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 실린 우리말(1)

◆ 있다가도 없는 것, 늘 있는 것 : 가지다/지니다

[풀이]

소유, 보유, 소지 등을 뜻하는 한국어 낱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지다'와 '지니다'다. 그런데 연설이나 발표를 할 때, 혹은 제법 나이 든 사람이 점잔을 빼면서 말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한국어 사용자들이 입말에서 '지니다'를 쓰는 일은 매우 드물다.

'가지다'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널리 쓰이는 데 반해, '지니다'는 주로 글말이나 점잖은 입말에서 쓰이는 것이다. '가지다'가 비격식체라면 '지니다'는 격식체다. 따라서 20대 청년이 가까운 벗에게 허물없이 말할 때에는 '돈 좀 갖고 다녀라.'가 자연스럽고, 노부가 사회 초년생 아들에게 짐짓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워 점잖게 충고할 때에는 '성인은 늘 돈을 어느 정도 지니고 다녀야 한다.'가 어울린다. 똑같은 물건이라고 해도 말을 할 때에는 '그 여자는 핸드백을 늘 갖고’다닌다.'가 거의 불문율이지만, 글로 쓸 때에는 '그 여자는 핸드백을 늘 지니고 다닌다.'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두 낱말 사이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숨어 있다. '가지다'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사람한테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다가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집을/차를 지니고 있다.'는 영 어색하다.

이에 반해 흔히 '지니다'의 대상이 되는 특성, 재주, 권리, 품성, 기운, 아름다움 같은 것들은 사람이 날 때부터 혹은 어느 순간부터 몸에 '지니게'되면, 이후로는 웬만큼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는 법이 없다. 단지 떠나가지 않을 뿐 아니라, 늘 그 사람한테 붙어 있는 중요한 일부가 된다.

'가지다'가 나타내는 소유가 한시적이고 가변적이라면, '지니다'가 나타내는 소유는 항구적이고 불변적이다.

따라서 보통은 '가지다'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도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또는 인격의 일부처럼 늘 소지(혹은 보유)할 때에는 '지니다'로 쓰는 편이 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핸드백이나 신분증, 비상금 같은 것이 그 예다. (물론 이것은 글말이나 격식을 차린 입말에 한한다.) 특히 번역문에서 '미모, 신비, 성격, 인격, 재주, 능력, 잠재력, 자질, 특성, 속성' 따위에 '가지다'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지니다'로 바꾸어서 어느 쪽이 나은지 따져 볼 일이다.

 

[요약]

가지다 : 소유가 한시적이고 가변적임 / 입말투 / 비격식체

지니다 : 소유가 항구적이고 불변적임 / 글말투 / 격식체

 

[연습문제] 괄호 안에서 자연스러운 말을 고르시오.

1. (어머니가 초등학생 딸에게) 책가방도 안 (갖고/지니고) 학교 가는 애가 어딨니?

2. (소설의 지문에서) 여자는 남자가 선물한 핸드백을 늘 보물처럼 (갖고/지니고) 다녔다.

3. (여고생이 친구에게) 이 구두쇠야, 제발 돈 좀 (갖고/지니고) 다녀라!

4. (전기문에서) 그는 더없이 온화한 품성을 (가진/지닌) 학자였다.

* 출처 : 한겨레신문(2006/04/14)

◆ 속과 안은 다르다.

'속'과 '안'은 본디 다른 말인데, 요즘은 헷갈려 뒤죽박죽 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 보니 '속'은 거죽이나 껍질로 싸인 물체의 안쪽 부분이라 하고, '안'은 어떤 물체나 공간의 둘러싸인 가에서 가운데로 향한 쪽, 또는 그런 곳이나 부분이라 해놨다. 어떻게 다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밖에도 여러 풀이를 덧붙였으나 그건 죄다 위에 풀이한 뜻에서 번져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본디 뜻을 또렷하게 밝혀 놓으면 번지고 퍼져나간 뜻은 절로 졸가리가 서서 쉽게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본디 뜻을 흐릿하게 해놓으니까 그런 여러 풀이가 사람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 뿐이다.

