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길(1936)                                                  -최명익-

 

 

 

성 밖 한 끝에 사는 병일이가 봉직하고 있는 공장은 역시 맞은 편 성 밖 한 끝에 있었다. 맞은편이지만 사변형의 대각은 채 아니므로 30분쯤 걷는 그 길은 중로에서 성 안 시가지의 한모퉁이를 약간 스칠 뿐이다.

집을 나서면 부행정 구역도에 있는 좁은 비탈길을 10여 분간 걸어야 한다.

그 길은 여름날 새벽에 바자게 뜨는 햇빛도 서편 집 추녀 밑에 간신히 한 뼘 넓이나 비칠까 말까 하게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작은 집들이, 서로 등을 부빌 듯이 총총히 들어박힌 골목이다.

이 골목은 언제나 그렇듯 한산한 탓인지, 아침 저녁 어두워서만 이 길을 오고 가게 되는 병일은, 동편 집들의 뒷담 꽁무늬에 열려 있는, 변소 구멍에서 어정거리는 개들과, 서편 집들의 부엌에서 행길로 뜨물을 내쏟는 안질난 여인들밖에는, 별로 내왕하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일찍이 각기병으로 기운이 빠진 병일이의 다리는, 길을 좀 돌더라도 평탄한 큰거리로 다니기를 원하였다. 사실 걷기 힘든 길이었다.

봄이면 얼음 풀린 물에 길이 질었다. 여름이면 장마물이 그 좁은 길을 개천삼아 흘렀다. 겨울에는 아이들이 첫눈 때부터 길을 닦아 놓고, 얼음을 지치었다(얼음 위를 미끄러져 달리다).

병일이는 부드러운 다리에 실린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하여 외나무다리나 건너듯이,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걷는 것이었다.

봄의 눈 녹은 물과 여름 장마를 치르고 나면 이 길을 걷는 병일이가 아끼는 그의 구두 콧등을 여지없이 망쳐 버리는 것이었다.

비록 대낮에라도 비행기 소리에 눈이 팔리거나, 머리를 수그렸더라도 무슨 생각에 정신이 팔리면, 반드시 영양 불량상태인 아이들의 똥을 밟을 것이다.

 

봄이 되면 그 음침한 담 밑에도 작은 풀잎새가 한 떨기씩 돋아나기도 하였다.

이 골목에 간혹 들어박힌 고가(古家)의 기왓장에 버즘같이 돋친 이끼가 아침 이슬에 젖어서 초록빛을 보이는 때가 있지만, 한줌 한줌씩 아껴 가며 구차하나마 이 돌짝길의 기슭을 치장하여 놓은 어린 풀떨기는 이 빈민굴도 역시 봄을 맞이한 대지의 한끝이라는 느낌을 새롭게 하였다.

밤이면 행길로 문을 낸 서편 집들 중에 간혹 문등(대문이나 현관문 따위에 다는 등)을 단 집이 있었다. 그것은 토지 · 가옥 · 인사 소개업이라는 간판을 붙인 집이었다.

그것도 같은 집에 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퉁이를 지나면 있으려니 하였던 문등이 없어지기도 하고 저 모퉁이는 어두우려니 하고 가면 의외의 새 문등이 켜 있기도 하였다.

요사이 문등이 또 한 개 새로이 켜지었다.

새 문등이 달리자 초롱을 든 인력거꾼이 그 집 문 밖에서 기다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여름에는 초저녁부터 그 집 안방에 가득 차게 쳐 놓은 생초 모기장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집들은 이 여름에도 여전히 모기 쑥을 피우고 있었다.

그 집도 작년까지는 모기 쑥을 피웠던 것이다. 저녁마다 집으로 돌아올 때에 모기 쑥내에 잠긴 이 골목에서, 붉은 도련(저고리 자락의 끝 둘레)을 친 그 초록 모기장을 볼 때마다, 병일이는 윗꼭지를 척 도려 놓은 수박을 연상하였다.

이 골목을 지나가면 새로운 시구 계획으로 갓 닦아 놓은 넓은 길에 나서게 된다.

옛 성벽 한모퉁이를 무찌르고 나갈 그 거리는 아직 시가다운 시가를 이루지 못하였다.

헐리운 옛 성 밑에는 낮고 작은 고가들이, 들추어 놓은 고분 속같이 침울하게 벌려져 있고, 그것을 가리우기 위한 차면(遮面, 얼굴을 기리거나 가리는 물건)같이 회담에 함석 영(이엉)을 덮은 새집들이 단벌 줄로 나란히 서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바로크식 외짝 거리의 맞은편은, 아직도 집들이 들어서지 않았었다. 시탄(땔나무와 숯 또는 석탄) 장사, 장목(물건을 받치거나 버티는 데 쓰는 굵고 긴 나무) 장사, 옹기 노점, 시멘트로 만드는 토관 제조장 등, 성 밖에 빈 땅을 이용하는 장사터가 그저 남아 있었다.

도시의 발전은 옛 성벽을 깨뜨리고, 아직도 초평(草坪, 풀이 무성하게 자란 넓은 벌판)이 남아 있는 이 성 밖으로 뀌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직도 자리잡히지 않은 이 거리의 누렇던 길이 매연과 발걸음에 나날이 짙어서 꺼멓게 멍들기 시작한 이 거리를 지나면, 얼마 안 가서 옛 성문이 있었다. 그 성문을 통하여 이 신작로의 수직선으로 뚫린 시가가 바라보이는 것이었다.

그 성문 밖을 지나치면 신흥 상공도시라는 이 도시의 공장지대에 들어서게 된다. 병일이가 봉직하고 있는 공장도 그곳에 있었다.

병일이는 이 길을 이년 간이나 걸었다. 아침에는 집에서 공장으로, 저녁에는 공장에서 집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므로 이 길을 걷는 것이었다.

 

[중략]

 

 

비가 부슬부슬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비 안개를 격하여 보이는 옛 성문은 그 윤곽이 어둠 속에 잠겨서 영겁(영원한 세월)의 비를 머금고 있는 검은 구름 속으로 녹아들고 말 듯이 보였다.

그러나 성낭(성 밑의 낭떠러지) 위에 높이 달아 놓은 광대의 전등이 누각 한편 추녀 끝에 불빛을 던지고 있었다.

이끼에 덮이고 남은 기왓장이 빛나 보이고, 그 틈서리에 길어난 긴 풀대가 비껴 오는 빗발에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외짝 거리까지 온 병일이는 어느 집 처마 아래로 들어섰다. 그것은 문등이 달린 조그만 현관이었다.

현관 옆에는 회 바른 담을 네모나게 도려 내고 유리를 넣어서 만들어 놓은 쇼윈도가 있었다.

"하아, 여기 사진관이 있었던가!"
하고 병일이는 아직껏 몰라보았던 것이 우스웠다. 그 작은 쇼윈도 안에는 값 없는 16촉 전구가 켜 있었다. 그리고 파란 판에 금박으로 무늬를 놓은 반자지(반자를 바르는 종이. 흔히 여러 가지 색깔과 무늬가 박혀 있음. *'반자'는 방이나 마루의 천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시설)를 바른 그 안에는 중판쯤 되는 결혼사진을 중심으로 명함판의 작은 사진들이 가득히 붙어 있었다. 대개가 고무공장이나 정미소의 여공인 듯한 소녀들의 사진이었다.

