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의 이해

-김승호-    

1. 판소리의 전반적 이해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로 여기에 이미 판소리의 대략적 정의는 들어가 있는 셈이다. <판>이란 놀이판이나 연기가 펼쳐지는 무대라는 뜻이고, <소리>는 노래의 다른 말이라고 볼 수 있으니 판소리는 노래꾼(唱者)이 노래판에서 부르는 노래를 뜻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판소리를 이루는 가장 기초적 이해일 뿐이다.  거칠기는 매한가지지만 <판소리란 광대 혼자서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사설을 이어부르는 우리의 민속 음악>이라 하면 뜻이 조금은 자세해진다.

판소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노래들, 가령 민요 · 창가 · 시조 · 가곡 · 서정시를 바탕으로 노래하지만 그 바탕글(唱本)은 단가의 그것과 달리 대단한 분량으로 되어 있을뿐더러 소설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쓰임새도 독특해서 광대가 인물과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설을 외우고 노래와 이야기를 엇섞어 관중들을 울리고 웃기고 한숨을 토하고 비분도 젖게도 만든다. 무엇보다 노래만으로 그치지 않고 이야기가 곁들여진다는 점은 단순히 판소리를 음악의 영역에서만 살펴볼 수 없게 할뿐더러 구비서사문학으로도 이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게다가 판소리는 이야기나 노래로 끝나지 않고 광대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구실을 하며 갖가지 시늉과 표정을 지어 작중 인물과 상황을 실감나게 엮어나가는 또 다른 면이 있다. 광대가 도맡아 하는 이런 연기를 '너름새'라고 하는데 완전한 연기의 수준에가지 이르는 것은 아니나 노래판에 참여한 관중에게 듣고 보게 해주고 한껏 창자의 연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데 아주 긴요한 구실을 한다. 이렇게 볼 때 판소리는 민속 음악의 테두리에만 넣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함과 복합성을 지닌 장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판소리의 구성 요소 ]

                              ① 창(노래, 음악)

                              ② 아니리(사설문학)

                              ③ 너름새(몸짓, 연극)

 

신재효는 광대가(廣大歌)에서

      광대라 하는 것은

      ⑴ 제일은 인물치레

      ⑵ 둘째는 사설치레

      ⑶ 그 지차 득음이요

      ⑷ 그 지차 너름새

라 하여 판소리의 구성 요소와 광대의 자질을 잘 짚어 주었다. 광대 노릇은 분명 아무나 할 수 없다. 더구나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네 가지 요소를 갖추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천부적 재질과 더불어 피나는 소리 수업이 따라야 한다는 점을 광대가에서 분명히 일러주고 있다. 이미 19세기에 접어들면 광대는 능란한 소리와 연기를 바탕으로 폭넓은 수용층을 확보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들이 겸비해야 할 조건을 앞의 도식으로 설명할 때, ⑴은 좋은 목을 가지고 능수능란하게 노래할 수 있는 광대의 능력을 말한다. 그리하여 일단 경지에 오른 명창은 "폭포수가 쏟아지듯 / 장단고저 변화무궁 / 이리농락 저리농락"할 수 있었고, 또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⑵는 <춘향가> · <심청가> · <흥부가>처럼 노래의 바탕글(창본)과 이를 다 소화해내는 입담과 기억력, ⑶은 앞의 노래와 이야기를 적절하게 보조하고 의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줄 수 있는 표정과 함께 그런 연기력을 말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판소리가 음악 · 문학 · 연극을 세 축으로 한 복합적 구조물임을 새겨볼 수 있다. 판소리는 후대로 오면서 창극화되고 사설이나 연기에 비중을 두어, 창을 되도록 줄이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야기에 기울어지는 소리꾼을 <아니리 광대>라 비아냥거리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했는데, 전통적으로 판소리에서 창을 가장 중시했음을 여기에서 알게 된다. 19세기 이후 목좋은 명창은 부와 명예를 한껏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의식 때문이었다.

판소리는 서양 연극이나 오페라와는 달리 공연 준비가 거의 필요 없다. 광대와 고수가 등장하고 자리 하나만 깔아 놓으면 언제 어디서나 부를 수 있는, 단촐하기 그지없는 연행물이다. 그런데도 관중들에게는 어떤 예술에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감동과 여운을 남길 수 있었다. 판소리가 단순히 창자(唱者) 한 사람의 노래나 연기를 듣고 보는데 그치지 않고, 관중에게도 그때그때 창에 호응할 수 있도록 판이 개방되어 있다는 데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판에서 노래가 익어가고 창자에게서 고도의 기교가 터져나올 때나 줄거리가 기막힌 대목에 이르면 너나 할 것 없이 관중들은 추임새를 넣으며 그 소리를 거들어주길 주저하지 않았으며, 흥을 못이긴 나머지 일부 청중은 어깨춤을 추며 창자의 노래와 연기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내기도 한 것이 절정기 판소리 연희 현장의 풍경이었다.

                      창, 너름새                                           창

청중       <-----------        창자(唱者)       -------------->     고수(鼓手)

                    ----------->                              <--------------

                        추임새                                         추임새, 북장단

판소리는 창자와 관중 그리고 고수가 혼연 일체가 되어 한 공간에서 공동체 의식을 갖고, 보고 즐길 수 있는 독특한 구조를 지닌 공연 예술이다. 기본적으로 노래의 주역은 창자이고 청중과 고수는 감상자에 속하지만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면서 고수의 북장단과 추임새 그리고 청중의 추임새까지 가세하여 고단한 창자에 힘과 흥을 불어 넣어준다. 이리되면 감상자에 보답하듯 창자는 더욱 신바람이 나서 활기찬 몸짓으로 노래를 이어나가게 된다. 이렇게 주고 받으면서 생기는 흥과 열기는 마침내 창자와 고수 그리고 감상자 간에 너와 내가 따로 없는 우리의식으로 이끌어다 준다. 이점은 판소리가 창자 한 사람에서 시작되고 그에서 끝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공동체적 의식을 중심에 둔 아주 개방적인 구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 판소리의 기원과 발생

 

판소리는 언제 어느 지방에서 어떤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했으며, 우리 고유의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의 어떤 것을 모방해서 생겨난 것인가 등등 그 발생을 둘러싸고 궁금한 것이 참 많다. 그러나 아직까지 시원하게 밝혀지지 못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판소리가 처음 전라도 충청도를 포함하는 삼국시대 백제권에서 생겨났고 그 노래꾼들이 무속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대체로 동의하게 되었다.

