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소문의 벽」에 대한 평론 -어둠 속에서의 글쓰기-

-권오룡 교수-

6, 70년대 한국 문학의 흐름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청준의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60년대 초의 이른바 개인주의 문학의 계열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있고, 또 60년대 중반 이후의 사회적 관심을 앞세우는 문학과도 다르다. 어쩌면 분단이나 좌 · 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문제를 형상화하는 계열과는 약간 유사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그 관심 내용이 많은 부분 합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이청준의 소설은 좌 · 우의 극한 대립과 관련된 50년대적 체험과 6, 70년대의 주로 정치적인 현실에 대한 체험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상상력의 움직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50년대적 체험으로부터 깊숙이 각인된 어떤 정신적 외상이나 그것으로부터 형성시켜 지니게 된 관념이 6, 70년대의 현실에 대한 체험을 의미화시키는 과정을 어떤 식으로든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청준의 소설들에 있어 이 원초적 체험으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관념의 틀, 혹은 세상을 보는 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이청준의 대부분의 초기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관찰의 원리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관찰의 원리 앞에서 시대를 달리하는 현실의 구체적 차이들은 해소되어 버리고 모든 대상들은, 굳이 거창하게 말하면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이에 따라 이청준의 소설들은 매우 관념적인 특성을 지니게 된다. 즉 그의 소설들에서 이야기되는 사건이나 일화들은 다분히 작가의 관념적 의도를 중심으로 한 원근법적 구도 속에 치밀하게 배열되는 것이다. 이것은 각각의 작품에 있어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한 편 한 편의 소설들이 어우러져 이루는 전체의 구도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청준의 작품 세계 전체는 작가의 원초적 체험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져 있는 부채꼴의 형상에 흡사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의 작품집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러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수록된 작품들의 대부분에서 이청준은 전짓불의 체험과 정신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청준의 소설들을 뜸하게라도 읽어본 독자들은 이 전짓불의 체험이 세상에 대한 원초적 체험으로 이청준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살기등등하게 뻗어나오는 그 한 줄기 칼날과도 같은 빛은 이청준의 상상력의 어두운 근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빛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병은? 이것은, 말하자면, 그 전짓불 체험, 혹은 이에 버금가는 체험을 지닌 사람들이 세상을 향하여 갖게 되는 접촉 방식, 이해 방식을 표현한 매우 별난 것으로 특이한 관념의 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달리 말하면, 전짓불의 체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그것을 초극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빚어내는 특이한 실존의 유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전짓불의 체험이나 정신병증은 물론 특이한 것이지만,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경험했던 역사적, 사회적 현실이 어쩌면 이것들을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지평 위에 놓일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청준의 소설은 바로 이러한 사실의 인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즉 이청준의 소설은 일차적으로는 이러한 체험이나 실존 유형의 개인성, 특이성을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매개하고자 하는 의지를 그 저변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시대별로 구체적 내용을 달리하는 현실 체험의 내용들은 그 차이를 초월하여 형이상학적 주제로 수렴되어 가는 동적 구조 속에서 의미적 긴장을 지니게 된다. 또한 이렇게 될 때 차이를 포괄하여 성립하는 주제는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미의 수준을 벗어나 다분히 인류학적이라 할 수 있는 의미의 차원으로까지 도약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청준의 소설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여러 가지 움직임의 구도를 관찰해내는 일과도 직결되는 일일 것이다.

우선 전짓불의 체험에 대해 논의해 보자. 이 체험이 상세히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소문의 벽>에서이다. 그 전짓불이란 어떤 전짓불인가 6 · 25 때 아군과 적군을 가릴 새도 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핀내 나는 혼란통에, 깊은 밤중에 아녀자들밖에 없는 집에 들이닥쳐 삶과 죽음 사이의 제비뽑기를 강요했던 그것은, 뒤에 선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어서 더욱 '원망스럽고 무서운' 그런 전짓불이다. 깊은 밤중에 사람들이 전짓불을 앞세우고 들이닥친다. 그리고는 어느 편인가를 다그쳐 묻는다. 틀리면 죽는다. 그렇다면 들이닥친 사람들이 적인지 아군인지를 알아내야만 한다. 그러나 전짓불 때문에 사람이 보이지 않아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해 낼 도리가 없다. 이 무시무시한 암흑의 상황 속에서 혼자 번뜩이는 것, 그것이 바로 전짓불이다. 이것이 전짓불과 관련된 원체험의 내용이다. 그러나 <소문의 벽>에서 이 전짓불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G라는 인물의 전짓불 체험은 대학 시절에까지 이어진다. 잠을 자기 위해 몰래 들어온 강의실을 비추는 수위의 전짓불에 대해 그는 "그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공포" 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과연 그렇다. 참으로 참을 수 없는 공포였으리라. 바로 이처럼 '참을 수 없는 공포', 바로 이것이 전짓불의 의미이다. 그 인물에게 있어 빛은 이처럼 공포의 관념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한 줄기 빛'이라는 상투적 표현이 전달해 주는 안도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기다랗고 곧은 장대" 처럼 되어 어둠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지독한 공포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공포의 근원으로서의 빛의 의미! 아마도 이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소문의 벽>이 독자들에게 주는 가장 큰 충격일 것이다.

