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일락서산(1972)                   -이문구-

시골을 다녀오되 성묘가 목적이기는 근년으로 드문 일이었다. 더욱이 양력 정초에 몸소 그런 예모( 禮貌, 예절을 갖추는 모양)를 찾고 치름은 낳고 첫 겪음(체험)이기도 했다. 물론 귀성(객지에서 고향으로 가는 것) 열차를 끊어 앉고부터 "숭헌(흉한) …… 뉘라 양력슬두 슬이라 이른다더냐, 상것들이나 왜놈 세력(歲曆, 달력)을 아는 벱여 ……," 세모(한 해가 저물 무렵)가 되면 한두 군데서 들어오던 세찬(歲饌, 명절 음식)을 놓고 으레껏 꾸중이시던 할아버지 말씀이 자주 되살아나 마음 한켠이 걸리지 않은 바도 아니었지만, 시절이 이러매 신정 연휴를 빌미할 수밖에 없음을 달리 어쩌랴 하며 견딘 거였다(서울생활을 하느라 성묘도 제대로 가지 못하다가 모처럼 신정 연휴 기간을 이용해 내려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드러냄). 그러나 할아버지한테 결례(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을 나 자신에게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가문을 지킨 모든 선인 조상들의 심상은 오로지 단 한 분, 할아버지 그분의 인상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그리워해 온 선대인(先代人, 조상)은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동기간들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색창연(퍽 오래되어 예스러운 정감과 운치가 그윽함)한 이조인(李朝人)이었던 할아버지, 오직 그분 한 분만이 진실로 육친이요 조상의 얼이란 느낌을 지워 버릴 수 없는 거였고, 또 앞으로도 길래(길게, 오래도록) 그럴 것같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받은 사랑이며 가는 정으로야 어찌 어머니 위에 다시 있다 감히 장담할 수 있을까마는, 그럼에도 삼가 할아버지 한 분만으로 조상의 넋을 가늠하되, 당신 생전에 받은 가르침이야말로 진실로 받들고 싶도록 값지게 여겨지는 터임에, 거듭 할아버지의 존재와 추억의 조각들을 모든 것의 으뜸으로 믿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1) 나는 모처럼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다.

초사흗날, 기중 붐비지 않을 듯 싶던 열차로 가려 탄 것이 불찰(잘 살피지 않은 잘못이나 실수)이라 하게 피곤하고도 고달픈 고향길이었다. 한내읍에 닿았을 때는 이미 세 시도 겨워 머잖아 해거름(해가 질 무렵)을 만나게 될 그런 어름(두 물건이 맞닿은 자리)이었다. 열차가 한내읍 머리맡이기도 한 갈머리[冠村部落] 모퉁이를 돌아설 즈음엔 차창에 빗방울까지 그어지고 있었다. 예년에 없던 푹한 날씨기에 눈을 비로 뿌리던 모양이었다. 겨울비를 맞으며 고향을 찾아보기도 난생 처음인데다 정두고 떠났던 옛 산이 돌아보이자, 나는 설레이기 시작한 가슴을 부접할(의지할) 길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두 눈을 지릅뜨고(부릅뜨고) 빗발무늬가 잦아가던 창가에 서서, 뒷동산 부엉재를 감싸며 돌아가는 갈머리부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이 들뜬 것과는 별도로 정말 썰렁하고 울적한 기분이었다.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 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 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

그 중에서도 맨 먼저 가슴을 후려친 것은 왕소나무가 사라져 버린 사실이었다. 분명 왕소나무가 서 있던 거리엔 외양간만한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 굴뚝만이 꼴불견으로 뻗질러 서 있던 것이다.

그 왕소나무 잎새에 누렁물이 들고 가지에 삭정이(말라 죽은 작은 가지)가 끼는 거 보며 고향을 뜨고 13년 만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긴 했지만, 언제 베어다 켜 썼는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현장을 목격하니 오장(五臟)에서 부레(물고기 뱃속에 있는 공기 주머니, 여기서는 화를 뜻함.)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4백여 년에 걸친 그 허구헌 풍상(모진 시련과 고난)을 다 부대껴 내고도 어느 솔보다 푸르던, 십장생(十長生, 해, 산, 물, 돌, 구름, 솔,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의 으뜸다운 풍모로 마을을 지켜 온 왕소나무가 아니었던가. 내가 일곱 살 나 천자문을 떼고 책씻이(책 한 권을 다 공부한 것을 자축하는 풍습. 책걸이)도 마친 어느 여름날 해 설핀(설핏하다 = 해가 져서 밝은 빛이 약하다) 석양으로 잊지 않고 있지만, 나는 갯가 제방둑까지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와 온 마을을 쓸어삼킬 듯이 쳐들어오던 바다 밀물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댕기물떼새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석양놀에 가득 떠 있던 눈부신 바다를 구경했던 것이다. 방파제 곁으로 장항선 철로가 끝간 데 없고, 철로와 나란히 자갈마다 뽀얀 신작로는 모퉁이를 돌았는데, 그 왕소나무는 철로와 신작로가 가장 가까이로 다가선, 잡목 한 그루 없이 잔디만 펼쳐진 펑퍼짐한 버덩(높고 편편하고 나무가 없는 풀만 난 땅) 위에서 4백여 년이나 버티어 왔던 것이다.