판소리 형식을 두고 '광대소학지설(廣大笑謔之說)', 즉 광대들이 이야기 놀이판에서 해학과 골계로 사람들을 사로잡던 이야기와 노래가 가다듬어지고 정리되어 나중에 판소리가 되었다든가 혹은 중국에서 평민 등에게 불경을 깨우쳐주기 위해 만든 이야기, 곧 강창문학(講唱文學)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판소리 형식으로 바꾸어졌다는 설이 있었으나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제 많지 않게 되었다. 그밖에 민요 · 시조 · 가사 · 창 등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했으나 이 역시 서사무가 기원설에 밀려 점차 설득력을 잃고 있다.

서사무가에서 판소리가 나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이렇다. 우선 서사무가와 판소리는 모두 장편 구비 서사시로 서로 간에 전환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판소리인 <심청가>를 무속적인 <심청굿>으로 얼마든지 바꾸어 부를 수가 있다. 창과 아니리를 서로 섞어 부르는 가창 방식에 있어서도 양자는 똑같고, 전라도 무가의 경우 판소리와 장단까지도 동일해 서로 간의 전환이 아주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판소리의 광대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라도 단골 무가 출신으로 밝혀져 다른 무엇보다도 전라도 무악과 판소리는 뗄 수 없는 관련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판소리와 무가의 주제는 각각 그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무가에서는 신성성을 강조하고 초월적 권위에 대한 기원과 주술성을 담고 있다면, 판소리 사설은 세속적 현실에서의 자잘한 일을 소재로 삼아, 초월적 능력을 가진 영웅 대신 힘없고 가난한 인물이 지니고 있는 불만과 욕망을 야유 · 풍자 · 골계 · 해학 등에 실어, 보고 듣는 이들이 재미 · 쾌감 · 교훈을 얻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결과적으로 판소리는 평민층이 그들의 의식과 욕구를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카타르시스까지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판소리가 간직한 감동과 여운은 평민만의 몫은 될 수 없었으니, 양반층도 그 나름으로 소리판에 대단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후에는 이를 적극 가상하고 지원하는 이도 늘었다. 즉 유식한 언어 구사와 더불어 세련되고 깊이있는 이야기 틀은 사대부, 양반층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족했다. 그만큼 판소리는 계급 · 신분 · 나이를 넘어 누구나가 다 공감하고 즐길 수 있도록 음악적 · 문학적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배려를 했다.

컨대 판소리는 가창 방식에서는 무가(巫歌)를, 사설에서는 근원 설화를 바탕삼아 생겼으나 굳이 그런 것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이를 변형 · 개작 · 보완하는 한편 조선 후기 민중들의 입장과 처지, 나아가 당대 사회상까지 생생하게 부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무엇보다 민중 안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난 이 양식이 양반층까지 그 감상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점은 내용과 주제를 떠나 우리말과 노래가 지닌 아름다움을 교묘한 방법으로 판소리 안에 숨겨 놓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판소리와 주변 양식

 

판소리가 애초 무가에서 왔다고는 하나 광대들은 무가의 내용을 버리고 세속의 일이나 비천한 사람들에 초점을 두어 그들의 평소 사정과 생각을 전해주려 했다. 이때 그들은 창본을 새로 창작하여 쓰기보다 민간에 떠돌던 설화를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보는데, 우선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따로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다시말해 민간 설화는 당대 민중들이 품고 있던 생각과 세계관 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민중의 입장을 드러내려는 그들로서는 민간 설화야말로 아주 이상적인 창본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광대들은 치졸한 형태의 판소리가 횡행하던 초기에는 창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니리>에 관심을 더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창의 비중을 높여나갔다. 그런 과정에서 명창들의 도움을 받아 판소리 열두 마당이 정해졌다. 일단 이렇게 자리를 굳힌 판소리는 도회지나 궁벽한 시골을 가리지 않고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 마침내 국민 음악으로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다섯 마당 가운데 <삼국지연의>에서 따온 <화용도(華容道)>를 빼고는 모두 근원설화를 가지고 있어 판소리 사설이 애초에 근원설화에서 온 것이 분명해진다. 가령 <춘향전>은 열녀 설화, 암행어사 설화에서, <심청가>는 이미 조선초 민가에 퍼져있던 전라도 옥과부 관음사 연기설화(緣起說話)에서, <배비장전>은 서거정의 태평한화를 약간 변형시켜 사설로 쓴 것임이 밝혀졌다. 이로써 우리는 [근원설화 → 판소리 → 판소리계소설]로 이행되어 왔다고 믿게 되었다. 이는 한문 소설과 대비해 판소리계 소설이 매우 특이한 기원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흐름이 [판소리 → 판소리계 소설]로 되어 있어 자칫 소설 형성에 판소리가 크나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여기서의 <판소리>란 판소리 사설 혹은 창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판소리 · 판소리 사설 · 판소리계 소설은 그 역할과 기능이 서로 다를뿐더러 그 나름의 특성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구별이 어렵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무시하고서는 판소리와 주변 양식의 차이와 판소리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내기가 어려워진다. 판소리 연구가 먼저 국문학 쪽에서 진행되다보니 사설 위주의 연구로 기울어졌던 점은 반성하고 시정할 일이다. 근래에는 현장 중심으로의 고찰을 포함하여 민속학적 · 연극적 측면에서의 고찰 역시 절실하다는 의견들이 있었고, 그에 따라 최근에는 문학 부분 이외에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바람직하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판소리의 음악적 측면

 

(1) 장단

판소리는 자유스런 음가로 부르지 않고 정해진 여러 가지 장단과 발성의 틀을 가지고 있다. <일고수 일명창>이라 해서 장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장단은 사설을 보다 다채롭고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생각해온 것이다. 현재 사용하는 판소리 장단은 진양 중모리 · 중중모리 · 자진모리 · 휘모리 · 엇모리 · 엇중모리가 있는데, 중모리 · 중중모리 · 자진모리 장단이 기본이 된다. 박헌봉은 창악대강에서 "진양은 서정적이고 애련조"이고, "중머리는 태연한 맛과 안정감이 있고", "중중모리는 흥취를 돋우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들은 [진양 → 중모리 → 중중모리 → 자진모리 → 휘모리]순으로 점점 빠르게 되어 있으며 사설 중의 상황과 인물의 감정 · 기분에 따라 적절히 골라 대응시킬 수 있다는 데 묘미가 있다. 아래에 좀더 덧붙여 설명한다.

