직원이 맞아 대고 할 적엔 작인들한테나 또 마을 사람들에게 어지간하더니만 그의 아들이 다시 총독부에 앉아 있는 군정청 관리로 들어가면서는 또한 서슬이 퍼래진 것이었다. 해방 직후 열 가마니의 쌀을 극빈자에게 줘 달라고 치안 유지회에 들여논 것도 괜한 짓을 하였다는 태도였다.

서흥수네는 또 많은 땅을 팔았다. 그 땅을 갈아먹던 작인들은 헌신짝같이 내동댕이치었다. 그리고 떨어져 나가 엉엉엉엉 아이들처럼 우는 작인은 불어나기만 했다. 안 떨어지려고 집을 팔고, 소를 팔고 온갖 것을 다 팔고 심지어 김장독까지 다 팔고 그러고도 토지소유권 문서를 잡히게 하고 높은 변리로 빚을 내고 해서 부치던 땅을 사는 자도 혹 있긴 하나 대개는 떨어져 나갔다. 안 떨어질 수 없는 것이 그들 중에 소를 가진 자가 몇이 없고 팔아서 돈이 될 만한 집을 지닌 자가 몇 안 되었다. 무엇으로 땅을 사 낼 수가 있겠느냐 말이다. 빚도 어지간해야 내지 아주 밑두머리가 없는 형편에 빚을 낼 용기도 없으려니와 빚을 누가 주려 들기나 하는가. 곡가가 고등(물건 값이 뛰어오름)해 가는 틈을 노리고 고리 대금으로 살쪄 가는 자 중엔 떨어져 나가는 농민에게 돈을 취해 주어서 추수를 반작해 먹기로 하는 일도 있으나 이런 예는 극소한 일이지 누구나 다 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리대금업자로 살쪄 가는 자가 이런 작은 빈촌에 많이 있을 리도 없겠지만 있다 치더라도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었다. 땅이 훨씬 좋아서 양석(생산 능력을 말할 때, 한 마지기 논에서 나는 벼 두 섬을 이르는 말)을 바라보는 거라야 되는데 땅 파는 자는 또 양석을 바라보는 땅은 좀체 팔지 않았다. 토지 개혁이니 뭐니뭐니 하지만 세상은 아직도 소란할 뿐 우리 정부가 설 날도 막연한데 토지 개혁이란 그리 쉽게 올 리는 없을 거라고 지주들은 생각하고, 그래도 어쩔 줄 아나 하는 마음에서 파는 땅이라 상답(토질 따위가 좋아서 벼가 잘 되는 논)을 마구 내어놓지는 않았다. 토지 개혁이란 최후의 선고장이 내리자면 아직 한참 될 것 같으니까 그 동안에 나쁜 놈만 처분해서 그 돈으로 달리 이득을 볼 방법을 취하는 것이 좋겠고 좋은 놈은 그대로 두었다가 토지 개혁이 될 무렵에 땅이 좋으니만큼 욕심낼 자가 많겠으니까 그 때를 봐서 할 일이고 혹시 그리 못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아직 그 동안이 한참 될 성싶으니까 그새에 거기서 소출을 많이 내어서 가장 적은 피해를 받자는 것이 지주의 생각이었다.

서흥수네는 중치 하치는 다 팔고 한 목(결. 논밭 넓이의 단위. 세금을 계산할 때 씀. 1결은 1동의 열 배로, 그 넓이는 시대에 따라 달랐음) 만 평 가까운 땅이 쪽 내깔린 좋은 것들만 농사를 짓는데 그 방법이 참 묘하였다. 근 만 평 땅에 작인이 삼십 명 넘었다. 삼십 명 넘는 작인 중에서 서흥수는 가장 상치의 작인을 골라 내었다. 해방 전에 징용을 안 나가고 농업 지도원이라는 패를 가슴에 붙였던 자들 중에서도 고르고 다시 고르고 해서 그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데 이건 경작권 없이 주는 땅이었다. 또 땅도 다른 땅과 마찬가지로 작인에게서 경작권을 죄다 박탈해 가지고 그것을 다시 한 사람에게 열 마지기, 또 농사꾼이 한 집에 셋씩 넷씩 되는 데는 열다섯 마지기도 주고 혹은 여덟 마지기 일곱 마지기 다섯 마지기씩을 주는데 경작권까지 주는 것은 아니고 그저 농사를 지어서 가을에 추수를 해서 그 나는 소출 중에서 서흥수가 삼분지의 이 이상을 차지하고 그 나머지를 농사지은 자에게 주는 것이었다. 우리 앞집 갑복이네도 그 축에 한몫 끼였는데 갑복이네는 사십 석 추수를 바라보는 추수에서 열 섬ㅇㄹ 받기로 하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서흥수는 삼분지 이를 더 차지하는 셈이었다. 농사짓는 측의 억울함이란 말이 아니지만 이 축에 한몫 낄 수가 없을까 하여 애를 빠득빠득 쓰는 자도 많았다.

