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 배경 고사

<제5장>

전절 : 칠수와 저수(지금의 중국 섬서성에 있는 두 강의 이름)는 빈 땅이다. 태왕 고공단보는 적인(狄人)을 피하여 기산 밑으로 옮겨가 살았는데(제4장 참조), 칠수와 저수 강가에 살 때에는 한동안 움을 파고 거기에서 고생스럽게 살았다. 이 움이 후세까지 남아 있었는데, 주공 때에 이르러 주공이 그의 어린 조카인 성왕(成王)에게 그 움을 가리키며 시(詩)를 지어 주나라의 제업이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하여 더욱 부지런히 지켜 나가야 할 것을 경계하였다. '후성(後聖)'은 물로 '주공'을 가리키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주 나라의 벋어남이 / 오이덩굴 같으나 / 처음 칠·저강 가에 살 제는 /

고공단보께서는 / 움을 파고 계시며 / 집도 방도 없었다오.

후절 : 제4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익조가 경흥에서 목조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데, 그 위덕이 점점 성해져서 인심이 다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러자 천호(千戶)들이 그를 모함하여 죽이려 하였으므로, 배를 타고 두만강을 내려가 적도(블근 셤)에 이르러 움을 파고 고생스럽게 살았다. 그때의 그 움이 세종 때까지도 남아 있어 볼 수가 있었으니, 왕업의 어려움이 이러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물론 이 노래를 지을 당시를 말한다.

 

<제6장>

전절 : 상나라는 당시 중국에 있던 나라 이름인데, 은(殷)나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은 나라가 쇠망하고 주 나라가 천하를 맡게 되는데, 주 나라 태왕 고공단보가 기산으로 옮아갈 때에 서수(칠수와 저수를 가리킨다) 강변에 움을 파고 살았으나, 빈곡 백성들이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그의 덕을 사모하고 따라와서 그 서수 가가 성시를 이루었다.

후절 : 고려의 국운이 쇠퇘해감에 따라 장차 새나라를 이씨에게 맡기려고 하늘이 인심을 목조에게로 돌려, 그가 전주를 떠나 강원도 삼척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때 그의 덕을 사모하여 전주 백성 1백 7십여 호가 따라갔다. 목조가 삼척에 있을 때, 새로 도임한 원이 전주에 있을 때에 자기를 쫓아내게 한 사람이었으므로 다시 동해 바다를 건너 함경도로 이사갈 때에 또 1백 7십 여호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이런 일이 다 이씨가 새나라를 맡아 다스리게 될 징조인데, 그것이 다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제9장>

전절 : 무왕이 하늘의 뜻을 받들고 상 나라의 못된 임금 주왕(紂王)을 치고 선정을 베풀어 그 위세가 나라 밖에까지 미치었다는 이야기인데,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는 술과 음탕한 짓을 좋아하여 달기라는 여자에게 빠져서 그녀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매일같이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그 학정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므로, 무왕은 태공망을 그 스승으로 삼고 주공 단의 보필을 얻어 주왕을 치니, 사방 제후들이 다 그를 도왔다. 그리고 무왕이 선정을 베풀어 그 교화가 사방에 미치어 서쪽 오랑캐까지도 모여들었다.

후절 : 고려의 폐왕인 '신 우'가 최영과 모의하여 요동을 치려고 할 때에 태조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는 것이 잘못이요, 둘째로 더운 여름에 군사를 움직이는 것이 잘못이요, 셋째로 전군을 동원하여 원정을 하게 되면 왜가 그 틈을 타서 쳐들어 올 것이이요, 넷째로 바야흐로  덥고 비가 내려서 활이 녹고 대군이 병에 걸릴 것이니 불가하다고 반대하였다. 그래도 강행하자 태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기를 들었는데, 그때 태조에게로 달려온 사람이 함경도 백성과 여진족가지 1천여 명에 달하였다.

 

<제10장> : 이 10장은 앞의 9장의 내용을 부연 강조한 것임

전절 : 폭군 주왕의 학정에 시달린 백성들이 무왕이야말로 우리의 임금이라 하여 여러 색깔의 비단을 대그릇에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 주왕을 치는 무왕을 환영하였다는 말임.

후절 : 태조가 반기를 들고 회군하자 동북면의 많은 백성들과 여진 사람들이 음식과 술을 마련해 가지고 와서 그를 환영하였다는 말이다.

 

<제11장>

전절 : 주나라 문왕 때에 이웃에 있던 우나라와 예나라가 밭의 경계를 가지고 서로 다투다가 문왕에게 그 시비를 질정(質正)하러 주나라로 들어갔더니, 거기에서는 밭갈이하는 이가 밭두둑을 서로 양보하고, 길가는 사람들은 서로 길을 비켜주었다. 이 광경을 본 두 사람은 자신들의 행위가 부끄러워서 그만 돌아가 버렸다. 이 소문을 들은 사방의 제후들은 문왕의 덕을 흠모하여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이리하여 문왕은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는 덕이 지극히 높은 인물이었으므로 폭군 주를 치지 아니하고 여전히 섬겼던 것이다.

후절 : 진려는 군사를 돌린다는 뜻이니 '위화도 회군'을 말한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로 백성들의 여망이 태조에게로 모였지만 그는 지극히 충성된 분이었으므로, 자기가 왕위에 오르지 않고 고려를 중흥시킬 임금으로 공양왕을 세웠다. 즉, 요망한 중 '신 돈'의 씨인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신종의 둘째 아들인 양양공의 6대손인 요를 세워 고려의 왕통을 잇게 하였다 중흥주란 이 공양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12장>

전절 : 주나라의 무왕이 문왕의 뒤를 이어서 5년 동안이나 상나라의 주왕이 개과천선하기를 기다렸으나, 개과천선은커녕 학정이 도리어 날로 더 심해 갔으므로, 드디어 주왕을 쳐 버렸는데, 이것은 주왕을 끝내 섬기려던 아버지 문와으이 뜻을 지키지 못한 일이 되기는 하였으나, 부득이한 하늘의 뜻이었다는 말이다.

후절 : 태조가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워 고려의 중흥을 꾀하려 하였으나, 공양왕은 첫날부터 우왕과 창왕 무리의 참소를 듣고 도리어 그를 모해하려는 흉모가 날로 더해 갔으므로, 정도전 등의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는 뜻에 못 이기어 왕위에 오르게 되어 끝내 고려의 충신이 되려던 평생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일이니, 반역이 아니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제14장>

전절 : 주나라 문왕이 한 번 노하여 주(紂)를 치니, 상나라의 6백 년 왕업이 주나라의 낙양으로 옮겨졌다는 말이다. 상나라는 629년(또는 644) 동안 계속되었다. '일노(一怒)'는 <맹자>에 있는 말로 '孟子曰 武王一怒而安天下之民'임.  무왕이 주왕을 친 뒤에 서울을 낙양으로 옮길 생각으로 구정(九鼎)을 그곳으로 미리 옮겨 두었는데, 그의 아들 성왕과 그 아우 주공이 그 뜻을 받들어 낙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후절 : 성자는 태조를 가리킨다. 태조가 왕이 되라는 권고를 세 번이나 사양하였지만,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여망을 저 버리지 못하여 새나라를 세워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었다. 고려의 왕업은 475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줄잡아 500년 왕업이라 부른다.

 

<제15장>

전절 : 진시황 때에 점쟁이가 말하기를 양자강 남쪽 금릉(지금의 남경 땅)에는 천자가 일어날 기운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막으려고 많은 죄수들을 보내어 산을 뚫고 개천을 만들어 지맥을 끊고, 또 그 이름 금릉을 말릉으로 고치었다. 그러나, 결국 뒤에 7대, 곧 오(吳) · 진(晉) ·  송(宋) · 제(齊) · 양(梁) · 진(陳) · 명(明)의 일곱 나라가 그 곳을 도읍지로 삼았다.

후절 : 고려 태조 왕 건은 훈요십조를 지어 자손들을 경계하였는데, 그 중에 공주강밖(公州江外)은 그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반역)의 형국을 이루고 있으니 그 이남 사람들을 조정에 참여시키거나, 왕실과 혼인하여 정권을 잡게 하면 나라에 변란이 일어날 것이니 등용하지 말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구변지국이 어찌 사람의 뜻이겠는가. 조선 왕조가 전주에서 일어나지 않았는가. 국(局)은 도국(圖局)으로서 단군 때에 신지가 만든 도참(예언서)의 이름인데, 여기에는 동국의 서울이 아홉 번 바뀔 것을 말하고, 아울러 조선 왕조가 천명을 받고 도읍을 세울 사실이 예언되어 있다고 한다.

 

<제16장>

전절 : 수(隨)나라의 이 밀(李密)이 양제(煬帝)에게 죄를 짓고 망명하여 다니면서도 여러 번 어려운 고비에서 목숨을 부지하였으므로, 자기의 명은 하늘이 준 것으로 믿고 있었다. 또 그 때에 '도리자(桃李子)가 임금이 된다'는 민요가 나돌았으므로 이 밀은 자기가 수나라를 대신하여 새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일어난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을 만나보고, 이세민이야말로 참된 영주라고 탄복하였으니, 자기가 이제까지 헛물 켠 일이 두고두고 부끄러운 노릇이 아니냐?

후절 : 단군 때의 사람이라는 신지와 신라 말엽의 스님 도선의 도참에 이씨가 한양에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고려 숙종 때에 이를 미리 막으려고 한때 한양에 남경을 창건하여 서울을 옮겨 보기도 하고, 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골라서 한양부윤을 삼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생각해 보면 그것들이 부질없는 일이요, 웃음거리밖에 안된다는 말이다.

 

<제17장>

전절 : 당나라 고조가 태원 유수로 있을 때에 침입해 온 돌궐족과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문책을 당할까 보아 몹시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 때에 작은 아들 이세민(당 태종)이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무도하여 백성이 곤경에 빠지고, 진양성 밖이 온통 싸움터가 되었는데, 아버님이 조그마한 절개를 지키다가 화를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민심에 순응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전화위복이 될 것이며, 이것이 또한 하늘의 뜻입니다."

하였다. 또, 배 적이라는 사람이 진양 궁감으로 있을 때에 고조에게 궁녀를 바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이 탄로되면 다 죄를 입을 것이니, 세민의 말대로 의거하기를 권하였다. 한편, 수나라의 양제는 고구려를 치려다가 도리어 패전의 고배를 여러 번 마시고는 유흥으로 날을 새우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갔다. 이제 더 늦출 수가 없어, 양제가 강도에 거둥하였을 때를 틈타 드디어 거사를 하게 된 것이다.

후절 : 태조의 고조인 목조가 관기의 일 때문에 전주의 원과 틈이 생겨 도망하여 강원도 삼척으로, 함경도 덕원으로 옮아가 살게 된 것이 다 북쪽에서 왕업의 기초를 닦기를 하늘이 재촉한 것이라는 뜻이다.

 

<제18장>

전절 : 한나라의 고조 유 방이 사상 정장으로 있을 때에 진시황의 장지(葬地)인 여산으로 인부를 인솔하고 갔는데, 도중에서 도망쳐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사람도 남을 것 같지가 않아서 짐짓 다 놓아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중 10 명의 장사가 끝내 그를 따라가기를 원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열 사람의 마음을 달래어서 그를 따르게 한 것이다.

후절 : 목조가 전주에서 피신하여 강원도 삼척에 이사해 가서 살 때에 새로 도임한 안렴사가 전주에서 그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꺼려서 바다를 건너 함경도로 다시 이사할 때에 1백 70여 호가 따라 갔다. 이것은 목조가 청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제19장>

전절 : 후한의 광무제가 왕 랑(王郞)에게 쫓기어 달아날 때에 하박성을 찾아 갔으나 성문이 굳게 닫히고 받아주지를 않아서 어디로 갈지 갈 바를 몰라하는 참에, 웬 흰옷 입은 늙은 할아비가 나타나 신도성이 여기서 80리인데 그리로 가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곳 성주 임 광이 기꺼이 맞이하여 서로 힘을 모아 왕 랑을 쳤다. 그 늙은이는 곧 하늘이 보낸 신인(神人)이었던 것이다.