진양은 3분박 느린 6박자를 단위로 하여 소리의 맺고 풀림에 따라 3 ∼ 6단위의 주기로 북의 변주가 따른다. 진양은 느린 장단이므로 사설의 상황이 한가롭고 느슨하며 서정적 장면에 잘 어울린다. <춘향가> 중의 적성가 · 긴사랑가, <심청가>에서는 범피중류 · 추월만정 등에서 진양을 쓰고 있다.

중모리는 2분박 빠른 12박자로 이를 몇 개 단위로 해 소리를 맺고 푸는 데 따라 북을 변주하여 친다. 중모리는 빠른 장단이므로 사설에서도 서정적이거나 서술하는 부분에서 많이 쓰인다. <춘향가>의 쑥대머리 · 옥중상봉, <흥보가>의 가난타령, <심청가>의 선인 따라가는 대목은 중모리가 사용된 대표적인 예이다.

중중모리는 3분박 좀 느린 4박자이나 좀 빠른 12박자로 느끼기도 한다. 이를 3-8단위로 하여 소리를 맺고 푸는 데 맞춰 북을 변주하여 친다. 중중모리는 사설 가운데 춤추거나 활보하거나 통곡하는 장면에 맞추어 많이 쓰이는 장단이다. <춘향가>에서 천자풀이 · 자진사랑가 · 어사와 장모, <심청가>에서 꽃타령, <흥보가>에서 제비노정기 · 비단타령, <수궁가>에서 토끼화상, <적벽가> 중 장승타령은 중중모리를 쓰고 있다.

자진모리는 3분박 보통 빠르기나 좀더 빠른 4박자로 이를 몇 개의 단위로 해서 소리의 맺고 풀림에 따라 북을 변주하여 친다. 자진모리는 다시 '느린 자진모리'와 '자진 자진모리'로 나눈다. '느린 자진모리'는 사설의 장면이 길게 서술하거나 순차적으로 사건 상황을 나열할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한다. 이에 비해 '자진 자진모리'는 이보다 훨씬 급박한 상황에 쓴다. 자진모리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의 신정맞이 · 어사출도, <심청가>에서 인당수 바람부는 데, <적벽가>에서 자룡이 활쏘는 데 따위를 들 수 있다.

휘모리는 2분박 매우 빠른 4박자이며 이를 몇 개의 단위로 하여 소리의 맺고 풀림에 따라 북을 변주해 친다. 이는 매우 빠른 장단이므로 사설에서 상황이 매우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대목에 알맞다. <춘향가> 중 춘향이 끌어내리는 데, <심청가>에서 심청이 물에 빠지는 데, <흥보가>에서 돈과 쌀을 퍼나르는 대목에서 이를 쓴다.

 

(2) 선율

소박하고 유치한 단가적 형태에서 점차 벗어나 판소리의 음악적 기교와 세련미를 갖출 수 있게 된 데는 또한 조(調)의 구실이 퍽 컸다 할 수 있다. 조는 계면조 · 우조 · 평조 · 경드름 · 추천목 · 석화제 · 설렁제 · 강산제 · 메나리조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감정 표현 · 발성 등을 염두에 두고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보형에 따르면 계면조(界面調)는 슬픈 느낌을 주고, 우조(羽調)는 밝고 화평한 느낌을 주고, 평조(平調)는 경쾌한 느낌을 주고, 경드름은 웅장한 느낌을 주고, 설렁제는 씩씩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조는 사설의 분위기와 상황을 통해 사건 상황에 따른 즐거움과 슬픔같은 감정을 깊이 있고 간절하게 드러내는 데 매우 큰 힘을 발휘한다. 좀 더 덧붙이면 아래와 같다.

판소리에서 계면조는 가곡에서 쓰던 용어를 빌려쓴 것으로 서름제 혹은 애원성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슬프고 애절하며 여성이 등장하는 장면에 곧잘 쓰인다. 계면조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이별가 · 옥중가, <심청가>에서 심청의 유언 · 추월만정, <흥보가>에서 가난타령, <적벽가>에서 고당상(高堂上) · 새타령이 이에 해당한다.

우조는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어 호령조라고도 하며, 그만큼 남성이나 영웅의 출현 대목에 흔히 쓰인다. <춘향가>의 만첩청산 · 신년맞이, <적벽가>에서 삼고초려가 이에 해당한다.

평조는 정가적인 특질을 갖고 있는 조이다. 이 조는 특히 화평하고 명랑하고 즐거운 대목에 많이 쓰인다. <춘향가>에서 천자풀이, <적벽가>에서 장승타령 따위가 대표적이다.

 

(3) 유파

▒ 동편제(東便制)

이 소리제는 전라도 동북 지역인 운봉 · 구례 · 순창 · 홍덕 등지에서 전승되어 오던 것으로 순조 때 송흥록을 시작으로 하여 그의 집안에서 지속적으로 다듬고 세련되게 만들어 내려온 소리이다. 송흥록 이후에는 송광록 · 박만순 · 송우룡 · 송만갑 · 유성준으로 전해졌다. 그 밖에 김세종 · 장자백 · 정춘봉 · 박기홍 등도 이 동편제에 속했던 명창들이다. 근래에는 박봉술에서 송순섭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편제 소리는 우조를 많이 쓰고 발성을 무겁게 하고 소리의 꼬리를 짧게 끊고 굵고 웅장한 시김새(소리꾼의 목소리가 매우 예술적으로 세련된 상태)로 짜여 있어 청중에게 시원스러운 맛을 가져다준다.

 

▒ 서편제

서편제는 전라도 서남 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로 주로 보성 · 광주 · 나주 등지에서 많이 불려졌다. 이 소리제의 명창으로는 철종 때의 박유전에서 출발하여 이날치 · 김채만을 축으로 한다. 그 밖에 정창업 · 김창환 · 김봉학으로 내려오면서 큰 줄기를 이루었다. 서편제 소리는 비교적 계면조를 많이 쓰며 발성을 가볍게 하는 데다 소리의 꼬리를 길게 늘이고 정교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소리의 공력은 적은 대신 사설의 리듬을 다양하게 하여 소리를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서편제의 특징이다.

