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 장(1960)                                     - 최인훈 -

 

 

<전략>

 

햇빛에 바랜 낙타 똥 냄새가, 어렴풋이 풍기는 장엄한 시간이, 몸속으로 소리쳐 흘러오는 듯한 떨림이 있다. 아랫배에서 치골에 이르는 언저리도 마찬가지 기하학적 우격다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두부 모 자르듯 한 다룸새가 보는 이로부터 구체적 상상을 가로막는 구실을 하고 있는, 굳어서 말라 버린 이, 사람의 몸은, 병원의 유리관 속 알코올에 담긴 몸뚱어리가 풍기는 생생한 역겨움에서는 동떨어진 속으로 그를 이끌어간다. 정 선생은 조용히 휘장을 내린다. 그 옛날 이 아낙이 대리석 잠자리에서 낮잠을 즐길 때, 그녀가 거느린 종이 그러했을 것처럼 조심조심. 명준은 꿈에서 깬 듯 제정신이 들었다. 휘장 하나 너머에 방금 본 야릇한 물건이 누워 있다는 게 거짓말 같다. 그들은 응접실로 돌아오면서 서로 말이 없다.

"전 정말, 가끔가다 선생님 곁에서 이런 굿을 치르지 않으면 제 생활이란 훨씬 보잘 것 없는 걸 겁니다."

"지나친 말이네. 내가 자네보다 나은 건, 내가 더 부자라는 것뿐이야."

"사는 것처럼 사는 법이 좀 없을까요?"

"자넨 아직 패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나?"

"패라니요?"

"왜, 미스를 할 적마다 패 하나씩 빼앗기는 놀이 있잖아. 자넨 아직 한 판도 안 했단 말일세. 아니 내가 잘못 알았나?"

"아닙니다. 아직 한 번도 미스가 없지요."

"그러니 되지 않았나. 큰소린 치지만 내 손엔 남은 패가 사실은 한 장도 없어. 어쩌면 도대체 나한텐 패가 꼭 한 장뿐이었는지도 모르지."

"실수를 해 보면 압니까?"

"그건 장담 못 하지. 다만 자넨 바보가 아니니깐, 될 거야."

"그러나 전 게임을 하면, 실수없이 할 작정인데요."

"미신 중에 으뜸가는 미신이야.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저한테 주어진 패를 잔뜩 움켜쥐고 무덤에 들어서는 게 자랑은 아닐세. 저승에서 그 패를 주고 천국행 침대표하고 바꿔칠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허나 그건 놀부 같은 놈 아니야? 애정에 그렇게 인색한 게 덕인가? 가만 있자, 내 경우를 가지고 반박하지는 말게. 내겐 워낙 패가 한 장밖엔 없었다고 하지 않나."

"알아요. 그러나 저는 반드시 연애여야만 하겠다는게 아니에요. 아무것이든 좋아요. 갈빗대가 버그러지도록 뿌듯한 보람을 품고 살고 싶다는 거예요."

"정치는 어때?"

"정치? 오늘날 한국의 정치란 미군 부대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서, 그 중에서 깡통을 골라내어 양철을 만들구, 목재를 가려내서 소위 문화 주택 마루를 깔구, 나머지 찌꺼기를 가지고 목축을 하자는 거나 뭐가 달라요? 그런 걸 가지고 산뜻한 지붕, 슈투라우스의 왈츠에 맞추어 구두 끝을 비비는 마루며, 덴마크가 무색한 목장을 가지자는 말인가요? 저 브로커의 무리들, 정치 시장에서 밀수입과 암거래에 갱들과 결탁한 어두운 보스들,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정치는 인간의 광장 가운데서두 제일 거친 곳이 아닌가요? 외국 같은 덴 기독교가 뭐니 뭐니 해도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 같은 몫을 하잖아요? 정치의 오물과 찌꺼기가 아무리 쏟아져도 다 삼키고 다 실어 가 버리거든요. 도시로 치면 서양의 정치 사회는 하수도 시설이 잘 돼 있단 말이에요. 사람이 똥오줌을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에도 똥과 오줌은 할 수 없지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허지만 하수도와 청소차를 마련해야 하지 않아요?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놓구,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 바닥을 깔구,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착한 길 가던 사람이 그걸 말릴라치면 멀리서 망을 보던 갱이 광장에서 빠지는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한 칼에 그를 해치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도둑놈한테서 몫을 타는 것이지요. 그는 그 몫으로 정조를 사고,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칼을 품고 광장으로 나옵니다.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으니깐요. 그렇게 해서 빼앗기고 피흘린 스산한 광장에 검은 해가 떴다가는 핏빛으로 물들어 빌딩 너머로 떨어져 갑니다.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이 아닙니까? 선량한 시민은 오히려 문에 자물쇠를 잠그고 창을 닫고 있어요.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 시장으로 가는 때만 할 수 없이 그는 자기 방문을 엽니다. 한 줌 쌀과 한 포기 시래기를 사기 위해서, 시장, 그건 경제의 광장입니다. 경제의 광장에는 도둑 물건이 넘치고 있습니다. 모조리 도둑질한 물건. 안 놓겠다고 앙탈하는 말라빠진 손목을 도끼로 쳐 떼어 버리고, 빼앗아온 감자 한 자루가 거기 있습니다. 피 묻은 배추가 거기 있습니다. 정액으로 더럽혀지고 찢긴, 강간당한 여자의 몸뚱이에서 벗겨온 드레스가 거기 걸려 있습니다. 한푼 두푼 모아서 가계가 늘어가는 그런 얘기는 벌써 통하지 않아요. 바늘끝만한 양심을 지키면서 탐욕과 조절을 꾀하자는 자본주의의 교활한 윤리조차도 없습니다. 파는 사람이 사는 사람을 을러댑니다. 한국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의 안개 속에 협박의 꽃불이 터지고 허영의 애드벌룬이 떠돕니다. 문화의 광장 말입니꺼? 헛소리의 꽃이 만발합니다.

또 그곳에는 아편꽃 기르기가 한창입니다. 개처럼 욕정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주는 개인 지도와 좀 대중적인 강습소와 이 두 가지 층이 있습니다. 정치의 광장에서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람들이 뒷골목에 차려진 작은 지붕 달린 광장들, 바와 카바레에서는 공범자처럼 술을 권합니다. 부정하게 얻은 돈이 마구 뿌려지고, 문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비굴한 예술가의 낯짝에 지폐 뭉치가 뿌려집니다. 발레리나들은 스커트를 한 번씩 들어줄 때마다 지폐 한 장씩 다투어가며 주워 모아서는 핸드백에 소중히 간직합니다. 그 핸드백의 무게가 그녀들의 명성의 바로미터이지요. 할 수 없어요. 그녀들의 연습장은 당수협회에서 뺏아 버렸으니깐. 저 빛무리 눈부신 화랑들의 무술 말이에요.

시인들은 알아볼 수 있는 막끝까지 말을 두들겨 패서 사디즘 충동을 카타르시스합니다. 그들은 가난하니까 진짜 대상, 여자를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평가들은, 아니 자네가 정말 카프카와 똑같은 겪음을 했단 말이야? 거짓말 말아, 저놈은 가짭니다. 이런 식으로 국산 카프카를 엉망 진창이 되게시리 두들겨 팹니다. 비평가란, 자기만은 박래품이라는 망상에 걸린 불쌍한 미치광이의 별명이지요. 이런 광장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느낌이란 불신뿐입니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건 자기의 방, 밀실뿐입니다.