그날 할아버지는 장정 두 팔로 꼭 네 아름이라던 왕소나무 밑둥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면서,

"이애야, 이 왕솔은 토정(土亭 ― 李之함) 할아버지께서 짚고 가시던 지팽이를 꽂어 놓셨는디 이냥 자란 게란다. 그쩍에 그 할아버지 말씜은, 요 지팽이 앞으루 철마(기차)가 지나가거들랑 우리 한산 이씨 자손들은 이 고을에서 뜨야 허리라구 하셨다는 게여……, 그 말씜을 새겨들어 진작 타관살이를 했더라면 요로큼 모진 시상은 안 만났을지두 모르는 것을……."
하던 말을 나는 여지껏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왕소나무의 내력에 대해서 최초로 들은 지식이었다.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왕소나무로 되다니. 토정이 이인(異人, 비범한 사람)이며 기행(奇行, 기이한 행동)이 많았다던 것은 토정비결을 보는 자리 옆에서 이따금 들었으므로, 할아버지가 외경(畏敬)스러워하던 모습이나 개탄(慨歎)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듯도 했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런 구전된 전설 따위는 곧이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 왕소나무는 군내에선 겨룰 데가 없던 백수(百樹, 온갖 나무)의 우두머리였고, 그 나무는 이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나는 우리 가문의 선조 한 분이 그토록 우려하고 경계했다던, 그러나 이미 40여 년 전부터 장항선 철로를 핥아 온 철마를 탄 몸으로 창가에 서서, 지호지간(指呼之間, 손짓으로 부를 만한 가까운 거리)의 그 유적지를 비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완전히 타락한 동네구나 ―― 나는 은연중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마을의 주인(왕소나무)이 세상 뜬 지 오래라니 오죽해졌으랴 싶기도 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더욱이 피서지로 한몫해 온 탓에, 해수욕장이 개장된 여름이면 밤낮 기적 소리가 잘 틈 없던 철롯가에 서서, 그 숱한 소음과 매연을 마시다 지쳐, 영물(靈物, 영험스러운 생물 혹은 물건)의 예우도 내던지고 고사(枯死, 나무나 풀이 말라 죽음)해 버린 왕소나무의 운명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가슴이 쓰리고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왕소나무의 비운(悲運)에 대한 조상(弔喪, 죽음을 애도함)만으로 비감(悲感)에 젖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

사실이 그랬다. 내가 살았던 옛집의 추레한 주제꼴에 한결 더 가슴이 미어지는 비감으로 뼈저려하고 있었으니까. 비록 얼핏 지나치는 차창 너머로 눈결에 온 것이긴 했지만, 간살(일정한 규격으로 건물을 둘러막은 공간. 간사리)이 넉넉한 열다섯 간짜리 꽃패집의 풍채는커녕, 읍내 어디서라도 갈머리 쪽을 바라볼 적마다 온 마을의 종가(宗家)나 되는 양 한눈에 알겠던 집이 그렇게 변모할 수가 있을까 싶던 것이다.