 

▒ 중고제

중고제는 경기도 · 충청도 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이다. 이에는 두 축이 있는데 순조 때부터 시작하여 김성옥 · 김정근 · 황호통 · 김창룡으로 전해지는 소리제에, 아울러 순조 때의 명창 염계달로부터 고수관 · 한송학 · 김석창으로 전해지는 소리제가 있다. 중고제는 소리는 동편제에 가까우며 고박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5. 판소리 사설과 신재효

 

판소리 사설은 무엇이며 판소리계 소설은 무엇인가를 놓고 사람들은 엄밀한 구분없이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 판소리 사설이란 광대가 소리를 할 때 바탕글로 삼고 있는 것, 다른 말로 창본을 가리킨다면, 판소리계 소설이란 그 창본을 소설로 바꾸어 독서물로 쓴 것을 지칭한다. 사설은 평민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억울하고 서러운 심정을 쏟아놓고 때로는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지만 실컷 양반을 조롱하고 비웃는 내용으로 처리해 놓고 있어 특히 피지배층의 공감을 크게 얻을 수 있었다. 이렇듯 사설이 평민들에게 대리 배설과 욕구 충족의 몫을 하게 되자 사설을 창본으로서만 쓸 게 아니라 소설책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몰락한 양반이나 유식한 중인들 사이에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사설은 쉽게 소설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후 서울 · 안성 · 전주 등지에 필사자들이 모이고 세책점(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상점)들이 들어서는, 전에 보지 못하는 풍경이 생겼다. 책장수와 필사자들이 노리는 독자층은 농업의 광포화와 상업 · 공업의 발달로 점차 경제적으로 여유를 누리게 된 평민층과 도시의 상공업자들이었다. 판소리 사설이 노래판에서의 창본으로 그 쓰임새가 그치지 않고 소설로서 쓰임새가 바뀌게 된 계기는 19세기 사회 경제적 상황의 변화, 그리고 양반들의 의식과 구별되는 민중의식이 사설 속에 강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소리 사설과 판소리계 소설은 각각 연희에서의 공연 대본으로서, 또는 독서만을 위한 이야기로서 각각 다른 쓰임새를 지니고 있어 사실 그 차이가 크다. 그럼에도 사설과 소설의 차이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는 사설을 큰 수정이나 변형을 가하지 않은 채 거의 그대로 소설책으로 둔갑시켜 이름만 바꾸어 쓴 탓이다. 그러나 그 쓰임새가 달랐으니 같은 이야기이지만 서술적인 면에서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설은 아무래도 공연물로서 구실해야 했기에 극적 요소가 보다 요구되었던 반면, 소설은 순수 독서물로서 구체적인 이야기와 그 논리를 앞세웠다. 판소리 사설이 나중에는 소설로 바꾸어도 표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의 세련도를 갖추게 되지만 판소리의 형성기만 하더라도 사설은 근원 설화와 별반 다른 게 없었다고 본다. 그때의 사설은 논리면에서나 이야기로서의 전체적 구조에서 통일성이 부족함은 물론, 문체도 소박하고 매우 거칠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기의 사설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다듬어지지 않은 대신 초기의 사설은 민중의 생각과 감정을 바탕에 깔고 그들의 생기발랄한 삶, 역동적인 힘, 순진무구한 인물을 통한 해학과 익살스러움, 그리고 화자의 노골적인 설명과 해석이 질펀한 입담 위주의 이야기에 실려 마음껏 구사될 수 있었다. 이것은 민중 언어가 성취한 크나큰 성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평민들이나 중인층만의 예술로 머물지 않고 양반들까지 판소리를 즐기게 되면서 사설이 크게 바뀌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시대 변화와 관련지어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인물은 신재효이다.

신재효는 1812년 11월 6일 생으로 그의 아버지 신광흡은 서울 사람이었으나 고창현의 경주인 노릇을 했고, 뒤에 그곳에서 관약방(官藥房)을 차려 크게 재산을 늘렸던 인물이다. 그런 집안 배경은 신재효로 하여금 뒷날 그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판소리에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베풀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왜 중인으로서 그가 열정과 재산을 바쳐가면서 판소리 부흥에 매달렸는지 동기가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단지 재산이 넉넉했던 중인이었으나 아직 신분 상승의 뜻을 이룰 수 없던 그로서는 예술가로서의 길을 찾기로 마음을 다진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든 아직 광대나 판소리에 대한 인식이 보잘 것 없던 그때 판소리 중흥에 온몸을 바친 것에서 그의 심미안적 안목과 선각자적 통찰력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신분 상승의 굴레를 극복하고 판소리 중흥의 기틀을 다진 그의 생애는 그 자체로 돋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공적을 몇 가지로 나누어 구체화시킬 수도 있다.

우선 노래 부르고 당대적 명창을 얻는다는 개인적 차원에서 벗어나 그 당시 이미 전성기에 들어선 판소리를 체계화하고 그 이론의 틀을 만들어 뒷세대에 물려주려 애썼음을 잊을 수 없다. 둘째, 광대들을 문하에 끌어들여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한편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남창만 존재하던 시절 진채선이나 허금파같은 여창을 발굴하고 길러낼 수 있었던 것은 개방적인 그의 안목이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웠다. 셋째, 직접 자신이 광대가를 비롯하여 14편의 단가를 짓는 등 나름대로의 창작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중구난방으로 떠돌던 판소리를 고르고 매만져 <춘향가>(남창, 동창) · <토별가> · <심청가> · <박타령> · <적벽가> · <변강쇠>가 등의 6마당을 정착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특히 그가 사설을 매만지고 고쳐 6마당으로 정해 놓은 일은 잘한 짓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었다. 그런데 신재효 판소리 사설이 양반 중심으로 고쳐진 데는 시대적으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이르면서 양반도 이제 열렬한 판소리의 감상자로 떠올랐다. 이런 사실은 1754년 유진한이 소리판에서 춘향가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이를 한시로 남긴 <만화본 춘향가(晩華本春香歌)>가 있는데 이는 양반들의 판소리에 대한 인식을 보이는 최초의 기록이다. 또 1810년에는 양반인 송만재가 그 아들이 급제했으나 판소리판을 열어줄 돈이 없어 낙담하다 궁리 끝에 놀이판을 그대로 묘사한 관우희(觀優戱)를 지어 잔치에 대신한다고 했다. 50년 주기로 나타난 이 두 자료는 19세기에 이르면서 평민 못지 않게 양반들도 판소리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분위기로 바뀌었음을 일러준다. 단적인 사례로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철종 · 대원군 · 고종 등의 임금을 비롯해 상층군에서는 판소리 광대를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소리판을 벌였고, 벼슬을 내리고 푸짐한 대가를 내려 광대의 사기를 높였다. 광대들은 이제 시골이나 장터에서 소리를 팔아 푼돈을 챙겨 근근히 생활하는 딱한 신세들이 아니었다. 유명한 광대는 재물과 벼슬을 얻게 되었고, 그런 변화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에 관심을 갖고 물질적으로 지원해주는 상층의 입장과 그들의 취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세기의 판소리를 둘러싼 이같은 변화는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을 개작하고 정립시키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간추려 말한다면 신재효 판소리 사설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평민의 입장에서 지어진 사설을 될 수 있는 대로 양반들의 생각과 취향에 다라 말과 줄거리를 고쳐 나가고자 애썼다는 것이다. 그의 사설 개작을 자세히 살피다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그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자주 사설에 끼워 넣는다.