사진의 인물들은 모두 먹칠이나 한 듯이 시꺼멓고 구멍이 들여다보이었다.

"압정으로 사진의 윗머리만을 눌러 놓아서 얼굴들이 반쯤 젖혀진 탓이겠지."
하고 병일이는 웃고 있는 자기에게 농담을 건네어 보았다.

그들의 후죽은 이마 아래 눌리어 있는 정기 없는 눈과, 두드러진 관골(광대뼈) 틈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나지막한 코를 바라보면서 병일이는 그들의 무릎 위에 얹혀 있을 거친 손을 상상하였다.

병일이는 담배를 붙여 물고 돌아서서 발 앞에 쏟아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맞은편 빈터의 캄캄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마다 빗발은 병일이의 옷자락으로 풍겨들었다.

옆집 유리창 안에는 닦아 놓은 푸른 능금알들이 불빛에 기름이나 바른 듯이 윤나 보였다. 그 가운데 주인 노파가 장죽을 물고 앉아 있었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졸고 있는 것이었다.

푸른 연기는 유리창 안에서 천장을 향하여 가늘게 떠오르고 있었다. 노파의 손에 들린 삿부채(갈대 따위를 쪼개어 결어 만든 부채)가 그 한편에 깃든 검은 그림자를 이편 저편 뒤칠 때마다 가는 연기 줄은 흩어져서 능금알의 반질반질한 뺨으로 스며 사라졌다.

그 때마다 병일이는 강철 바늘 같은 모기 소리를 느끼고 몸서리를 쳤다.

빗소리밖에는…… 고요한 저녁이었다.

병일이는 다시 쇼윈도 앞으로 돌아서서 연하여 하품을 하면서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때에 갑자기 사진이 붙어 있는 뒤 판장(널판장)이 젖혀지며 커다란 얼굴이 쑤욱 나타났다.

병일이의 얼굴과 마주친 그 눈은 한 겹 유리창을 격하여 잠시 동안 병일이를 바라보다가, 붉은 손에 잡힌 비로 쇼윈도 안을 쓸어 내고 전등알까지 쓰다듬었다.

전등알에는 천장과 연하여 풀솜오리 같은 거미줄이 얽혀 있었다.

비를 놓고 부채로 쇼윈도 안의 하루살이와 파리를 쫓아 내는 그의 혈색 좋은 커다란 얼굴은 직사되는 광선에 번질번질 빛나 보이었다. 그리고 그의 미간에 칼자국같이 깊이 잡힌 한 줄기의 주름살과, 구둣솔을 잘라 붙인 듯한 거친 눈썹, 인중에 먹물같이 흐른 커다란 코그림자는 산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 얼굴의 윤곽을 도려 낸 백지판에 모필(짐승의 털로 만든 붓)로 한 획씩 먹물을 칠한 것같이 보이었다.

병일이는 지금 보고 있는 이 얼굴이나 아까 보던 사진의 그것은 모두 조화되지 않은 광선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암흑한 적막 속에 잠겨들고, 마른 옛 성문 누각의 한편 추녀끝만을 적시는 듯이 보이는 빗발이 다시 한번 병일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렇게 서서 의식의 문 밖에 쏟아지는 낙숫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있는 병일이는, 광선이 희화화한 쇼윈도 안의 초상이 한겹 유리창을 격하여 흘금흘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충혈된 눈을 마주 보았다.

변한 바람세에 휘어진 빗발이 그들이 격하여 서로 바라보고 있는 유리창에 뿌려져 빗방울은 금시에 미끄러져서 길게 흘러내렸다.

"희화된 초상화에서 흐르는 땀방울!"

[병일이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착각을 꾸며 보았다. 지금껏 자기를 흘금흘금 바라보는 그 충혈된 눈에 작은 반감을 가졌던 것이었다.](착각을 통해서 자기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병일의 자의식적 측면을 보여준다.)

비에 놀란 듯한 얼굴은 쇼윈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리었다. 현관문을 열어 잡고 하늘을 쳐다보던 그는,

"비가 대단하구먼요. 이리로 들어와서 비를 그으시지요(피하시지요). 자 들어오세요."
하고 역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병일이에게 말하였다.

그의 적삼 아래로는 뚱뚱한 배가 드러나 보였다.

가차없이 비를 쏟고 있는 푸렁덩한 하늘같이 그의 내민 배가 병일이의 조급한 신경을 거슬리었으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같이 친절한 것은 둥실한 그 배의 성격이거니 생각하여 전하는 대로 현관문 안에 들어섰다.

그는 병일이에게 의자를 권하고 이어서 휘파람을 불면서 조금 전에 떼어들였던 판장에서 사진들을 떼기 시작하였다.

함석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어수선한 좁은 방 안을 침울하게 하였다.

구둣솔을 잘라 붙인 듯한 눈썹을 찌푸려서 미간의 외줄기 주름살은 더욱 깊어지고, 두드러진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휘파람 소리는 날카롭게 들리었다.

병일이는 빗소리에 섞여 오는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앨범을 뒤적이고 있었다.

"금년에는 비가 많이 올 걸요."

휘파람을 불다 말고 사진사는 이렇게 말을 건네며 병일이를 쳐다보았다.

"글쎄요……?"

"두고 보시우. 정녕코 금년에는 탕수(홍수의 방언)가 나고야 맙네다."

"……글쎄요……?"

병일이는 역시 이렇게 대답할밖에 없었다.

"서문의 문지기 구렁이가 현신을 했답니다."

"…… ?"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는 병일이에게 어떤 커다란 사변의 전말이나 설명하듯이 그는 일손을 멈추고,

"어젯저녁에 비가 부슬부슬 오실 때······."
하고 말을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이 우산을 받고 성문 안으로 들어갈 때에 누각 기왓장이 우산을 스치고 발 앞에 철석철석 떨어졌다.  그래 쳐다본즉 그 넓은 기왓골에 십여 골이나 걸친 큰 구렁이가 박죽(밥주걱의 북한어) 같은 머리를 내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그 중에 날쌘 젊은이가 올라가서 잡으려고 하였다. 노인들은 성문지기 구렁이를 해하면(죽이면) 재변(재앙으로 인하여 생긴 변고)이 난다고 야단쳤다. 갈기려는 채찍을 피하여 달아나는 구렁이를 여기 간다 저기 간다 하며 잡지 말라는 노인들을 둘러싼 젊은이들은 문 위에 올라간 사람을 지휘하며 웃고 떠들었다. 마침내 구렁이는 수많은 기왓골 틈으로 들어가 숨고 말았다. 안심한 노인들은 분한 것 놓쳤다고 떠드는 젊은이들 틈에서 이 여름에는 무서운 홍수가 나리라고 걱정하였다고 한다.

"노인들의 증험(증거로 삼을 만한 경험)이 틀리지 않습니다."
하고 그의 말은 끝났다.