그것은 왕소나무의 비운 버금으로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었다. 이제는 가로세로 들쑹날쑹, 꼴값하는 난봉난(허랑하고 방탕해진) 집들이 들어서며 마을을 어질러 놓아, 겨우 초가 안채 용마루(지붕 가운데 있는 수평 마루)만이 그럴 듯할 뿐이었으며, 좌우에서 하늘자락을 치켜들며 함석지붕 날개와 담장을 뒤덮었던 담쟁이덩굴, 사철 푸르게 밭마당의 방풍림으로 늘어섰던 들충나무(사철나무)의 가지런한 맵시 따위는 찾아볼 엄두도 못 내게 구차스런(살림이 몹시 가난한) 동네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실향민. 나는 어느덧 실향민이 돼 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덜어 버릴 수가 없었다. 고향이랬자 무덤[묘(墓)]들밖에 남겨 둔 게 없던 터라 어차피 무심하게 여겨 온 셈이긴 했지만, 막상 퇴락해 버린 고향 풍경을 대하니, 나 자신이 그토록 처연하고(쓸쓸하고 구슬프다) 헙헙하며(헛헛하며, 채워지지 아니한 허전한 마음이 있다) 외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2) 동네 어귀의 왕소나무가 없어진 것을 보고 옛 모습이 사라진 고향의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나는 맨 먼저 할아버지 산소부터 성묘를 해야 예의라고 믿고 있었다. 할아버지 산소는 한내에서 40여 리 바깥 고만(高巒)이란 갯마을 연해의 종산(宗山. 풍수설에서 '주산 위에 있는 주산'을 이르는 말.  주산이란 집터,  묏자리, 도읍 터 등의 뒤쪽에 위치하고, 거기서 좌청룡 우백호가 갈려 나온, 주가 되는 산) 한기슭에 외따로 모셔져 있었다. 하루 한 차례의 버스편마저 없는 곳이라 천상 걷기로만 해야 하되 오며가며 한 대도 하룻길로는 벅찬 곳. 도착한 날은 도리없이 읍내에서 묵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었다. 비록 고향을 등진 지는 오래였지만, 며칠쯤 묵는대서 흉허물이 될 집은 없었다. 나는 읍내 군청 관사에 살고 있던 외척(외가쪽의 친척)을 찾아 유숙처(머물러 하룻밤 묵는 곳)로 내정했다. 그런 뒤로 해전(해가 지기 전)을 뜻 없이 보낼 일이 따분하여 갈머리를 찾기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뛰놀며 성장했던 옛 터전들을 두루 살피되, 그 시절의 정경과 오늘에 이른 안부를 알고 싶은 순수한 충동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 계기였다. 비단 엉뚱하고 생소하게 변해 버려 옛 정경, 그 태깔은 찾을 길이 없다더라도 나는 반드시 둘러보고, 변했으면 변한 모양새만이라도 다시 한번 눈여겨 둠으로써, 몸은 비록 타관을 떠돌며 세월할지라도 마음만은 고향 잃은 설움을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역전거리로 나서자마자 비닐우산부터 장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두둑 우두둑 우산 위에서 들린 빗낱 듣던 소리는, 점심마저 굶어 허당(땅바닥이 갑자기 움푹 패어 빠지기 쉬운 땅)이 된 가슴속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분명한 가락으로 두들겨 주고 있었다(변한 고향의 모습에 서글퍼지는 심리적 동요를 나타냄).

갈머리는 일테면 한내읍 교외로서 읍내 복판에서 보통 걸음으로 10분이면 닿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마을 동구 앞에는 조갑지('조개'의 충청도 방언) 같은 초가 세 채가 신작로를 가운데로 하여 따로 떨어져 있었다. 한 채는 눈깔사탕이며 엿과 성냥을 팔던 송방(松房, 다른 지방에 있는 개성 사람의 포목점)으로 불린 구멍가게였고, 주인은 술장수 퇴물인 채 씨 부부였다. 그 맞은편 집은 사철 풀무질(풀무로 바람을 내보내는 짓, 풀무는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 풍무)이 바쁘던 원애꾸네 대장간이었으며, 그 옆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던, 대낮에도 볕살이 추녀 끝에서만 맴돌다가 어둡던 옴팡집(옴땅간. 방 하나와 부엌 하나만 있는 아주 작고 초라한 집)은 장중철이네가 차린 주막이었다. 부엌은 도가술(양조장에서 만든 술)에 물 타서 느루(한번에 몰아치지 않고 길게 늘여서 하는 모양) 팔던 술청이었고, 손바닥만하던 명색 마당 귀퉁이는 이발 기계와 면도 하나로 깎고 도스리던, 장에 가는 장꾼들만 바라보던 무허가 노천 이발소였다. 주막과 대장간 어중간에는 사철 시커멓게 그슬린 드럼통 솥이 걸리어 있어, 장날마다 싸잡이(규격이나 품질 따위를 가리지 않고 여럿을 함께 뭉뚱그린 물건) 나무를 때어 끓이면서 장으로 들어가는 옷가지나 바랜 이불잇 따위를 염색하던, 검정 염색터가 전봇대 밑에 웅크리고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한 가지도 그전 그 모습대로 남아 있지 않다. 송방은 헐고 새로 이은 밝고 시원한 이발소로 변해 처마에 '관촌 이발관'이라는 문짝만한 간판이 올라 있었고, 원애꾸네 대장간 자리에도 붉은 기와의 오죽잖은(변변치 못하다) 블록집이 대신 들어서 있는데, 아마 초등학교 선생이나 군청 계장쯤 된 사람이 사는 살림집인 것 같았다. 장중철이네 움막도 지붕을 슬레이트로 개량했고, 판자 울타리는 시퍼런 페인트를 발랐던 시늉만 낸 채로 '반공 방첩' 표찰과 분식 장려 담화문이 붙어 있었으며, 곁들여 인두판만큼 기름하고 좁은 널빤지에 되다 만 먹글씨로 '천일 양조장 제13구역 탁주 위탁 판매소'라는 상호를 내걸고 있었다. 이발관 유리창을 뚫고 나온 난로 함석 연통에서는 보얀 연탄 가스가 끓는 소댕(솥뚜껑)에 김 서리듯 부실거리고, 낯선 얼굴 두엇이 무심찮은 눈으로 나를 살펴보며 서성거리고 있었으나, 내가 알아볼 만한 얼굴은 단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온 동네를 바깥 마당으로 여기며 18년 동안이나 산 토박이가 이토록 나그네 같은 서툰 몸짓밖에 취할 수 없단 말인가(고향을 떠난 후 오랜 세월이 흐른 까닭에 아는 사람도 없고, 마을 집들도 달라져 낯선 느낌을 가지게 된 것에 안타까워 함). 진실로 서글픈 일이었다.