⊙ 다른 가객 몽준중가는 황릉묘에 갔다는데 이 사설 짓는 이는 다른 데를 갔다 하니 좌상처분 어떨는지

⊙ 화로에 향피우고 바리에 물을 부어 앙천암축하시는 데 가만가만 빈말씀을 알 수가 없건마는 제사를 지내실 제 축문이 있겠기에 이 사설 짓는 사람 제 의사로 지었으니 공명선생 아시면 꾸중이나 안하실지

신재효의 사설 정리는 단순한 채록의 수준이 아니었다. 사설을 자기 마음대로 고치고 심지어 엉뚱하게 줄거리를 바꾸기까지 했는데, 그런 적극적 개작은 판소리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이해가 깊다는 스스로의 자신감과 우월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밑줄 친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한편으로는 양반 좌상, 곧 그보다 신분이 높은 관중을 퍽 의식하여 사설을 고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설에 일단 얼굴을 내밀어 놓고 그 다음 사설 개작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구하는 자신의 말을 덧붙이곤 했으나 창자들에게는 소화해내기 어려운 군더더기가 되어 버렸다.

둘째, 신재효 사설에 이르면 민중의 성격이 크게 약화된다. 문체에 있어서나 주제에 있어서나 작중 인물에 있어서 이같은 현상은 폭넓게 나타난다. 그때까지 불려졌던 판소리의 바탕글들은 세속의 평민들이 일상에서 내뱉는 욕 · 비어 · 속담 · 육담 · 사투리가 예사로 판을 쳤고 그것이 별 여과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여졌으나 이제는 말을 고르고 다듬어 가능한 한 점잖고 품위있는 것으로 고쳐나가려고 애썼다. 다음에 <이고본>과 <신재효 사설>을 예시하겠다. 이고본은 신재효 사설보다 앞선 시기의 것이어서 이 둘을 비교하면 신재효 개작의 특징이 나올 것이다.

<李古本> (방자가) 밧비 뛰며 건너가서 눈 우의다 손을 언고 벽역갓치 소래를 질너 이애 춘향아 말듯거라 야단낫다. 춘향이가 깜짝 놀나 추천줄의 둑여날여와 눈 흘기며 욕을 하되 애고 망칙해라 제미□개□으로 열두다섯 번 나온 년석은 어름의 잣바진 경풍한 쇠누깔갓치 최생원의 호패 구역갓치 또 뚜러진 년석이 대각이는 어러동산의 문달래 따먹든 덩덕새 대갈리 갓튼 년석이 생고자 색기 갓치 몹시 질너 하마트면 애보가 떠러질 번하였다.

 

<신재효 사설> 房子가 썩 들어서며 이에 春香아 너본지 오래구나. 老母 侍下에 잘 있었느냐. 春香이 돌아보니 전에 보던 房子여든 너 어찌 나왔느냐 사또 자제 도령님이 廣寒樓 구경왔다 추천하는 제 네 거동을 보고 大怒하여 불러오라 하셨으니 나를 따라 어서 가자 春香이 天然正色하여 房子를 꾸짓는다. 서울 계신 도령님이 내 이름을 어찌 알며 설령 알고 부르란들 네가 나를 누구로 알고 부르면 썩 갈줄로 당돌히 건너온다. 千萬不當 못될 일을 잔말 말고 건너가라.

같은 대목을 두고 <이고본>과 <신재효 사설>은 이렇듯 서술에 있어 큰 차이가 나타난다. 앞의 것이 현장의 말을 그대로 채록한 수준이라면 뒤의 것에서 보듯 신재효는 유식한 문자로 말을 다듬고 장면을 정리하는 데 매우 힘을 기울였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신재효는 이야기의 전체적 틀도 실수 많고 무식하고 가난한 평민의 생애가 아니라 영웅의 일생에 맞는 줄거리로 뜯어 고치기도 했다. 특히 춘향전에서 춘향을 천상에서 하강한 선녀로 보고 지상에의 탄생과 시련, 고난, 그리고 극적 반정을 거쳐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해 놓았는데 <유충렬전>과 같은 영웅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을 보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평민의 발랄함이나 현실에서의 실감나는 묘사가 신재효의 적극적 개작으로 해서 크게 상처가 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 밖에 인물을 자의적으로 나름대로 함부로 탈락시킨 것도 그의 잘못으로 꼽기도 한다. 방자와 같은 인물이 그의 사설에서는 사라지는 일은 대표적 예이다. <춘향전>의 방자는 작중 인물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양반에 기생하는 천한 신분이나 상전인 이도령이나 춘향을 예사로 조롱하고 골탕먹이는가 하면 민중의식을 감춘 채 은근히 양반을 욕하는 구실이 사람들에게 적잖은 재미와 익살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신재효는 그 인물을 지워버렸다. 그럼 기존의 사설을 이렇게 함부로 고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중인에 속했던 당시 신재효 개인의 사정을 살펴야 할 것이다. 적지 않은 부를 축적한 데다 문자 깨침에 있어서 양반과 다를 게 없었던 처지에도 불구하고 신재효는 다른 중인층과 마찬가지로 끝내 양반의 신분에 올라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는 벌서 양반의 세계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판소리계의 수장격이 된 그로서는 이전부터 중구난방으로 흘러온 판소리와 그 사설을 정리하고 가다듬어 후대로 전해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에 사로잡혔을지 모른다. 그런 의식은 그가 남긴 판소리 6마당의 선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가 정착시킨 판소리 여섯마당(춘향가, 심청가, 토별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가)이 한결같이 유교주의적 덕목인 忠 · 孝 · 烈 · 友愛를 주제로 삼고 있음은 주목할 점이다. 다시말해 그는 사설 개작 과정에서 양반이 지향하는 의식 세계를 의식했고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합리성과 논리 그리고 도덕적으로 깨우침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특히 그는 광대들의 중심 인물로서 위치를 거듭 생각했다. 이미 당시 광대 중의 일부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양반과 매우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평민보다 상층들을 더 의식하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신재효로서는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사설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설을 전아하고 품위있게 고쳐 양반의 입맛과 취향에 맞도록 고쳐나간 일은 신재효 개인의 사정과 함게 당대 광대들이 처한 미묘한 입장을 암시해 주는 셈이다.