후절 : 익조의 위세와 덕망이 날로 성해 가자, 여진의 다른 천호들이 그를 시기하여 익조를 죽이려고 계책을 꾸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서로 모여서 놀기를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 오지 않으므로 해관성으로 찾아가는데 도중에 한 노파가 나타나, "여진 천호들이 공을 죽이려고 청병하러 갔다. 위험하니 곧 몸을 피하라."하였다. 그래서, 익조는 적도(블근 셤)로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제20장>

전절 :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가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쫓기는 몸이 이 강을 건너야 살겠는데, 배가 없어 건너지를 못한다. 그 때에 하늘이 강물을 얼게 하여 도망쳐 건널 수가 있었고, 뒤쫓아 온 적이 건너려니까 그때 갓 언 강물을 녹혀서 못 건너게 했다는 이야기다.

후한의 광무제가 왕 랑에게 쫓기어 호타하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왕명을 받은 장수 왕 패가 강가에 가 보니 성엣장이 둥둥 떠 있어 배가 아니면 건널 수가 없었으나, 왕 패는 왕을 따르는 군사가 놀랄까 염려하여 얼음이 얼어서 건널 수가 있다고 거짓 복명하였다. 모두들 마음을 놓고 강가에 와 보니 과연 얼음이 얼어서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다. 그러나, 왕 랑의 군대가 뒤쫓아 왔을 때에는 이미 얼음이 녹아서 못 건너고 말았다. 이것은 천하는 광무의 것이요, 왕 랑 따위에게 넘겨줄 수가 없어 하늘이 그렇게 도운 것이다.

후절 : 앞장에서 말했듯이 익조가 여진의 무리에게 쫓겨 붉은 섬(적도)으로 건너가려고 바닷가에 와 보니 붉은 섬까지는 물의 넓이가 6백 보나 되는데, 배도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물이 줄어서 물의 넓이가 1백여 보밖에 안되었으므로 말을 타고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진의 무리가 뒤따라 왔을 때에는 물이 다시 깊어져서 허탕을 치고 돌아가 버렸다. 이것은 삼한의 땅을 이씨에게 맡기기 위하여 하늘이 도와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제21장>

전절 : 송나라 진종(眞宗)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옥황상제에게 빌었다. 이에 옥황상제가 여러 신선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였으나 진종의 아들로 인간 세상에 내려가겠다는 신선이 없었다. 다만 적각 대선이 홀로 빙그레 웃었으므로, 그를 내려가게 하였으니 그가 곧 인종(진종의 아들)이다. 하늘의 뜻이 이미 송나라로 하여금 천하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으니만큼, 설사 적각 선인이 아닐지라도 진종의 후사를 끊어서 천하의 백성들을 저버리었겠는가.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절 : 익조가 정숙왕후와 함께 강원도 양양 낙산 관음굴에서 아들을 빌었더니,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선래(善來)라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도조의 어릴 적 이름이 선래다. 하늘이 이미 잘 선택해서 이씨에게 해동 나라를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니, 설사 누비중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조선 백성을 하늘이 저버리겠는가. 이씨 왕조는 미리 정해진 하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제22장>

전절 : 적제는 한나라 고조인 유방이요, 백제는 진나라의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씨는 방향으로는 남쪽이니 5행(五行)의 화(火)에 해당하며, 5색으로는 빨강이니 적제(赤帝)요, 화덕지왕인 것이다. 잉 대하여 진나라는 방향으로 서쪽이니 5행으로는 금(金)이요, 5색으로는 백(白)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나라 고조 유방이 진나라의 왕자영에게 항복받은 이야기다.

유방이 사상 정장으로 있을 때에 여산 역도가 다 도망쳤으나 남아서 그를 따른 장사 10여 명을 데리고 되돌아갈 때의 일이다. 앞에서 가던 사람이, "앞에 큰 뱀이 있으니 되돌아가야겠습니다." 하였으나, 유방은, "장사가 가는 길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하고, 나아가 그 뱀을 한칼에 베어 죽였더니, 한 노파가 나타나 통곡하면서, "내 아들이 백제자(白帝子)인데, 뱀으로 둔갑해 있다가 적제자에게 살해되었다."고 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노래 속의 '신파'란 이 노파를 가리키는 말이다.

후절 : 도조가 하루는 꿈을 꾸었더니, "나는 백룡으로서 아무곳에 살고 있는데, 흑룡이 내가 사는 곳을 뺏으려고 하니, 공이 와서 나를 구해주소서." 하였다. 도조는 별로 이상히 여기지 않고 있었는데, 꿈에 또 다시 와서 청하므로, 활을 들고 가 보았더니, 흑·백 두 마리의 용이 싸우고 있으므로, 그 중의 흑룡을 한 살에 쏘아 죽였다. 그랬더니, 그 백룡이 다시 꿈에 나타나, "장차 공의 자손에게 큰 경사가 있을 겁니다." 하였다고 한다. 노래 속의 '신물'이란 이 백룡을 말한다.

 

<제23장>

전절 : 후당 태조 이극용과 달단부인이 활재주를 겨루었는데, 달단이 극용에게 날아가는 두 마리 속수리를 쏘라고 하므로, 극용이 활을 들어 한 살에 두 마리의 독수리를 꿰뚫었더니 달단이 탄복하였다.

후절 : 제7장에서 이미 보았듯이, 도조가 두 마리 까치를 한 살로 쏘아 떨어뜨렸다.

 

<제24장>

전절 : 후주의 태조가 죽자 북한주(北漢主) 유 숭이 매우 기뻐하여, 거란에 군사를 청하여 후주로 쳐들어갔다. 그 때 조광윤(뒤에 송나라 태조가 됨)이 남들은 도망쳐 달아나거나 항복하거나 하였지마는 홀로 싸워 새 임금 세종을 구하였으며, 뒤에 세종이 남당(南唐)을 칠 때에는 그를 받들어 육합현(六合縣)에서 남당의 군대를 크게 무찔러 그 정예 군졸을 섬멸하였다. '임금'은 후주의 세종을 가리킨다.

후절 : 환조가 쌍성 등지의 천호로 있을 때에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씨가 고려 사람이었는데, 그의 오라비 기철이 원나라의 대사도로 있으면서 쌍성의 반역자들과 통하여 반역을 꾀하였다. 환조는 공민왕을 받들고 쌍성 총관부를 쳐서 화주(지금의 영흥) 등 여덟 주와 선덕 등 여러 성을 수복하였는데, 하란(지금의 함흥)  · 훙컨(지금의 홍원) · 삼산(지금의 북청) 등지는 고종 때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것을 90 년만에 되찾게 되었다. 왕은 환조에게 사복경의 벼슬과 집을 주어 서울에 살게 하였다. 그러나 그 아우 자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만 환조는 그 아우와는 생각이 달라서 '나라에 돌아와'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위하여 쌍성의 역적을 평정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제26장>

전절 :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이 진양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둘째 아들 세민(태종)의 계책이었다. 그리하여 태조가 말하기를, "만약 이 일이 성공하면 이것이 다 네 공이니 너를 태자로 삼겠다." 고 하였으나, 세민은 이것을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명이 날로 성해 갔으므로 맏아들 건성이 이를 시기하여 셋째 아우 원길과 더불어 세민을 모해하려고 하여 불화가 심하였다. 이에 고조는 세민을 장안의 동쪽 8백 5십 리에 있는 낙양으로 보내려 하니, 건성의 무리는 그렇게 되면 세민의 위세가 더욱 강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백방으로 참소를 하여 못 가게 막았다. 이 세민을 동도 낙양에 보내는 것을 건성과 원길이 참소로써 말렸지만, 결국 이 세민이 태종이 되어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이곳(장안)에 있으나 저곳(낙양)에 있으나 결과에 있어 매한가지가 아니냐. 정해진 하늘의 뜻이니까 말이다.

후절 : 고려 공민왕이 환조를 삭방도(북도) 병마사로 삼았더니 어사대에서 상소하기를, "환조는 본디 동북면 사람이요, 또 천호까지 지낸 사람이므로 그 곳 병마사로 보내면 안됩니다." 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환조를 북도에 보내는 것을 글월(상소문)로 말리었는데, 북도로 갔거나 여기에 남아 계시거나, 그의 아들 태조가 왕이 됨에 있어서는 그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임.

 

<제27장>

전절 :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활이 보통 것의 갑절이나 되었다. 태종이 유혹달과 싸울 적에 돌궐족의 용맹한 장사 한 사람이 돌진해 오는 것을 쏘아 죽였더니, 화살이 등을 꿰뚫었다. 그 살이 북번에 전하는데, 돌궐이 그것을 보고 경탄하여 태종을 신인(神人)이라 불렀다. 뒤에 큰 활 하나와 살 다섯 대를 얻어서 무기고에 간직하여 세보(世寶)로 삼았다.

후절 : 태조 이성계의 활도 커서 힘이 갑절이나 들었지만 살의 크기와 무게가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젊었을 때에 아버지 환조를 따라 사냥을 갔을 때에 환조가 태조의 그 활을 들어 보고, "이것이 사람이 쓰는 것이냐?" 하고 땅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 때에 노루 한 마리가 뛰어 나오는 것을 태조가 말을 달려 쏘아 잡았다. 이리하여 잇따라 7마리를 쏘아 잡으니 환조가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제28장>

전절 : 한나라 고조 유방의 이야기로 관상을 잘 보는 여공(呂公)이라는 사람이 원수를 피하여 패령(원님)의 집에 와 있었는데, 그 때에 마침 유방이 정장(亭長)으로 있으면서 패령을 찾아왔다. 여공이 유방의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 "내가 여러 사람의 관상을 보았으나 이런 상은 아직 본 일이 없습니다. 자애(自愛)하소서." 하고는 그의 아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의 딸을 유방에게 주었다. 얼마 안 지나서 그의 예측대로 유방은 한나라의 고조가 되었는데, 이 여공의 딸이 저 유명한 여후(呂后)가 된 것이다. 원 패령의 집에 원수를 피하여 와 있는 손님 여공의 예언이 전한과 후한의 옛일과 맞아 떨어지지 않느냐는 말이다.

후절 : 환조가 함경도에 있을 때에 동북면도순문사 이달충이 찾아 왔다. 서울로 돌아갈 때에 들에서 배웅하였는데, 태조가 아버지 환조 뒤에 서 있었다. 전별의 술을 권할 적에 환조가 권할 때에는 달충이 선 채로 받아 마시고, 태조가 권할 때에는 꿇어 앉아서 술잔을 받았다. 환조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달충의 말이 "이 아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오, 공의 가업을 반드시 대성할 것이오." 하였다.

 

<제29장>

전절 : 한나라의 국운이 비록 쇠하였으나, 그 후손인 유비가 제갈공명의 도움을 얻어 중흥시켰다는 말

후절 : 고려말의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려고 나신 분이라, 태조의 생김새가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명나라의 조사 유사길이 태조의 귀가 큰 것을 보고 칭찬하였다.

 

<제30장>

전절 : 후당 태조 이극용이 후량 태조 주전충의 꾀임에 빠져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주전충 군사의 침입을 받았다. 때마침 뇌성벽력이 천지를 뒤흔드는 캄캄한 밤이었으나, 번갯불 빛이 어두운 길을 비추어 주어 가까스로 도망칠 수가 있었는데, 이것이 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후절 : 태조가 젊어서 들에 사냥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난데없이 갈대밭 속에서 한 마리의 표범이 갑자기 뛰어 나왔다. 불의의 습격이라 손 쓸 틈도 없이 달아나는데, 앞에는 깊은 못이 있었다. 얼음도 아직 엷어서 사람이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탄 채 용케 건널 수가 있었다. 이것은 하늘이 엷은 얼음을 굳혀 준 것이다.