서흥수를 찾아가서 애원하는 자도 있었으며 엿이나 닭이나 계란이나 또 그 외의 다른 것들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자기의 원이 이루어 안 져서 서흥수에게 생전 처음으로 삿대질을 하며 온 집안 권속을 몰아 가지고 그 마당에 가서 초상난 모양으로 손뼉을 치며 뒹굴며 죽여 달라고 아우성치는 패도 있었다. 서흥수는 선물 갖다 주는 자는 선물만 받고 돌려보내고 삿대질이며 행패를 하려 드는 자는 주재소에 돌렸다.

마을은 다시 눈물의 바다 한숨의 골짜구니로 변하였다. 해방 전 그 무섭던 생지옥――주림과 징병과 보국대와 징발의 생지옥을 연상하는 마을이 되어 갔다.

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 늙은 정자나무 그늘에서 희색(기뻐하는 얼굴빛)이 만면해 재미나하던 정치담도 다 잊어 버렸다. 초등학교 아동을 선두로 뙤뙤 나팔과 북만 가진 악대에 발을 맞춰 멀리 삼십 리길 마을까지 행진하며 '만세' '만세' 그저 만세만 부르던 일은 꿈 같았다. 면소를 부수고 면직원을 때리고 순사를 쫓고 두들겨 주던 그 의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바 없었다.

정자나무 아래 이승만, 여운형, 김구 등으로 몰두하던 그들은――독립(해방)이 한 번 더 돼야 해――하고 뇌까렸다.

우리 닭장을 짓는 목수 영감에게서도 나는 종종,

"독립이 다시 돼야 해요."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서흥수에게서 학대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 갈아먹던 땅까지 빼앗기고 아주 지주와 작인이라는 주종 관계가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서흥수에게는 쩔쩔매었다. 이번 서흥수의 회갑 잔치만 해도 그다지 굉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흥수 자신의 말로도 '패가하는 놈이 무슨 회갑' 하였다니까. 그 자식 되는 자들이 서둘러서 한다 치더라도 강에까지 회갑 잔치 놀이터를 잡지 않았었을지 모른다. 강가에 회갑 잔치 놀이터를 정하게 된 것은 경작권 없이 농사를 지어 주고 삼분지 일도 못 찾아먹는 서흥수 농사꾼들과 또 그의 전(前) 작인――헌신짝처럼 떨어져 나간 작인들이 서둘러서 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똑같이 서흥수의 회갑 잔치를 위해서 쌀 한 말씩을 술을 해 놓고 돈 백 원씩 내기로 하였다. 하루 세 끼를 푸성귀로 이어 가기를 일 년이면 열 달씩이나 하는 그들의 쌀이었다.

작년 추수 후에 얼마간 쌀밥의 미끄러운 감촉을 맛본 뒤에는 한 번 온전히 쌀만으로 밥을 지어 먹어 보지 못한 그들의 쌀이었다. 돈은 어떤가. 돈 백 원, 백 원이면 십 원이 열이 모여진 백 원이었다. 단 십 원이 없어서 소금을 못 사는 때가 많은 그들의 돈이었다. 십 원이 아닌 오원이 없어서 배급 담배를 못 받아 피우는 그들의 돈이었다. 백 원! 백 원! 손톱 발톱 다 닳아 문드러지는 고된 일을 해야 타게 되는 이틀 치의 품삯이었다.