그러나 판소리사(史)에서 신재효의 업적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그의 노력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판소리 사설의 정착 과정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가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나누어 부르게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신재효는 창과 인물에 따른 배역 분담이 필요함을 스스로 터득했고, 이를 사설에 적극 반영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사설의 개작은 이른 바 상층과 하층이 서로 대립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조화롭게 융합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매우 고심했던 산물일 수도 있다. 그의 앞시대의 사설이 골계와 비속함으로 흘러갔다면 그는 거기에다 비장함과 전아함이 깃들게 하여 판소리 사설의 균형감을 살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결국 판소리 사설 개작의 의미를 민중과 양반의 대립적 의식을 없애 계층과 신분을 떠나 보다 많은 이가 판소리를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뜻을 두었다. 이는 그가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직접 광대를 지도하고 뒷바라지해 준 것과 마찬가지로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크게 높이는 밑거름이 되었다.

 

6. 판소리계 소설

 

사설이 <-가>의 명칭으로 불렸다면 판소리계 소설은 <-전>으로 불려진 경우가 많았다. 판소리 사설이 소리판의 창본으로 쓰이다 어느 시점부터 쓰임새가 달라져 소설로 바뀌어 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판소리는 12마당이었다고 했으므로 12편의 사설이 있을 터이고 따라서 적어도 그만큼의 판소리계 소설을 예상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없어져 확인이 어렵다. 송만재가 관우희에서 말한 판소리 12마당이란 <춘향가> · <심청가> · <흥보가> · <수궁가> · <적벽가> · <변강쇠타령> · <배비장타령> · <강릉매화전> · <옹고집타령> · <장끼타령> · <왈자타령> · <가짜신선타령>(정노식은 '왈자타령' 대신에 '무숙이타령'을, '가짜신선타령' 대신에 '숙영낭자전'을 넣고 있다.) 등인데, 그 가운데 소설로 바뀌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춘향전> · <흥보전>   <심청전> · <토끼전(별주부전)> · <화용도>('적벽가'의 정착) · <배비장전> · <옹고집전> · <장끼전> · <숙영낭자전> 등이 있다. 이들 작품 외에도 <두껍전> · <옥단춘전> · <괴똥전> 등을 판소리계 소설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밖에 소설본은 아니지만 신재효가 채록해 놓은 <변강쇠가>가 전하고 있다.

 

(1) 문체

판소리계 소설은 사설을 문자로 고정시킨 것이므로 문체에서도 공연을 목적으로 했던 사설의 여러 특징이 먼저 눈에 띈다. 단순한 서술체 문장에서 보기 어려운 율문적 문장체는 곧 창의 대본이었음을 말해준다. 장편 구비 서사시로 사설의 장르를 분류하는 사람도 있지만, 워낙 노래를 위한 바탕글에 목적을 두다 보니 자연 문장 길이가 짧아지고 3∼4음을 기본으로 한 리듬이 알맞게 되었다. 문법 구조상 이야기식의 문장이 되지 못하고 숨의 휴지에 의한 제약과 함께 노래의 율동을 돕고 그 의미를 명료하게 전하기 위해 문장이 짧아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또 다른 까닭이었다.

 

    광한진경(廣寒眞景) 조컨이다 오작교가 더욱 좃다.

    방가워지 호남으로 제일성(第一城)이로다.

    오작교 분명하면 견우직녀 어디있나

    일언승지의 풍월이 업실소냐

    도련임이 글 두 귀를 지여스되

    고명오락션이여 광한옥계누라

    차문천상수직이요 지홍금일 아거누라.

 

판소리 사설은 아니리와 창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아무래도 창의 부분에 율문이 많이 들어가고 아니리 부분은 산문 위주로 처리될 것이나 자세히 보면 아니리 부분도 산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율문에 더 가깝게 되어있다. 이는 판소리계 소설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유장한 문장으로 보기보다는 시가라고 하는 편이 덜 어색할 정도로 주로 3∼4음을 기본으로 한 이야기로 처리되고 있다. 마치 장편 구비 서사시를 보는 기분이다.

아울러 판소리계 소설은 여러 삽입 가요를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여러 양식의 복합 수용체라는 느낌마저 준다. 그런데 바탕글조차 율문 위주로 흐르다보니 어떤 시가 형식이 삽입되더라도 그리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 아래는 그런 대목 중의 하나이다.

     

    애고 애고 설운지고 그리하여 도 못되거든 이때 말나 초조하여 죽은 후의 넉시라도 삼슈갑산 졔비되어 도련님 계신 첨하 기슭에 집을 종종 지어두고 밤듕만 집으로 드난 체하고 도련님 품으로 드러볼까 니별(離別) 말이 웬말이요 니별 니자(離字) 내든 사람 날과 백년 원수로다. 진시황 분시서(焚詩書)할 제 니별 두 자 이졌던가. 그때에나 살나더면 이 니별이 이실소냐. 방낭사중(博浪沙中) 쓰고 남은 철퇴 텬하장사 항우 쥬어 힘가지 두러메여 깨치고져.      <남원고사 중 이별가>

 