빛의 의미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희망이고 구원이다. 그것의 의미적 가치는 명쾌하고 단순하다. 반면에 빛과 반대되는 어둠은 피상적으로는 절망이고 전락일 것이지만, 그 심층의 차원에는 밝음의 씨앗을 간직한 채 그것을 감추고 있는 의미적 양가성을 지니는 것일 수 있다. 이에 비해 밝음의 의미는 너무나도 투명해 보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너무나 눈이 부셔서 오히려 눈이 멀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에서처럼, 빛은 밝음의 의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밝음과 대조되기에 오히려 더욱 캄캄한 어둠의 원인이 될 수 잇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청준 소설의 전짓불이 이러한 경우일 것이다. 이처럼 이청준의 전짓불의 체험은 빛, 밝음을 구원, 희망, 안도 등의 의미로 손쉽게 받아들이는 상투적 사고의 두꺼운 벽(아마도 이것 또한 '소문의 벽'이 아니겠는가)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렇듯 빛은 어둠보다 더 진한 암흑일 수 있다. 빛은 그 어떤 절망보다 더 무서운 절망을 강요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빛=구원의 등식 관계를 거의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러한 등식 관게는 거의 인류학적 보편성의 수준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등식 관계는 빛이, 밝음이 어둠과의 싸움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이다. 이청준의 소설이 우리에게 일개워 주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이다. 범위를 조금 넓혀 생각하면 빛과 암흑과의 싸움, 그리고 이 싸움에서의 빛의 승리의 과정, 이것이 바로 근대 역사의 의미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인류의 역사 전체의 의미로까지 확대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아무튼 근대적 이성은 과학의 빛, 명증성의 빛으로 중세적 미신의 암흑을 걷어냈던 것이다. 이 싸움에서의 무기는 바로 인간 자신의 지적 능력이었다. 그것은 마치 제 손에 들려진 등불과는 흡사한 것이었다.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청준의 소설의 전짓불이야말로 바로 이 암흑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의 무기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제 손에 든 등불만으로 세상 곳곳을 샅샅이 밝힐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한낱 인간의 오만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오만이 근대라는 세계를 지탱해 왔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는가?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진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로, 인간의 지적 능력과 이성의 명증성에 대한 확신은 세상을 빛과 그늘의 더욱 요지부동한 이분법의 세계로 구획해 버렸고, 근대인들이 추구해온 합리성은 한층 더 살벌한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타락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빛과 이성의 승리가 역사적 현실로 확인되는 것처럼 보이던 시점에서 이러한 전환의 의미를 미성숙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명제로 칭송할 수 있었던 칸트와는 달리 그 과정, 즉 계몽에 대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세상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재앙의 승리, 이들은 바로 이것이 계몽의 결과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계몽이란, 빛이란 폭력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이청준 소설에 있어서의 전짓불이 그러한 것처럼 …… 이것이 지나치게 일면적인 단정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바로 이러한 폭력의 현실, 이것이 곧 이청준의 소설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세상의 적나라한 참모습이다. 그것은 밝음을 단순히 밝음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세상, 밝음이 또한 무시무시한 어둠이기도 하다는 것을 동시에 말해야만 하는 세상이다. 이것은 대단한 통찰이지만, 그러나 또한 그것은 밝음을 밝음이라고만 받아들이는 통념의 세계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어서 필경 비정상적이라는 낙인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통찰이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자주 정신병이 성찰의 대상으로 떠올려지고 정신이상인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정신병이란 무엇인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정신이 이상해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부터 벗어난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 이것이 정신병이다. 가령 있지도 않은 딸을 있는 것처럼 꾸며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든가, 스스로를 갑부로 착각하는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다든가, 사자를 몰아내고는 스스로 사자 우리에 대신 갇힌다든가 하는 짓들은 아무래도 비정상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이런 상태를 정신병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정상적인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 격리시켜 놓아야 한다는 필요성까지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물어보자. 정신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실체인가? 아니다. 미셸 푸코의 통찰에 힘입어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실체로 항구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분류의 기준선을 긋기 위한 싸움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임의적 구분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싸움은 결국 임의의 기준선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 상태에 대하여 병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으로 귀착된다. 어떤 상태에 대하여 병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기준선 바깥으로 몰아냄으로써 기준선 안쪽의 승리는 확인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그 분류의 임의성 자체에 대해서일 것이다. 이청준이 문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병이라는 명칭에 내포되어 잇는 구분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정신의 어떤 상태를 병이라고 지칭할 때, 이것은 마치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이상 증식을 하는 세포를 암세포라 부르고, 또 이 암세포가 번식해 있는 상태를 암이라는 병명으로 부르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또한 이럴 때 암의 경우라면 당연히 수술 등의 방법을 통해 암세포를 제거하고 치료해야 하는 것처럼, 정신병의 경우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반드시 고쳐서 정상의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 이론의 여지없는 지당한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상태와 정신의 상태를 같은 범주에 포함시켜 같은 용어로 지칭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물론 육체와 정신이 확연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고대 그리스로부터의 가르침처럼 육체와 정신 사이의 상관 관계는 매우 긴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육체와 정신이 아무런 유보 없이 전적으로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서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더라도, 그 둘은 엄연히 다른 범주에 속한다. 그러므로 정신의 상태에 적용될 때 병이라는 용어는 애당초에는 비유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래의 내력은 금방 잊혀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될 때 정신병이라는 용어나 그것이 비유적인 방식으로 가리키는 대상은 마치 그것이 원래부터 실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둔갑해 버리게 되고, 또 이러한 과정에서 뭔가 불순한 의미와 효과가 생겨나게 된다.