나는 이윽고 신작로가 나뉘면서 검붉은 황토를 드러낸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섰다. 몇 걸음 안 가서 이내 과수원이 나왔다. 이제 과수원 탱자나무 울타리 곱은탱이(굽이진 길모퉁이)만 돌아가면 철철이 선대의 손길이 닳아지고, 사변 이듬해부터는 여러 가지 푸성귀와 그루갈이를 내 손으로 직접 거두어 먹다가 집과 함께 모개흥정(한데 몰아서 흥정하는 일)으로 처분하고 떠났던, 팔백여 평의 터앝(꽃이나 나무를 심을 만한 집 울안에 있는 작은 터)이 나타날 숨가쁜 길목이었다. 내린 비로 터지게 얼었던 거죽이 풀린 길은 해토(解土)머리(언 땅이 풀릴 때)가 다 된 것이나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질었다. 그러나 옛 길을 되찾았다는 감상 따위는 우러나지 않았다. 소나기가 두어 줄금만 내려도 산에서 쏟히는 맑은 물이 흐르던 길가의 개랑은 수채만이나 하게 좁아진 반면, 그 구거지(溝渠地. 개골창. 도랑. 개랑)에는 지질한 블록집들이 잇대어 서 있어, 등산객의 걸음이 잦은 서울 교외의 외진 동네와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끝나면서부터는 바로 그 터앝머리였다. 나는 마음이 바빠 다그친 걸음으로 보리싹이 푸릇거리는 밭두둑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찰나, 가슴을 냅다 쥐어질린(주먹으로 냅다 지르다) 충격과 함께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지팡이에 굽은 허리를 의지한 할아버지가 당신의 헛묘[假墳墓,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둔 분묘]를 굽어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항용(늘, 항상) 아끼시던 마가목(능금나무과의 낙엽 교목. 산에서 자라며 열매는 둥글고 익으면 붉은 색을 띰.)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는 역시 탕건(갓 아래 받쳐 쓰는 관)으로 망건을 받쳐 쓰고, 공단 마고자 아래 허리춤에서는 안경집이 대롱거렸으며, 허연 수염을 바람결에 날리면서 구부정하게 서 있음이 처연하였다(쓸쓸하고 구슬프다).

한참 만에야 순간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잃어버린 지난날의 한 시절을 되살려 낸 착각으로 그렇게 오두망절(우두망찰의 방언. 정신이 얼떨떨하여 어찌할 바를 모름)하고 서 있은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깊은 한숨을 끄면서 칠성바위 쪽으로 다가갔던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 순간적인 환각이었으나 소년 시절에는 너무도 자주, 일상으로 목격하여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도록, 그 할아버지 아니면 아무도 시늉할 수 없을, 그분의 인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던 사실이었다.