그는 밀실에만은 한 떨기 백합을 마련하기를 원합니다. 그의 마지막 숨을 구멍이기 때문이지요. 저희들에겐 좋은 아버지였어요. 국고금을 털컥 한 정치인을 아버지로 가진 인텔리 따님의 말이 풍기는 수수께끼는 여기 있는 겁니다. 오, 좋은 아버지. 인민의 나쁜 심부름꾼.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습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각기의 밀실은 신분에 맞춰서 그런 대로 푸짐합니다. 개미처럼 물어다 가꾸니깐요.

좋은 아버지. 불란서로 유학 보내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 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정 선생은 가만히 듣고 있다. 맞장구도 치지 않고, 대꾸도 없다. 두 사람 다 그쪽이 편했다.  

정 선생은 은갑에서 담배를 꺼내 자기가 한 대 물고, 명준에게도 권한다. 라이터를 내미는 선생의 손이 떨리는 듯했다.

정 선생이 그때 선생에서 친구로 내려오는 것을 명준은 어렴풋이 깨닫는다. 자랑스러우면서 서운하다. 우상을 부순 다음에 오는 허전함.

"그 텅빈 광장으로 시민을 모으는 나팔수는 될 수 없을까?"

"자신이 없어요. 폭군들이 너무 강하니깐."

"자네도 밀실 가꾸기에만 힘쓰겠다는."

"그 속에서 충분히 준비가 끝나면."

"나와서"

"치고 받겠다는 거죠."

"그 얘기가 부도가 되면?"

"부도나는 편이 진실이겠죠."

또 말이 끊어진다. 말할수록 정 선생의 자리는 내려가고, 그는 자꾸 건방져지는 게 선하다.

"베토벤이 어때?"

명준은 크게 끄덕인다. 정 선생은 전축을 걸어놓는다. 부수는 듯한 비바람 대신에, 나긋나긋하고 환한 가락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로맨스」다. 몰리고 있던 분풀이를 마음껏 했다는 듯 일부러 딴 데를 보면서, 정 선생은 장난꾸러기처럼 허리를 한 번 젖혀 보인다. 명준은 빙긋 웃는다.

 

[중략]

 

테이블에 펼쳐진 해도(배가 항해할 때 필요한 여러 가지 사항을 그려 넣은 지도) 위에 컴퍼스가 던져진 채 선장은 보이지 않았다.

마카오(중국 광둥성 남부, 주장강 어귀에 있는 섬. 포르투갈령이었으나 1999년 중국에 반환됨.)가 가까워 오자 석방자들은 또다시 선장에게 상륙시켜 주도록 요청해 보라고 그를 졸라대기 시작했으나 명준은 끝내 거절하고 말았다. 그들 얼굴에 새겨진 불만과 적의를 보고도 별반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오래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덮쳐들 듯 어깨가 무겁고, 남하고 얘기하기가 귀찮았다.

송환 등록이 시작됐을 무렵 갈팡질팡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제3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자기를 위해 마련된 조항이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정전(停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명준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는 북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가 전쟁 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는 없었으나 설령 생존했다 하더라도 그 한 가지 조건으로 북을 택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 테지, 효도 같은 걸 하기엔 현실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리고 이북 사회 같은 데서 육친의 정이란 무엇이던가. 그러고 보면 이제 그가 북으로 가야 할 아무 이유도 없었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은혜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속해 있다는 감정은, 구체저으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인간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느 곳에 좌표(座標)를 정할 것인가(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삶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는 뜻. 명준이 중립국을 택하게 되는 큰 이유이다.). 그렇다고 그 사회 자체에 대한 신앙조차 잃어버린 지금에. 믿음 없이 예배하는 것이 고통스럽듯이, 신념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커뮤니스트란, 월북할 때 그가 막연하게 그려본 그런 인종들이 아니었다. 한때, 그들의 존재를,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는 현대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생각했다. 이상주의의 마지막 수호자들. 그는 커뮤니즘과 기독교 ― 특히 카톨릭을 한 가지 정신의 소산으로 보는 아날로지(유추, 같은 종류나 유사한 것에 의하여 다른 사물을 미루어 추측하는 일)를 그럴싸한 자가발견(自家發見,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발견)으로 여겼다. 

 

 <기독교 도식>

1. 에덴 시대

2. 타락

3. 원죄 가운데 있는 인류

4. 구약 시대 제민족의 역사

5.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6. 십자가(사랑)

7. 고백(고해) 성사

8. 법왕(法王))

9. 바티칸 궁

 

 <커뮤니즘의 도식>

1. 원시 공산 사회

2. 사유 제도의 발생

3. 자본주의 사회 속의 인류

4. 노예 · 봉건 · 자본주의 국가의 역사

5. 칼 마르크스의 출현

6. 낫과 망치(해머, 증오)

7. 자아 비판 제도

8. 스탈린

9. 크렘린 궁

 

에덴의 타락에서 법왕제에 이르는 기독교의 도식은 그대로 커뮤니즘의 탄생과 발전의 도식에 신기스럽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완전한 좌우 상칭을 이루는 도형이었다. 철학을 전공한 그는 이 비밀을 우연하게 보지는 않았다. 비밀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제자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헤겔은 바이블에서 먼저 역사적 의상(衣裳)을 박탈하고 다음에 지방적 분장을 지워 버린 후 그 순수 도식만을 뽑아 낸 것이다(헤겔은 성경에서 시간적 · 시대적인 여러 특성을 제거하고, 지역적 · 공간적으로 획득된 특성을 지워 버린 후 지극히 보편적인 도식만을 간추려 낸 것이다.). 말하자면 헤겔의 철학은 바이블의 에스페란토(폴란드의 자멘호프가 만든 국제 공용어) 역(譯)이었다. 도식이란 그것이 우수할수록 모방하기 쉽다. 마르크스는 선생이 애써 이루어 놓은 나체화에다 다시 한 번 옷을 입혔다. 경제학과 이상주의의 옷을(마르크스는 헤겔이 애써 이룩한 세계사 전개의 보편성과 세계 해석의 보편성에 특정한 사회 체제(자본주의)에 대한 경제 분석과, 전노동 계급의 해방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자신의 궁극적 이상을 덧입혔다).

초대 교회의 소박한 정열과 경건한 믿음을 현대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정과 마찬가지로, 가령 커뮤니즘이 현실적으로는 광대한 판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지만 그 창시자들의 선의와 정열은 없어진 지 오래다. 구라파 사람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헤겔의 철학이 매력적인 아편이요 결정적인 독소였던 것처럼, 이명준에게 있어서 커뮤니스트 사회에서 살아 보았다는 체험은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회당 가운데서 그들은 우상(偶像)을 섬긴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영감(靈感)이 아니라 의식(儀式)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사랑과 용서가 아니라 증오와 보복이었다.