 

<제31장>

전절 : 당태종 이세민은 그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의 모함과 박해를 수없이 받았다. 그런데, 하루는 고조가 세 아들을 데리고 나가 사냥의 경쟁을 시켰다. 건성은 세민에게 잘 넘어지는 다리 저는 되말을 타라고 주었다. 세민이 이것을 타고 사슴을 쫓는데 말이 자꾸 넘어지곤 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세민은 다치지 않고 성큼 내려서 말이 일어나면 다시 타곤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고 말하기를, "이런 말을 주어 나를 죽이려 하지만, 죽고 사는 것이 천명에 달렸는데, 어찌 함부로 상하리요." 하였다. 하늘이 내신 30년 천자인데, 그를 모함하는 나쁜 꾀가 이루어질 수가 있겠느냐.

후절 : 태조가 젊었을 적에 산기슭에서 사냥을 하면서 멧돼지 한 마리를 쏘려 달리다가 문득 백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에 다다랐는데, 그 거리가 한 자밖에 안 되는 곳에서 갑자기 말 뒤로 뛰어 내려 우뚝 섰으나, 멧돼지와 말은 그대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버렸다. 또, 장단(長湍)에서 사냥할 때에 절벽 위를 지나는데 나타난 노루를 쏘려고 말에 채찍을 가하여 달리니, 따르는 사람들이 대경실색하였다. 그러나 태조가 앞의 노루를 맞히고 급히 말머리를 돌려 세우니, 절벽에서 수보(數步)의 거리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랐으나 태조는 웃으면서, "내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멈추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수만 리의 임', 곧 우리나라의 임금인데, 하늘이 그렇게 함부로 떨어져 죽게 하겠는가, 수만 리는 우리나라의 둘레를 말한 것이다.

 

<제32장>

전절 :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휘종 · 흠종 두 임금과 왕비 등 3천여 명이 북으로 잡혀갔다. 흠종의 아들 고종이 일어나 근왕병을 모았는데 상주 비선정에서, "이 현판의 글자를 차례로 맞추면 반드시 서울에서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하고, 활을 당겨 쏘았더니, 과연 세 발을 쏘아 세 번 다 차례로 맞추었다. 그랬더니 모두 감동하여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비록 중원에서는 쫓기었으나 남경에서 왕위에 올랐다. 송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하늘이 고종에게 그런 재주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후절 : 태조가 어느 더운 여름 날 목욕을 하고 나서 냇가에 앉아 있는데, 근처 숲 속에서 큰 담비 한 마리가 뛰어 나왔다. 얼른 활을 들어 나무 화살로 쏘니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또 한 마리가 나오는 것을 이번에는 쇠화살로 쏘았다. 이리하여 잇달라 스무 마리를 모두 쏘아 잡았다. 태조의 활 솜씨가 이렇게 신묘하였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하늘이 내신 재목이 분명하지 않은가.

 

<제33장>

전절 : 수나라의 양제가 북새(北塞)를 순행 중에 돌궐의 습격을 받아 안문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부근의 41성이 겨의 다 돌궐에게 항복하고, 오직 이 안문과 다른 한 성만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 안문도 돌궐에게 포위되어 적의 화살이 어전에까지 떨어지자 양제는 겁에 질려 그 아들을 안고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다. 이 때에 이세민이 16세의 어린 나이로 구원병에 참가하여 운정흥 장군을 따라서 수 양제를 구하러 갔다. 이 때에 이세민은 의병법을 쓰기를 권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돌궐이 안문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후절 : 고려 공민왕 때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서울(송도)에까지 쳐들어왔으므로, 임금은 난을 피하여 경안역(경기도 광주)을 지나 안동에까지 이르게 되니 임진강 이북이 완전히 적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 때에 태조가 2천여 명의 친병을 이끌고 맨먼저 서울로 쳐들어가 적의 우두머리의 목을 베고 적을 모조리 소탕하였는데, 적의 시체가 10만을 넘었다.

 

<제34장>

전절 :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요(거란)나라 황룡부를 칠 때에 혼동강(흑룡강)에 이르니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 때에 태조는 한 사람을 앞세우고 말을 타고 건너면서, "내 채찍이 가리키는 대로 가라" 하니, 모든 군사가 따라 건넜다. 그런데 물의 깊이는 말 배에 닿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 건너고 나서 뱃사공에게 그 물 깊이를 재게 하였더니, 깊어서 밑까지 닿지가 않았다.

후절 : 태조가 송도에 들어온 홍건적을 칠 때에, 밤중에 적이 포위망을 뚫고 동문으로 달아나려 할 때에 달려가 보니, 적과 아군이 뒤섞이어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 북새통에 태조는 오른쪽 귀를 뒤로부터 적의 창에 찔리었다. 사태가 다급하여 앞에 있는 7~8명을 베고, 말을 탄 채 성을 뛰어넘었으나 말과 사람이 다 무사하였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제35장>

전절 : 당태종 이세민이 그의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니, 돌궐이 당나라 서울에 내란이 있을 것으로 잘못 알고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그러나 태종이 군대를 정비하고 단기(單騎)로 쳐 나아가 돌궐을 물리쳤다.

후절 : 원나라의 승상 나하추가 함경도 지방에 침입해 왔으므로, 태조가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홍원 · 함흥 등지에서 나하추의 군대와 싸워 여러 번 이기고 적군을 무찌르고 또 사로잡기도 하였다. 한 번은 요소요소에 복병을 매복시켜 놓고 군사를 3군으로 나누어 자기는 중군을 거느리고 함흥 평야에서 나하추와 맞붙였다. 한참을 싸우다가 거짓 패한 체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니 적군은 멋도 모르고 추격하여 왔다. 적을 깊숙이 끌어들인 다음 좌 · 우군과 복병이 합세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에 뒤쫓아 오는 적장 세 사람이 있었는데, 태조가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어 오른쪽으로 꺾어 빠지니 적장이 말을 멈추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고 나서 급히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니, 그 말이 입을 크게 벌리는 것을 그 입에다 활을 쏘아서 죽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적장 세 사람을 잡기도 하였다.

 

<제36장>

전절 : 당나라 고조가 그의 아들 건성과 세민과 함께 수나라 공제(恭帝)를 칠 때의 일이다. 형 건성이 적병에게 쫓기어 말에서 떨어진 것을 본 아우 세민이 비탈길을 급히 달려 내려가 수십 명을 베어 죽였는데, 이 때에 두 자루의 칼이 다 부러졌다.

후절 : 앞장에서 본 바와 같이 태조가 말을 채찍질하여 거짓 후퇴하는 것을 적장 세 사람이 좋아라고 급히 추격해 오는 것을, 태조가 갑자기 말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비키었다가 멈추지 못하고 그냥 달리는 적장 세 사람을 세 살에 다 거꾸러뜨렸다. '길 버서 쏘샤'는 이 장면을 말한 것이다.

 

<제37장>

전절 : 조조가 한나라의 헌제를 허현으로 옮기고 스스로 대장군 · 무평후가 되니, 천하는 조씨의 것이 되고, 천자는 그 자리만 유지할 뿐이었다. 그 때, 촉한주인 유비가 번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형주목 유표가 찾아왔다가 그 사람됨이 비상함을 보고 마음 속에 꺼려 술자리를 베풀고 죽이려 하였다. 유비가 그것을 눈치채고 뒷간에 가는 체 속이고 애마 적로(的盧)를 타고 도망하다가 양양성 서쪽 단계수에 빠져 헤어나오지를 못하게 되었다. 유비가 다급하여, "적로야 오늘 같은 난국에 힘을 내어라" 하고 외치니, 적로가 세 길이나 뛰어올라 물에서 빠져 나왔다.

후절 : 원나라의 기황후(고려의 여자임)의 오라비 기철이 지나친 세도를 부리다가 공민왕에게 미움을 사 멸족을 당하였기 때문에 기황후는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고려에서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 그 때 태조가 우익이 되어 싸우다가 말이 수렁에 빠져 사태가 위험하게 되었으나 말이 몸을 날려 뛰어나오니 모두가 경탄하였다. 하늘이 충신의 지성을 알고 수렁의 여린 흙을 굳혀 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제38장>

전절 : 사정 무적은 직역하면 사방을 정벌하여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은나라의 성군 성탕(成湯)이 잘 다스려지지 못한 나라 11나라를 정벌하였는데, 그 나라 백성들이 서로 성탕 임금이 빨리 자기 나라를 정벌해 주기를 마치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 하였다. 탕왕이 자기 나라에 오시어야 자기들을 살려줄 것이므로, 동에 가면 북쪽 나라가 그가 와 주기를 바랐다는 말이다.

후절 : 태조의 용병술이 귀신 같아서 일찍이 원나라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싸울 때마다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방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이다. 이를 테면,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는 태조의 고종 형제인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태조가 원나라 기황후의 침략을 막으러 간 틈에 여진을 꾀어서 북쪽 변경을 침노하였다. 관군이 여러 번 막아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여 태조가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태조가 돌아오니 삼선 · 삼개는 여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제39장>

전절 : 진시황이 동남쪽 초나라 방면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자신이 그 방면에 거둥함으로써 그 천자의 기운을 막으려고 하였다. 즉, 거기에서 다를 천자가 나지 못하도록 애를 썼다. 한편, 한나라 고조 유방이 그 쪽에 살고 있었는데, 그 천자기는 자기의 것이라고 깨닫고 으슥한 곳에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에 여후(呂后)가 찾아오곤 했는데, "당신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구름기가 있어 찾기가 쉬웠어요" 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모르고 공연한 애만 태운 진시황의 마음이 그 아니 어리석으냐는 말이다.

후절 : 고려 공민왕이 태조를 동북면 원수로 삼아 동녕부를 쳐서 북원을 막으려 하였다. 태조는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는데, 이 날 저녁에 그 서북쪽에 자기(紫氣, 붉은 기운)가 하늘에 가득하였다. 서운관(기상대)이 말하기를, 그것은 장군의 기운이라 하니, 왕이 매우 기뻐하여 그것은 이장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무'는 태조를 가리킨 것이다.

 

<제40장>

전절 : 당나라 고조가 용문현 싸움에서 화살 70개를 쏘아 적병 70명을 죽였다. 그리하여 적병의 시체가 경관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후절 : 태조가 북원을 칠 때에 추장 고안위가 산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의 군사가 그 성을 에워싸고 성 위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화살 70발을 쏘아 70명의 얼굴을 맞히니, 고안위는 달아나 버리고 여러 두목들은 항복을 하였다.

 

<제41장>

전절 :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에 쳐들어왔다가 안시성 싸움에서 크게 지고 겨우 목숨만을 부지해 돌아갔는데, 이 때에 사로잡은 고구려의 포로들을 도로 다 놓아주니, 고구려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환호성을 올렸다는 이야기다.

후절 : 태조가 북원을 정벌할 때에 크게 이겨, 전리품으로 말 1백여 마리, 소 2천여 마리를 얻었으나, 그것을 다 그 임자에게 돌려주니, 태조의 인자하고 정의로운 군사를 온 요동 백성들이 다 기뻐하여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는 이야기다.

 

<제42장>

전절 : 원나라 태조가 회회국을 치고 인도국 철문관으로 나아갔을 때에 사슴 모양에 말꼬리를 하고 외뿔을 가진 짐승이 나타나 사람의 말로써, "너희 군사는 빨리 돌아가라" 하였다. 태조가 이상히 여겨 야율초재에게 물었더니, 술수에 능통한 그가 말하기를, "이 짐승의 이름은 각단이라고 하는데, 하루에 1만 8천 리를 가며,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압니다. 폐하의 서방 정벌이 이미 4년이 지났으므로, 하늘이 살생을 싫어하여 이 짐승을 보낸 것입니다" 하므로, 그의 말에 따라 곧 회군하였다.