"글쎄요?"

[병일이는 이렇게 꼭 같은 대답을 세 번이나 하기가 미안하였다. 그렇다고 '설마 그럴라구요.' 하였다가 이 완고한 젊은이의 무지와 충돌하여 부질없는 얘기가 벌어지게 되면, 귀찮은 일이다.](외부와의 화해를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병일의 의식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때에 현관문으로 작은 식함(음식 그릇)이 들어왔다. 오늘 만든 듯한 새 사진을 붙이고 있던 주인은 일감을 밀어 치우고 식함에 놓인 술병과 음식 그릇을 테이블 위에 받아 놓고 의자를 당겨 앉으며,

"자 우리, 같이 먹읍시다. 이미 청하였던 것이지만."
 하고 술을 따라서 병일이에게 건네었다.

병일이는 코 끝에 닿을 듯한 술잔을 피하여 물러앉으며,

"미안합니다만 나는 술을 먹지 않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그러지 마시구 자, 한잔 드시우. 자, 이미 권하던 잔이니 한 잔만―."

아직 인사도 안 한 그가 이렇게 치근스럽게(끈기있는 물건이 맞닿아서 불쾌한 느낌이 드는 듯하게) 술을 권하는 것이 불쾌하였다. 그래서 여러 번 거절하여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굳이 권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호의로 생각할밖에 없었고 더구나 돌아가는 잔이라든가, 권하던 잔이라든가 하는 술꾼들의 미신적 습관을 짐작하는 병일이는 끝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서 받아 마시고는 잔을 그이 앞에 놓았다. 술을 따라서 잔을 건네면 이 술 추렴에 한몫 드는 셈이 되겠는 고로 빈 잔을 놓은 것이었다.

"자아, 이걸 좀 드시우. 이미 청하였던 음식이라 도리어 미안하웨다만 ―."

이렇게 말하며 일변 손수 술을 따라 마시면서 초계탕 그릇을 병일이에게로 밀어 놓는다.

"자, 좀 드시우."

이렇게 다지고 그는 안으로 들어가서 은수저 한 벌을 더 가지고 나와서 자기가 마침 떠 먹으며,

"어어 시원해. 하루 종일 밥벌이하느라고 꾸벅꾸벅 일하다가 이렇게 한 잔 먹는 것이 제일이거든요."

이러한 주인의 말에 병일이는 한번 더 '글쎄요' 하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누르고,

"피곤한 것을 잊게 되니깐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동정하는 병일이의 대답에, 사진사는,

"참 좋아요. 아시다시피 사진 영업이라는 것은 기술이니만치 뼈가 쏘게(쑤시다의 방언) 힘드는 일은 아니지만 매일 암실에서 눈과 뇌를 씁니다그려. 그러다가 이렇게 한잔."
하며 그는 손수 술을 따라 마시고 나서,

"일이 그렇게 많습니까?"
하고 묻는 병일이에게 잔을 건네며,

"그저 심심치 않지요. 또 혹시 일이 없어서 돈벌이를 못 할 날이면 술을 안 먹고 자고 마니까요, 하하."

이렇게 쾌하게 웃으며 연하여 술을 마시는 오늘은 돈벌이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병일이도 그가 권하는 대로 술잔을 받아 마시었다.

다소 취기가 돈 듯한 사진사는 병일이의 잔에 술을 따르며,

"참 하시는 사업은 무엇이신가요? 하긴 우리 ― 피차에 인사도 않았겟다. 그러나 나는 선생이 늘 이 앞으로 지나시는 것을 보았지요. 이렇게 합석하기는 처음이지만. 나는 저어 이칠성이라고 불러 주시우. 그리구 앞으로 많이 사랑해 주시우."

이같이 기다란 인사가 끝난 후에 사진사는 병일이를 긴 상(김씨 성을 가진 사람을 일본식으로 부르는 말)이라고 불러가며 더욱 친절히 술을 권하면서,

"긴 상두 독립적으로 사업을 시작하시우. 나두 어려서부터 요 몇 해 전까지 월급 생활을 했지만."
하고 자기의 내력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병일이는 방금 말한 자기의 직업적 지위와 대조하여 사진사가 이같이 갑자기 선배연하는 태도로 말하는 것이 역하였다.

그래서 그의 내력담에 경의를 가지기보다도, 그와 이렇게 마주 앉게 된 것을 후회하면서 일종의 경멸과 불쾌감으로 들었다.

그가 삼 년 전에 비로소 이 사진관을 시작하기까지 열세 살부터 십여 년 동안 그의 적공(많은 힘을 들여 애를 씀)은 그의 사진술(?)과, 지금 병일이의 눈앞에 보이는 이 독립적 사업으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내력담을 마친 그는 등 뒤의 장지문을 열어 젖히며,

"여기가 사장(사진을 찍는 시설을 갖추어 놓은 곳)입니다."
하고 병일이를 돌아보며 일어서서 안내하였다.

사장 안의 둔각으로 꺾인 천장의 한 면은 유리를 넣었다. 유리 천장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캄캄하였다. 그리고 거기 내리는 빗소리는 여운이 없이 무겁게 들리었다.

맞은 벽에는 배경이 걸려 있었다. 이편 방 전등빛에 배경 앞에 놓인 소파의 진한 그림자가 회색으로 그린 배경 속 나무 위에 기대어졌다. 그리고 그 소파 앞에 작은 탁자가 서 있고, 그 위에는 커다란 양서 한 권과 수선화 한 분이 정물화같이 놓여 있었다.

사진사는 사장 안의 전등을 켜고 들어가서 검은 보자기를 씌운 사진기를 만지며,

"설비라야 별 것 없지요. 이것이 제일 값나가는 것인데 지금 살라면 삼백오륙십 원은 줘야 할 겝니다. 그때도 월부로 샀으니깐 그 돈은 다 준 셈이지만."
하고 자기가 소사로부터 조수가 되기까지 십여 년간이나 섬긴 주인이 고맙게도 보증을 해 주어서 그 사진기를 월부로 살 수가 있었다는 것과, 지난 봄까지 대금을 다 치렀으므로, 이제는 완전히 자기 것이 되었다는 것을 가장 만족한 듯이 설명하였다.

그리고 전등을 끄고 나오려던 사진사는, 다시 어두워진 사장 안에 묵화 같은 수선화를 보고 섰는 병일이의 어깨를 치며,

"참 여기만 해도 어수룩합네다. 배경이라고는 저것밖에 없는데 여기 손님들은 저 산수 배경 아래에 걸터앉아서 수선화를 앞에 놓고 넌지시 책을 펴들고 백이거든요."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자리에 돌아온 그가,

"차차 배경도 마련하여야겠습니다."
하는 것으로 보아서 결코 그는 자기의 직업적 안목으로 손님들을 웃어 주는 것이 아니요, 이것저것 모든 것이 만족하여서 견딜 수가 없다는 웃음으로 병일이는 들었다.

부채로 식히고 있는 그 얼굴의 칼자국 같은 미간의 주름살도 거의 펴진 듯이 보이었다.