나는 칠성바위 중 맨 고섶(물건을 두는 곳이나 그릇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맨 앞쪽)에 있고, 참외를 따거나 수수목을 찔 때 흔히 올라 앉아 쉬었던, 네모가 뚜렷한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빗낱은 계속 성깃성깃하게 흩뿌리며 비닐우산을 투덕거렸고, 암컷처럼 패인 부엉재 고랑 아래 잔솔밭(잔솔이 많은 곳) 밑 두어 채 초가 굴뚝에서는 저녁 청솔가지 연기가 비거스렁이(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지는 일)에 눌려 안개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앉자마자 칠성바위들의 안부를 하나하나 살펴 가기 시작했다. 조금도 요동시킬 수 없이 생긴 바위라서일까. 태고로부터 북두칠성과 똑같은 위치로 배치되어 앉았던 일곱 덩이의 바위는, 한결같이 옛날 그대로 제 자리들을 지키고 있었다. 동네 조무라기들이 그 중 자주 오르내렸던 길가에 나앉은 막내둥이의 지프 같던 모습도 여전했으며, 댓 걸음 곁의 두꺼비 바위도 그 자리에 직수굿하게(꺾여 대들지 �方� 다소곳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범이 누운 형상의 세 번째 바위 역시 엉성해진 덤불을 들러리로 한 채 그 위엄스런 풍모를 타고난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눈발이 히뜩대면 곧잘 콩새와 굴뚝새들이 날아들어 푸득대던 덤불도 새 밭 임자의 연장에 어지간히 시달렸으련만, 두 그루의 옻나무와 찔레덩굴, 그리고 까치밥과 개다래 넌출(넝쿨)이 어우러져 여전히 멧새들을 부르고 있었다.

바로 범바위 밑에 쓰였던 할아버지의 헛묘가 언제부터 그토록 묘갈(墓碣, 묘 앞의 작은 비석)과 봉분(封墳, 흙을 올려 덮어서 무덤을 만든 곳)의 잔디결도 곱게 다듬어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신후(身後, 죽은 뒤)로, 궤연상(机筵床, 죽은 이의 혼백이나 신주를 모셔 두는 상)에 차린 음식으로 조석 상식(궤연상에 차려 올리는 음식)을 올리면 뭘 하며, 초하루 보름에 삭망 차례(삭망전, 초하루와 보름에 드리는 제사)를 드린들 무슨 소용이랴고, 그 일이야말로 생전에 찾고 갖출 일이라 하여 15년 전부터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누구 생일 잔치보다도 더 푸짐하게 진짓상을 올리게 했던 아버지보다 앞서, 앞일이 다가오는 것을 내다본 할아버지 당신 스스로가 서둘러 만든 헛묘였으며, 평생 주초(酒草, 술과 담배)뿐 아니라 바둑 장기 같은 조용한 잡기(雜技)마저 몰랐던 할아버지가 해 길어 무료함에 지치던 봄날이면, 지팡이를 의지해 홀로 칠성바위에 나섰고, 구부정한 허리를 두들기면서 장차 당신이 영원히 누울 유택(幽宅, 무덤)을 보살피며, 쥐구멍이나 잡초가 자리를 못 잡도록 가다듬은 다음,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보곤 하던 모습만을 자주 발견하고, 어린 소견에도 숙연해진 마음으로 발걸음이 무거워지던 것만은, 이십 수삼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선명한 기억으로 간직해 왔던 것이다.

3) 할아버지의 묘 앞 칠성바위에 앉아 할아버지를 회상한다.

그 무렵 칠성바위 언저리와 밭 가장자리에는 새봄마다 지장풀이 잘 되었고, 특히 할아버지의 헛묘 묘갈과 봉분에는 달짝지근하게 배동(이삭이 패려고 대가 불룩해지는 현상) 오른 삘기(띠의 어린 새순으로, 먹기도 함)가 많아, 햇살 긴 마른 봄날이면 얼굴을 새까맣게 태워 가며 소꿉장난으로 긴 해를 저물리곤 했었다. 그럴 적이면 할아버지도 지팡이를 앞세워 칠성바위로 나왔고, 질경이와 광대나물이 흔하던 바위 앞 보리밭에서 남보다 몇 갑절씩 들나물을 잘 뜯던 망아지만한 옹점이도, 부살같이(매우 빠르게) 손칼을 놀려 대며 나물바구니를 채워 가곤 했었다.