커뮤니즘에 있어서의 마틴 루터는 아직 없다. 크렘린(소련 정부 또는 소련 공산당을 이름)의 권위에 항거한 자들은 이단(異端) 심문소에서 화형(火刑)이 되었다. 권위는 아직도 튼튼하다. 신(神)의 재림이 2천 년 동안 연기되어 온 것처럼, 공산 낙원의 재현은 30년 동안 연기되어 왔다.

여기까지가 그가 알아볼 수 있었던 벼랑끝이었다. 벼랑을 뛰어넘거나 타고 내리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 무서운 밀림에 과연 얼마나한 자리를 낼 수 있을지, 자기 힘에 대한, 지적 체력에 대한 믿음이 자꾸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물음을 누군가와 힘을 모아 풀어나간다는 삶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벌써 전쟁이 나기 전에 알고 있은 일이었다. 오랜 세월을 참을 차비가 되어 있었다. 역사의 속셈을 푸는 마술 주문을 단박 찾아내지 못한다고 삶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참고, 조금씩, 그러나 제 머리로 한 치씩이라도 길을 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그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북조선 같은 데서, 적에게 잡혔다가 돌아온 사람의 처지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이명준은 자기한테 돌아온 운명을 한탄했다. 적어도 남만큼 한 충성심을 인정받으면서, 자기가 믿는 바대로 남은 세월을 조용히, 그러나 자기 힘이 미치는 너비에서 옳게 써나간다는 삶조차도 꾸리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제국주의자들의 균을 묻혀 가지고 온 자로서, 일이 있을 적마다 끌려나와 참회해야 할 것이었다. 마치 동네 안에 살면서도 사람은 아닌 문둥이처럼. 그런 처지에서 무슨 일을 해볼 수 있겠는가.

그런 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한을 택할 것인가? 명준의 눈에는 남한이라 게으른 '즉자태(卽自態, 현상에서 독립한 그 스스로의 존재 ↔ '對自態', 다른 것과 관계함으로써 자기를 자각하고 자신과 대립하는 존재)'였다(인간의 공통된 선을 지향하는 이상이 없이 그저 현실적인 삶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理想)의 결여태(缺如態, 있어야 할 것이 모자라거나 없는 상태)'였다. 키에르케고르 선생 식으로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이었다. 광신(狂信)이 무섭다면 무이상(無理想)은 슬펐다. 다만 장점이 있다면 그곳에는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나태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정말 그곳은 자유향(自由鄕,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계)이었다. 오늘날 커뮤니즘이 인기 없는 것은 구체적이고 단적인 투쟁의 상대 ― 적(敵)을 인민에게 지시해 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에는 그렇게 뚜렷하던 인민의 적이 오늘날에는 원자 탐지기의 바늘도 갈팡질팡할 정도로 막연하기만 하다. 빈곤과 악의 책임자들을 찾기 위하여 세분되고 얽히고 설킨 사회 조직의 미궁(迷宮) 속을 헤매다가 불쌍한 '인민'은 그만 포기해 버리고, 태고연한 신상 상담소, 동양 철학관으로 달려가서 1년치 토정비결을 사고 만다(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하려고 하지 않고 운명에 삶을 맡겨 버린다). 인류학자의 분석력과 직관을 가지고서도 현대 사회의 음성적인 부패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기 힘드는 판에, 김 서방 이 주사를 나무라는 건 아무래도 가혹하다. 그래서 자유가 있다. 이북 사회에는 이 자유가 없었다. 게으를 수 있는 자유까지도 없었다. 그건 기본 인권의 유린이다. 남한의 정치가들은 천재적이었다. '들어찬 주장(酒場, 술집)마다' 들어차서 '울랴고 내가 왔던가 웃으랴고 왔던가'를 심각히 고민하는 대중을 위하여 더 많은 양주장 설립 허가를 발급한다(대중들로 하여금 자유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향락에 빠져 사회적 갈등을 자연스럽게 해소하도록 만든다.). 매춘 제도(賣春制度)를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라는 여성 단체의 호소는 당일치 신문 기사로만 현실적 가치를 얻을 뿐이다. 그들의 정치 철학은 교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방면으로 카타르시스(배설)되는 힘을 봉쇄하면, 무줄기가 어디로 터져 나올지를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에겐 진심으로 교회에 나가기를 권유하고 외국에 보내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 한다.

이런 사회. 그런 사회로 가기도 싫다. 그러나 둘 중에서 택일해야만 한다. 형기가 만료된 죄수가 더 있겠다고 버티었자 안 될 말이다. 그는 흡사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짐승이었다. 그때 중립국 송환이 쌍방간에 합의를 보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각오를 하는 찰나 난데없이 밧줄이 내려온 것이었다. 그때의 기쁨을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판문점. 쌍방의 설득자들 앞에서처럼 통쾌했던 일이란 그의 과거에서 두 번도 없다.

장내 구조는 양측 설득자들이 마주 보고 책상을 놓은 사이로 포로는 왼편에서 들어와서 바른편으로 퇴장하게 돼 있다. 순서는 공산측이 먼저였다. 네 사람의 공산군 장교와 국민복을 입은 중공(中共) 대표가 한 사람, 도합 다섯 명. 그는 그들 앞에 가서 걸음을 멈췄다. 앞에 앉은 장교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들리지 않는 양 그대로 버틴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이념이 배제된 공간, 남한과 북한 모두 완전하지 못한 공간이라는 깨달음 이후에 하는 소극적 선택임.)

그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상반신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했다.

"동무, 중립국도 역시 자본주의 국가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북을 선택하면 받게 될 영웅 대접)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이번에는, 그 옆에 앉은 장교가 나앉는다.

"동무, 지금 인민공화국에서는, 참전 용사들을 위한 연금 법령을 냈소. 동무는 누구보다도 먼저 일터를 가지게 될 것이며, 인민의 영웅으로 존경받을 것이오. 전체 인민은 동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고향의 초목도 동무의 개선을 반길 거요."

"중립국."

그들은 머리를 모으고 소곤소곤 상의를 한다.(명준을 설득하기 위해 논의하는 것으로, 명준이 보복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함.)

처음에 말하던 장교가, 다시 입을 연다.

"동무의 심정도 잘 알겠소. 오랜 포로 생활에서, 제국주의자들의 간사한 꾀임수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용서할 수 있소.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시오. 공화국은 동무의 하찮은 잘못을 탓하기보다도, 동무가 조국과 인민에게 바친 충서을 더 높이 평가하오. 일체의 보복 행위는 없을 것을 약속하오. 동무는 ……."

"중립국."

중공 대표가, 날카롭게 무어라 외쳤다. 설득하던 장교는, 증오에 찬 눈초리로 명준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좋아."

눈길을, 방금 도어를 열고 들어서는 다음 포로에게 옮겨 버렸다.

아까부터 그는 설득자들에게 간단한 한마디만을 되풀이 대꾸하면서, 지금 다른 천막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광경을 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도 자기를 세워보고 있었다.(남한 측의 설득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상상함.)

"자넨 어디 출신인가?"

"……."

"음, 서울이군."

설득자는,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면서,

"중립국이라지만 막연한 얘기요. 제 나라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겠어요. 외국에 가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 밖에 나가봐야 조국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구 하잖아요? 당신이 지금 가슴에 품은 울분은 나도 압니다. 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허허허,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 나라 내 민족의 한 사람이, 타향 만리 이국 땅에 가겠다고 나서서, 동족으로서 어찌 한 마디 참고되는 이야길 안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곳에 남한 2천만 동포의 부탁을 받고 온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서,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라는 ……."