사진사는 더욱더욱 유쾌하여지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술취한 그의 버릇인지, 그는 아까부터 바른손으로 자기의 바른편 귓속을 잡아 훑으며 수다스럽게 얘기를 벌이고 있었다.

병일이는 작은 귤쪽같이 빨개진 사진사의 바른편 귀를 바라보면서 하품을 하며 듣고 있었다.

사진사는 다시 한번 귓속을 잡아 훑으며,

"긴 상은 몸이 강해서 그다지 더운 줄을 모르겠군요. 나는 술 살인지 작년부터 몸이 나기 시작해서 ― 제가 더웁기라니 ― 노인들의 말씀같이 부해져서 돈이나 많이 모으면 몰라도 밤에 ―."
하고 그는 적삼 아래 드러난 배를 쓸면서 병일이에게는 아직 경험이 없는 침실의 내막을 얘기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얼굴이 붉어진 병일이를 건너다보며, 어서 장사를 시작하고 하루바삐 장가를 들어서 사람 사는 재미를 보도록 하라고 타이르는 듯이 말하였다.

병일이는 '사람 사는 재미라니? 어떻게 살아야 재미나게 살 수 있느냐?고 사진사에게 물어 보고 싶기도 하였으나 들어야 땀내나는 그 말이려니 생각되어 다시 한번 '글쎄요.'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열시가 지난 여름밤에, 어느덧 빗소리도 가늘어졌다.

비가 멎기를 기다려서 가라고 붙잡는 사진사에게 내일 다시 오기를 약조하고 우산을 빌려 가지고 나섰다.

몇 걸음 안 가서 돌아볼 때에는 쇼윈도 안의 불은 이미 꺼지었다. 캄캄한 외짝 거리의 점포들은 모두 판장문이 닫혀 있었다. 문 틈으로 가늘게 새어 나오는 불빛에 은사실(은을 얇게 입힌 실) 같은 빗발이 지우산(대오리로 만든 살에 기름 먹인 종이를 발라 만든 우산) 위에서 소리를 낼 뿐이었다.

얼굴을 스치는 밤기운과 손등을 때리는 물방울에 지금까지 흐려졌던 모든 감각이 일시에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빈터 초평에서 한두 마리의 청개구리 소리가 들려 왔다. 병일이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얼마 기다려서야 맹꽁맹꽁 우는 소리를 한두 마디 들을 수가 있었다.

때리는 빗방울에 눈을 껌벅이면서 맹꽁맹꽁 울 적마다 물에 잠긴 흰 뱃가죽이 흐물거리는 청개구리를 눈앞에 그리어 보았다.

[청개구리의 뱃가죽 같은 놈!] (사진사의 뚱뚱한 배와 동일한 이미지를 떠올린 것이다. 사진사에 대한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구절임) 문득 이런 말이 나오며 병일이는 자기도 모를 사진사에게 대한 경멸감이 떠올랐다.

선뜩선뜩하고 번질번질한 청개구리의 흰 뱃가죽을 핥은 듯이 입 안에 께끔한 침이 돌아서 발걸음마다 침을 뱉었다. 그리고 숨결마다 코앞에 서리는 술내가 역하여서 이리저리 얼굴을 돌리는 바람에 그의 발걸음은 비틀거리었다.

내가 취하였는가? 하는 생각에 그는 정신을 차리었으나 떼어놓는 발걸음마다 철벅철벅 하는 진흙물 소리가 자기 외에 다른 누가 따라 오는 듯하여 자주 뒤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청개구리의 뱃가죽 같은 놈!' 하는 생각에 그는 자주 침을 뱉으며 좁은 골목에 들어섰다.

거기는 빗소리보다도 좌우편 집들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었다.

동편 집들의 뒷담은 무덤과 같이 답답하게 돌아앉아 있었다. 문을 열어 놓은 서편 집들의 어두운 방 안에서는 후끈한 김이 코를 스치고, 아이들의 울음 소리와 여인들의 잠꼬대 소리가 들리었다.

그리고 간혹 작은 칸델라(휴대용 석유등)를 켜놓은 방 안에는 마른 지렁이 같은 늙은이의 팔다리가 더러운 이불 밖에서 움직이며 가래걸린 말소리와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병일이는 아침에나 초저녁에는 볼 수 없던 한층 더 침울한 이 골목에 들어서 좌우편 담에 우산을 부딪치며,

'이것이 사람 사는 재미냐? 흥, 청개구리의 뱃가죽 같은 놈!'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침을 뱉으며 걸었다.

뒤에서 찔릉찔릉 하는 종소리가 들리었다. 누렇게 비치는 초롱을 단 인력거가 오고 있었다.

병일이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서기가 싫어서, 한편으로 길을 비키고 섰다. 가까이 온 인격거의 초롱은 작은 갓모(사기그릇을 만드는 물레의 밑구멍에 끼우는, 사기로 된 고리) 같은 우비 아래서 덜덜 떨고 있었다. 반쯤 기운 병일이의 우산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인력거 안에서,

"아이 참 골목두 이렇게 좁아서야."
하고 두세 번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었다.

"아씨두, 아랫거리에 큰 집이나 한 채 사시구 가셔야지요."

인력거꾼이 숨찬 마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아이 어느새 머어."
하는 기생의 말소리가 그치었으나 캄캄한 호로(포장) 안에서 그 대꾸를 들으려고 귀를 기웃하고 기다리는 양이 상상되는 음성이었다.

"왜요, 아씨만하구서야 ―."

이렇게 하려던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숨이 찬 인력거꾼은 한 손으로 코를 풀었다.

"그렇지만 큰 집 한 채에 돈이 얼마기 ―."

이렇게 혼잣말같이 하는 기생의 말소리는 금시에 호적한(고요하고 쓸쓸한) 맛이 있었다. 인력거꾼은,

"아씨같이 잘 불리면 삼사 년이면 그것쯤이야 ―."
하고 기생을 위로하듯이 아까 하던 말을 이었다. 그러나 호로 안에서는 잠깐 잠잠하였다가,

"수다 식구가 먹고, 입고, 사는 것만 해두 여간이 아닌데."
하는 기생의 말소리는 더욱 호적하였다. 인력거꾼도 말을 끊었다. 초롱불에 희미하게 비치는 진흙물에 떼어놓는 발걸음 소리만이 무겁게 들리었다.

인력거는 작은 대문 앞에 멎었다. 컴컴한 처마 끝에는 빗물이 맺혀서 뜨고 있는 동그란 문둥이 흰 포도알같이 작게 비치고 있었다.

인력거에서 내린 기생은 낙숫물을 피하여 날쌔게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대문 밖을 내다보며 인력거꾼에게, "잘 가오." 하고 어린애와 같이 웃는 얼굴로 사라졌다.

병일이는 늙은 인력거꾼이 잡고 선 초롱불에 기생의 작은 손등을 반쯤 가린 남길솜과 동그란 허리에 감싸 올린 옥색 치마 위에 늘어진 붉은 저고리 고름을 보았다. 그것이 어린애와 같이 웃는 기생의 흰 얼굴과 어울려서 더욱 어리게 보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력거꾼과 하던 말과 그 짧은 대화의 끝을 콤비한 생활고의 독백으로 마치던 그 호젓한 말씨는 결코 어린애의 말이라고 들을 수는 없었다.