후절 : 기황후의 오라비인 기철의 아들이 원나라를 섬기어 평장 벼슬에 있었는데, 원나라가 망하자 무리를 동녕에 모아 그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고려의 국경을 쳐들어오려 하였으므로, 태조가 압록강을 건너가 동녕성에서 이를 쳤다. 이날 밤 하늘에서 붉은 기운이 뻗쳐 그의 군영을 비추었다. 일관이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군영에 뻗치니 군대를 옮겨야 하겠습니다"하였으므로, 그의 말대로 군사를 돌려 야숙을 하기로 하고, 군졸을 시켜 뒷간과 외양간을 짓게 하였다. 적군은 이것을 보고, "뒷간과 외양간을 지은 것은 군용이 다 정돈된 것이니 칠 수가 없다" 하고 돌아가 버렸다.

 

<제43장>

전절 : 당나라 현종이 일찍이 사냥을 나갔을 때에 현무북문에서 한 살에 두 마리의 멧돼지를 맞추었는데, 그 광경을 위 무첨에게 그리으로 그리게 하여 전하였다.

후절 : 태조가 일찍이 함경도 홍원 졸애산에서 사냥할 때, 세 마리의 노루가 한꺼번에 뛰어나오는 것을, 말을 타고 먼저 그 중 한 마리를 쏘아 쓰러뜨리고, 또 두 마리가 나란히 달아나는 것을 꼬치처럼 한 살에 두 마리를 꿰고 화살 끝은 나무에 박혔다. 그 하늘이 내신 재주를 당나라 현종처럼 꼭 그림에 그리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지 않더라도 태조의 뛰어난 활솜씨는 온 천하가 다 아는 터이라는 뜻이다.

 

<제44장>

전절 : 당나라 선종이 공치기를 썩 잘해서 말을 타고 공을 공중에 던져 올려 수백 번을 잇달아서 치니, 양편 선수들이 모두 탄복하여 마지 않았다.

후절 : 옛날 고려에서 단오가 되면, 임금을 비롯하여 온 서울의 남녀 노소가 구경하는 가운데 네거리 근처에 마련된 경기장에서 무관과 귀족의 자제들이 풍악을 울리는 가운데에서 공치기 경기를 벌이곤 하였다. 공민왕 때에 태조도 이 경기에 출전하여 위에 적은 여러 가지 멋진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제45장>

전절 : 초 회왕이 진나라를 치려고 할 때, 항우가 유방과 함께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늙은 장수들이 말하기를, "항우는 사납고 잔인하니, 너그럽고 온후한 유장자를 보내어 의로써 진나라 백성을 달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므로 그렇게 하였더니 유방은 가는 곳마다 이기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군대는 노략질을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진나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여 다투어 음식과 술, 고기를 대접하였다.

후절 : 고려 공민왕이 경대부들에게 활을 쏘게 하고는 친히 구경하였는데, 태조가 백발백중이므로 공민왕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오늘의 활쏘기에 있어서는 오직 이장군 한 사람뿐이로다." 하였다. 또, 당시 활 잘 쏘기로 천하에 이름이 높은 찬성사 황상과 태조가 덕바위에서 1백 5십 보밖에 과녁을 놓고 서로 활쏘기를 겨루었는데, 황상은 50발을 맞힌 뒤부터는 맞다 안 맞다 하였으나, 태조는 안 맞는 살이 하나도 없었다. 왕이 이를 듣고는, "이장군은 진실로 비상한 사람이로다"하였다. 태조야말로 무덕을 알고 무덕으로서 백성을 구한 분이다.

 

<제46장>

전절 : 신무 숙공 두의가 후주 무왕의누님 양양장 공주에게 장가들을 딸을 낳았는데, 세 살이 되니 머리카락의 길이가 제 키만 하였다. 훌륭하 사위를 맞으려고 문에 공작 두 마리를 그려 두고 활을 쏘아 맞히는 젊은이에게 허혼하기로 하였는데, 맞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오직 당고조 이연이 두 사랄을 쏘아 각각 한 눈씩을 맞추었다. 어진 임금 당고조를 내리고 하늘이 후주 무왕의 부마 두의를 달래어 두 공작을 그리게 한 것이다.

후절 : 고려 공민왕이 작은 은거울 10개를 80보밖에 놓고 활을 쏘아 맞추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기로 하였는데, 태조는 10번을 쏘아 10개를 다 맞추었다. 태조의 성무(聖武)를 보이기 위하여 하늘이 공민왕에게 그렇게 은거울을 놓게 한 것이라는 말이다.

 

<제47장>

전절 : 당태종의 화살에 돌궐이 놀란 이야기는 27장을 참조하기 바람.

후절 : 고려 우왕 때에 경상도 해안에 왜적이 침입하였다. 태조가 지리산에서 이들을 맞아서 쳤는데, 그 때 2백 보쯤 떨어진 곳에서 왜놈 한 사람이 손으로 자기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이쪽을 향하여 욕하는 시늉을 하였다. 태조가 얼른 작은 살을 쏘아 한 살에 쓰러 뜨렸더니, 적들이 겁에 질려 산으로 달아나 버렸다.

 

<제49장>

전절 : 당나라 희종 때에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게 되니, 희종은 성도(成都)로 피난을 하였다. 뒤에 장안을 수복하는데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후당 태조 이극용이었다. 그런데 그는 한쪽 눈이 작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독안룡'이라 불렀다.

후절 : 고려 우왕 때에 왜구가 극성을 부려 강화에까지 쳐들어와 전함을 불사르고 강화부사를 죽일 지경이었다. 최영과 양백연 두 장수가 나가 싸웠으나, 도리어 쫓김을 당하였으므로, 한때 서울이 위태로와 왕과 신하들이 피난 차비를 하고 있을 때에 태조가 기병을 이끌고 나아가서 양백연과 합세하여 적을 대파하니, 적은 거의 섬멸되고 잔당은 도망하였다.

 

<제50장>

전절 : 당나라 현종이 이후(韋后)를 칠 때의 이야기다. 위후는 중종의 왕후인데 중종을 독살하고 자신이 섭정을 하면서 그 일가붙이들을 요직에 앉혔다. 이에 현종이 위후를 치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로 들어갈 때에 하늘에서 별이 눈같이 떨어졌다. 하늘이 현종을 위하여 내린 상서였다.

후절 : 고려 우왕 때에 왜선 5백 척이 충청도와 진포에 머무르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짓이기어 무고한 백성의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다. 태조가 삼도 도순찰사가 되어 왜적을 치려고 진군하였는데, 장단에 이르렀을 때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떠 있었다. 싸움에 이길 징조라는 점장이의 말대로 왜적을 물리치고 백성을 안정시켰다.

<제51장>

전절 : 원나라 태조가 내만부장 태양한을 칠 때의 일이다.  태양한의 부하 찰목합이 태조의 군용이 잘 정돈되어 있고 매우 엄숙하여 그 기세가 지난날과 같이 허술하지 않다고 하여 겁이 나서 달아나 버렸다.

후절 : 앞장인 50장의 내용을 되풀이한 것으로, 태조가 왜구와 싸울 때에 왜장 아기발도가 태조의 진 친 것을 보고 군사들에게, "전날의 다른 장수이 포진과는 아주 딴판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고 하였다. 아기발도는 이 싸움에서 결국 전사하였는데, 그가 만약 나오지 않고 물러났던들 목수을 마치었겠는가 맞서 싸우지 않았더라면 마치지 않았을 것이다.

 

<제52장>

전절 : 후당의 헌조가 토곡혼 도독 혁연탁에게 패하여 그 아들 태조와 더불어 달단으로 망명을 하였다 혁연탁이 달단에게 뇌물을 주고 헌조 부자를 죽이라고 하였다. 태조는 이 사실을 알고 때때로 여러 호걸들과 어울려 사냥을 하면서, 혹은 바늘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혹은 말채찍을 세워 놓고 1백 보 밖에서 쏘아 맞히곤 하니, 여러 호걸들이 탄복하여 감히 해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후절 : 태조가 왜구와 싸울 적에 왜장 아기발도의 용맹함을 아껴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으므로 그의 투구를 쏘아 벗기니, 이두란이 머리를 쏘아 죽였다. 아기발도의 '아기'는 우리말의 어린아기의 아기고, 발도는 몽고말의 용감무쌍하다는 말인데, 그가 어려서부터 용맹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기발도는 왜구로 오기를 싫어 하였으나 그의 용맹을 이용하려고 왜구가 간청을 해서 왔던 것이라고 한다.

 

<제53장>

전절 : 당태종이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부터 풍년이 들어서 여행하는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천하가 태평해지니, 북쪽 오랑캐 돌궐이 투항하여 왔다.

후절 : 삼국 시대 말엽 이래로 평양 이북의 땅은 야인들의 사냥터가 되어 버렸다. 고려 때에 남쪽 백성을 옮겨 살 게 하고, 의주에서 양덕에 이르는 사이에 장성을 쌓아 나라를 지키었다. 또 남쪽 땅에는 왜구가 발호하여 민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태조가 천명을 받은 뒤부터는 교화가 멀리까지 미치어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을 거의 개척하니, 북쪽 백성들이 평안히 살게 되었으며, 왜를 비롯하여 유구, 섬라가 내조(來朝),통상을 다시 하게 되어 남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진도 귀화하는 자가 많아, 그들에게도 만호(萬戶), 천호(千戶)의 벼슬을 주었다.

 

<제54장>

전절 :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항우를 베고 초나라의 땅을 평정하였으나, 노나라만은 항복을 하지 않았다. 고조가 노나라를 치려고 성 밑에 이르니 거문고 타고 노래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고조가 생각하기를, "노나라는 예절과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니 임금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하고, 항우의 머리를 노나라 부형에게 보이었더니 항복하였다. 또한 남해의 조타가 진나라가 쇠한 틈을 타서 스스로 남월(南越)의 무왕이 되었으나 고조가 즉위하자 신하를 자칭하고 투항하여 왔다.

후절 : 원나라의 장수 조무가 원나라가 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공주(孔州) 땅에 웅거하였다. 이때, 태조가 동북면에 있으면서, 그를 치려고 하였는데 조무의 사람됨이 재주있고 용맹함을 아끼어 쇠화살을 쓰지 않고 복두로 쏘아 수십 발을 맞히니, 조무가 말에서 내려 절하고 잡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태조의 심복 부하가 되었으며,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제55장>

전절 : 축록 미기는 사슴을 쫓아서 아직 한 다리를 잡지 못하였다는 말임. 사슴은 황제의 자리를 비유한 것이니, 진나라가 그 사슴을 잃었는데, 초와 한이 서로 그 사슴을 잡으려고 각축전을 벌였으나, 한나라의 고조 유방도 아직 그 사슴의 다리를 못 잡았다는 말이다. 한고조가 광무에서 초나라와 대진하고 있을 때에 북맥 · 연인들이 한고조를 사모하여 날쌘 기병을 보내어 그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다.

후절 : 물 속에 잠겨 있는 용이 아직 풍운을 타고 하늘에 날아 오르지 못할 적이라는 말이니, 태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을 말한다. 53장에서 보듯이 태조의 교화가 멀리 동북면에 미치어 야인 추장들이 활과 칼을 차고 그의 곁을 따라다니면서 그를 모시고 섬겼다.

 

<제56장>

전절 : 당태종의 성교가 널리 미치어서, 불모의 땅까지도 호적에 편입하였기 때문에 혁명 후에 그 백성들이 태종의 후은을 그리워하였다.

후절 : 조선 태조의 위혜가 널리 미치어서 북쪽의 미개한 야인들에게까지도 벼슬을 주어 관복을 입혔더니, 모두 태조의 지덕에 감읍하였다.