'속'은 '겉'과 짝을 이뤄 평면이나 덩이를 뜻하고, '안'은 '밖'과 짝을 이뤄 텅빈 공간을 뜻한다. '속'은 '겉'과 하나가 돼 붙어 있지만, '안'은 '밖'과 둘로 나뉘어 있다. 그러니까 국어 사전이 보기로 내놓은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까 말까 한 좁은 골목 '속'에 쓰러져 가는 판잣집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서 있다. '지갑 안에서 돈을 꺼내다' 이런 것들은 잘못 쓴 보기로 내세워야 마땅한 것들이다. 골목에는 '속'이 없고 '안'이 있을 뿐이고, 지갑에는 '안'이 없고 '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 속담 <독 안에 든 쥐> 또는 <보선이라 속을 뒤집어 보이겠나!> 같은 쓰임새를 눈여겨 살피면 깨달을 수 있다.

* 출처 : 한겨레신문(2006/05/23),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 '기쁘다'와 '즐겁다'

국어사전에서 '기쁘다'를 찾으면 '마음에 즐거운 느낌이 나다', '즐겁다'를 찾으면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쁘다' 이렇다. 기쁘다와 즐겁다는 같은 뜻을 지녔다는 소리다. 같은 뜻이라면 무슨 까닭에 다른 낱말을 쓰겠는가? 둘 다 느낌을 뜻하는 말이다. 그냥 느낌일 뿐만 아니라 좋은 쪽의 느낌이다. 마음이, 기분이, 몸까지도 좋다는 느낌이라는 쪽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두 말은 느낌이 오는 뿌리에서 다르다. 좋다는 느낌의 뿌리가 마음 깊숙이 박혀서 몸으로 밀고 나오면 기쁜 것이다. 좋다는 느낌의 뿌리가 몸에 박혀서 마음으로 밀고 들어오면 즐거운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쁘다'는 느낌은 마음에서 오고, '즐겁다'는 느낌은 몸에서 온다.

이를테면, 달고 향긋한 참외를 맛나게 먹으면 즐겁다. 눈으로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보거나 좋은 영화를 보아도 즐겁다. 이런 즐거움들은 모두 입, 눈, 귀와 같은 몸이 먼저 좋고 나서 마음으로 좋음이 번져 들어온다. 한편, 전쟁에 나갔던 아들이 탈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 어버이는 기쁘다. 몸져 누우셨던 어버이가 깨끗이 나아 일어나시면 아들딸은 기쁘다. 이런 기쁜들은 어느 것이나 몸과는 상관없이 먼저 마음속에서 좋고 그런 다음 몸으로 좋음이 번져나간다. '기쁨'은 혼자 마음속에 간직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으나 '즐거움'은 홀로 가만히 감추고 있기 어렵다. 즐거운 것은 몸과 더불어 바깥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남들과 함께 나눠야 제격이다.

* 출처 : 한겨레신문(2006/05/30),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 '기쁘다'와 '즐겁다'에 대한 다른 의견

5월 29일치 <한겨레> '말뜻 말맛'에 실렸던 '기쁘다'와 '즐겁다'를 잘 읽었다. 우리말을 바르게 쓰자는 김수업 선생의 뜻에 매우 공감한다. 하지만 이 글에 약간 이견이 있다. 김 선생은 '기쁘다'는 느낌은 마음에서 오고 '즐겁다'는 느낌은 몸에서 온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기쁘다'는 좋은 느낌이 곧바로 오는 것이고, '즐겁다'는 지속되고 있는 그 시간적 차이에서 구별되는 것이라고 본다.

'기쁘다'는 좋은 일이 눈 앞에 생겨 느낌이 곧바로 오는 것이다. 김 선생이 든 보기들, 곧 '전쟁에 나갔던 아들이 탈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 어버이는 기쁘다.'가 그런 보기들이다. 대학 합격이나 회사 취직도 기쁜  소식이다. 기쁜 일은 순간적으로 생기므로 그 반응도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기쁜 느낌은 얼굴에 감출 수가 없다. 그래서 '희색이 만면하다.'는 표현이 있다. 반면에 '즐겁다'는 좋은 기분이 꾸준히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즐기자'거나 '즐기며  살자'고 한다. 하지만 '인생을 기뻐한다.'거나 '기쁘게 살자.'는 말은 없다. 취미로 '낚시를 즐긴다.'는 말도 있다. 지금 낚시를 하고 있지 않아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지속되는 일에  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즐기다'가 김 선생 말처럼 몸에서 오는 느낌이라면 '독서를 즐긴다.'는 표현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즐거우면 그 느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인생을 즐기는 사람의 얼굴이 진지하거나 심각할 수도 있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의 얼굴도 대개 덤덤하다. 그러나 월척을 낚은 순간은 기쁨이 얼굴에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은 혼자 마음속에 간직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으나 즐거움은 홀로 가만히 감추고 있기 어렵다는 김 선생의 말은 거꾸로 된 것이다. 오히려 즐거움은 혼자 마음속에 간직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으나 기쁨은 가만히 감추고 있기 어렵다고 말해야 맞다.