대문 안에 사라진, 미상불 갓 깬 병아리 같은 솜털이 있을 기생의 얼굴을 눈앞에 그리며 그의 얘기 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는 병일이의 머릿속에는 어릴 때 손가락을 베였던 의액(억새)이 풀잎이 생각난다.

연하면서도 날카로운 의액이의 파란 풀잎이 머릿속을 스치고 사라지자 병일의 신경은 술에서 깨어나는 듯하였다.

돌아가는 인력거의 초롱불에 자기의 양복 바지가 말 못 되게 더러운 것을 발견하고 병일은 하염없는 웃음이 떠오름을 깨달았다.

하숙방에 돌아온 병일이는 머리맡에 널려 있는 책을 두겨서(쌓다) 베고 누웠다.

그는 천장을 쳐다보며 2년래로 매일 걸어다니는 자기의 변화 없는 생활의 코스인 (오늘 밤 비 오는) 길에서 보고 들은 생활 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것은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물론 진기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같은 것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서 생각하는 자기가 이상하리만큼 평범하고 속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같이 음산하게 벌어져 있는 현실은 산문적이면서도, 그 산문적 현실 속에는 일관하여 흐르고 있는 어떤 힘찬 리듬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 리듬은 엄숙한 비판의 힘으로 변하여 병일이의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는 듯하였다.

 

 

'내게는 청개구리의 뱃가죽만 한 탄력도 없고, 의액이 풀잎 같은 청기(푸른 기운)도 날카로움도 없지 않은가?'

이러한 반성이 머릿속에 가득 찬 병일이는 용이히(쉽게) 올 것 같지 않은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우울한 장마는 계속이 되었다. 그것은 태양의 얼굴과 창공과 대지를 씻어 낼 패기 있는 폭풍우를 그립게 하는 궂은비였다.

이 며칠 동안에는 얼굴을 편 태양을 볼 수가 없었다. 혹시 비가 개는 때라도 열에 뜬 태양은 병신같이 마음이 궂었다.

오래간만에 맞은편 하늘에 비낀 무지개를 반겨서 나왔던 아이들은 수목 없는 거리의 처마 아래로 다시 쫓겨갈밖에 없었다.

밤 하늘에는 별들도 대개는 불을 켜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야수떼 같은 검은 구름이 달리었다. 그러고는 또 비가 구질구질 내리었다. 빗물 고인 웅덩이에는 수없는 장구벌레들이 끓어 내인 신경 줄기같이 꼬불거리고 있었다.

병일이는 요즈음 독서력을 전혀 잃고 말았다.

어느 날 밤엔가 늦도록 <백치>(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를 읽다가 잠이 들었을 때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속 궁근 기침을 깃던 끝에 혈담을 뱉는 꿈을 꾸었다. 침과 혈담의 비말(날아 흩어지거나 튀어오르는 물방울)을 수염 끝에 묻힌 채 그는 혼몽해져서 의자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의 검은 눈자위와 우므러진 뺨과 검은 정맥이 늘어선, 벗어진 이마 위에 솟은 땀방울을 보고 그의 기진한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었다. 그 때에 방 안에는 네 시를 치려는 목종(나무로 틀을 만들어 꾸민 시계)의 기름 마른 기계 소리만이 섞여 들릴 뿐이었다.

이렇게 잠을 잃은 병일이는 <백치> 권두에 있는 작자의 전기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전기에는 역시 병일이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문호의 숙환으로 간질의 기록만이 있을 뿐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동양인 같은 수염에 맺혔던 혈담은 어릴 적 기억에 남아 있는 자기 아버지의 죽음의 연상으로 생기는 환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근자에 병일이는 사무실에서 장부 정리를 할 때에도 혹시, 후원에서 성낸 소와 같이 거닐고 있던 니체가 푸른 이끼 돋친 바위를 안고 이마를 부딪치는 것을 상상하고 작은 신음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깨닫고는 몸서리를 치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곁에서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 주인을 바라볼 때 신문 외에는 활자와 인연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의 생활이 부럽도록 경쾌한 것 같았다. 사실 월급에서 하숙비를 제하고 몇 푼 안 남는 돈으로 탐내어 사들인 책들이 요즈음에는 무거운 짐같이 겨웠다.

활자로 박힌 말의 퇴적이 발호하여서 풍겨 오는 문학의 자극에, 자기의 신경은 확실히 피곤하여졌다고 병일이는 생각하였다.

피곤한 병일이는 사무실에서 돌아올 때마다, 이 지루한 장마는 언제까지나 계속할 셈인가고 중얼거리었다.

지금부터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돌아가는 길에 언제나 발을 멈추고 바라보는 성문을 요즈음에는 우산 속에 숨어서 그저 지나치는 때가 많았다. 혹시 생각나서 돌아볼 때에는 수없는 빗발에 씻기며 서 있는 누각을 박쥐조차 나들지 않았다. 전날 큰 구렁이가 기왓장을 떨어쳤다는 말이 병일이에게는 육친의 시체를 보는 듯한 침울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모깃소리에 빈대 냄새와 반들거리다가 새침히 뛰어오르는 벼룩이가 기다릴 뿐인 바람 한 점 없는 하숙방에서 활자로 시커멓게 메인 책과 마주 앉을 용기가 없어진 병일이는 어떤 유혹에 끌린 듯이 사진관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사진사도 병일이를 환영하였다. 그리고 술과 한담이 있었다.

아직껏 취흥을 향락해 본 경험이 없던 병일이는 자기도 적지 않게 마시고 제법 사진사와 같이 한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 만족하게 생각되기도 하였다.

사진사가 수다스럽게 주워섬기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병일이는 문득 자기를 기다릴 듯한 어젯밤 펴 놓은 대로 있을 책을 생각하고 시계를 쳐다보기도 하였으나 문 밖에 빗소리를 듣고는 누구에 대한 것인지도 모를 송구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얘기에 신이 나서 잊고 있는 사진사의 잔을 집어서 거푸 마시었다.

밤 열두 시가 거진 되어서 하숙으로 돌아가는 병일이는 비를 맞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였다. '이것이 무슨 짓이냐!' 하는 반성은 갈라진 검은 구름 밖으로 보이는 별 밑에 한층 더하므로 '이 생활은 일시적이다. 장마의 탓이다.' 하는 생각을, 오는 비에 핑계하기가 편하였던 것이다.

책상 앞에 돌아온 병일이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모두 없어진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 시간을 위하여 자야 할 병일이는 벌써 깊이 잠들었을 사진사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요즈음 사진사는 술을 사양하는 때가 있었다. 손이 떨려서 사진 수정에 실수가 많으므로 얼마 동안 술을 끊어 볼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장마에 손님이 없어서 그이 역시 우울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병일이가 술을 사서 권하면 서너 잔 후에는 이내 유쾌해지는 것이었다.

오늘도 유쾌해진 사진사가 병일이에게 잔을 건네며,

"긴 상, 밤에는 무엇으로 소일하시우……."
하고 물었다.