 

<제57장>

전절 : 금나라 태조가 15세에 활을 썩 잘 쏘았다. 하루는 요나라의 사신이 부중에 앉아 있다가, 금태조를 보고 새를 쏘아 보라고 하였다. 태조가 세 살을 쏘아 다 맞추니,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기남자(奇男子)로다" 하였다.

후절 : 고려 우왕 때에 여진 사람 호발도가 동북면 백성을 납치해 갔으므로, 그것을 치고 올라 오는 길이었다. 안변에 이르렀을 때에 비둘기 두 마리가 밭 가운데 뽕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한 살을 쏘니 두 마리가 한꺼번에 떨어졌다. 길가에서 김을 매고 있던 한충 · 김인찬이 그것을 보고 탄복하여 태조를 평생 따르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은 뒤에 개국공신의 반열에 참여하였다. 본문에서 '길가엣 백성'이란 물론 이 두 사람을 가리키며, 개국공신이 되었으니 '큰 공을 이룬' 것이 분명하다.

 

<제58장>

전절 : 왕세충이 낙양에서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정(鄭)이라 하니, 당나라 고조가 태종을 보내어 그를 치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세충의 병력이 강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말리었으나 태종은 듣지 않고 나아가 기병 5백 명을 길가에 숨겨 놓고 자신은 겨우 4기(騎)만을 거느리고 나아갔다. 적기 5,6천이 그를 추격하였으나 태종은 말고삐를 당기어 천천히 가다가 뒤쫓는 자가 있으면 쏘아 죽이곤 하면서 복병이 있는 곳까지 끌고 가서 크게 무찔렀다.

후절 : 고려 우왕 때에 왜적의 배 1백 50척이 함경도 동해안 함주 · 홍원 · 북청 등지에 침입하여 노략질이 매우 심하였다. 심덕부 · 홍징 등 여러 장수가 나가 싸웠으나 다 패하였다. 이에 태조가 자청하여 나아가 군사를 산 밑에 숨겨 두고 자신은 1백여 기를 거느리고 적에게 접근하여, 말안장을 모두 벗기고 쉬게 하였다. 그리고 왜말을 아는 사람을 시켜, "우리 장수는 이만호(태조)이니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였으나, 감히 나오지 못하는 적을 꾀를 써서 복병이 있는 곳까지 끌고 와서 크게 무찔렀다

 

<제59장>

전절 : 앞장에서 보듯이 당태종 이세민이 낙양의 왕세충을 치러갈 때에 정예 군사 1천여 명을 뽑아서 모두 검은 갑옷과 검은 투구를 씌워, 좌우 두 대로 나누어, 태종 자신도 같은 차림으로 선봉에 서서 진격하니, 당태종의 위력과 무용을 잘 알고 있는 적이 두려워 항복하였다.

후절 : 이 또한 앞장에서 보듯이 태조가 함경도 동해에 침입한 왜적을 칠 때에, 왜적이 태조의 지략과 용맹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태조의 군사가 한 번 부는 소라 나팔 소리에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는 말이다.

 

<제60장>

전절 : 기묘한 계략을 냄이 끝이 없다는 뜻인데, 당태종이 왕세충을 칠 때에, 기묘한 계략을 써서 대낮에 적진 앞을 유유히 지나갔으나, 세충이 성 위에서 빤히 바라보고도 무슨 계략인지 몰라서 성에서 나와서 싸우지를 못하였다.

후절 : 태조의 용병술이 변화 무궁하다는 말이다. 태조가 왜적을 칠 때, 부하 1백여 기를 이끌고 적들의 사이로 천천히 지나갔으나,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고 동산에 있던 적과 서산에 있던 적이 한 곳에 모였다는 이야기다.

 

<제61장>

전절 : 왕세충의 군사는 당태종의 이름만 듣고서도 놀랐다. 혼자 뒤에서 적의 척후병 수 명을 쏘아 쓰러뜨렸더니, 힘들이지 않고 5천 명의 적군을 이길 수가 있었다.

후절 : 왜적이 조선 태조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하는 터이라, 태조가 손수 적을 쳐서 무수히 죽이고 왜선 1백 50척을 잡았다.

 

<제62장>

전절 : 돌궐족의 힐리 · 돌리 두 가한(可汗)이 쳐들어오니, 당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이를 막아 싸울 때의 일이다. 태종이 자기 이름을 당당히 알리고 혼자 대담하게 나아가 꾸짖으니, 힐리는 생각하기를 혹시 돌리와 무슨 밀약이라도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감히 나와 싸우지 못하고 화친을 청하였다.

후절 : 왜적이 우리 나라 사람을 사로잡아 가면 어김없이 태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 보고, 태조의 군사가 있는 곳에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제63장>

전절 : 말채찍을 백 보 밖에 세워 놓고 쏜 이야기는 제52장에 자세히 나온다.

후절 : 태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친구들이 다 모여서 활쏘기를 할 때의 일이다. 1백 보쯤 밖의 배나무 가지에 수십 개의 배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청에 의하여 활을 쏘아 한 살에 그것을 모두 떨어뜨려 가져다가 대접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감탄하여 술잔을 들어 경하하였다.

 

<제64장>

전절 : 금나라 태조가 도량이 넓고 매사에 자신이 만만하였다 부하인 여도 등이 반역을 꾀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태조는 여도를 불러 조용히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얻은 것은 임금과 신하들이 마음과 덕을 같이 하여 큰 공을 이룬 것이요, 너희들의 힘이 아니다. 너희들이 반역을 꾀한다 하니, 참으로 그렇다면 말과 갑옷, 투구 등을 너희들에게 주겠다. 만일 너희들이 다시 나에게 잡히면 그때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이대로 머물러서 나를 섬겨 딴 뜻을 품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모두들 몸을 떨면서 대답을 못하였다. 이에 태조는 그들을 모두 놓아 주었다.

후절 : 태조는 항상 겸손하여 남의 위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활쏘기를 할 때에도 매양 상대와 맞추는 수를 거의 같이 하였으며, 구태여 보기를 원하여 권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도 한 살쯤을 더할 뿐이었다.

 

<제65장>

전절 : 당태종이 낙양원에서 사냥을 할 때에 멧돼지 여러 마리가 숲속에서 뛰어나왔다. 태종이 활 네 발을 쏘아 네 마리를 쓰러뜨렸다. 또 한 마리의 돼지가 말의 등자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민부상서 당검이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손으로 그 돼지를 쳤다. 태종은 칼을 빼어 돼지를 베고 웃으며 하는 말이, "천책 장사는 상장이 도적을 치는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어찌 그다지도 두려워하느냐." 하였다.

후절 : 태조가 하루는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하는데 노루 한 마리가 높은 산마루에서 뛰어 내려 왔다. 그런데, 비탈이 너무 가파라서 군사들은 내려가지를 못하였으나, 태조는 그것을 곧바로 말을 달려 내려와 번개처럼 달리는 노루를 살로 쏘아 맞추었다. 군사 중에 최영 장군의 휘하 현귀명이 있었는데, 이 말을 최영 장군에게 하였더니, 오랫동안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고 한다. 또, 태조가 일찍이 화녕(지금의 함경도 영흥)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거기에서도 가파른 비탈을 말을 달려 내려와서 큰 곰 네 마리를 쏘아 잡았더니, 되의 장수 처명이 '공의 재주는 천하 제일이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제66장>

전절 : 항우가 의제(義帝)를 죽이니, 한고조 유방이 의제를 위하여 곡하고 항우를 치려고 의기를 드니, 천하의 제후가 고조에게로 모여 왔다. 그러나, 고조는 선비를 경멸하고 꾸짖기를 잘하는 버릇이 있어 위후가 배반하였다.

후절 : 고려말에는 군사를 여러 장수들이 각각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패기(牌記)라고 하는데, 대장 최영 · 변안열 · 지용수 · 우인열 등의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들은 부하들을 여지없이 꾸짖고 함부로 매질을 하여 죽는 자도 있어서 부하들의 원망을 샀으나, 태조는 그런 일이 없이 부하들을 예의와 부드러운 말로써 접했으므로, 여러 장수들의 부하가 태조의 휘하에 들기를 원하였다.

 

<제69장>

전절 : 후한의 광무제 유수가 갱시(更始) 장군의 부하로 있으면서 한단을 칠 때에,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오라는 갱시 장군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기가 왕위에 오르려 하였다. 이 때에 유생이 적복부라는 예언서를 드렸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유수가 군대를 내어 부도를 잡아 / 사이가 운집하여 용이 들에 싸우니 / 사칠 즈음에 화가 주 되리라."

'용이 들에서 싸운다'는 것은 여러 영웅들이 으르렁거리는 것이요, '사칠장'은 광무제의 28장수를 가리키며, '화'는 한(漢)을 가리킨다.

후절 : 태조가 요동을 치라는 우왕의 명령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돌아올 때에, "서경 성 밖에 불빛이요 / 안주 성 밖에 연광이라." 이라는 동요가 나돌았고, 또 '十八子(李)가 삼한을 바로 잡는다'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제70장>

전절 : 하늘이 당태종 이세민과 같은 영특하고 기이한 재목을 낸 것은 백성을 평안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때를 맞추어 여섯 마리 준마가 나서 그를 도왔다. 당태종은 여섯 마리의 준마를 가지고 있었다.

후절 : 하늘이 나라를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태조와 같은 용맹하고 슬기로운 인물을 내시니 여덟 마리의 준마가 때를 맞추어 났다는 것이다. 조선 태조가 탄 말이 여덟 마리였다.

 

<제71장>

전절 : 당나라 현종이 태자(원랑)로 있을 때에 태평공주가 태자의 영특함을 꺼려서 어리석은 자를 태자로 세워서 자기의 권세를 펴 보려고 임금 예종에게 여러 번 참소를 하였다. 하늘에 살별이 나타났을 때에 그것은 태자가 임금 자리를 뺏을 징조라고 하여 태자를 폐하기를 청하였다. 예종이 비록 용렬한 임금이기는 하였으나 천성은 밝았으므로 그것을 물리치고 현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후절 : 고려 창왕이 즉위하자 그 자리를 튼튼히 하려고 문하시중 이색이 명나라 천자를 찾아 뵙기를 청하였다. 위성(僞姓)을 굳히려고 하였다는 말은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한 말이다. 그러나, 뒤에 태조가 왕이 되어 명나라 천자에게 사신을 보내어 승인을 얻고자 할 때에, 명나라 태조는 성주이기 때문에 천명을 알아서 사신에게, "너희 임금이 나라를 얻은 것도 내가 나라를 얻은 것과 같이 하늘이 준 것이다."하고 쾌히 승낙을 해 주었다.

 

<제73장>

전절 : 중국 5대 시대에 일곱 성의 장수들이 난을 일으켜 백성들이 고생을 하므로 후주의 세종이 균전이 치치(致治)의 근본이라 하여 전조를 균정(均定)하였다.

후절 : 태조가 고려의 호족들이 백성으로부터 수탈한 토지를 회수해서 균전의 제도를 실시하고, 창왕은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워 중흥을 꾀하였다.

 

<제74장>

전절 : 원나라 헌종 때에 간신이, '아우 세조가 중토의 인심을 얻어 임금자리를 엿봅니다.' 하고 참소를 하였다. 헌종은 그것을 믿고 세조를 파직시켰으나, 세조가 들어와 우니 용서하고 형제가 다시 처음과 같이 우애하게 되었다.

후절 : 고려 공양왕 때에 파평군 윤이, 중랑장 이초가 명나라에 가서, '이시중(조선 태조)이 왕요(공양왕)를 세워 왕을 삼고, 군대를 움직여 명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니, 친왕병을 보내어 토벌하소서.'하고 청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태조가 충신임을 알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제75장>

후절 : 고려 공양왕 때에 여진 사람 올량합과 알타리가 내조(來朝)하여, 서로 자기가 윗사람이라고 다투다가 알타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온 것은 지위를 다투러 온 것이 아니요, 제군사(태조의 그 당시의 벼슬)의 위신을 사모하여 온 것입니다." 하고는 더 다투지 아니하였다. 태조는 이들을 집으로 불러 후하게 대접하였다.