어떤 불순한 효과인가? 바로 권력을 만들어내고 이를 정당화하는 효과이다. 가령 이청준의 소설들에서 이러저러한 인물들의 정신병(?)을 치료하는 의사들의 단호함과 집요함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예컨대 <조만득 씨> 같은 소설에서 '독선의 냄새'까지를 풍기는 민 박사의 그 오만한 확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가 그 정체를 애써 규명할 필요도 없이 결과에 이르러 소설 스스로가 그것이 조만득이라는 개인을 구원 아닌 파멸로 이끌어간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렇다면 민 박사의 그 단호한 성실함이란 미스 윤이 고발하는 것처럼 "편한 책임만 명분으로 내세우는 오만하고 무책임한 범죄"였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러한 확신의 정체가 폭력이었다는 것이 판명된다고 해서 그 확신의 정당성이 뿌리채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민 박사가 갖는 단호한 확신의 근거, 혹은 그 뿌리에 있어서의 의미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그것은 "미친 것은 가짜의 삶이고 가짜의 행복"이라는 논리이다. 이것이 설득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삶이 아무리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서밖에는 삶의 진실이 찾아질 수 없다."고 하는, 너무나도 지당하고 합리적이어서 오히려 불모의 것이나 다름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여전히 정상과 비정상의 뿌리 깊은 이분법 위에 성립되어 있는 통념의 진실인 것이다. 민 박사의 '오만하고 무책임한' 확신이 폭력과 범죄로서의 정체를 감추고 성실함으로 위장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통념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념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정당성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위장된 통념에 근거함으로써 그것은 오히려 권력의 지위로까지 발돋움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것에 가해질 수 있는 모든 비난이나 의구심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합리성 ―― 사실은 가짜에 지나지 않지만 ―― 을 정당성의 근거로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폭력의 혐의로부터 유유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민 박사나 이와 유사한 입장에 있는 다른 인물들의 단호함과 확신이란 실은 의사로서의 전문성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통념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이들과 반대되거나 이들의 확신에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의 입장은 무엇인가? 예컨대 <소문의 벽>에서의 화자나 <조만득 씨>에서의 미스 윤 같은 인물들 말이다. 아마도 이들은 인간다움이라든가 행복의 추구 등과 같은 윤리적 진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일 터이지만, 이들의 주장이나 옹호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일 따름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의 구도 또한 정상 대 비정상의 구분과 대립의 구도에서 익명적 통념 대 개인적 진실의 대립의 구도로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통념이라는 것에 대해 물음을 던져 보자. 통념이란 무엇인가? 누가 한 생각인지, 언제부터 옳다고 받아들여져 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저 일반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생각이 바로 통념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어 없는 발화, 주체 없는 사고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대개의 경우 그것은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엄청난 억압적 실체로 개인들 위에 군림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틀렸다고 반발하고 나서면 어떻게 되는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놀림감이 되거나, 따돌림당하게 되거나, 심한 경우 정신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이것이 분류, 혹은 구분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작업을 통해 벌어지는 배제와 추방의 메커니즘이다.