전에는 사진사가 주워섬기는 화제는 대부분이 사진사 자신의 내력과 생활에 관한 얘기요 자랑이었다. 혹시 도를 지나치는 그의 살림 내정 얘기에 간혹 미안히 생각되는 때가 있었으나 마음놓고 들으며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이 며칠은 병일이가 술을 마시는 탓인지 사진사는 병일의 생활을 화제로 삼으려는 것이 현저하였다.

병일이가 월급을 얼마나 받느냐고 물은 것이 벌써 그저께였다.

어젯밤에는 하숙비는 얼마나 내느냐고 물은 다음에, 흐지부지 허튼 돈을 안 쓰는 '긴 상'이라 용처로 한 달에 기껏 6원을 쓴다 치고라도 한 달에 7, 8원은 저금하였을 터이니 이태 동안에 소불하(少不下, 적게 잡아도) 2백 원은 앞세웠으리라고 계산하였다. 그 말에 병일이는 웃으며, 글쎄 그랬더라면 좋았을 걸 아직 한 푼도 저축한 것이 없다고 하였더니, 내가 긴 상에게 돈 꾸려고 할 사람이 아니니 거짓말 할 필요는 없다고 서둘다가, 정말 돈을 앞세우지 못하였다면 그 돈을 무엇에다 다 썼을까고 대단히 궁금해 하는 모양이었다.

사진사가 오늘 이렇게 묻는 것도 그러한 궁금증에서 나오는 말인 것을 짐작하는 병일이는 하기 싫은 대답을 간신히,

"갑갑하니까 그저 책이나 보지요."
하고 담배 연기를 핑계로 찡그린 얼굴을 돌렸다. 사진사는 서슴지 않고 여전히 병일이를 바라보며,

"책? 법률 공부 하시우? 책이나 보시기야 무슨 돈을 그렇게……, 나를 속이시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혼자서 적지 않은 돈을 저금도 안 하고 다 쓴다니 말이 되오?"

이렇게 말하며 충혈된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병일이를 마주 보는 것이었다.

술이 반쯤 취한 때마다 "사람이란 것은……." 하고 흥분한 어조로 자기의 신념을 말하거나 설교를 하려 드는 것이 사진사의 버릇임을 이미 아는 바이요, 또한 그 설교를 무심중 귀를 기울이고 들은 적도 있었지만 오늘같이 병일이의 생활을 들추어서 설교하려 드는 것은 대단히 불쾌한 것이다.

술에 흥분된 병일이는 '그래 댁이 무슨 상관이오.' 하는 말이 생각나기는 하엿으나 이런 경우에 잘 맞지 않는 남의 말을 빌리는 것 같아서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돈을 아껴서 책까지 안 산다면 내 생활은 무엇이 됩니까? 지금 나에게는 도서관에 갈 시간도 없지 않소? 그러면 그렇게 책은 읽어서 무엇 하느냐고 묻겠지만 나 역시 무슨 목적이 있어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는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는 일생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즉 사람에게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도 그것을 알아보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고학도 할 수 없이 된 병약한 몸과 2년래로 주인에게 모욕을 받고 있는 나의 인격의 울분한 반항이――말하자면 모두 자기네 일에 분망한 세상에서 나도 내 생활을 위하여 몰두하는 시간을 가져 보겠다는 것이 나의 독서요,' 하고 이렇게 말한다면 말하는 자기의 음성이 떨릴 것이요, 그 말을 듣는 사진사는 반드시 하품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병일이는 하염없는 웃음을 웃고 나서,

"그럼 나도 책 사는 돈으로 저금이나 할까? 책 대신에 매달 조금씩 늘어 가는 저금 통장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낙을 삼구……."

"아무렴 그것이 재미지…… 적소성대(작은 것도 쌓이면 많아짐)라니."

이렇게 하는 사진사의 말을 가로채어서,

"하하 시간을 거꾸루 보아서 10년 후의 천 원을 미리 기뻐하며 하하."
하고 웃고 난 병일이는 아까부터 놓여 있는 술잔을 꿀꺽 마시고 사진사의 말을 막으려는 듯이 곧 술을 따라 건네었다.

술잔을 받아든 사진사는 치(벌의 독침)가 있는 듯한 병일의 말에 찔린 마음이 병일의 공소한(허전하거나 어설프다) 웃음소리에 중화되려는 쓸개 빠진 얼굴로 병일이를 바라보다가 체신을 차리려고 호기 있게 눈을 굴리며,

"10년도 잠간이요. 돈을 모으며 살아도 10년, 허트루 살아도 10년인데 같은 값이면 우리두 돈 모아서 남과 같이 살아야지……."
하는 사진사의 말을 받아서,

"누구와 같이? 어떻게?"
하고 대들 듯이 묻는 병일의 눈은 한순간 빛났다.

들어야 그 말이지, 하고 생각하여 온 병일이는 이 때에 발작적으로 사진사가 꿈꾸는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아니 누구같이라니! 자, 긴 상 내 말 들어 보소. 자, 다른 말 할 것 있소. 셋집이나 아니구 자그마하게나마 자기 집에다 장사면 장사를 벌리구 앉아서 먹구 남는 것을 착착 모아가는 살림이 세상에 상 재미란 말이요."
하고 그는 목을 축이듯이 술을 마시고 병일에게 잔을 건네며,

"이제 두구 보시우. 내가 이대루 3년만 잘하면 집 한 채를 마련할 자신이 꼭 있는데, 그 때쯤 되면 내 맏아들놈이 학교에 가게 된단 말이오. 살림집은 유축(외따로 떨어져 구석진 곳)이라도 좋으니 학교 갓게다 벌리고 앉으면 보란 말이오. 그렇게만 되면 머어 창학이 누구누구 다 부러울 것이 없단 말이요."
하고 가장 쾌하게 웃었다. 쾌하게 웃던 사진사는 잔을 든 채로 멀거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병일이의 눈과 마주치자 멋쩍게 웃음을 끊었다가 그럴 것 없다는 듯이 다시 웃음을 지어 웃으며,

"어떻소? 긴 상 내 말이 옳소? 그르오? 하하하."
하며 병일이가 들고 있는 술잔이 쏟아지도록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병일이는 잔 밑에 조금 남은 술 방울을 혓바닥에 처뜨려서 쓴맛을 맛보듯이 마시고 잔 밑굽으로 테이블에 작은 소리를 내며,

"글쎄요."
하고 얼굴을 수그리며 대답하였다.

사진사는,

"글쎄요라니?"
하니 병일이의 대답이 하도 시들함을 나무라는 모양으로,

"긴 상은 도무지 남의 말을 곧이 안 듣는 것이 병이거든. 그리구 내가 보기엔 긴 상은 돈 모고 세상살이 할 생각은 않는 것 같단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사진사는 자기의 말을 스스로 긍정하는 태도로 병일이를 건너다보며 머리를 건득이었다(고개를 힘없이 자꾸 앞으로 숙였다 들었다 하다).

병일이도 사진사의 말을 긍정할밖에 없었다.