그런데 목수 영감은 이 위에 또 닭 한 마리를 더 서흥수의 회갑 잔치를 위해서 가져가겠다니 어쩌면 좋으랴. 바로 어제 저녁 일이었다. 그는 어저께도 그의 아들과 같이 와서 우리 닭장을 짓고 있었다. 목수 영감이 혼자 할 수 없는 '외'(흙벽을 바르기 위하여 벽 속에 엮은 나뭇가지)를 얽는다든지 서까래를 얹는다든지 지붕을 인다든지 하는 일은 줄창 그 아들과 해 왔었다. 서까래 얹는 것과 지붕은 아버지가 아래서 섬기고 아들이 위에서 얹고 이고 하였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회감(회충 때문에 생기는 배앓이)하니 어지러워서 높은 데는 꼼짝 못 하였다. 목수 영감이 내게,

"애기 어머니, 닭 한 마리만 외상으로 줍시오. 가을에 양식으로 드립지요."
하니까 아들은 얼른 미리 준비나 하고 있은 것처럼,

"아버진 참 그러지 마시래두……."
하고 아버지를 걱정스런 낯으로 건너다보는 것이었다.

"이놈아, 굶어 죽어두 좋단 말이냐. 이놈아, 다른 자들은 돼지두 바친다 돼지두 응 이놈아, 그래 닭 한 마리가…… 네 이놈아, 어느 땐 줄 알구……."

아버지의 호기는 대단하였다. 너무 격동이 심해서 말을 이어 내지 못하였다. 그 꾀죄죄한 몰골 속에서 아들에게 피워 보는 호기만이 남은 것 같았다. 아들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저 난처해하면서 아버지더러 올라가시자구만 하였다. 물론 나는 서흥수를 갖다 먹이라고 나의 닭 어느 닭 한 마리도 붙잡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처참하고 또 처참한 그의 현실을 돌보아서 닭 한 마리를 목수 영감에게 주어서 행여 그 일로 말미암아 목수 영감이 서흥수가 삼분지 이도 더 차지하고 농사짓는 측이 삼분지 일도 못 찾아 먹는 경작권 없는 그 땅을 얻어 하게 했으면 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들의 낯색도 또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영감, 왜 그러시유?"

옆집 철용 아버지가 들어왔다. 어떻게 되었든 나는 철용 아버지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을 다행하다 여겼다. 그 자리를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까 하던 참인 것이었다. 철용 아버지는 울타리 밑에서 뭘 하고 있는 것 같더니만 목수 영감의 호기 빼는 소리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그러지 않아도 그는 하루에 몇 번씩 우리 집에 잘 왔다). 저녁을 지내고 심심해서도 왔겠지만 목수 영감이 호기를 뽑게 된 그 사건이 구미가 당겨서 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하긴 무슨 일에나 참견을 잘하자고 하는 그였다. 해방 전엔 주재소 수석과 친밀히 지내고 지금도 직업은 소장에 나가서 어른인 체하고 중계를 들어 한몫 보는 것이 일이고 돈이 나올 데 없는데 그래도 잘 쓰고 명절이면 주재소 면소를 불러 먹이고 하였다. 이십 년 전에 보통학교 선생을 한 이력이 있었다니 그걸로 해서 일본말을 좀 하는 것 같았다. 해방 후――술집, 떡집, 고깃집이 서른 개도 넘을 적에 그는 갈보를 데려다 놓고 술집을 차렸다. 그러다가 작은 곳에 술집이 이렇게 많아서야 되겠느냐고 이 곳 유지들이 술집 박멸 운동을 나선 일이 있었다. 그 때 철용 아버지는 술집을 하던 체를 하지 않고 박멸 운동에 자기도 한몫 끼였다.

"암 술집을 없애야지. 갈보를 없애야지. 국가를 걸머질 청년들이 술과 계집으루 녹아서야 될 말인가 안 될 말이지 안 되구 말구……."

유지들보다 더 열렬하였다. 그는 아무 데나 덥적거리고(무슨 일에나 가리지 않고 자꾸 참견하다) 아무 말에나 가서 참견하였다. 내가 그가 오는 것을 싫지 않게 여기는 거나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나발'이란 별명을 불러 가면서도 그를 기피하는 일이 없었다. 뒤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무신념한 때문이다. 무신념한 것을 채택할 것은 아니더라도 거부하는 데까지 쉬이 이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인지 모르겠다.