"중립국."

"당신은 고등교육까지 받은 지식인입니다. 조국은 지금 당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버리고 떠나버리렵니까?"

"중립국."

"지식인일수록 불만이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 몸을 없애버리겠습니까? 종기가 났다고 말이지요.(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동경이 크고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는 지식인일수록 현재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몸은 조국을, 종기는 사회의 작은 모순을 각각 의미한다.) 당신 한 사람을 잃는 건, 무식한 사람 열을 잃은 것보다 더 큰 민족의 손실입니다.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나는 당신보다 나이를 약간 더 먹었다는 의미에서, 친구로서 충고하고 싶습니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서, 조국을 재건하는 일꾼이 돼주십시오. 낯선 땅에 가서 고생하느니, 그쪽이 당신 개인으로서도 행복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대단히 인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 어떻게 생각지 마십시오. 나는 동생처럼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만일 남한에 오는 경우에, 개인적인 조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명준은 고개를 쳐들고, 반듯하게 된 천막 천장을 올려다본다. 한층 가락을 낮춘 목소리로 혼잣말 외듯 나직이 말할 것이다.

"중립국."

설득자는, 손에 들었던 연필 꼭지로, 테이블을 툭 치면서, 곁에 앉은 미군을 돌아볼 것이다.(명준이 자신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남한 측 설득자의 행동을 상상함.) 미군은, 어깨를 추스르며, 눈을 찡긋 하고 웃겠지.

나오는 문 앞에서, 서기의 책상 위에 놓인 명부에 이름을 적고 천막을 나서자, 그는 마치 재채기를 참았던 사람처럼 몸을 벌떡 뒤로 젖히면서,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찔끔찔끔 번지고, 침이 걸려서 캑캑거리면서도 그의 웃음은 멎지 않았다.(자신에게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중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에서 오는 후련함과 중립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자조적인 비애와 허탈감이 웃음 속에 담겨 있다.)

준다고 바다를 마실 수는 없는 일. 사람이 마시기는 한 사발의 물. 준다는 것도 허황하고 가지거니 함도 철없는 일. 바다와 한 잔의 물. 그 사이에 놓인 골짜기와 눈물과 땀과 피. 그것을 셈할 줄 모르는 데 잘못이 있었다. 세상에서 뒤진 가난한 땅에 자란 지식 노동자의 슬픈 환상. 과학을 믿은 게 아니라 무술을 믿었던 게지. 바다를 한 잔의 영생수로 바꿔준다는 마술사의 말을. 그들은 뻔히 알면서 권력이라는 약을 팔려고 말로 속인 꼬임을. 어리석게 신비한 술잔을 찾아 나섰다가, 낌새를 차리고 항구를 돌아보자, 그들은 항구를 차지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참을 알고 돌아온 바다의 난파자들을 그들은 감옥에 가둘 것이다. 못된 균을 옮기지 않기 위해서. 역사는 소걸음으로 움직인다. 사람의 커다란 모순과 업(業)에 비기면, 아무 자국도 못 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대까지 사람이 만들어낸 물질 생산의 수확을 고르게 나누는 것만이 모든 시대에 두루 맞는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 아닌가. 벌써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 동네가 알아낸 슬기. 사람이라는 조건에서 비롯하는 슬픔과 기쁨을 고루 나누는 것. 그래 봐야, 사람의 조건이 아직도 풀어나가야 할 어려움의 크기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이루어놓은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루어야 할 것에만 눈을 돌리면, 그 자리에서 그는 삶의 힘을 잃는다. 사람이 풀어야 할 일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은혜의 죽음을 당했을 때, 이명준 배에서는 마지막 돛대가 부러진 셈이다. 이제 이루어놓은 것에 눈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 팔자소관으로 빨리 늙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된 몸의 길, 마음의 길, 무리의 길, 대일 언덕 없는 난파꾼은 항구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물결 따라 나선다. 환상의 술에 취해보지 못한 섬에 닿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섬에서 환상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서운 것을 너무 빨리 본 탓으로 지쳐빠진 몸이, 자연의 수명을 다하기를 기다리면서 쉬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결정한, 중립국행이었다.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 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도 모를 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병원 문지기라든지, 소방서 감시원이라든지, 극장의 매표원, 그런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쓰는 일이 적고, 그 대신 똑같은 움직임을 하루 종일 되풀이만 하면 되는 일을 할 테다. 수위실 속에서 나는 몸의 병을 고치러 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나는 문간을 깨끗이 치우고 아침저녁으로 꽃밭에 물을 준다. 원장 선생이 나올 때와 돌아갈 때는 일어서서 경례를 한다. 간호부들이 시키는 잔심부름을 기꺼이 해줘야지. 신문을 사달라느니 모퉁이 과자집에서 초콜릿 한 개만 사다 달라느니 따위 귀여운 부탁을 성심껏 해준다. 그녀들은 봉급날이면 잔돈푼을 모아서 싸구려 모자나 양말 같은 조촐한 선물을 할 게다. 나는 고마워라 허리를 굽히며 받는다. 그리고 빙긋 웃는다. 그녀들 중엔 새로 온 애숭이가 이렇게 물어본다.

"리 아저씬 중국분이시죠?"

그러면 고참 언니의 한 사람은, 가벼운 경멸을 섞으면서 신입생의 무지를 고친다.

"애두, 코리안이란다."

나는 내내 웃음을 띤 채 말이 없다. 잠도 숙직실에서 잔다. 밤중에 돌아보다가 숙직 간호원이 끄기를 잊어버린 가스 화덕을 발견하여, 그 큰 병원을 불에서 구하게 된다. 나는 표창을 받고 사무실로 올려주겠다고 한다. 나는 모자를 집어들고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말한다.

"인제 가봐야겠습니다, 원장 선생님. 자리를 너무 비우면 안 됩니다."

마당을 가로 질러 수위실로 걸어간다. 창문에 붙어서서 존경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원장 선생의 눈길을 등에 느끼면서. 나는 신문을 가끔 본다. 그것도 '해외토픽'쯤이다.

몇 년에 한 번쯤, 코리아 얘기가 서너 너덧 줄 날 때가 있을 것이다.

'코리아 관광협회에서는, 코리아에 오는 외국 여행자들이 해마다 늘기 때문에, 어린애들이 그들을 따라다니느라고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현지 주민의 불평을 정부 당국에 강력히 드러낸 탓으로 내각이 넘어졌다.'

이 글을 보면서 나는 빙긋 웃는다. 기웃해 들여다보던 간호부가 한마디 한다.

"이런 나라는 얼마나 살기 좋을까?"

결혼? 안 한다. 결혼하지 못해서 색시 고르러 온 게 아니므로. 또는 도시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망루에서 하루 종일 보내는 소방서 불지기는 어떤가.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도회 경치는 삶의 터이자 노래일 거다. 그 노래가 곧 삶이 된다. 딱정벌레처럼 발발 기어다니는 자동차들. 성냥갑 모양 반듯한 공장과 굴뚝. 장난감 같은 도시의 지붕이 늘 발밑에 있다. 나는 그 지붕 밑에 벌어지는 삶을 떠올려 본다. 사내가 색시 앞에 꿇어앉아서 사랑한다고 한다. 내 사랑을 어떻게 알렸으면 좋겠느냐고 도리어 졸라보는 체한다. 여자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웃기만 한다.