<논어>의 첫 구절,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와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는 바로 이런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배우고 때때로 익혀서 모르던 것을 알게 되면 곧바로 좋은 기분이 일어나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반면에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면, 그 벗과 함께 공부도 하고 문학과 인생도 논하면서 지속적으로 좋은 느낌이 우러나오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요컨대, 자식을 낳으면 기쁘다. 그리고 자식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 즐겁다.

* 출처 : 한겨레 신문(1006/06/09), 김창진/초당대 교수, '한국어 바르고 아름답게 말하기 운동본부 사무국장

 

 

◆ 다시 '기쁘다'와 '즐겁다'

내가 쓴 '기쁘다'와 '즐겁다'의 뜻풀이를 읽고 다르게 본다는 분이 있고, 그 분이 그렇게 보는 바를 서슴없이 글로 써서 세상에 내놓으니 참으로 반갑다. 게다가 나에게 다시 이런 글을 쓸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니 신문 편집하는 분들 또한 고맙다.

내가 알기로 우리 토박이말의 뜻과 쓰임새를 놓고 옳고 그른 바를 따지고 밝혀보자며 나서는 사람도 일찍이 없었고, 우리말의 뜻과 쓰임새를 두고 생각을 나누도록 자리를 마련한 신문도 일찍이 없었다. 그만큼 우리 토박이말은 생각하고 따지고 밝힐 만한 것도 아니라고 여기며 살았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나는 더없이 반갑고 고맙다.

사실, 내가 기쁘다와 즐겁다의 뜻을 지면이 좁아 겨우 뿌리만 이야기했기 때문에 김창진 교수처럼 고개를 갸우뚱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헷갈리게 써온 지가 이미 반세기를 넘어 머리에 남은 체험의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되고, 지난날 쓰임새를 낱낱이 찾아 살피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리는 까닭에 섣불리 나서서 가늠해낼 사람은 흔치 않다. 이제부터라도 짓밟히며 견뎌온 우리 토박이말을 살피고 돌보려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기쁘다와 즐겁다는 내가 우리 토박이말에 처음으로 눈길을 돌린 스무 해쯤 전부터 마음에 걸려 있던 낱말이다. 그때 내가 몸담았던 대학에서 학생들과 토론을 벌였을 적에도 김 교수와 같은 의견을 내놓는 학생들이 있었다. 김교수가 기쁘다는 곧바로 왔다가 (사라지고), 즐겁다는 꾸준히 이어진다고 했는데, 그런 느낌도 뿌리가 마음에 내린 것과 몸에 내린 것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쉽게 가닥이 잡혔다.

김 교수는 두 낱말이 쓰이는 보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가운데는 헷갈려 쓰인 것도 없지 않으나 거의는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뿌리가 속의 마음에서 오는 것과 겉의 마음에서 오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들이다. 일테면, <논어>에서 보기를 끌어왔는데 그것은 중국 글말을 뒤친 것이라 꼭 마땅한 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침은 요즘처럼 헷갈림이 없던 지난날 우리 겨레의 쓰임새로 살펴볼 값어치가 있다.