 

<제76장>

전절 : 한나라 고조는 진나라가 외로워서 망한 것에 비추어 동성(친척)을 각지에 봉하여 천하를 진무하려 하였다. 종형(從兄) 가(賈)를 형왕(荊王)으로 삼고, 아우 교(交)를 초왕(楚王), 형 희(喜)를 대왕(代王), 아들 비(肥)를 제왕(齊王)으로 삼았다. '종실에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은 이 사실을 말한다. 또, 형 희의 아들 비를 오왕(吳王)으로 삼았는데, 고조는 비에게 "네 얼굴에 반역의 상이 있으나, 천하가 다 한 집안이니 그래서는 안된다." 고 하니, 비가 절하고 맹세하였다. 뒤에 송나라의 소식이 한고조가 비를 죽이지 않은 것은 성덕의 일이라고 하였는데, 한나라에서 송나라까지는 1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니까 한고조의 성덕은 천 년 뒤까지도 찬양된다는 뜻이 된다. '모진 상'은 비의 반역상을 가리킨다.

후절 : 조선 태조는 천성이 인후하여 9족이 화목하였으며, 서형제(庶兄弟)에까지도 우애가 지극하였다. 환조가 돌아가자 종형 천계(天桂)가 적통을 이으려고 난을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였으나, 태조는 조금도 개의하지 아니하였고, 개국한 뒤에 천계의 아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다. '모진 꾀'란 천계가 난을 꾀한 사실을 말한다.

 

<제77장>

전절 : 다른 사람들은 위징은 당태종의 원수이니 등용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당태종은 해와 달처럼 밝고 너그러우신 분이므로, 자기를 죽이라고 그 형 건성에게 권한 위징을, 그의 재주를 아끼어 다시 등용하여 그의 힘으로 부강을 이룩하였다.

후절 : 태조가 즉위하자 정도전이 이색과 우현보를 죽이라고 하였지만, 하늘 땅같이 넓은 태조의 도량이라 이색을 한산백을 삼고, 우현보의 직첩을 도로 주었다.

 

<제78장>

전절 : 한나라 고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경포가 처음 한나라에 왔을 때에 고조가 걸터앉아 발을 씻으면서 자기를 대하였으므로, 경포가 크게 노하여 온 것을 후회하였다. 그러나, 숙소에 와 보니 음식 차림이나 시중드는 관원이 모두 고조의 거처와 같았으므로 매우 기뻐하여 그에게 충성하게 되었다.

후절 : 태조가 개국하자 우선 공신도감을 설치하여 공신들을 후하게 포상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끝까지 정답게 지냈으며 설사 죄가 있는 자라도 죽이지 아니하였다.

 

<제79장>

전절 : 한고조가 공신인 한신, 팽월 등을 죽이니, 경포도 반기를 들어 항거하다가 토벌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울을 정한 지 얼마 못 되어(겨우 20년에) 여후의 난을 맞게 되었다.

후절 : 태조가 신하들을 끝까지 사랑하였으므로, 공신들이 모두 충성을 다하였다.

 

<제80장>

전절 : 촉한의 유비가 군사 일에 분주하면서도 선비 학자인 진기 · 정현 등에게서 세상을 다스리는 도를 들었기 때문에 정치의 업을 세울 수 있었다는 말이다. 정치는 한 · 위 · 오의 세 나라가 솥발처럼 맞선다는 뜻이다. 3국 정립이라고도 한다.·

후절 : 태조가 비록 도적들을 치기에 바빴지만, 본래 유학을 중히 여기어 군중에 있으면서도 학자를 불러 경사를 논의하며 밤이 새는 줄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리는 큰 업적이 더욱 빛났다는 것이다.

 

<제81장>

전절 :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성격이 엄격중후하고 말이 적으며 책 읽기를 좋아하여 비록 군중에 있을지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좋은 책이 있으면 천금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들였다. 그러므로, 나라를 경영하는 도량이 컸던 것이다.

후절 : 이 말 뜻은 타고난 성인으로서의 성품을 자만하지 않는다는 것.  태조의 활달하고 시국을 바로잡는 아량과 인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덕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어서, 공훈이 더할수록 더욱 겸손하고 온공(溫恭)하였다. 또, 학문을 중히 여기시어 틈만 있으면 항상 선비들과 더불어 경사 보기를 즐겨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집안에 유학을 닦는 이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태종에게 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태종이 성덕을 성취한 것은 천성으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하지만 태조가 학문을 권한 덕이라 하겠다. 이리하여 조선 왕조 창업의 규모가 원대함을 알 것이라는 뜻이다.

 

<제82장>

전절 : 고려 충렬왕이 세자(뒤에 충선왕)를 원나라에 보냈는데, 정당문학 정가신 등이 따라갔다. 하루는 원나라 세조가 세자를 편전에서 인견할 때에 책상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서, "너는 무슨 책을 읽느냐?" 하고 물었다. 이에 세자는, "스승 정가신에게 <효경>과 <논어> · <맹자>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하니, 세조가 기뻐하면서 정가신을 부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가신 등을 인견할 때에는 일어나서 관을 쓰고 대하였으니, 그 선비를 공경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하냐?

후절 : 고려 공양왕 때에 한산군 이색이 귀양살이에서 풀려 서울에 돌아와 태조를 그 집에서 찾아 뵈었더니, 태조가 몹시 반기며 그를 윗자리에 모시고 꿇어 앉아 술을 권하였다. 태조의 학자를 존중하는 덕행이 이러하였다.

 

 <제84장>

전절 : 한나라 소제(昭帝) 때에 태산의 큰 돌이 스스로 일어서고, 상림(上林)의 말라 죽었던 버드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부절령 목홍이 말하기를 "돌과 버들은 음류(陰類)로서 백성의 상징이니, 이것은 필부(匹夫)가 천자가 될 조짐입니다." 하였다. 과연 그로부터 5년 후에 소제가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선제(宣帝)가 민간에서 일어나 왕위에 올랐다.

후절 : 함경도 덕원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어 말라 죽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조선 왕조가 개국하기 1년 전에 다시 새 잎이 나니, 그 때 사람들이 그것은 개국할 징조라고 하였다.

 

<제85장>

전절 :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얼굴은 네모난 얼굴이었다. 주나라 세종이 요나라를 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방의 문서(文書)를 살피다가 가죽 부대 속에서 석 자쯤 되는 나무토막을 얻었는데, 거기에는 '점검(點檢, 벼슬이름)이 천자가 된다'고 씌어 있었다. 그 때에 장영덕이 점검이었으므로, 세종은 그를 의심하여 조광윤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신하 중에 얼굴이 모나고 귀가 큰 사람이 있으면 '천자의 상'이라 하여 반드시 죽이었다. 조광윤은 얼굴이 모나고 귀가 크고 또 점검이었는데도 세종은 매일 곁에 두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이 벼슬까지 올려 준 것은 하늘이 조광윤을 송나라 천자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절 : 점글이란 참문(讖文), 도참(圖讖)이라고 하는 것인데, 일종의 예언서를 말한다. 그 속에 '조명지문(早明之文)'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태조가 새 나라 이름은 '조선(朝鮮)'이라고 고치기를 명하였다. 조선이란 '조일이 선명하다(朝日鮮明)'라는 뜻이니, '조명'과 합치되지 않는가.

 

<제86장>

전절 : 여기서부터 제89장까지는 이제까지의 전례를 깨고 앞뒷귀가 모두 다 조선 태조의 사적이다. 제28장에서 본 바와 같이 태조가 아이 때에 아버지 환조를 따라 동북면 도순문사 이달충이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들에서 배웅할 때에, 달충이 환조가 권하는 술잔을 선 채로 받았으나, 태조가 권하는 술잔은 무릎을 꿇고 받으면서, "이 아이가 장가 가업을 대성할 것이외다." 하였는데, 그 때에 저쪽 언덕에 노루가 일곱 마리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저 노루를 한 마리 잡아서 술안주로 할 수가 없을까" 하였다. 태조가 군사를 시켜 뒷산에 올라가 노루를 쫓아낸 뒤에 태조가 여섯 발을 쏘아 여섯 마리를 잡은 일이 있다. 또 태조가 어렸을 때에 정안옹주 김씨가 까마귀 다섯 마리가 담장 위에 앉은 것을 보고 쏘라고 하였더니, 한 발에 다섯 마리 까마귀의 머리를 쏘아 떨어뜨렸더니, 김씨가 깜짝 놀랐는데, 태조는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태조가 어느 날 이두란과 함께 사슴을 쫓아 말을 달리는데, 앞에 비스듬히 가로 누워 있는 나무가 있어 사슴이 그 밑을 빠져나갔다. 두란은 단념하고 말머리를 돌렸으나, 태조는 그 나무를 뛰어넘어 그 밑으로 나오는 말을 다시 잡아 타고 사슴을 소아 잡았다. 이두란이 그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공은 하늘이 낸 재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후절 : 태조가 아직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한 스님이 찾아와서 이상한 책을 바치고는 '지리산 바위 틈에서 얻은 것입니다.' 하고는 안개처럼 사라졌는데, 그 속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나무 아들(木子)이 돼지를 타고 내려와 삼한 나라를 바로잡는다." 나무 아들은 이(李)요, 태조는 돼지띠 을해생이었다.

 

<제87장>

전절 : 태조가 젊어서 함경도에 있을 때에 범을 잡은 이야기다. 범이 너무 가까이에서 발견되어 말을 돌려 피하려 하니, 범이 말 위로 뛰어 올라 달려들었다. 그것을 오른손으로 후려쳤더니 범이 나자빠져서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그것을 활로 쏘아 쓰러뜨렸다. 고려 공양왕 때 태조가 함경도 함주에 있을 때의 일이다. 황소 싸움이 붙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말렸으나 별 수가 없었다. 옷을 벗어 던지기도 하고, 혹은 불을 던져 보기도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그 때에 태조가 다가가서 두 손으로 한 마리씩 코뚜레를 잡고 갈라 놓으니, 소는 더 이상 싸우지 못하였다.

후절 : 역시 공양왕 때의 일이다. 태조가 통천의 총석정 구경을 간 일이 있는데, 안변 학포교를 졸면서 지나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디어 떨어졌다. 태조는 잽싸게 내려서서 두 손으로 말의 귀와 갈기를 잡으니, 말은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으나 끝내 놓지를 아니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말의 안장끈을 베어 버리고 말을 놓으니, 말은 물에 잠기었다가 다시 세어나왔다.

 

<제88장>

전절 : 태조가 우왕을 따라 해주에서 사냥할 때의 일이다. 태조가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 짐승을 쏠 때에는 꼭 등을 맞추겠다." 하더니, 이 날 사슴 마흔 마리를 쏘았는데, 과연 그 말대로 모두 등만을 맞추어 그 귀신 같은 활솜씨에 놀라게 하였다. 제35장에서 보았듯이, 태조가 원나라의 승상 나하추와 싸울 때에 적장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니 말이 입을 벌리자 그 입을 쏘았으며, 제37장에서 보았듯이 서해도(황해도) 안악 등지에서 왜구와 싸울 적에, 그가 말한 대로 대우전(화살) 20개로 적의 왼쪽 눈을 쏘아 모조리 맞추었다. 태조가 아직 임금 자리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하루는 우인열과 함께 서청에 앉아 있었는데, 차양에 쥐 세 마리가 기어가는 것을 세 살을 쏘아 죽지 않도록 쏘아 맞추었다.