철용 아버지는 아무의 대꾸도 없으니까,

"그래 영감, 돼질 바치구 얻어걸린 자 뉘란 말이요. 왜 자꾸 서흥수네 배 불릴 생각을 하시유, 딱들 하시유……."

목수 영감의 아들이 없고 또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더면 그는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내가 서흥수네를 못마땅히 여기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고 또 목수 영감의 아들의 뜻도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에그 아니꼬운 소리 집어치여……. 세상두 모르구 괜스레 나 덥적거림 되는 줄 알어……."

아들에게 뻗쳤던 화살이 철용 아버지께로 돌아섰다. 목수 영감은 눈에 눈물이 괴괴하기까지 하였다.

"뭘 덥적거린단 말이유. 그 영감 참 그래 저런 아들을 두구 그 주책없는 짓을……."

"아따 잘한다. 불붙는 집에 키구려……. 네 이눔, 네 그래 또 내 속 태워 줄려구 그러니……. 이눔아, 땅 떨어졌을 때만 해두 나리댁에 불을 질러 놓는다구 지랄을 쳐서 속썩이드니 이눔아……. 철을 몰라두 분수가 있지 흙을 파묵겠냐 돌을 깨물겠냐. 그러커들랑 순살 댕기든 면서길 댕기래두그래. 그게 잘하는 짓이야 이눔아……."

이번엔 철용 아버지와 아들을 한꺼번에 화살질하였다.

 

아들이 아버지와 처음 같이 와서 일하던 날 서까래를 얹느라고 두덩실 높이 덩그러니 앉아 쿵닥닥 따악딱 못을 박을 때 하늘이 높고 녹음이 짙은 탓이었던지 아버지를 도무지 닮지 않은 아들이 어느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같아서 나는 목수 영감에게 아들의 이력을 물어 보았다. 영감은 서울 사는 유족한(넉넉한) 이모가 아들을 데려다가 중학교를 마쳐 주고 전문학교에 입학시키려 들던 때 병으로 죽어서 공부는 못 하고 있다가 징병으로 뽑혀 나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 이모가 있었으면 때때로 군색한(필요한 것이 없거나 모자라서 어렵고 답답하다) 형편을 살펴 줄 것이었다는 말을 유감스런 얼굴로 하고 나서 아들이 순사나 면서길 다니라고 그렇게 말해야 싫다고만 한다고 하며 이어 좀 낮은 소리로,

"애기 어머니보구 말이지 그놈이 글쎄 앨 멕여서 큰일났어요."
하였다.

"어떻게 앨 멕이시게? 색시 바람이 났에요?"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기나 했음 좋게. 색시, 색신 생각두 안 합니다그려. 아 글쎄 애기 어머니, 애기 어머니보구니 말씀이지 그놈이 글쎄 나리댁을 불질른대니 저걸 어쩜 좋아요. 도무지 그놈 때메 똥끝이 타서 견딜 수 없군요. 글쎄, 농사꾼들이 배곯는 게 다 나리댁 탓이라구 그러잖아요. 땅이 떨어질 때만 해두 빚을 얻어서 땅을 붙잡자구 난 그랬죠. 그런데 그놈이 들어 줘야죠. 인제 좋은 세상이 올 테니 가만 내 버려 두라구 그러니 글쎄 잘살구 못사는 게 하늘이 마련하는 일인데 그게 될 말입니까?"

목수 영감은 잡았던 연장을 쉬이며 후연히(무연히의 사투리. 크게 낙담하여) 한숨까지 지었다.

 

"암 불을 질러야 해, 참 시훈이 장하군그래. 암 용기가 있는 청년이지……."

이것은 영감의 말을 주워듣고 하는 철용 아버지 말이었다.

"이 나발아! 어이구 나발아……."

영감은 매우 괘씸하였다. 철용 아버지의 별명을 연거푸 부르는 외엔 말이 안 나왔다.

"날더러 나발? 영감은 맹꽁이지 맹꽁이고, 맹꽁이 같은 짓 좀 말아요. 젊은 청년은 용기가 있어야지. 암 부숴 버려야지, 그런 걸 가만두군 살 수 없지……. 나두 부실 맘이 나는 걸……."

