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인의 작품들

그리움

 

공장 뜨락에

다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오는 그리움이여

스물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오는

가난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노동의 새벽』, 풀빛)

 

 

시다의 꿈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순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둑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노동에서 노동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고난에 찬 삶들이 시의 한 행 한 행에 빼곡히 아로새겨져 있으며, 노동자의 현재와 미래가 선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이 시다의 꿈이 단순히 자신의 따스한 옷, 찢겨진 살림의 되찾음이 아니라 '갈라진 세상' 전체로 향해져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신혼일기

 

길고 긴 일주일의 노동 끝에

언 가슴 웅크리며

찬 새벽길 더듬어

방안을 들어서면

아내는 벌써 공장 나가고 없다.

 

지난 일주일의 노동

기인 이별에 한숨지며

쓴 담배연기 어지러이 내어뿜으며

바삐 팽겨쳐진 아내의 잠옷을 접어들면

혼자서 밤들을 지낸 외로운 아내 내음에

눈물이 난다

 

깊은 잠 속에 떨어져 주체 못할 피로에 아프게 눈을 뜨면

야간일 끝내고 온 파랗게 언 아내는

가슴 위에 엎으러져 하염없이 쓰다듬고

사랑의 입맞춤에

내 몸은 서서히 생기를 띤다

 

밥상을 마주하고

지난 일주일의 밀린 얘기에

소곤소곤 정겨운

우리의 하룻밤이 너무도 짧다

 

날이 밝으면 또 다시 이별인데,

괴로운 노동 속으로 기계되어 돌아가는

우리의 아침이 두려웁다

 

서로의 사랑으로 희망을 품고 돌아서서

일치 속에서 함께 앞을 보는

가난한 우리의 사랑, 우리의 신혼행진곡

 

사랑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사랑은 갈라섬,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

사랑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

우리가 되어 역사 속에 녹아들어 소생하는 것

사랑은 잔인한 것, 냉혹한 결단

사랑은 투쟁, 무자비한 투쟁

사랑은 회오리,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 일어서

폭풍치고 번개치며 포효하며 핏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의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아란 하늘

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 위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 하나이 되어

춤추며 노래하는 눈부신 새날의

위대한 잉태

 

진짜 노동자가 되려면, 또 주저앉지 않고 밀어젖히려면 아무래도 어줍잖은 사랑이 아니라 이 시와 같은 전투적 사랑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