이쯤 되면 통념적 사고와 전짓불 체험의 구도가 얼마나 잘 맞아 떨어지느냐 하는 것은 굳이 강조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다. 눈이 부시게, 아니 그래서 오히려 앞이 안 보이게 들이대며 어느 편인가를 따져 묻는 전짓불의 그 감춰진 소유자처럼, 통념적 사고는 이 또한 누가 하는 생각, 누가 하는 말인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로 사람들에게 편들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렇게 강요되는 편가르기에서 통념의 안쪽에 자리잡을 때, 그것은 마치 깜깜한 암흑 속에서 전짓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우리 편인지 적인지를 분간해 낸 것과도 같은 커다란 안도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럴 때 아마도 통념은 진실로, 전짓불은 구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사람들은 이러한 안도감을 대가로 완전한 익명성의 세계로 '실종'되어 버리게 되고 만다.

실종! 이청준의 많은 소설들의 주요 모티프이기도 한 실종의 의미적 배경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불안, 즉 누군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구가 꿈꾸도록 만드는 사라짐의 상태이다. 그렇다면 분명 그것은 상대방이 드러나지 않음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폭력적인 상황, 일방적인 지배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된 전략일 것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한낱 얕은 꾀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 얕은 꾀에 대한 세상의 보복은 삼엄하다. <소문의 벽>의 박준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미친 척하려는 사람을 세상은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대립의 세계에 제3의 영역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당초에 있어서는 그 미친 척은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기 위한 나름대로의 전략으로 선택된 행태이겠지만,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여전히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구분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 줄타기의 결과는 어느 한쪽으로 떠밀려 넘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구분선 위에서의 줄타기로 선택을 유예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구분 자체를 해체시켜 무화시켜 버리는 일이다. 이청준이 정신병을 소재로 삼은 여러 편의 소설을 통해 열어 보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는 길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건 모르겠다. 이청준이 소설이 제기하고 있는 것도 답이 아니라 문제일 뿐이다. 다만 이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이청준의 글쓰기란 바로 이 '어떻게'에 대한 진지한 모색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청준에게 있어 글쓰기란 세상의 폭력에 대항하는 무기로 선택된 도구인 것이다. 앞서 우리는 전짓불의 체험과 통념적 사고 사이의 구조적 일치에 대해 말했다. 이러한 일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물리적 현실과 상징적 세계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입증해 보여주는 것일 터이다. 전짓불 체험의 폭력성이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통념적 사고가 내포하는 폭력성은 상징적 차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의 폭력성은 상징적 차원에서 영속의 기반을 마련한다. 부르디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상징적 폭력이란 그것을 당하는 사람들의 암묵적 공범 관계를 통해 행사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력과의 싸움은 물리적 폭력의 제거라는 목표에만 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징의 수준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안으로부터 그 체계를 깨뜨려버리는 것이다. 이때 선택될 수 있는 무기로 글쓰기 외에 달리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그 글쓰기의 목표는 일차적으로는 당연히 폭력의 제거일 것이다. 그러나 폭력의 제거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가리켜 보여주는 것인가? 다시 전짓불 이야기에 기대어 말하면 아마도 그것은 전짓불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상태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상황과 현실과 세계로부터 '실종'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자신의 모습으로 당당하고도 행복하게 나타나게 되는 그런 상태일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 드러내기', 이것이 이청준에게 있어서의 글쓰기의 의미이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 대해 이청준은 "세상을 향해 뭔가 끊임없이 자기 진술을 계속할 의무를 자임하고 나선 사람"이라는 정의를 부여한다. 통념이라는 익명성의 사고로 지배당하는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진술, 즉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이리하여 주체성을 스스로 확인하고, 남에게도 확인시키고자 하는 힘겨운 시도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비유적으로 그것은 "필자와 편집자의 진술이 결국 잡지라는 한 권의 책 속에 서로 화의롭게 만나게 되는" 상태에 대한 꿈과 흡사한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꿈은 아마도 하버마스가 역설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상적 대화 상황의 구조로 설정된 세상의 모습과도 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에 있어 이러한 이상이란 필경 실현 불가능한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문학은 최소한 이런 상태에의 꿈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문의 벽>을 위시한 이청준의 초기 소설들이 독자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빛이 만들어내는 어둠 속에서의 글쓰기, 이것을 통해 이청준은 세상을 비춰 줄 참다운 빛과 밝음을 찾으려 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