"아 이건 연장(나이가 많은 사람)두 몰라본담. 맹꽁이 그래 맹꽁이가 어쨌단 말이여……."

"글쎄 어린애들 모양으루 왜들 이러십니까?"

성문처럼 닫혔던 아들이 이쪽으로 돌아서며 하는 말이었다.

두 영감은 아무 소리도 못 하였다. 아들의 음성이 부드럽고 너무 낮았던 때문인지 모른다.

아들은 아버지를 아이 달래듯 하며 집에 가시자고 하였다. 나는 영감에게 아들의 말대로 하시라고 하고 그리고 이른 아침――즉 오늘 아침――서흥수네 회갑 잔치에 가기 전에 두어 시간이면 해 단다고 하던 닭의 운동장 문을 꼭 달아 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영감은 꼭 그러하겠노라면서 아들과 함께 돌아갔다.

그랬는데 이튿날인――오늘 아침에 와서 목수 영감은 서흥수네 일로 분주해서 널빤지로는 어렵겠으니 우선 가마니로 해 달아서 족제비의 피해만 막아 놓고 저녁때――회갑놀이 끝난 후에 마저 해 달겠노라고 했다.

약은 족제비는 내려드리운 가마니로 된 운동장 문이 제가 드나들기에 좋은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었다.

 

이래서 우리 닭이 오늘 두 마리나 물려 간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거짓말을 하였다. 우리 닭이 족제비에게 물려 갈 때 그 비둘기같이 하얀 닭이 모가지를 잘칵 물린 탓으로 눈이 볼찐 나온 채 '깨애액 깨애액' 비명을 지르는 것을 차마 들을 수가 없고 또 그 때 바로 서흥수네 잔치 놀이터에서 오는 풍류 소리가 참으로 요란하였기 때문에 내 손에 들린 긴 몽둥이를 가진 채 강가 놀이터로 달려가겠다고 했는데, 달려가서 그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횡행천하하는 것을 부숴 버리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못 하고 말았다. 나는 꼭 가려고 하였다. 진정 떨리는 내 손에 쥐인 몽둥이로 마구 짓두들겨 대려고 하였다.

나는 강가가 잘 내다뵈는 뒤뜰 높은 지대에 우선 올라서서 풍류 소리 나는 데를 내다보고 나서 가려고 하였다. 그래 높은 데 턱 올라선즉 그와 동시에 얼핏 내 발 아래의 채마밭 광경이 눈에 뜨이는 것이었다. 기막히는 참경(끔찍하고 비참한 광경)이었다. 족제비를 쫓는 내 몽둥이 바람에 소 떼가 들었다 난 콩밭이었다.

해토(얼었던 땅이 녹음)가 되기를 기다려서 남보다 일찍 서두른 위에 연신 거름을 들고 다니며 가꾼 탓으로 볼수록 풍성한 채마밭이었다. 그 중에도 토마토는 아침 저녁으로 순을 보아 주고 열매를 솎아 주고 해서 흐벅지게(탐스럽게 두툼하고 부드럽다) 굵은 열매가 관상 품으로도 제법 훌륭하던 것이다. 그 토마토가 가지가 찢긴 놈, 그냥 나무째로 쓰러진 놈, 열매가 굵은 까닭에 피해가 더 컸던 것 같다. 그 유난히 번들거리는 표피에 강렬한 광선을 받아서 더 한층 디글거렸다. 좁은 곳에 삼십여 마리의 닭을 가둬 놓고 닭을 고생시킨 것도 이 채마밭을 끝까지 예쁘게 길러 보자는 데서가 아니었던가…….

나는 그 자리에 그만 푹 주저앉아 버렸다.

그 때 철용 아버지가 사립문께로 들어왔다.

"아 왜 그러구 계세요?"

"닭을 또 물어 갔어요."

"아 저런 아침에두 가져가구 또…… 거 참 그놈의 영감쟁일…… 가만 계십시요. 내가 가서 그 맹꽁일 데려오지요."