사진사의 설교가 아니라도 이러한 희망과 목표는 이러한 사회층(물론 병일이 자신도 운명적으로 예속된 사회층)에 관념화한 행복의 목표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회층의 일평생의 노력은 이러한 행복을 잡기 위한 것임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늘 보고 듣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일이는 이러한 것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희망과 목표는 무엇인가고 생각할 때에는 병일이의 뇌장(뇌척수액. 뇌의 빈 곳 및 척추의 중심관을 채우고 있는 액체)은 얼어붙은 듯이 대답이 없었다. 이와 같이 별다른 희망과 목표를 찾을 수 없으면서도 자기가 처하여 있는 사회층의 누구나 희망하는 행복을 행복이라고 믿지 못하는 이유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희망과 목표를 향하여 분투하고 노력하는 사람의 물결 가운데서 오직 병일이 자기만이 지향 없이 주저하는 고독감을 느낄 뿐이었다. 다만 일생의 목표를 그리 소홀하게 결정할 것이 아니라고 간신히 자기에게 귓속말을 하여 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귓속말에 비하여 사진사의 자신 있는 말은 얼마나 사진사 자신을 힘있게 격려할 것인가? 더욱이 누구나 자기의 희망과 포부는 말로나 글로나 자라나고 있을 때보다 훨씬 빈약해 보이는 것이요, 대개는 정열과 매력을 잃고 마는 것인데, 이 사진사는 그 반대로 자기 말에 더욱더욱 신념과 행복감을 갖는 것을 볼 때 그는 참으로 행복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할밖에 없었다.

이렇게 사진사를 행복자라고 생각하는 병일이는 그러한 행복 관념 앞에 여지없이 굴복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 행복 관념에 복종할 수 없었다. 그러면 자기는 마치 반역하는 노예와 같이 운명이 내리는 고역과 매가 자기에게는 한층 더 심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병일이는 이렇듯이 발걸음 하나나마 자신 있게 내지를 수 있는 명일의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오직 가혹한 운명의 채찍 아래서 생명의 노예가 되어 언제까지 살지도 모를 일생을 생각할 때 깨어날 수 없는 악몽에서 신음하듯이 전신에 땀이 흐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박관념에 짓눌리어서 멀거니 앉아 있는 병일이에게,

"참말 나 긴 상한테 긴히 부탁할 말이 있는데."
하고 사진사는 병일이를 마주 보는 것이었다. 사진사의 말과 시선에 부딪힌 병일이는 한 장 벌꺽 뒤치어 새 그림을 대한 듯한 기름기 있는 큰 얼굴에 빙그레 흘린 웃음을 바라보았다.

"긴 상 여기 신문사 양반 아는 이 있소?"
하며 전에 없이 긴한 표정으로 사진사는 물었다.

"없어요."
하고 대답하는 병일이가 얘기한 이상으로 사진사는 재미 없다는 입맛을 다시고 나서,

"사람이라는 것은 할 수만 있다면 교제를 널리 할 필요가 있어."
하고 병일이를 쳐다보며,

"긴 상도 누구만 못지 않게 꽁생원이거든!"

이렇게 말하고 이어서 하하 웃었다.

웃고 난 사진사는 말마다 '신문사 양반'이라고 불러 가며 여기 유력한 신문 지국의 '지정 사진관'이라는 간판을 얻기만 하면 수입도 상당하거니와 사진관으로서는 큰 명예가 된다고 기다랗게 설명을 하였다. 일전에 지방 잡신으로 성문 위에 길이 석 자 가량 되는 구렁이가 나타나서 작은 난센스 소동을 일으켰다는 기사를 보고 작은 것을 크게 보도하는 것이 신문 기자의 책임이어든 옛날부터 있는 성문지기 구렁이를 석 자밖에 안 된다고 한 것은 무슨 얼빠진 수작이냐고 사진사는 대단히 분개하였던 것이었다.

"전부터 별러 온 것이지만 왜 지금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기회가……."
하고 사진사는 의논성 있게 한층 말소리를 낮추며,

"× × 사진관 주인이 (전에 말한 이전에 자기가 섬기던 주인이라고 그는 주를 달았다) 오랜 해소병으로 오늘내일하는 판인데 그 자리가 성 안 사진관치고도 그만한 곳이 없고 게다가 완전한 설비도 있는 터이라 이 기회에 유력한 신문 지국의 지정 간판만 얻어 가지고 가게 되면 남부러울 것이 없거든요……."
하고 말을 이어서,

"자, 그러니 이 기회에 긴 상이 한번 수고를 아끼지 않고 지정 간판을 얻도록 활동해 주시면……."
하는 사진사의 말에 병일이는,

"이 기회라니…… 그 사진관 주인이 딱 언제 죽는대요."
하고 빙그레 웃었다.

"아이 긴 상두 원 그러게 내가 긴 상은 남의 말을 곧이 안 듣는다고 하는 게오. 오늘내일하는 판이라구 안 그러우. 설사 날래 끝장이 안 난대도 지정 간판은 지금 여기다 걸어도 좋으니깐 달리 생각하지 마시고 좀 힘을 써 주시구려……."
하고 사진사는 마시는 술잔 너머로 병일이를 슬쩍 훑어보았다. 병일이는 그러한 눈치가 싫었다. 그는 사진사의 눈치를 피하며 담뱃내를 천장으로 길게 뿜으며,

"천만에 달리 생각하는 게 아니지. 나도 학생 시대에 테니스를 할 때에 쎄큰(세컨드) 플레이가 되어서 남이 하는 게임이 속히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린 경험이 있으니까요, 하하하."
하고 과장한 웃음을 웃었다.

"아무렴! 세상일이 다 그렇구말구."
하고 사진사는 유쾌하게 껄껄 웃었다. 그리고 병일이의 손목을 잡아 흔들며, 친구로 다리를 놓아서라도 '신문사 양반'에게 부탁하여 '지정 간판'을 얻도록 하여 달라고 신신부탁하는 것이었다.

내일도 또 오라는 사진사의 인사를 들으며 행ㄱㄹ에 나선 병일이는 머리가 아프고 말할 수 없이 우울하였다.

병일이가 돌아볼 때에는 사진관 쇼윈도의 불은 이미 꺼지었다. 사진사를 처음 만났던 밤에 우연히 돌아보았을 때 꺼졌던 불은 청개구리 소리를 듣던 곳까지 와서 돌아보면 언제나 꺼지던 것이었다. 병일이가 하숙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거진 같은 때였지만, 쇼윈도의 불은 병일의 발걸음을 몇 걸음까지 세듯이 일정한 시간 거리를 두고 꺼지는 것이었다.

병일이는 으레 꺼졌을 줄 알면서도 돌아볼 때마다 그 불은 이미 꺼졌던 것이었다.

어떤 때――유쾌하게 취한 병일이는 미리 발걸음을 멈추고 이제 쇼윈도의 불이 꺼지려니 하고 기다리다가 정말 꺼지는 불을 보고는 '아니나 다를까' 하고 웃은 적도 있었다.