옹점이는 마음씨가 너그럽고 착한 아이였다. 그녀는 3천 석의 지주이며 한말에 중추원(고려와 조선때,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 군기 등을 맡아보던 관청)의 의관을 지내다가 인접 동네 달밭[月田里]으로 낙향하여 살았던 외가의 행랑아범 딸로, 어머니의 신행(혼인해서 신부가 신랑집에 가는 것)에 교전비(지난날, 혼례 때 신부를 따라가던 계집종)로 왔던 아이가 얼마 안 있어서 황아장수(지난날, 온갖 잡화를 등에 지고 팔러 다니던 장수)에게 묻어가자 이를테면 그 보충역으로 오게 된 아이였는데, 술장수의 데림추(주견없이 남에게 끌려다니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로 붙어다녔던 이매(二梅)라는 화류계(기생 따위의 노는 계집의 사회) 퇴물이 행랑아범과 좋아 지내다가 일이 급해 어느 옹기점의 독 틈에서 낳았다 하여 이름이 옹점이라는 것이었다. 옹점이가 우리집으로 들어온 것은 그녀 나이 일곱 살 때였다고 했다. 어머니가 친정에 갔다가, 외가 부엌에서 아기 동자아치(부엌일을 맡아 하는 여자 하인)로 자라던 것을 안저지(지난날, 어린아이를 안아 주며 보살피는 여자 하인을 이르던 말) 겸 허드레 심부름용으로 데려와서 길렀다는 거였다. 마음씨갈(마음을 쓰는 태도나 바탕)은 비단결같이 고운 데다 손속(노름판에서 쓰는 말로 손덕, 수덕이라 함)이 좋고 눈썰미가 뛰어나며, 인정과 동정심이 많은 점에서 어머니는 노상 쓸 만한 아이라고 추어 주었다. 때문에 그녀는 동네에 떠들어온 모든 비렁뱅이와 동냥중, 그리고 나병환자들한테 인기가 있었고, 우리집에 와서 살던 머슴들은 그녀의 마음씨 녹아 자진하여 부엌일까지 옙들이(거들거나 도움) 해주며 도우려고 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녀 일을 흉내내어 나를 자주 웃겼던 것도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맨 처음 그녀를 다잡아 가면서 안팎 범절과 행실을 가르치고 다스린 이도 할아버지였다. 본디 사람 보는 눈이 달랐던 할아버지는 그녀를 보자 대뜸 싹이 있겠다고 판단하여 나이부터 물었었다.

"그래 너는 몇 살이나 되었다더냐?"

그러자 그녀는 아무 어렴성 없이 아는 대로 대꾸했다.

"지 에미가 그러는디 제년이 작년까장은 제우 여섯 살이었대유. 그런디 시방은 잘 몰르것유."

"늬가 늬 나이를 모른다 허느냐?"

"예. 워떤 이는 하나 늘어서 일곱 살이라구 허던디 또 누구는 하나 먹었응께 다섯 살이라구 허거던유."

"페엥 ―― 그래 늬 에민가 작것인가는 요새두 더러 보이더냐?"

"접때 달밭 대감댁(외가)에 왔는디 봉께, 유똥치마(실크 본견으로 만든 치마)를 입구, 머리는 힛사시까미(앞머리를 쑥 내밀게 묶어 빗은 머리 모양을 가리키는 일본말)를 허구, 근사헌 우데마끼(손목시계)두 차구 …… 여간 하이칼라(취향이 새롭거나 서양식 유행을 따르는 사람)가 아니던디유."

"그래 그것은 시방두 장(늘) 술고래라더냐?"

"그리기 접때두 취해서 �p 애비허구 다투다가 고쟁이 바람으로 �X겨났었유."

"패엥 ―― 숭헌 ……."

할아버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철부지하고 이러니저러니 하기 싱거워서가 아니었다. 굴지(屈指, 여럿 가운데서 손가락을 꼽아 헤아릴 만큼 뛰어남)의 지주였던 탓에 온갖 잡기와 유흥에만 몰두했던 나의 외숙한테 '대감'이라는 칭호를 썼기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을 말버릇이었지만 할아버지 앞에서는 무엄한 말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잘 참았다.

"그래 늬 이��은 무엇이라 부르더냐?"

"먼젓것인디유."

"먼젓것이라 …… 아직 이��이 �쨈囑� 말이렸다."

"……"

"늬 에미가 너를 즘촌(店村―질그릇 굽는 마을) 옹기 틈목에서 풀었다더구나 ……. 오날버텀 이��을 옹젬(甕點)이라 허거라. 옹젬이가 무던허겄구나."

할아버지는 그렇게 즉흥적인 작명을 했는데, 호적부에도 그대로 올라갔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옹점이는 어른 앞에서는 소견이 넓었고 아이들에게는 남달리 인정이 많았다. 그릇을 잘 깨는 덜렁쇠였고 참새 못잖던 수다쟁이이기도 했다. 나물 바구니가 차도록 헛묘 앞에서 떠날 줄 모르던 할아버지를 볼 적마다 그녀는 그녀 깜냥(일을 가늠해보아 해 낼 만한 능력)대로 집에 들어오면 으레껏 나물 바구니를 뜰팡(토방의 방언)에 내던지며,

"아씨, 나리만님두 봄을 타셔서 심난 허신개비데유."

그 큰 목통으로 떠들어 댔던 것이다.