철용 아버지는 내 말도 들어 안 보고 사립문 밖으로 돌아서 휘적휘적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간 뒤에 내 발앞에 기다랗게 자빠진 몽둥이를 집어 들고 뒤뜰에서 내려왔다. 내려와서는 몽둥이를 헛간 모퉁이에 본래대로 갖다 세워 놓았다. 살구 딸 적에 쉬이 눈에 뜨이도록――그리고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는 심심해졌다. 족제비에게 물려 가는 닭의 비명도 끝나고 강가에서 오는 풍류 소리도 그친 탓인지 나는 이상하게 무료함을 느꼈다.

목수 영감을 데리러 갔던 철용 아버지와 목수 영감 둘이 다 새파랗게 질려서 뛰어들어왔다. 영감은 본래 해골과 같이 마른 얼굴, 철용 아버지는 거무퇴퇴한 기름기 도는 얼굴, 그러나 그 두 얼굴이 똑 같은 보고를 내게 할 것 같았다.

"우리 눔이 잡혀갔어요 선상님.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목수 영감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날더러 처음 그는 '선상님'이라 하였다. 목수 영감의 뒤를 이어 철용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해가 한가운데 떴을 때――그림자들이 납작해지는 때――단 혼자서 서흥수가 그 아들과 손자와 친척들과 그 아들 친구들과 그리고 온 마을 사람들에게서 절을 받고 있을 때 목수 영감의 아들은 호화찬란하게 차려 놓은 회갑 큰 상을 부숴 버렸다고 하였다. 서흥수가 소리소리 지르며,

"이놈이 이게 어느 놈이냐 이게 창선이 아들놈이 아니냐."
고 뒤뚱거렸고 그의 아들과 딸들과 그 친구와 친척들이 모두 목수 영감 아들에게 달려들어서 붙잡고 넘어뜨리고 자빠뜨리고 모가지를 뒤로 끌어당기는 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저 벙벙해서 있었다고 하였다. 목수 영감은 이 판국에 서흥수와 그의 가족들을 쫓아다니며 손을 싹싹 비벼,

"저눔이 미쳤어요. 저눔이 환장했어요."

정말 환장한 것처럼 빌었다고 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순사가 와서 목수 영감의 아들을 묶어 가고 회갑 잔치는 흐지부지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목수 영감의 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그저 행동만 하였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문득 그에게 감사를 느끼었다.

내가 쳐부수려던 것을 대신 해 준 것이 고마워서 하는 감사가 아니었다. 고 악착스런 인간 같지 않은 서흥수의 회갑놀이를 용감히 부숴 버린 것이 고마워서 하는 감사도 아니었다. 그의 성문 같은 침묵――그 앞에서 하는 감사, 그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그 하나뿐인 것이다.

"당신 부채질해서 그랬어 내 아들이…… 어엉!"

목수 영감은 철용 아버지를 탓하면서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서 뺑소닐 쳤던 것이다. 순사가 무섭고 서흥수네가 두려웠다. 나는 자꾸자꾸 우는 영감에게 아들이 얼른 나온다고 위로하고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가난하고 우매한 농민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이 꼼짝 못 하는 세상이 와서 마을 사람들이 헐벗지 아니하고 병을 앓으면 약을 쓰고 어떠한 사람이나 배고프지 아니하고 글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된다고 말하였다. 영감은 주먹으로 눈을 씻으며,

"정말 우리 눔이 얼른 나와요? 선상님, 정말 그런 세상이 와요? 선상님." 하였다.

마을의 풍류 소리가 다시 들려올 때 진정 배고픈 자 하나 없고, 헐벗은 자 하나 없고, 병들어 약 쓰지 못하는 자 하나 없고, 우매한 자 하나 없이 모두 배불리 먹고 뛰어 보지 않으려느냐. 모두 좋은 옷 입고 노래 부르지 않으려느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소작인의 멍에를 벗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해방이 되었어도 여전히 서슬이 퍼런 지주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억울한 마음과 불만들은 목수 영감의 아들이 마지막에 회갑 상을 엎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목수 영감의 아들을 통해 농민들의 비참한 삶의 원인을 지주들의 행동에서 찾고 있다. <흉가> 이후의 몇 작품이 여성의 불행한 운명을 그리되 개인의 차원에서만 바라본 것이라면, 이 작품은 소작인 대 지주 관계라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