후절 : 태조가 꿩 사냥을 할 때는 엎드려 숨어 있는 꿩을 반드시 놀라서 날아 오르게 하여 공중에서 쏘아 떨어뜨리곤 하였다. 태조는 평소에 배만한 나무공을 만들어 50~60보 밖에서 공중에 던져 올려 쏘아 맞추는 연습을 하였다. 이 장은 모두가 태조의 활솜씨의 비상함을 칭찬한 내용들이다.

 

<제89장>

전절 : 고려 우왕 때에 왜선 1백 50 척이 함경도 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이 심하였으므로, 태조가 자청하여 이를 치러 갔다. 함주에 이르니, 영중에 한 소나무가 70 보쯤 밖에 서 있었다. 태조가 군사들을 불러 이르기를, "저 소나무의 어느 가지, 어느 솔방울을 쏠 터이니, 잘 지켜 보아라." 하고는 활을 당겨 쏘니, 일곱 발을 쏘아 일곱 개를 어김없이 다 맞추니, 군사들이 날뛰며 환호하였다.

또, 1백 보 밖에 있는 썩은 나무 등걸을 연달아 세 번 쏘아 세 번을 다 보기좋게 맞추었다.

또 한 번은 문하평리 임견미 · 변안열 등과 왜구를 황해도에서 칠 때에 임견비 · 변안열 등이 나가 싸우다가 다 패하고 돌아왔다. 태조가 투구를 백 수십 보 밖에 쏘아 승부를 점쳤는데, 세 번 쏘아 세 번 다 화살이 투구를 뚫었다.

후절 :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송정의 동문인 숭인문 밖의 산대바위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태조는 이길 조짐을 점쳐서 인심을 모으려고 1백 보쯤 밖에 서 있는 보득솔(우산처럼 둥그스럼하게 우죽이 무지러진 소나무)을 쏘았더니 한 살에 꺾어져 버렸다. 태조의 귀신 같은 활솜씨가 이러하였다. 이 장도 모두 태조의 활솜씨에 관한 이야기다.

 

<제90장>

전절 : 제26장에서 보았듯이 당태종 이세민의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이 세민을 몹시 미워하였는데, 그를 죽이려고 술에 독약을 타 먹였으나 죽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아무리 독약일지라도 천명을 받은 사람은 해치지 못하는 것이다.

당태종이 네 살 때에 한 서생(書生)이 아버지 고조를 뵈러 와서 세민을 보고 하는 말이, "이 아이는 용봉지자(龍鳳之姿)요, 천일지표(天日之表)이니, 반드시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이름을 '세민(世民)'이라고 지었다.

후절 : 조선 태종이 이색의 서장관으로 명나라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발해에서 태풍을 만나 다른 두 배는 가라앉아 버렸지마는 태종이 탄 배는 무사하였다. 태풍도 하늘의 뜻을 어기지 못하는 법이어서 천명을 받은 태종을 해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다.

태종이 성년이 되기 전에 술사 문성윤이라는 사람이 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에게 아뢰기를, "이 아이에게 반드시 천명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아뢰고는, 이 일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제92장>

전절 : 당태종이 생일을 맞이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다 즐거워하지마는 나에게 있어서는 이 날이 도리어 슬프다. <시경>에 이르기를, '애처롭다, 우리 부모님. 나를 낳고 고생하셨네'라고 하였는데, 부모님께서 이렇게 고생하신 날에 어찌 술마시며 즐거워할 수가 있겠느냐." 하고는 두어 줄의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다 슬퍼하였다.

후절 : 삼국시대 이래로 임금이 죽으면, 새 임금은 3년상을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태조가 돌아가셨을 때에 여러 신하들이 단상(短喪)을 간청하였으나, 태종은 듣지 않고 3년상을 치렀다. '옷'이란 상복을 말한다.

 

<제93장>

전절 : 주나라 세종이 아버지 태조의 관을 산릉에 모셔 놓고, 고평 싸움터로 나아가 북한주를 쳐서 크게 이겨 왕업을 굳혔다. 만일, 아버지의 재궁(임금의 널)에 연연하여 고평에 나아가 적을 치지 아니하였던들 배천지업(配天之業,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되는 왕업)을 굳힐 수가 있었겠는가?

후절 : 태종의 모후 신의왕후의 능이 제릉인데, 경기도 풍덕군 북쪽 15 리 속촌에 있는데, 태종이 거기에 시묘하고 있을 때에 태조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낙상하였다는 소식과, 또 정몽주가 태조가 서울에 들어오는 날 난을 꾸민다는 소문을 듣고, 제릉을 떠나 벽란도로 달렸다. 거기에서 태조를 만나 뵙고, "정몽주는 반드시 우리 집안을 망칠 것입니다" 하였으나, 태조는 대답이 없었다. 재삼 간청을 하여 새벽에 서울로 들어가 정몽주를 죽이고 공을 세웠다. 어머님 산릉에 연연하여 아버지를 설득하지 않고 속촌으로 돌아오고 말았던들 건국의 공을 세울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제94장>

전절 : 송나라 고종의 사연이다. 송나라가 금나라에 져서 왕자를 볼모로 보내게 되자, 재상 이강이 한사코 말렸으나 나라를 위하여 고종이 갔는데, 왕자를 알아보지 못한 금나라에서는 그를 돌려 보냈으니, 소흥(고종의 연호)의 천명을 금나라 사람이 모른 것이다. 좀더 자세히 부연하면, 송나라가 금나라에게 지게 되니, 송나라 휘종 임금은 흠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재상 이방언은 화의를 주장하였으나, 이강은 강경론을 내세워 자신이 금나라에 가서 지연 전술을 쓰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흠종이 듣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었다. 또 볼모로 친왕(親王)을 요구하므로 흠종은 아우 고종을 보내었다. 고종은 금나라 군영에 머무르면서 활을 썩 잘 쏘았기 때문에 금나라 사람은 친왕인 것 같지 않다 하여 돌려 보내었다.

후절 : 태조 때에 여진에게 사신을 보내었다 하여 명나라 천자가 문책하여 왕자를 보내라고 하였으므로, 태종이 나라를 위하여 갔더니, 천자가 태종의 나라에 충성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도리어 후히 대접하였다.

 

<제95장>

전절 : 이밀이 처음 당나라 고조를 만났을 때에는 자신의 지략과 공명을 스스로 믿고 고조를 대함에 오만한 빛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 이세민을 보고는 깜짝 놀라 탄복하여 말하기를, "태종이야말로 참 영주이다. 이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나라를 평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후절 : 명나라 황제의 사신 우우가 왔을 때의 일이다. 태조는 종친들을 시켜 잔치를 베풀어 그를 융숭히 대접하였는데, 우우는 아주 거만하여 가는 곳마다 무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태종의 저택에서 태종을 대하자 자리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렸다.

의성군 남은이 평시에 태종을 보고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개천영기(蓋天英氣)다." 라고 말하였다.

 

<제96장>

전절 : 한나라 문제 때에 순우의라는 벼슬아치가 죄가 있어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딸 제영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자기가 관비가 되어 아비의 죄를 갚겠다고 애원하였다. 문제는 그 애절한 정상을 가엾이 여겨 그 아비를 특사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 왕실의 어진 가풍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후절 : 태조 때에 경상도, 전라도 도안무사 박자안이 항복한 왜인을 옹립하면서 잘못하여 군사의 기밀을 누설하여 그 죄로 참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실(實)이 이 말을 듣고 태종의 집에 찾아와서 통곡하면서 아비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태종이 그것을 가엾이 여겨 태조에게 간청하여 형 집행 직전에 그 아비를 구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 아비를 구해 준 아들 실을 가상히 여겨 대궐을 지키는 군사에 임명하였는데, 뒤에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거룩한 조종의 어진 정치를 도와 더욱 빛내었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며 도량이 넓음이 이와 같았다는 것이다.

 

<제97장>

전절 : 한나 고양 사람 역이기는 집이 가난하여 마을의 문지기를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 불렀다. 그는 한고조가 활달하여 도량이 넓고 지략이 큼을 알고 그를 따르려고, 마침 고조의 휘하에 같은 동네 사람이 있음을 연줄로, 고조를 만나서 천하의 요충인 진류를 손에 넣게 하고 고조를 도와 큰 공을 세웠다.

후절 : 태조의 얼굴이 콧마루가 우뚝한 용안이더니, 여러 아들 중에서 태종이 태조를 닮았다. 하윤과 태종의 장인인 민제는 뜻을 같이 하는 벗이었는데 하루는 하윤이 민제에게, "내가 관상을 여러 사람 보았으나, 그대의 사위 만한 사람을 아직 못 보았으니 뵙게 해 주게." 하고 청하여 드디어 태종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윤은 태종을 성심껏 섬기어 뒤에 정사좌명 공신이 되었다. 서생이란 하윤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98장>

전절 : 진나라 왕 부견이 중화의 정통 왕조에 뜻을 두고, 여러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회수에서 동진과 싸우다가 대패하였다. 그 때에 얼마나 놀랐던지 팔공산(중국 안휘성 회수 남쪽에 있음)의 초목이 모두 동진의 군사로 보였다고 한다.

후절 : 태조가 계비 강씨의 소생인 제8남 방석을 세자로 삼을 뜻을 두자 정도전 · 남은 등이 태조 임금의 말림을 듣지 않고 전 왕비의 소생인 다른 왕자들(6형제)을 없애 버리려고 하였다. 마침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여 여러 왕자를 대궐로 불러들일 기회를 이용하여 한 번에 죽이려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태종 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방석과 정도전 · 남은 등을 죽이었는데 그 때에 방석 무리의 눈에는 광화문에서 남산까지의 길에는 군마가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였다는 이야기다. 태조 임금의 말을 안 듣고 적자(태종)를 제거하려다가 패한 방석 무리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다.

 

<제99장>

전절 : 당나라 현종이 태자로 있을 적에 태평 공주의 참소를 두려워하여, 예종의 맏아들 송왕 성기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예종은 매양, "내가 천하를 얻은 것은 너의 힘이다." 하고, 도리어 현종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 주었다.

후절 : 이방원이 정도전의 난을 평정한 뒤에 모든 사람들은 다 방원을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였으나 태종은 그것을 굳이 사양하였다. 그리고, 형을 세자로 삼을 것을 태조에게 청하였다. 그리하여, 정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후사가 없었으므로 태종을 세자로 삼을 것을 신하들이 간청하였으므로, 정종은 태종을 세자로 삼았다.

 

<제100장>

전절 :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일찍이 주나라의 세종을 따라 회남으로 쳐 나아가 강정에서 싸울 때에 용이 물 속으로부터 태조를 향하여 튀어 나오니 식자(識者)들이 놀라서 그것은 임금이 되어 나라를 평정할 조짐이라고 하였다.

후절 : 조선 태종이 송도의 추동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이른 새벽에 흰 용 한 마리가 태종의 침실 위에 보였는데, 크기가 서까래 만하고 비늘의 광채가 찬란하며 긴 고리가 꿈틀거리는데 머리는 바로 태종의 침상을 향하고 있었다. 이것은 태종이 보위에 오를 조짐이라는 것이다.

 

<제101장>

전절 : 당나라 건국에는 태종의 공이 매우 컸다. 그러나 태자의 자리에는 그의 형 건성이 올라 있었으며, 또 태종이 낙양에 가는 것을 건성과 아우 원길의 무리가 백방으로 방해하고 또 그를 제거하려고 갖은 꾀를 다 썼다. 그 때에 샛별이 낮에 나타나는 이변이 있었다. 태사령 부혁이 고조에게, "태백이 진나라 분야에 보이니, 진왕(태종)이 천하를 가질 것입니다." 하고 은밀히 아뢰었다.

후절 : 조선 왕조의 건국에는 태종의 공이 매우 컸다. 그런데, 왕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세자의 자리가 아직 결정되지 못하고 있을 때에 밤에 붉은 기운이 하늘에 나타났다.