"아가씨, 믿어드리시우. 그 양반 하는 말이 정말입넨다."

나는 자기 자리도 잊어버리고 들리지도 않을 소리를 거든다. 안 들려도 그만이다. 좋은 말을 듣고 싶으면 더 훌륭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게다. 결국 조언이란 쓸데없는 것, 사람에게 조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만이 조언할 수 있지만 그도 지금은 지쳤다. 옛날처럼 상냥하지 못하다. 사람이 나쁘달 수도 없다. 어떻게 되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된 것뿐이다. 사람과 하느님, 어차피 남남끼린데 잘된 일이다. 불이 보인다. 어? 시장네 집 언저리다. 요란한 나팔 소리. 길을 막는구나. 달린다. 옳지 벌써 호스에서 물이 뿜어지누나. 엣헴 더 볼 것 있나. 제때에 알아보면 꺼버린 거나 다름없지. 사람 일도 그렇다? 몰라 몰라. 귀찮은 말씀은 이제는 그만. 불 끄는 놈이 객담은 무슨 객담.

또 극장 매표원은 어떻구. 돈을 디미는 손을 보고, 일자리며 나이며 틀림없이 알아맞히게 이골이 날 즈음, 표팔이를 자동식으로 하자는 소리가 나온다. 나는 전국 표팔이 일꾼들의 앞장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대통령 관저 앞에서 들었다 놓는다.

"극장 매표구에서 겪는 즐거운 붐빔을 죽이지 말라."

지나가던 대학생이 플래카드의 문구를 보고 친구보고 말한다.

"옛날 모더니스트들의 시 구절 같잖아?"

낮굿이 있을 땐 밤에는 쉰다. 수수한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단골 술집으로 간다. 가벼운 것만 마시고 팁을 톡톡히 놓고 가는 손님이래서 그들은 늘 상냥하다. 여급이 사랑 비슷한 걸 하자는 눈치를 보인다. 나는 손가락으로 '못써 그런 소리' 해보인다. 그녀는 숫처녀처럼 빨개지면서 그러나 눈썹을 쓱 치켜보이고는 선선히 돌아서 버린다. 나는 아파트에서 산다. 나가는 시간과 돌아오는 시간이 그대로 어김없는 탓으로, 정말은 그보다 방세가 꼬박꼬박인 탓으로 마담은 안팎일 같은 걸, 가까운 살붙이한테 털어놓듯이 건네오는 때가 많다. 그러면 나는 숫제 농으로 돌려 버린다. 8호실 젊은 친구는 술만 마신 날이면 가스 시설이 나쁘다는 투정이니 어쩌면 좋아요. 꼴에 방세는 몇 달씩 밀리면서, 할라치면 내 대답, 아 가스 회사 사람을 한 분 7호실에 들이시구려. 마담은 웃고 만다. 마담도, 겪고 난 사람이다.

이런 모든 것이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중립국을 골랐다.

그는 벽장문에 달린 거울에 얼굴을 비춰봤다. 핏발 선 눈. 꺼진 볼. 흐트러진 머리. 5월달 새잎처럼 싱싱한 새 삶의 길에 내가 왜 이 꼴인가?

그는 다시 층게를 밟아 내려왔다. 어제 저녁에 보초를 서던 늙은 뱃사람이 나무궤짝을 메고 지나가다가 그를 보자, 말을 걸었다.

"미스터 리, 캘커타에 가면 내가 한 잔 사겠소."

전날 밤 일이 배 안에 퍼진 게 틀림없었다. 철없는 석방자들이 야료를 부린 가운데서 알 만하게 굴었대서, 믿음이 더해진 눈치다. 꼬집어 그럴 만한 일은 없어도, 어느 편인가 하면 건성으로 쌀쌀하기만 하고, 가끔 건방지기조차 하던 무라지의 어제 저녁에 보여 준 마음씨도, 분명히 그런 데서 오는 것이었다. 명준은 그런 배 안의 눈치를 채자 말할 수 없이 울적해졌다. 남들이 멋대로 자기를 영웅으로 만들어 버린 게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한 일이 아니었다. 따지고 들면, 그때 김이 왜 그토록 미웠는지 알 수 없다. 그때 내 가슴을 메스껍게 하던 덩어리를 본인도 풀이하지 못하는데, 이 사람들은 용케 척척 알아서 값을 매긴다. 뱃사람이 메고 있던 궤짝은 가벼운 물건이었던 모양으로, 그는 한 손으로 궤짝을 꼬나 갑판에 놓으면서, 명준에게 담배를 청했다.

"캘커타에 닿는 대로 상륙시킬 모양이니깐."

"그때 술을 사신단 말씀이죠?"

"암."

"왜 저한테 술을 삽니까?"

"응? 왜라니? 허."

이 늙은 바다의 노동자는, 명준의 물음에 적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의 단순한 머리로, 딴은, 제가 명준에게 느끼는 호감을 풀이하기는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명준은 우스워졌다. 그는 짓궂게 다그쳤다.

"글세 왜 저한테 술을 사신답니까?"

뱃사람은 내려놓았던 짐을 도로 어깨에 얹었다.

"좌우간 사고 싶으니까."

그는 말을 마치고는, 더 어물거리다가는 봉변이나 할 것처럼, 일부러 아랫도리를 묘하게 휘청거리며, 게다가 짐을 붙잡지 않은 한쪽 팔을 내저어 크게 활개를 치면서, 뱃머리 쪽으로 내빼 버렸다. 명준은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 보았다. 바다의 말은 남자답다. 좌우간 사고 싶으니까.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생각을 고쳐, 뒤쪽 난간으로 찾아갔다. 어쩌다 보니 그 자리에 단골이 돼 있었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발길이 알아서 이리로 옮겼고, 무슨 궁리를 하더라도 여기 오면 마무리가 되었다. 게다가 이 모퉁이는 발길도 드물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아무 꾸밈도 없는 민숭한 갑판이, 하얗게 햇빛이 눈부신 작은 놀이터 같았다. 이렇게 벽을 기대고 서서 갑판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노라면, 소학교 때, 교사 담벼락에 기대어 햇볕을 쬐던 일이 생각난다. 그토록 호젓했다. 여러 사람이 북적거리는 데를 비켜 늘 이런 자리를 찾아오는 마음. 남하고 돌아선, 아무리 초라해도 좋으니까 저 혼자만이 쓰는, 그런 광장 없이는 숨을 돌리지 못하는 버릇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약한 자가 숨는 데였다. 낙동강 싸움터에서 찾아낸 굴도 그렇다. 그는 거기에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 데리고 가면 그 동굴이 주는 거룩한 호젓함을 잃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은혜가 나타났을 때, 그녀도 굴을 쓰게 해주었다. 한 마리 가장 가까운 암컷에게만은 숨는 굴을 가리켜주었다. 사람이란 그런 것, 아니 나란 그런 놈. 그 스산한 마당에서, 일 미터 평방의 자리에 잠시 단 혼자서만 앉아 본다는 건 무엇이었을까. 애당초 여자를 끌어들일 셈이 아니었던 바에야, 자기 혼자의 때와 자리를 몰래 만들어놓자는 생각 말고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니면 어떤 영감으로 은혜가 오리라 미리 알고, 그녀와 둘이서 뒹굴 굴을 만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웃기지 말자. 누군가를 웃기지 말자. 남이 들으면 창피하다. 우리 목숨을 주무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장삼이사, 그놈이 그놈이다. 자기만 별난 줄 알면 못난이 사촌이다. 광장에서 졌을 때 사람은 동굴로 물러가는 것. 그러나 과연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사람은 한 번은 진다. 다만 얼마나 천하게 지느냐, 얼마나 갸륵하게 지느냐가 갈림길이다. 갸륵하게 져? 아무튼 잘난 멋을 가진 사람들 몫으로 그런 짜리도 셈에 넣는다 치더라도 누구든 지는 것만은 떼어놨다. 나는 영웅이 싫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내 이름도 물리고 싶다. 수억 마리 사람 중의 이름 없는 한 마리면 된다. 다만,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 그리고, 이 한 뼘의 광장에 들어설 땐,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만한 알은체를 하고, 허락을 받고 나서 움직이도록 하라. 내 허락도 없이 그 한 마리의 공서자를 끌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지. 그런데 그 일이 그토록 어려웠구나.