오늘따라 심히 아픈 병일이의 머릿속에는 '사진사는 벌써 잘 것이다.' 하는 생각만이 자꾸자꾸 뒤대어 반복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 생각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어느덧 좁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에 빗물이 맺혀 들고 있는 동그란 문등이 달린 대문을 두들기며 "낭홍이 낭홍이" 하고 부르는 사람이 보였다.

처마 그림자 밖으로 보이는 고무장화가 전등빛에 기다랗게 빛나며 나란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대문을 두세 번 퉁퉁 두들기고는 역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낭홍이 낭홍이" 하고 불렀다. 그 때마다 병일이도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웬 까닭인지 마음이 두근거림을 깨달았다.

대문을 두드리고 "낭홍이"를 부르고 귀를 재우고 기다리기를 몇 차례나 하였으나 종내 소식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단념한 그 사람은 돌아선 그와 마주 서게 된 병일이 멍하니 서 있는 자기의 얼굴을 가로 베듯이 날카로운 시선이 번쩍 스칠 때 아득하여진 그는 겨우 그 사람의 코 아래 팔자수염을 보았을 뿐이었다. 머리를 숙이고 도망하듯이 하숙으로 달아온 병일이는 이불을 뒤쓰고 누웠다. 신열이 나고 전신이 떨리었다.

신열로 며칠 앓고 난 병일이는 여전히 그 길을 걸으면서도 한 번도 사진사를 찾지 않았다. 한때는 자기가 사진사를 찾아가는 것은 마치 땀 흘린 말이 누워서 뒹굴 수 있는 몽당판('몽당'은 먼지의 사투리. 따라서 몽땅판은 자리를 깔지 않아 먼지가 이는 판을 말하는 듯하다)을 찾아가는 듯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곳도 마음놓고 뒹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피부 면에까지 노출된 듯한 병일의 신경으로는 문어의 흡반(빨판)같이 억센 생활의 기능으로서의 신경을 가진 사진사의 생활 면은 도리어 아픈 곳이었다.

이같이 사진사를 찾지 않으려고 생각한 병일이는 매일 오고 가는 길에 사진관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렇게 매일같이 찾아가던 자기가 갑자기 발을 끊는 것을 사진사는 나무럽게(대하는 태도나 말 따위가 못마땅하고 섭섭하게 생각되어 언짢다) 생각할 것 같았다. 그보다도 병일이 자신이 미안하였다. 자기를 사랑하던(?) 사진사의 호의를 무시하는 행동같이도 생각되었다. 자기가 그를 찾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사진사는 그가 부탁하였던 '지정 간판'이 짐스러워서 오지 않는 것같이 오해하지나 않을까? 그렇다고 자기가 사진사를 피하는 진정한 심정을 소설 중의 주인공이 아닌 자기로서 그 역시 소설 중의 인물이 아닌 사진사에게 어떻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같이 생각하던 병일이는 마침내 이렇듯 짐스러운 관심 때문에 자기 생활 중에서 얻기 힘든 사색의 기회를 주는 이 길 중도에 무신경하게 앉아 있는 사진사의 존재를 귀찮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아침에는 ――물론 사진관 문이 닫혀 있었다. 어젯밤에도 혼자서 술을 먹고 아직 자고 있는가? 하긴 새벽부터 가게 문을 열 필요는 없는 영업이니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저녁에는――열린 문 안에 혹시 사람의 흰 그림자가 보일 때마다 길게 걸쳐놓인 뱀의 시체나 뛰어넘듯이 머리 밑이 쭈삣하였다.

무슨 까닭인지 근자에 며일 동안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사진관의 문은 닫혀 있었다.

이렇게 연 며칠을 두고 더운 여름 밤에 문을 닫고 있는 사진사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하였다. 한번 찾아 들어가서 만나 보고 싶기도 하였으나 그리 신통치도 않았던 과거를 되풀이하여서는 무엇하리――하는 생각에 닫힌 문을 요행으로 알고 다니었다.

 

이렇게 지나기를 한 주일이나 지나친 어느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비 갠 아침에 병일이는 사무실 책상 앞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평양에 장질부사가 유행하여 사망자 다수라는 커다란 제목이 붙은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가 부립 P 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죽었다는 사람의 씨명(성명과 이름) 중에 이칠성이라는 세 글자를 보았다. 병일이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였으나 주소와 직업으로 보아서 그것은 칠성사진관 주인인 이씨임에 틀리지 않았다.

병일이는 지금껏 자기 앞에서 이야기를 하여 들려주던 사람이 하던 이야기를 마치지 않고 슬쩍 나가 버린 듯이 허전함을 느끼었다. 그 얘기는 영원히 중단된 얘기로 자기의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병일이는 뒤대어 오는 전화의 수화기를 떼어 들고 메모에 연필을 달리면서도 대체 사람이란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에 받던 전화에 말을 잊게 되어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하고 물었다.

 

병일이는 사진사를 조상할(조문하다) 길이 없었다. 다만 멀리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광산 화장장에서 떠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사진관 앞에서 이삿짐을 실은 구루마가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계집애인 듯한 어린것을 등에 업고 5, 6세 된 사내아이 손목을 잡은 젊은 여인이 짐 실은 구루마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병일이는 그것이 사진사의 유족인 것을 짐작하였다.

병일이는 뒤로 따라가다가 그들이 서문통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병일이는 공장으로 가면서,

"산 사람은 아무렇게라도 죽을 때까지는 살 수 있는 것이니까……."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자기가 어렸을 때 부모상을 당하고 못 살 듯이 서러워하였던 생각을 하였다.

저녁에 돌아갈 때에는 현관의 문등은 이미 없어졌다. 그리고 역시 불이 꺼진 쇼윈도 안에는 사진 대신에 '셋집'이라고 크게 쓴 백지가 비스듬히 붙어 있었다.

어느덧 장질부사의 흉스럽던 소식도 가라앉고 말았다. 홍수도 나지 않고 지루하던 장마도 이럭저럭 끝날 모양이었다. 병일이는 혹시 늦은 장맛비를 맞게 되는 때가 있어도 어느 집 처마로 들어가서 비를 그으려고 하지 않았다. 노방의 타인은 언제까지나 노방의 타인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더욱 독서에 강행군을 하리라고 계획하며 그 길을 걸었다.

 

<이해와 감상>

발표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심리 소설적 기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작가 최명익의 심리 묘사가 빛을 발하는 이 작품에는 모멸감을 참아 가며 공장의 회계일을 한다는 걸 제외하면 특별히 자기 일이라는 것을 갖지 못한 병일이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그가 사는 도시에 비가 내린다. 장마철의 음울한 분위기는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현실처럼 무겁게 작품 전편을 짓누른다. 공장과 하숙을 오가다 만난 사진관 주인 이칠성의 등장은 장면 전환을 꾀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세상사의 물리가 트인 사람처럼 병일에게 이런 일, 저런 일에 대해 훈수를 한다. 하지만 그는 오늘내일하는 옛 스승의 사진관을 물려받겠다는 바람과 달리, 자신이 먼저 유명을 달리한다. 병일은 속물인 사진관 주인의 삶도, 그와 대조적인 자신의 삶도 긍정하지 못하는 자신을 뼈저리게 자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