"저것 …… 저 방정머리는 원제나 철들어 고쳐질거나. 쯧쯧쯧 ……."
하며, 어머니는 그 수선에 혹시 어디 나들이하셨다가 낙상이라도 했단 말인가 싶어 꾸리고 있던 반짇고리를 밀쳐 놓게 마련이었다.

"나리만님은 당신 헛뫼 써 둔 것이 �� 걸리시는 모냥이던디유."

"너는 그만 좀 나서라."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게 바구리 것은 뭐라는 게냐?"

그것이 사랑에서 즐겨 찾는 국거리인 줄 번연히(환히) 알면서도 짐짓(일부러) 그렇게 묻는 거였다.

"나리만님 즐겨 허시는 나숭개(냉이) 허구 소리쟁이(마디풀과의 다년초로 잎은 먹을 수 있고, 뿌리는 한방에서 건위제로 씀)유 …… 참 해두 오라지게(고약하게) 질다 …… 쌍고동 울어울어 연락선은 떠난다아 ……."

그녀는 귀동냥하여 남은 콧노래를 불러 가며 아궁이 앞에서 나물 다듬기를 시작한다. 나이보다 숙성했던 그녀는 그때 이미 사춘기에 들어 있은 모양이었다.

"반�x생(반평생)을 �遮�(명당), �遮� 허셨는디, 터앝머리에 그런 자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또박 십여 년이나 산을 �g어댕기셨으니 여북허시겄네."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정말 할아버지는 자신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 볼 줄 안다던 지관(地官, 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 따위를 가려잡는 사람)이란 지관은 모조리 수소문하여 불러 모았고, 지관을 앞세워 놓고 먼 산 가림 없이 허다한 산을 뒤졌더라고 했다. 갈머리에서 읍내를 질러 건너다뵈는 성주산 옥마봉을 비롯, 청라 오서산, 공주 계룡산, 그리고 당신의 선조인 토정[이지함], 명곡[이산보], 성암[이지번] 삼숙질의 유택이 이웃한, 토정 자신이 찾아내어 스스로 무덤을 만듦으로써 종산(宗山)이 된 주포면 고만과 훨씬 선조인 목은[이색]을 모신 한산면의 여러 야산들까지도 두루 살펴보았지만, 결국 자신의 가분묘를 써 둘 만한 자리는 당신이 쓰는 사랑에서 가만히 불러도 이내 대답할 수 있게 가까운, 칠성바위 가운데 범바위 앞 밭머리에서 찾아낸 셈이었다.

한번은 헛묘 앞에서 마주친 할아버지한테 나도 무심할 수 없어 물어 보기까지 했다.

"할아버지, 요기가 무슨 �遮瑛肩÷�? 까시덤풀만 우거진 황토밭인디 ……."

눈보다 귀가 훨씬 가까웠던(지금 것을 천하게 여기고 옛것을 좋게 여기는 태도를 가리킴) 할아버지는,

"조 바위를 보려무나. 보매 보기루두 똑 북두칠성 형상 아니겄느냐."

"그렇다구 밭이다 모이(묘)를 써유? 할아버지는 돌아가는 게 좋신 모냥이네유."

"게 다 마찬가지여. 먹구 헐일 �쩜� 지달리는 게나, 일찍 가서 누워 잔디찰방(무덤의 잔디를 지킨다는 뜻으로, '죽어서 땅에 묻힘'을 농으로 이르는 말) 허는 게나 ……."

"……"

"철�쨈� 것 허구 이런 말 허는 내가 어리석다마는."

"그렇지만 해필이면 바위 밑이래유. 넘들은 산에다 모이를 쓰던디."

"나허구 이 바위들허구는 사구일생(四俱一生, 넷이 모여 하나가 되는 일)이니라."

"그게 무슨 말인디유?"

"그럼 사귀일성(四歸一成, 넷이 모여 하나가 되는 일. 목화 너 근이 솜 한 근으로, 수삼 너 근이 건삼 한 근으로 되는 따위)이라구 허던 말은 더러 들어 보았더냐?"

"아뉴."

"숭헌 …… 글을 배우구두 고만 것을 모른다면은 어쩐단 말이냐 ……."

"……"

"듣거라. 너 그럼 목화 느 근(木花四斤)이 면화 한 근(棉花一斤)인 줄은 알겄느냐?"

"씨아(목화 씨를 빼는 기구)루 잣어서 씨를 뺀 건 목화구, 솜틀집 가서 탄 목화는 면화지유."

"행림(杏林, 오나라의 동봉이라는 의원이 환자에게 치료비 대신 살구나무를 주어 심게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낱말로, '의원'을 달리 이르는 말)들이 수삼 느 근이 건삼 한 근이라던 말두 못 들었더란 말이냐?"