갑판을 눈여겨 내려다보면, 그 위에 비치는 햇빛의 밝기는 넓이 구석구석마다가 고르지는 않았다.

퍽으나 미미하지만 어룽어룽한 다름이 있다. 갑판의 나뭇결 빛깔이 얼마쯤씩 다른 탓인가 하고 살펴보는데, 잘 모르겠고, 그것은 아무튼 그 위에서 되비치는 빛의 꺾임은 고르지 못하다. 쭈그리고 앉아서 갑판에 손바닥을 댔다. 따뜻했다. 손을 움직여 쓸어 보았다. 꺼끌꺼끌한 겉은 그 따뜻한 기운만큼은 정답지 못했으나, 손 바닥을 맞아들이는 부피에는 닿음새만이 지니는 믿음성이 있었다. 자꾸 쓸어보았다. 지난날, 은혜의 몸을 이렇게 쓸어보았다. 이 햇빛에 익은 나무처럼 따뜻하고, 그보다는 견줄 수 없이 미끄러운 물질이었다. 자기 손을 보았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더듬고, 무엇인가를 잡고 있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외로운 놈이었다.

희망의 뱃길, 새 삶의 길이 아닌가. 왜 이렇게 허전한가. 게다가 무라지와 늙은 뱃사람은 캘커타에서 술까지 살 것이다. 왜 이런가. 일어서서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배 꼬리에서 바닷물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어서는 뒤로 길다란 물이랑을 파간다. 거대한 새끼가 꼬이듯 틀어대는 물살은 잘 자란 힘살의 용솟음을 떠올렸다. 그때, 그 물거품 속에서 흰 덩어리가 쏜살같이 튀어나오면서, 그의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기겁하면서 비키려 했으나, 그보다 빨리, 물체는 그의 머리 위로 지나서, 뒤로 빠져 버렸다. 돌아다 봤다. 갈매기였다. 뱃고리 쪽에서 내려 꽂히기와 치솟기를 부려본 것이리라. 그들이었다. 배를 탄 이후 그를 괴롭히는 그림자는. 그들의 빠른 움직임 때문에, 어떤 인물이 자기를 엿보고 있다가, 뒤돌아보면 싹 숨고 마는 환각을 주어왔던 것이다. 그는 붙잡고 있는 난간에 이마를 기댔다. 머릿속이 환히 트이는 듯, 심한 현기증으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울컥 메스꺼웠다. 난간 밖으로 목을 내밀기가 바쁘게 희멀건 것이 저 아래 물이랑 속으로 떨어져갔다. 바다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 배설물의 낙하는 큰 바다에 침을 뱉은 것처럼 몹시 작은 느낌을 주는 광경이었다. 씁쓸한 군침이 입 안에 가득 괴었을 때, 한꺼번에 뱉아 버리고 돌아섰다. 여태까지 뱃멀미는 없었다. 배가 크고 날씨가 맑아서 여태까지 편한 바닷길이었다. 아직도 가시지 않는 아찔한 어질머리를 참으면서 갑판을 걸어갔다. 뱃사람이 보초를 섰던 자리쯤에서 다시 한 번 침을 뱉고 복도로 들어섰다. 뱃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나, 밖으로 향한 창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어서, 문간은 한결같이 컴컴했다.

자기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자기를 따라오던 그림자가 문간에 멈춰 섰다는 환각이 또 스쳤다.

박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양주병이 언뜻 보였다. 그는 팔을 뻗쳐 병을 잡으면서 돌아섰다. 흰 그림자가 쏜살같이 저만치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따라가면서 힘껏 병을 던졌다. 그림자는 멀리 사라지고 병은 문지방에 부딪혀서 박살이 되어, 깨어진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더 따라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고 선 박을 남겨놓고, 자리에 기어 올라가서 번듯 누웠다. 가슴이 활랑거린다. 손을 가슴에 얹었다. 풀무처럼 헐떡거린다. 망막에서는 포알처럼 튀어들던 바다새의 흰 부피가, 페인트를 쏟아부은 듯, 아직도 끈적거렸다. 벌떡 일어났다. 도로 누웠다. 다시 일어났다. 아무리 해도 편치 않았다. 누워서 쉬려던 생각을 버리고 방바닥에 내려섰다. 아직도 거기 서 있는 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할 듯이 다가섰으나 못 본 체 해 버리고 방을 나섰다. 좌우 문간에서 서성거리던 얼굴들이 한결같이 쑥 들어갔다. 곧장 선장실로 올라왔다. 선장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벽장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양이 보기 싫어서 저쪽을 보고 돌아앉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제 저녁 그를 덮친 당돌한 물음이 언뜻 살아났다. 뒤를 이어 배꼬리 쪽에서 쏜살같이 날아오던 흰 새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 그들이라? 그는 주먹을 들어 이마에 댔다. 머릿속은 오히려 말짱했다.

또 속이 올라왔다. 이를 악물고 쓴 침을 삼켰다. 갈갈. 갈매기 우는 소리가 났다. 날 듯이 창가로 달려가, 윗몸을 밖으로 내밀며 고개를 치켰다.