판소리계 소설은 살아 숨쉬는 듯한 순수한 우리말과 생생한 느낌의 의성어, 의태어가 고스란히 채록되어 있어 다른 국문 소설 · 한문 소설 혹은 번역 소설에서 맛보기 어려운 독특한 감칠맛을 느끼게 한다. 이런 부분은 개인이 독서할 때보다도 강담, 강독과 같이 여러 청중을 대상으로 읽어줄 때 한결 그 감칠맛이 높아졌을 것이다. 아래와 같은 의성 · 의태어 역시 우리말만이 지닌 아름다운 소리결을 깨우쳐 주고 현장성을 살려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순수한 서술 문장에서 찾기 어려운 표현은 곧 이들 이야기가 판소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물씬 물씬한 쑥덕

    삼승이불 춤을 추고 새별요강은 장단을 맞추워 청그렁 쟁쟁

    문고루난 달낭달낭 등잔불은 가물가물

    흐르릉 흐르릉 아웅 어루난 듯

    두울 두울 수박웃봉지 시금털털 개살구

    자운자운하게 뒤로 자진듯하게

 

(2) 수사와 시제

수사법에서 판소리계 소설은 감탄법, 나열법, 중언법에다 직유나 은유를 매우 빈번히 쓰고 있다. 굳이 말을 고르지 않고 일상의 구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니 이야기가 외설스럽게 흘러갔고, 천하고 거친 말이나 사투리가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문장 속에 들어와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조선 후기 민중의 말과 삶을 판소리 사설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음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판소리계 소설에서 시제는 거의 현재 진행형으로 처리된다. 과거 시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소설 일반이 과거 시제를 선호하는 것에 비길 때 큰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이 역시 판소리 연희 행위가 관객을 의식하고 현장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판소리 연희 행위는 출연자나 관객에게는 오직 특정 공간에서 벌어지는 <현재>, <여기>에서의 일이므로 그 공연의 자취인 사설 소설 역시 현재 진행형으로 된 것이다.

 

(3) 시점과 화자

화자는 서술을 중간에서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작품 중에 숨어 있는 객관적 인물이다. 작중 인물과 그들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사건 상황의 전개는 물론 설명과 묘사까지도 화자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달려 있다. 판소리 소설에서 화자는 전지 전능한 입장에서 이야기를 엮어 나가지만 느닷없이 그 화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사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줄거리가 흐름이 단절되는 것은 물론 자칫 내용에 있어서도 신뢰성을 잃을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소설과 달리 판소리 소설에서 화자는 창을 직접 부르는 광대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아래 그런 예를 들어본다.

⊙ 북을 치되 잡스러이 치지 말고 또 이러케 치럈다 …… 내 별별 이상한 고담 하나를 하야 보리라.

⊙ 춘향의 곧은 마음 아프단 말 하여서는 열녀가 아니라고 저렇게 독한 형벌 아프단 말 아니하고 제 심중에 먹은 마음 낱낱이 발명할 제 집장가가 길어서는 집장하고 치는 매에 어느 틈에 할 수 있나……

앞의 경우는 창자가 얼굴을 직접 내밀고 앞으로 자기가 할 이야기에 때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한다. 뒤의 것은 화자는 직접 보이지는 않으나 춘향이 옥에 갇힌 춘향을 측은하게 보고 그 심정을 드러내는 말, 즉 화자의 느낌 판단이 들어가 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바로 화자이면서 창자인 바로 그 얼굴을 보게 된다.

 

(4) 주제

▒ 춘향전

이 작품은 판소리계 소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래도록 사랑을 받아왔다. 사설에서 소설로 정착되고 나서 사본 30종 목판본 7종 활자본 50-60종이 남아 있는 정도이니 일일이 이본을 챙겨보기도 어렵다. 춘향전은 남원을 무대로 펼쳐지고 구체적으로 그 작품 속의 광한루나 오작교가 아직도 남아 있어 지방민들 중에는 이를 사실담으로 여기기도 하나 설화에서 유래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춘향은 기생으로 개인의 영달과 신분 상승에 성공한 운좋은 여인으로 결말이 나지만 신분간 경계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이런 전개는 현실적으로 맞지 않았다. 여염집 여인도 아닌 기생의 딸이 파격적으로 양반의 정실 부인으로 오를 수 있었던 뒤에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소설을 통해서나마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민중의 바람에 힘입은 것이다. 신분 간의 장벽을 넘어 인간과 인간으로 만나고자 하는 민중의 욕구는 파격적인 전개까지 개의치 않을 만큼 강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파격적인 만큼 이를 상쇄하기 위한 배려가 또한 갖추어져 있음을 흘려서는 아니 된다. 어느 인물보다 춘향은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대상이다. 춘향은 천한 집안에서 아비없이 자란 아이답지 않게 정신적으로 성숙된 면모를 보인다. 기생이라면 그의 어머니가 생각하듯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호의호식할 수 있다면 어느 자리나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처신하는 게 보통이었을 터인데, 그녀는 이도령과의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춘향의 지고한 사랑만으로 변사또의 폭압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춘향이 독한 마음으로 변사또에게 저항할 때 이도령은 현실적으로 춘향을 구할 방도를 찾았고, 그래서 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왔다. 양반의 신분에 있으면서 그에 연연하지 않고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랑을 택했다는 점에서 이도령은 근대적 사고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믿음과 사랑은 독자에게 변사또가 춘향에게 어떤 폭압으로 누르든 기필코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준다. 이미 예정된 것이기는 하나 변사또는 결말 부위에서 일시에 그 위세를 잃어 버리게 된다. 바로 전까지 전형적인 탐관오리로서 민중의 힘을 업은 춘향과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변사또는 이도령이 출현하자마자 줄행랑을 치기에 바빴다. 이 대목에서 춘향과 이도령보다 더 기뻐하며 함성을 지른 무리는 춘향의 뒤에서 그녀에게 정신적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숱한 민중들이었다. 춘향은 모든 시련을 딛고 일어서 억눌린 민중에게 카타르시스와 희망을 보여준 여성 영웅과 같은 존재이다. 밖에 비친 주제는 춘향의 정절이라 하겠으나 환경과 신분을 넘는 남녀간의 지고한 사랑도 그에 못지 않은 주제라 하겠다.