알다시피 기쁘다는 '열(悅)'을 뒤치고, 즐겁다는 '락(樂)'을 뒤친 말이다. 그런데 열(悅)은 마음이 풀어짐을 뜻하는 글자고, 락(樂)은 큰북과 작은북을 나무받침에 올려놓고 두드린다는 뜻으로 만든 글자다. 이것으로도 기쁘다가 마음에서 오고 즐겁다가 몸에서 온다는 느낌의 뿌리를 올바로 가늠할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기쁘다와 즐겁다는 저마다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짝과 더불어 쓰인다. 기쁘다는 슬프다와 짝이고, 즐겁다는 괴롭다와 짝이다. 그런데 슬프다는 속인 마음에서 솟아나 몸으로 퍼지는 느낌이고, 괴롭다는 겉인 몸에서 일어나 마음으로 들어가는 느낌임을 좀 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내 뜻가림도 온전하다고 우길 생각은 없다. 우리 함께 깊이 살피고 헤아리며 밝혀가기를 바랄 따름이다.

*출처 : 한겨레신문(2006/06/13),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언어 분류

우리말을 세계 여러 언어들과 견줄 때, 흔히 알타이 말겨레에 딸린다기도 하고 교착어에 든다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현재 지구상에서 쓰이는 수천 어어들은 똑같은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에 비해 더 비슷하거나 가까운 게 있어, 서로 가까운 것끼리 묶어 볼 수 있다. 말을 분류하는 기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언어의 구조적 특징에 바탕을 두는 기준인데, 이를 유형론적 분류라 한다. 다음은 언어의 기원과 역사에 바탕을 두는 것인데, 이를 계통론적 나누기라고 한다.

언어의 유형론적 분류란 언어가 지니는 마소리, 낱말, 문장에 따라 같은 특징을 가진 언어들끼리 묶어서 나누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문장을 구성할 때 우리말처럼 목적어가 서술어 앞에 놓이는 언어들이 있는가 하면, 영어처럼 목적어가 서술어 뒤에 놓이는 언어들이 있다. 이처럼 부려 쓰는 말 차례에 따라서도 세계 언어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계통론적 분류란 그 언어의 뿌리가 어디에 있으며, 같은 뿌리에서 갈려 나온 언어에는 어떤 언어들이 있는지를 밝혀 나누는 방식이다. 이렇게 나누어 기원이 같은 언어들끼리 묶은 것을 말겨레(어족)라고 하는데, 흔히 알타이어족, 우랄어족, 인도유럽어족들이 그 보기다. 그렇다면 우리말은 알타이어족에 드는 언어일까? 그렇다고 알고 있는 이가 적잖은데, 아직은 단정짓기 어려운 수준이다.

* 출처 : 한겨레신문(2006/06/02), 권재일/서울대 교수, 언어학

얼과 넋

마음의 속살인 느낌 · 생각 · 뜻은 몸에서 나오지만 얼은 몸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그래서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얼이란 말을 썼으니 그게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얼간이 · 얼뜨기 · 얼빙이 · 얼빠졌다'는 말이 있다. 얼간이는 얼이 나가 버린 사람이다. '얼간 + 이'가 아닌 '얼 + 간 + 이'로 풀어야 얼뜨기는 얼이 떠 버린 사람, 얼빙이는 얼이 비어 버린 사람이다. 얼빙이나 얼뜨기나 얼간이의 사람됨을 싸잡아 '얼빠졌다' 한다. 얼이란 무엇인가? 우선 '알'이다. 뜻의 알, 생각의 알이고, 느낌의 알이며, 곧 마음의 알이다. 마음의 알이면 몸의 알이고 마침내 사람의 알이다. 사람의 알은 다른 온갖 알과는 아주 달라 홀소리를 바꾸어 '얼'이라 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 한다. 무엇이 돌아가는가? 몸은 주검으로 누워 있다. 느낌과 생각과 뜻인 마음은 몸에 뿌리박혔으니 주검과 떨어질 수 없다. 돌아가는 것은 다름 아닌 얼이다. 어디로 돌아가는가? 본디 왔던 거기로 돌아갈 수밖에. 그런데 몸을 떠나 돌아가는 얼은 얼이 아니다. 몸을 벗어나면 이미 무엇의 '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뀐 이름이 '넋'이다. 무교의 사제인 무당은 굿판에서 넋건지기, 넋걷이, 넋굿, 넋두리, 넋맞이, 넋반, 넋풀이 같은 말을 자주 쓴다. 산 사람에게도 '넋 빠진 사람, 넋 나간 사람, 넋을 놓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주검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매우 몰아치는 말이다.

* 출처 : 한겨레신문(2006/06/13),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