그들은 잠시 쉬려는 듯, 마스트에 매달려 있었다. 저것들 때문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갈갈, 께륵 께륵. 울음소리는 비웃는 듯 떨어져 온다. 그는 목이 아파서 고개를 돌렸다. 섬뜩한 짓을 한 이 불길한 새들. 허공을 한참 쳐다보던 눈이 찬장에 달린 거울에 멎었다. 눈에 살기가 있다. 찬장문을 연다. 오른편에 사냥총이 세워져 있다. 약실을 살펴봤다. 총알이 없다. 총알은 서랍 속에 있었다. 총알을 잰 다음, 잠금쇠를 풀었다. 사냥할 때에 지척에 있는 짐승에게 다가가는 포수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창에 이르렀다. 갈매기들은 아직 거기 있었다. 창틀에 등을 대고, 몸을 밖으로 젖히고, 총을 들어 어깨에 댔다. 하늘에 구름은 없었다. 창대처럼 꼿꼿한 마스트에 앉은 흰 새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마리 가운데 아래쪽, 가까운 데에 앉은 갈매기가 총구멍에 사뿐히 얹혀졌다.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그 흰 바다새는 진짜 총구 쪽을 향하여 떨어져 올 것이다. 그때 이상한 일이 눈에 띄었다. 그의 총구멍에 똑바로 겨눠져 얹혀진 새는 다른 한 마리의 반쯤 한 작은 새였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은혜가 한 말. 총공격이 다가선 줄 알면서도 두 사람은 다 어느 때하고 다르지 않았다. 사랑의 일이 끝나고, 그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저 ――." 깊은 우물 속에 내려가서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누구의 목소리 같지도 않은 깊은 울림이 있는 소리로 그녀가 불렀다. "응?" "저 ――." 명준은 그 목소리의 깊이에 몸이 굳어졌다. "뭔데, 응?" "저――." 그녀는 돌아누우면서 남자의 목을 끌어당겨 그 목소리처럼 깊숙이 남자의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남자의 귀에 대고 그 말을 속삭였다. "정말?" "아마." 명준은 일어나 앉아 여자의 배를 내려다봤다. 깊이 파인 배꼽 가득 땀이 괴어 있었다. 입술을 가져간다. 짭사한 바닷물 맛이다. '나 딸을 낳아요." 은혜는 징그럽게 기름진 배를 가진 여자였다. 날씬하고 탄탄하게 죄어진 무대 위의 모습을 보는 눈에는, 그녀의 벗은 몸은 늘 숨이 막혔다. 그 기름진 두께 밑에 이 짭사한 물의 바다가 있고, 거기서, 그들의 딸이라고 불릴 물고기 한 마리가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붙들어 자기 가슴으로 넘어뜨리면서, 남자의 뿌리를 잡아 자기의 하얀 기름진 기둥 사이의 배게 우거진 수풀 밑에 숨겨진, 깊은, 바다로 통하는 굴속으로 밀어 넣었다. "딸을 낳을 거예요. 어머니가 나는 딸이 첫 애기래요." 총구멍에 똑바로 겨눠져 얹혀진 새가 다른 한 마리의 반쯤 한 작은 새인 것을 알아보자 이명준은 그 새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작은 새하고 눈이 마주쳤다. 새는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눈이었다. 뱃길 내내 숨바꼭질해온 그 얼굴 없던 눈은, 그때 어미 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우리 애를 쏘지 마세요? 뺨에 댄 총몸이 부르르 떨었다. 총구에는 솜구름처럼 뭉실한 덩어리가 얹혔을 뿐. 마스트 언저리에 구름이 옮아 왔다.

망가진 기계가 헐떡이듯, 밖으로 나갔던 몸을 간신히 창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총을 내린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는 굵다란 진땀이 이마에 솟고, 볼따귀가 민망스럽게 푸들푸들 떨린다.

사람이 올라오는 기척에, 재빠르게 탄알을 뽑으면서 돌아서서, 벽장문을 열고, 먼저 있던 자리에 총을 놓았다. 벽장문을 닫고 돌아선 것과 거의 같이, 선장이 들어섰다.

가까운 사이에 흔히 그렇듯이, 선장은, 명준을 새삼 거들떠보는 일도 없이,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서, 해도 위에 몸을 굽혔다. 명준은, 낯빛을 감추려고 창문에 붙어선 채, 선장에게 등을 돌렸다. 해도 위에 캠퍼스 스치는 소리만 바스락댄다.

"미스터 리."

"네."

"인도에 가면 내 근사한 미인을 소개함세."

"미인을요."

"음, 내 조카야. 먼저 우리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그는 구부렸던 몸을 일으켜, 멍한 눈으로, 명준이 막아선 창문과 반대 창문으로 멀리 내다보았다. 곧 만나게 될, 가족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선장은 끝내 테이블에서 떨어져, 벽장 앞으로 가더니, 문을 열고, 사냥총을 꺼내들었다. 명준은 굳어졌다. 선장은 엽총을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먼젓번처럼, 명준에게 넘겼다. 명준은 총을 받아, 제대로 꼼꼼한 몸짓으로 어깨에 댔다. 그는 총대와 몸을 함께 핑그르 움직여, 바다를 겨냥했다. 총 끝이 가리키는 곳 멀리, 바다와 하늘이 아물락말락 닿고 있다. 바다를 쏠 것인가.

총몸을 받친 왼팔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그는 겨눔을 풀고, 총을 선장에게 돌려주고, 방을 나온다. 뱃간으로 간다. 방 안에 박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문간에는, 부서진 유리병 조각이 그대로 흩어져 있다. 마루에 널린 유리 조각을 밟는다. 유리는 구두 밑에서 짝짝, 소리를 낸다. 얼마를 그러니까, 더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방 안을 휘돌아본 후에, 또 갑판으로 나온다. 도무지 앉아야 할지 서야 할지, 허둥거려진다. 그는 선장실을 올려다본다. 또 그곳으로 갈 수도 없다. 캘커타에서 술을 산다던 늙은 뱃사람을 찾아볼까? 한참 걸어서 기관실로 간다. 거기에 그는 없다. 식당에 가 본다. 그곳에도 없다. 안타까워진다. 침실로 간다. 그의 자리는 비어 있고 몸이 불편한 모양인지, 젊은 뱃사람 하나가, 이마에 손을 얹고 누워 있다. 다시 갑판으로 돌아온다. 그 늙은이를 만나서는 어쩌자는 것인가. 그를 찾아 헤매는 일은 그만두기로 한다. 발길은 절로 뒷갑판, 그의 자리로 옮아간다. 그곳은, 여전히 언저리를 얼씬하는 사람의 기척도 없이 햇살만 창창하다. 손잡이틀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스크루가 파헤치는 물이랑을 본다. 아무리 보아도 지루하지 않다. 한참 보고 있으면, 물살의 움직임이 이쪽의 마음을 끌어당겨 그의 마음도 바다가 되어, 거기 물거품을 일으키면서, 물이랑을 파헤친다. 착각이 아니라, 확실한 평행 현상이 일어난다. 물결과 마음의 사이는, 차츰 가까워진다. 끝내 그의 몸과 물결은 하나가 된다. 그의 몸은 꿈틀거리는 물이랑을 따라, 곤두박질한다. 꼬이고 풀리는 물결 속에 그의 몸뚱어리가 풀려나간다. 그의 몸은 친친 막아놓은 밧줄처럼, 배에 얹힌 대로지만, 스크루의 물거품처럼, 술술 풀려나가서는, 말간 바닷물이 된다. 몸의 세포가 낱낱이 흩어져, 세포 알알이 물방울과 어울려 튄다.

자꾸 뒤로 뽑아내는 물이랑은, 이윽고, 크낙한 바다의 무게 속에, 가라앉아 버린다.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바다의 이물심은 견줄 데 없이 세다. 그는 상처를 줄 수 없는 불가사리다. 그 속에 파묻힌다. 자꾸 몸이 풀린다.