 

▒ 흥부전

단순하게 보면 흥부전은 형제 간의 의리와 그 갈등을 비판적으로 다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살필 때 조선 후기 사회상과 평민 의식을 잘 드러내는 데 더 큰 뜻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흥부전은 동요하는 조선후기 사회상 가운데 경제적인 면에서 특히 여러 가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조선 후기 사회상 가운데 경제적인 면에서 특히 여러 가지를 시사해주고 있다. 조선 후기는 이앙법과 광작의 영향으로 농민 중에서도 부를 누리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무역과 장사로 대도시 주변에 부유한 상공업자들이 급격히 늘어가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졸부의 한 전형으로 나선 인물이 놀부이다. 그는 흥부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흥부가 양반 의식을 지니고 가난한 살림에도 예의와 염치를 소중히 하는 데 비해 노비 출신인 놀부는 시세에 맞춰 영리하게 재산을 불려나갔다. 그의 그런 적응력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여러 사람이 본받아야 할 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 유산을 혼자 가로채는가 하면 아이가 12명이나 딸린 아우 흥부가 굶주림에 지쳐 구걸하려 오자 뭇매질하여 내쫓는 포악함을 보인다.  그는 극단의 이기주의자로 결코 관대함이나 인정을 베푼 적이 없었다. 형제 간이지만 흥부는 당시 가난과 고초에 허덕이며 나날을 고통으로 이어가던 민중 대부분의 삶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반대로 놀부는 고리대금업자, 지주 혹은 악랄한 상공업자로 평민의 피를 빨고 있는 졸부를 상징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민중들은 흥부를 동정했고 놀부를 응징하는 방법을 고심했다. 그러나 그 방법을 현실 안에서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신화가 없어진 시대에 그런 이야기 전개 방식을 좇게 되었고 제비와 박을 통해 현실적으로 처리하기 힘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였다. 유치한 발상이기는 하나 제비와 박은 권선징악의 결말로 이끌어준 고마운 존재이다.

실제 악덕 지주와 고리대금업자에게 시달림을 당하기가 일쑤였던 조선 후기 민중들에게는 이야기의 논리적 진행이란 하찮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악을 퇴치하고 선이 잘 되는 쪽으로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향촌에서 놀부 같은 악인을 없애 경제적 배분이 잘 이루어지고 보다 화목한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길 바랐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형제 간의 우애는 표면적 주제일 뿐 수탈과 착취, 그리고 복종과 희생으로 나누어지는 그 두 계층을 통해 경제 문제와 당대 현실을 꼼꼼하게 보여주는 데 더 큰 뜻이 있었다 하겠다.

 

▒ 심청전

심청전에는 악인이 없어 다른 작품과 구별된다. 심청이 어려서부터 심한 고난과 시련을 겪지만 그것은 특정인의 훼방이나 보복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타고난 운명 탓이다. 그렇지만 그의 어머니 곽씨나 심청은 전세(前世)에 천상에서 살다 지상에 내려와 다시 태어난 인물들로 설정하고 있어 사실 지상의 인간이 겪는 단순한 비극과는 사뭇 다르다. 천상과 천인의 결연은 일시적인 것이고 언젠가는 귀양이 끝나고 구원된 것이라는 가능성이 숨어있는 것이다. 심청이 죽었으되 다시 살아나는 재생 모티브의 삽입은 그러므로 그리 어색하지 않게 된다. 심청은 그녀를 낳고 일주일만에 세상을 떠난 곽씨 부인과 같이 심봉사에게는 구원자나 다름없다. 심청의 비극은 그 아버지가 집안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공양미 삼백석을 낼 수 있다고 덜컥 화주승에게 약조하면서 시작된다.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면 자기의 몸이라도 바치겠다고 벼르던 심청이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지지만 여전히 심봉사는 앞을 보지 못하고 딸의 죽음으로 해서 절망감과 외로움만 더 쌓이고 만다. 이 소설의 전반부는 신성한 내력을 지닌 곽씨 부인 · 심청 · 장승상 부인 등의 등장과 심청의 죽음으로 신성적 분위기와 비극성이 강조된다. 생기발랄한 인물이나 분위기를 찾기 어렵다. 그라나 후반부는 다르다. 뺑덕 어미가 나타나 흥미와 발랄함을 한껏 불어넣는 것이다. 그녀는 외상 달기를 밥먹듯 하여 심봉사의 재산을 거덜내는가 하면 풍기 문란한 행동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곤 한다. 당시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 여인을 중심으로 독자들은 향촌의 풍경을 보다 잘 볼 수 있고, 일순 익살과 해학을 맛보면서 실컷 웃게 된다. 심봉사와 뺑덕 어미의 결합은 심각하게 진행되던 줄거리를 이완되게 하는 데 큰 몫을 한다. 그러나 심청의 재생으로 초점은 다시 심봉사에게서 심청으로 넘어가고 이야기는 급하게 해결을 향해 치닫게 된다. 비극과 갈등은 아버지에게 효를 다한 심청을 옥황상제가 구원해줌으로써 그 뒤의 국면은 모두 화해롭게 전개될 수 있었다. 모든 가치를 넘어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바친 심청의 고귀한 헌신이 결국은 행복을 불러왔다는 결말은 불교적 세계관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계층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가 바라던 바로 그 해결책이었다. 심청전의 주제에서 '효'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 토끼전

토끼전은 전형적인 우화 소설이다. 용왕이 중한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영약을 찾는 것이 발단이다. 여러 동물의 출현이 곧 인간의 여러 부류를 빗댄 것이라면 여기서 용왕은 최상의 지배층일 것이고, 별주부는 그런 상층에 끝내 충성을 다하는 복고적 주변 세력, 토끼는 상층부의 수탈과 주구에 시달려온 평민이거나 그 이하의 신분층을 가리키는 것이겠다. 중세 봉건 시대 상층부 그 중에서도 임금에 대해서는 비판적 눈길조차 드러낼 수 없었음을 감안할 때 토끼전의 풍자는 매우 신랄한 면이 있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희생만 강요당하는, 그러면서도 삶을 지탱해주는 데에 도리어 감사해야 하는 그 암울한 시대에서 평민들은 이제 스스로 슬기나 기지를 발휘하면서 억압의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자신하게 된다. 토끼는 앞장서 그 일을 하는 인물이다. 용왕의 병은 중세 봉건 사회의 총체적 몰락을 예고한다. 이본에 따라서는 별주부도 용궁으로 돌아가길 포기하고 토끼와 더불어 육지에서 사는 것으로 처리했는데 자아를 각성하는 근대적 사고가 민중들에게 널리 퍼지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지배층에 대항하여 민중이 뭉치고 새시대를 열어가자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