 

<제103장>

전절 : 요나라 태조에게 다섯 아우가 있는데, 그들이 모두 반역을 꾀하였으나, 피를 나눈 형제란 서로 아끼고 화목하며, 미워하고 시기하는 일이 없어야 하므로 다 용서하여 주었다. 그랬기 때문에 2백 년의 왕업을 유지한 요나라의 기초를 열 수가 있었던 것이다.

후절 : 조선 태종의 형 방간이 왕위 다툼을 하면서 태종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태종이 즉위한 뒤에 모든 신하들은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극력 주장하였지만, 태종은 끝내 듣지 아니하였으며, 왕족에서 제명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방간은 목숨을 보존할 수가 있었으며, 천만 년에 전할 아름다운 풍속인 형제의 우애를 보였다는 것이다.

 

<제104장>

전절 : 당나라의 고조는 개국을 건의한 신하 민부상서 노공 유문정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었다. 그러나 유문정의 지략과 공훈이 우복야 배적의 위인데도 벼슬자리는 배적의 아래에 있었으므로, 두 신하는 사이자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정이 어느날 아우 문기 등과 술을 나누는 자리에서 임금에 대한 울분을 터뜨리면서 적의 목을 베어야겠다는 말을 하였따. 그때에 문정의 사랑을 잃은 첩이 문정이 모반하려 한다고 고조에게 참소하니, 문정이 하옥되었다. 그것을 태종이 힘써 구해 내려고 하였으나, 평소 고조의 신임이 두터운 배적의 방해로 결국 사형을 받고 재산 몰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태종은 그 인자한 마음을 펴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몸에 붙은 일'이란 모반한다는 혐의, 그것 때문에 처형된 것이라는 말이다.

후절 : 정종 때에 사병 혁파령이 내렸는데, 문하부사 이거이 등이 이 법을 어긴 죄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개국공신 조준이 이에 관련되어 있다는 참소를 받고 하옥되려는 것을 태종이 힘써 구해내었다.

 

<제105장>

전절 : 한나라 고조가 항우의 장수 정공의 공격을 받아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자, 정공에게 목숨을 비니 정공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그 뒤, 항우가 망하자 정공이 고조에게로 돌아오니 고조는 정공을 가리켜, "정공은 항우의 신하로서, 그 임금에게 불충하여 항우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한 자이다"하여, 드디어 그의 목을 베어 훗날의 신하된 자로서 그를 본받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정공이 제 임금 항우를 배반하고 나를 구해 주었지만, 개인적인 고마움을 칭찬하지 않고 도리어 엄벌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충신의 도리를 가르친 것이다.

후절 : 고려말 삼은의 한 사람인 야은 길재는 고려 때에 문하주서의 벼슬을 하였다. 새 조정이 들어선 뒤에 태종이 그를 정중히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자기의 명을 거역한 그를 미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기어 그가 세상을 떠나자 좌사간의 벼슬을 내리었다. 또, 세종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에 길재의 아들 길사순을 불러 벼슬을 주도록 세종에게 말하였다. 길재가 자기가 섬기던 임금을 잊지 않고 내(태종) 명령을 거역하였지만, 공적인 의리라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뒤를 이은 왕 세종에게 일러서 그 아들을 등용하였다는 말이다.

 

<제106장>

전절 : 충신이라 주나라 공제의 장수 한통을 가리킨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즉위하기 위하여 진교에서 변경으로 돌아올 때에 한통이 막았으므로 군교 왕언승이 한통과 그 처자를 죽였다. 송태조가 즉위한 뒤, 한통에게 벼슬을 내려 그 충성을 표창하고, 왕언승에게는 충신을 잘못 죽였다 하여 종신토록 절월을 주지 아니하였다.

후절 : 여기에서 의사란 김계란 · 최운 등 방석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일례를 들면, 정도전이 처형되자 방석을 따르던 무리는 뿔뿔이 다 흩어져 버렸으나 김계란만은 끝내 남아서 방석을 도왔다. 또 남은이 도망치자 그 종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최운만은 끝까지 그 상전을 부축하여 숨어 있었다. 태종은 이 두사람의 의리를 높이 사서 가까이 불러 썼으며, 계란은 벼슬이 3품에 이르렀고, 운은 2품에 이르렀다.·

 

<제107장>

전절 : 당나라 고조 때에 온 조정이 모두 불교를 그냥 두라고 청하였으나, 태조는 태사령 부혁의 불교를 혁파하라는 상소가 옳다고 하여 그의 주장에 따라 10만 승도를 한꺼번에 파하여 버렸다.

후절 : 고려 때부터 불교가 매우 성행하여 왕을 비롯하여 모든 신하들까지도 다 불교를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재물을 들여 다투어 절과 탑을 세웠었다. 그러나, 태종은 천성이 높고 밝아 시속(時俗)에 부동하지 아니하여 그것이 옳지 못하다 하여 하루 아침에 수많은 절을 혁파해 버렸다. 이리하여,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국시가 결정된 것이다.

 

<제108장>

전절 : 태봉의 왕 궁예가 학정을 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장군 홍유 · 배현경 등이 왕건을 추대하기로 밀의하고 밤에 왕건의 집으로 찾아가 그 뜻을 전하니, 왕건이 펄쩍 뛰며 굳이 사양하였다. 그 때, 부인 유씨가 숨어 엿듣다가 나와서, "인(仁)으로써 불인(不仁)을 치는 것은 에부터 있는 일입니다." 하며, 손수 갑옷을 입혀 주었다.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고 나와 새벽에 곡식더미 위에 앉아서 군신의 예를 행하고 이어서 왕에 즉위하였다.

후절 : 제98장에서 보았듯이, 정도전 등이 방석을 세자로 삼기로 정하고 태종을 해치려고, 태조의 병세 위독을 빙자하여 모든 왕자들에게 입궐하라고 권하였을 때에 태종의 비 원경왕후가 갑자기 흉복통이 심하니 와달라고 하여 태종을 못나가게 하고 불러들여 의논 끝에 무기를 정비하여 정도전 무리를 잡아 처단하게 하였다.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의 업적을 읊은 대목이라 하겠다.

 

<제110장>

전절 : 4조는 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 네 분 선대를 가리킨다. 그 옛날 목조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삼척에서 덕원으로, 또 경흥, 영흥, 함흥 등지를 전전하면서 고생하던 지난날을 상기시키었다.··

후절 : 구중 궁궐의 호화로운 거처에서 태평한 생활을 마음껏 누릴 때에도 지난날, 선조들의 고생스러웠던 사연들을 잊지 말고 치국안민의 대의를 저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되겠다는 경고이다.

 

<제112장>

▶ 조선 태조가 나라를 위하여 동정서벌하면서, 갑옷을 벗고 편안히 쉬어 본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 아느냐. 그런 노고의 덕택으로 이루어진 오늘의 태평성대이니, 망룡의나 곤룡포에 옥대를 띤 호화로운 차림을 하고 있을 때에는 흙묻은 갑옷을 벗지도 못하고 고생하던 일을 잊지 말라는 경계이다.

 

<제113장>

▶ 조선 태조께서는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끼니를 거른 일이 몇 번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임금 자리에 앉아 좋은 음식을 대할 때마다 그 일을 명심하고 정성껏 나라 다스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말이다.

 

<제114장>

▶ 하늘이 태조에게 나라 다스리는 대업을 내리려고 먼저 그의 몸을 가쁘게 하여, 몸의 상처 자국이 한두 곳이 아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하늘이 이 사람에게 대업을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 몸을 가쁘게 한다." 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나라가 태평하여 잘 다스려질 때일수록 선대의 노고를 결코 잊지 말라는 뜻이다.

 

<제115장>

▶ 고려의 기철(원나라 기황후의 오라비)의 아들 새인첩목아는 원나라를 섬기어 평장의 벼슬을 하였는데, 원나라가 망하자 그의 무리를 모아 동녕부에 웅거하면서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우리 북변을 침범하였다. 그래서 조선 태조가 압록강을 건너 요양성을 쳤는데, 적장 처명이 자기의 용맹을 믿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태조는 부장을 시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으니 항복하라고 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태조는 그의 투구를 쏘았으나 그래도 듣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다리를 쏘니 달아나다가 다시 와서 싸우려 하였다. 진정 그렇다면 이번에는 네 얼굴을 쏠 것이라고 위협하니, 그제서야 처명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려 항복하였다.

또, 조무는 원나라의 장수였는데, 원나라가 망해가자 무리를 이끌고 공주 땅에 버티고 있었다. 태조가 그의 용맹을 아껴서 쇠촉 화살을 쓰지 않고 나무 화살 수십 발을 쏘아 어김없이 다 맞추니, 조무가 말에서 내려 절하고 잡히었다. 이렇게 태조는 살생을 싫어하는 덕이 있었으므로, 사나운 적도 죽이지 않고 위협을 주어 사로잡았다. 위의 임금들이 턱으로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또한 마음대로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고 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권좌에 있을 때에 이 뜻을 저버리지 말라는 경계이다.

 

<제116장>

▶ 고려 우왕 때에 왜적의 배 5백 척이 충청도 진포에까지 쳐들어와 충청 · 전라 · 경사도 일대에서의 잔학한 행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태조가 1천 리 사이에 늘비하게 넘어져 있는 시체를 보고는 하도 끔찍하고 측은하고 분노해서 침식을 그쳐 버렸다.

백성을 사랑하고, 그 괴로움을 알고 그것을 풀어주는 것이 나라 다스리는 요체임을 강조한 것이다.

 

<제117장>

▶ 간신배의 아첨에 꾀여서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제118장>

▶ 태조의 덕화가 널리 미치어 북쪽의 야인들까지도 진심으로 태조를 따랐고, 멀리 유구,  섬라의 왕들도 사신과 선물을 보내왔다. 임금된 사람은 민심과 인심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제119장>

▶ 조선 태조의 서형(庶兄)이 그 누이와 짜고 태조를 죽이려 하였으나 태조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뒤에 그 서형이 살인죄로 처형되자 그 유족을 돌보아 주었고, 그 누이의 생활도 도와 주었다. 또 태종의 형 방간이 세자의 자리를 다투어 태종을 해치려고 난을 일으켰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 여러 신하들이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태종은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간악한 사람이 있어 형제의 의를 이간질할 때에는 위에 든 태조와 태종의 사적을 명심하고 거기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제120장>

▶ 고려 때의 토지 제도는 국가 소유제로서 신민에게 나누어 주되, 벼슬아치들에게는 그 품계에 따라 주었으며, 죽은 뒤에는 회수하였다. 군인은 20세에 주고 60세에 환수하였다. 사대부로서 토지를 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몰수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중하였다. 그러던 것이 말엽에 이르러서는 권세있는 자들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횡포를 자행하여 토지 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졌다. 이에 태조가 여러 권세 있는 신하들의 반대를 단호히 물리치고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이 뜻을 돌이켜 생각해서 백성들로부터 턱 없는 수탈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부터 '백성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한나라의 역이기의, "하늘을 아는 자는 왕사를 이룰 수 있다.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에서 나온 말이다.

 

<제121장>

▶ 한나라 고조가 항우의 장수 계포를 용서하여 낭중에 임명하였다. 조선 태조가 정몽주의 자손을 등용하고, 방석을 끝까지 섬긴 김계란과 남은의 충복 최운에게 벼슬을 주었다. 임금을 돕기 위하여 거리낌없이 바른 말하는 충신을 아끼고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 되겠다. 아첨하는 간신과 직언하는 충신을 가릴 줄 아는 임금은 현군이었다.

 

<제123장>

▶ 뭇사람들이 남을 헐뜯는 참소가 심할 때에 그것을 냉정히 가려서 엄정하게 처리하라는 경계이다.

 

<제124장>

▶ 이 장의 취지는 '숭유억불'의 조선의 국가 이념을 강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