꼬꾸라질 듯 앞으로 숙인 몸을, 황망히 끌어들인다. 손잡이에서 떨어져, 갑판에 주저앉는다. 눈에서는 아직도, 소용돌이쳐 뻗어나는 물결의 그림자가 아물거린다. 그것마저 사라져 버렸을 때 막막한 그림자가 등에 업혀온다. 또 일어서서, 손잡이를 잡는다.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든지 바라보면서, 자기 안에 있는 빈 데를 메우지 않으면, 금방 쓰러져 버릴 것 같다. 얼마를 그러고 있다가 또 뱃간으로 돌아온다. 방은 아까처럼 비어 있다.

자기 자리로 올라간다. 자려고 해서가 아니다. 그저 찾는 것도 없이, 머리맡을 어물어물 더듬는다. 손에 딱딱한 물건이 잡힌다. 부채다. 문간에서 기척이 난다.

얼른 돌아다 보았으나, 아무도 나타나지는 않는다. 되도록 천천히 다락에서 내려와, 마루에 내려선다. 무슨 할 일이 없는가 찾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린다. 방 안에 새삼스레 그의 주의를 끌 만한 것은 없다. 발끝으로 살살 밀어서 유리 조각을 한곳에 모으고, 꽉 밟는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더 힘있게 밟는다. 그만한 힘으로 발바닥을 올려 밀 뿐, 유리는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진 모양인지, 꿈쩍도 않는다.

복도로 나선다. 복도에도 인기척은 없다. 선장실로 올라간다. 선장은 없다. 벽장문을 연다. 총이 제자리에 세워져 있다. 벽장문을 닫는다. 서랍을 열고, 아까 선장이 들어오는 바람에 미처 돌려놓지 못한 총알을 제자리에 놓는다.(이전 장면에서 선장 몰래 총을 만졌음을 알 수 있음.) 몹시 중요한 일을 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해진다. 테이블로 가서 해도를 들여다 본다. 이 배가 밟아 온 자국이 연필로 그려져 있다. 선장이 하는 것처럼 컴퍼스를 손가락으로 꼬나잡고, 해도 위를 재보는 시늉을 한다. 한참 장난을 하다가 컴퍼스를 던져 버린다. 그때 여태까지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안다.

아까, 침대에서 손에 잡힌 대로, 들고 온 것이다. 의자에 걸터앉아서 부채(명준의 삶의 과정과 운명을 상징하는 소재)를 쭉 편다. 바다가 있고, 갈매기가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다가, 스르르 눈을 감는다. 머릿속으로 허허한 벌판이 끝없이 열리며, 희미한 모습이 해돋이처럼 차츰 떠올라온다.(해도에 배의 행적이 그려져 있는 것처럼, 명준은 마치 부채에 자신의 삶이 그려져 있다고 여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펼쳐진 부채가 있다.(과거 회상의 시작) 부채의 끝 넓은 테두리 쪽을, 철학과 학생 이명준이 걸어간다. 가을이다. 겨드랑이에 낀 대학신문을 꺼내 들여다본다. 약간 자랑스러운 듯이. 여자를 깔보지는 않아도, 알 수 없는 동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책을 모으고, 미이라를 구경하러 다닌다.

정치는 경멸하고 있다. 그 경멸이 실은 강한 관심과 아버지 일(해방 직후 남한의 혼란스럽고 부패한 정치에 대한 비판 의식과 아버지의 월북) 때문에 그런 모양으로 나타난 것인 줄은 알고 있다. 다음에, 부채의 안쪽 좀더 좁은 너비에(월북하던 때), 바다가 보이는 분지가 있다. 거기서 보면 갈매기가 날고 있다. 윤애에게 말하고 있다. 윤애 날 믿어 줘. 알몸으로 날 믿어 줘. 고기 썩는 냄새가 역한 배 안에서 물결에 흔들리다가 깜빡 잠든 사이에, 유토피아의 꿈(월북의 이유)을 꾸고 있는 그 자신이 있다. 조선인 콜호스(소련의 집단 농장. 모든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고 협동조합 형식에 의하여 농민이 집단 경영을 행하였으며, 각자의 노동에 따라 수익을 분배함) 숙소의 창에서 불타는 저녁놀의 힘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는 그도 있다. 구겨진 바바리코트 속에 시래기처럼 바랜 심장을 안고(북한의 실상에 절망한 심정을 비유) 은혜가 기다리는 하숙으로 돌아가고 있는 9월의 어느 저녁이 있다. 도어에 뒤통수를 부딪히면서 악마도 되지 못한 자기를 언제까지나 웃고 있는 그가 있다.(북한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비웃음) 그의 삶의 터는 부채꼴, 넓은 데서 점점 안으로 오므라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은혜와 둘이 안고 뒹굴던 동굴이 그 부채꼴 위에 있다.(전쟁중에 은혜와 재회한 상황)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어디선가 그런 소리도 들렸다.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에 서 있다.(과거 회상이 끝나고 현재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인식으로 전환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의 삶이 중립국행을 선택하게 했지만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음. 사북자리는 명준의 삶이 한계상황에까지 몰려왔음과 그러한 현실에서 인식의 전환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함.) 삶의 광장은 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찾지 못한 결과임. 자신이 존재할 공간이 없음을 인식함) 자 이제는? 모르는 나라, 아무도 자기를 알 리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전혀 새사람이 되기 위해 이 배를 탔다. 사람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 될 터이었다. 다만 한 가지만 없었다면.(명준의 의식이 전환됨.)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죽은 은혜),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명준이 과거의 모든 것을 잊으려 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가진 채 죽은 은혜와의 사랑은 잊을 수 없음을 깨달음.)

돌아서서 마스트(돛대)를 올려다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친 그는 지금 핑그르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바다는 명준이 그동안 찾으려고 했던 이상적 공간을 상징한다. 즉 사랑과 자유라는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이 공존하는 이상적 세계의 의미를 지닌다.)이 거기 있다.

자기가 무엇에 홀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 넉넉한 뱃길에 여태껏 알아보지 못하고, 숨바꼭질 하고, 피하려 하고 총으로 쏘려고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무엇에 씌었던 게 틀림없다. 큰일날 뻔했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 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되돌아 오면서, 그렇다고 한다.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은혜와 딸, 두 마리의 새),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옛날, 어느 벌판에서 겪은 신내림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자, 언젠가 전에, 이렇게 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벌판을 지금처럼 떠올린 일이, 그리고 딸을 부르던 일이, 이렇게 마음이 놓이던 일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활짝 웃고 있다.(명준은 자신이 바다에 빠져 죽음으로써 새로운 세계에서 은혜와 딸을 만나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명준의 웃음은 자신이 추구하던 '사랑과 자유가 충만한 광장'을 발견한 데서 오는 기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밤중.

선장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른 손목에 찬 야광시계를 보았다. 마카오에 닿자면 아직 일렀다.

"무슨 일이야?"

"석방자가 한 사람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응?"

"지금 같은 방에 있는 사람이 신고해 와서, 인원을 파악해 봤습니다만, 배 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선장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물었다.

"누구야 없다는 게?"

"미스터 리 말입니다."

 

이튿날.

타고르 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한 사람의 손님을 잃어버린 채 물체처럼 빼곡이 들어찬 남중국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간다.

흰 바다새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마스트에도. 그 언저리 바다에도.

아마, 마카오에서,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끝)

-『새벽』(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