"……"

"행림(杏林)이 의생(醫生)이라는 것두 모르는 모냥 아니냐?"

"……"

"무엇을 네 곱쟁이 합쳐야 그것을 가공한 것 하나허구 맞먹는다는 말인 게여."

"그럼 껏보리(겉보리) 느 말은 멥쌀 한 말이겠네유?"

"페에엥 ――."

'페에엥――' 소리는 '숭헌……'이라는 말과 함께 할아버지의 전용어였다. 걱정이 상투 끝에 이르러 아랫사람들에게 핀잔을 줄 때와, 되잖은 말, 같잖은 꼴, 어질지 못하며 어리석은 것 등, 꾸중을 대신하던 할아버지만의 용어였다.

4) 집안 일을 거들었던 옹점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는다.

그 무렵만 해도 할아버지는 자신이 일컬었듯 문자 그대로 백수풍진(白首風塵, 늙바탕에 치르는 온갖 고생. 늙바탕에 겪는 세상의 어지러움)이었으니, 정자 나무의 해묵은 뿌리마냥 간신히 견뎌내던 형편이었다. 망백(望百, 백 살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사람의 나이 아흔 한 살을 이르는 말)의 여든 아홉을 누린 탓에 인생무상을 삶 자체로서 느꼈고, 그래서 장력(壯力)은 잃었으되 매사에 자약(自若, 큰 일을 당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착할)할 수 있은 소중한 것을 지녔던 것인지도 몰랐다. 외람된 말이겠지만 바위들과 당신이 한몸임을 알았다면 바람이나 눈비 따위, 모든 자연계의 현상과 자신의 존재가 어떤 성질 혹은 체질을 서로 나눴는지도 알았을 것이었다.(의지와 정신력이 강하셨던 할아버지의 인생 역정이 단단한 바위와 같다는 생각을 하자, 할아버지는 자연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시면서 사셨을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 바위들이 무심무태한 한갓 자연 물질로서 그치는 것이 아닐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의지와 얼이 굳어져 버린 영구불변의 영혼이며, 아니면 최소한 그 상징일 것 같았으므로 신성하고 경건하게만 보이던 것이다.

나는 바위에서 내려 김장해 들이고 비워 둔 밭고랑을 질러 할아버지 산소를 모셨던 범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눈발이 나부끼는 겨울철이면 꿩과 산비둘기가 유난히 자주 내리던 자리였다. 우리집에서 내리 오 년 동안이나 머슴살이했던 박철호는 덫을 퇴비 속에 묻거나 약을 놓아, 꿩과 산비둘기들만 가만히 앉아서도 쉽게 사냥해 들이곤 했었다. 항상 할아버지와 겸상이었던 나는 할아버지가 타이른, 귀가 싫도록 들었던 말도 덩달아 새삼스러워졌다.

"세상이 아무리 앞뒤가 �쩐沮낫燭〉� 가릴 게라면 가려야 쓰는 게여. 생치(生稚, 산 꿩)는 양반 반찬이구 비닭이(비둘기)는 상것들이나 입에 대는 벱이니라."

혹시 비둘기 고기라도 입에 댈라 싶어 미리 경계한 거였다.

범바위 앞, 서울로 이사하기 앞서 종산으로 면봉해 드린 다음 집과 함께 모개흥정해 선로원(線路員) 김 씨에게 팔아넘긴 산소 자리에는 고구마를 갈았다가 거둬들인 듯, 고구마 마른 덩굴이 우북더북한 밭고랑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빗낱은 언제 그쳤던가, 비거스렁이(비가 갠 끝에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지는 현상)를 하느라고 바람이 몹시 매웠다. 좀 더 머물고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읍내로 들어가야 하리라. 그러나 나는 몇 가구의 하잘것없는 인가를 돌아 옛 동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진작 면례(무덤을 옮기어 장사를 다시 지내는 일)를 해 드린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랴. 칠성바위 언저리엔 오죽잖은 블록집들이 무려 다섯 채나 지어져 있었다. 담장도 안 쳐 있고 쓰레기장과 닭, 오리장이 너절하니 흩어져 있는 가옥들이었다. 장차 주택들이 들어차면 산소 관리하기에도 여의치 않으리라 여겨 종산으로 모셨던 것은 열 번 잘한 일 같았다. 집집마다 하수도가 돼 있지 않아 산소 자리와 칠성바위 둘레는 온통 수챗구멍이나 다름없이 더럽혀져 있었고, 특히 다섯 가구의 다섯 군데 변소는 악취를 제멋대로 풍기며 보기 흉한 꼴들을 하고 서 있던 것이다.

5) 읍내로 돌아가면서 씁쓸한 심정을 토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