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김소진)에 대해

1. 들어가며

살아가면서 더 이상 돌아갈 수도, 돌아갈 필요도 없는 과거의 기억들이 때때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현실 상황을 지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존재에 우리는 여태까지 곧잘 '과거'를 대변해 온 공적인 영역에 대한 회고로서 거대 담론을 형성하는 기억과는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으로서의 기억이라는 면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90년대 이전의 소설 속에 나타난 과거가 시대와 민족의 아픔과 추구하는 이념을 그리기 위해서 존재했다면, 소설가 김소진의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 보여지는 과거는 그저 개인이 가진 소소한 기억의 흔적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소소한 기억의 나열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추억의 회고가 아닌, 지금 여전히 유의미한 기억들을 재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정치적인 행위로서 볼 수 있다. 또한, 기억의 재생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과거를 통해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다고 할 것이다.

하얀 눈사람의 속에 우리가 '짐작한 것과는 다른' 검은 항아리가 숨겨져 있는 그림을 상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소진이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것과는 달리 돌아가는 세상'이다. 눈이 녹으면서 보게 된 검은 항아리의 실체는 우리에게는 낯선, 그러나 결국은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상인 것이다. 작가의 눈을 통해서 보게 된 세상은 그렇게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돌아가는 세상이었고, 그런 경험을 통해서 그는 세상에서 그의 존재가 생각한 것과 같이 무겁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그의 깨달음은 소설 속 '나'의 의식에 투영하여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에서 '나'는 자신의 기억 속에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는 공간의 실체가 그의 내면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말하게 하고 있다. 나의 서사는 기억을 지배하는 공간에서의 과거 시간으로의 회귀의 과정으로 보여지고 있다. 유년 시절의 경험에 그가 끊임없이 현실을 지배받는 이유는 그것이 '중심적 자아'가 아닌, 세상의 '주변일 뿐인 자아'를 깨닫게 되는 충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사건을 통해 새로운 자아로서 깨어나고 중심이 아닌, 변두리를 맴도는 주변인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내가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음으로 우리는 보다 편하게 그의 내면을 볼 수 있다. 그러한 목소리는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의식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내면의 흐름과 심리적 상태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작가가  같이 말하고자 한 것을 표현하도록 기여했던 요소들을 사건, 인물, 플롯 등의 총체적인 면을 살펴보면서 파악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 내가 사용했던 어떤 요소도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항아리를 깬 사건'과 '배설'이 무엇인지 고민해 봄으로써 작가가 작품을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눈 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1) '종이처럼 얇은 기억'에 이끌려 과거로 향하다.

경의선 기차를 타고 나와 신촌에서 미아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익숙해지면 질수록 내 머리 속에는 그날 새벽의 모습이 좀더 선명히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이 종이처럼 얇은 기억이 나를 이렇게 사라져 가려는 동네로 밀고 가는 것은 아닐까? 정말 그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창이 형을 만나 재개발 정보를 듣거나, 아버지 영정을 다시 꺼내 오거나, 잇속 바른 셋집 사내를 만나 삼만 원을 직접 건네주며 다독거려 주려고 나선다는 것은 어쩌면 허울뿐이지 않을까? 나는 머리통에 난 혹을 더듬는 기분으로 손끝으로 옆머리를 짚으며 기억의 끈질김에 대해 새삼 진저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따져보니 이십 년도 더 바랜 기억이었다.

나는 미아리 셋집을 향해 떠난다. 신도시에 집을 마련하여 미아리 집에 혼자 사시던 어머니를 모셔 온 그에게 더 이상 갈 필요가 없는 그곳으로의 발걸음을 옮기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셋집 사람에게 보일러 수리비 3만원을 직접 건네주기 위한 것이나 어머니가 기대하고 있는 재개발에 따른 시세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 또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가지고 오는 것 등의 일들, 곧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굳이 '그곳'에 가지 않아도 해결될 수 있는, 혹은 해결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일들을 한데 뭉쳐서 그는 그곳으로의 회귀를 핑계 댄다.

그러나 그곳에 나를 이끄는 것은 종이처럼 얇은 기억이다. 나는 '기억의 끈질김에 대해 새삼 진저리치며' 나의 어린 시절의 시간이 잠겨 있고, 현실의 순간을 끊임없이 지배하고 있는 미아리로 향하게 된다. 곧, 내가 뗀 발걸음은 지금껏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어떠한 기억에 대한 이끌림에 따른 것이었다. 나의 자아가 형성되는 데 '모태'가 된 깊고 깊은 심연의 공간으로 막연한 두려움을 다시금 회상해 보면서 나는 그 끈질긴 기억으로의 회귀를 위한 발걸음을 떼고 있는 것이다. 미아리 행 버스에 몸을 싣고 가는 나에게 익숙한 풍경들이 보이게 되면서 나는 그 기억이 좀더 선명히 어른거리는 것을 느낀다.

 

(2)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를 떠올리다.

소설 속의 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 설을 쇤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밤, 요강을 쓸 수 없어 공동 변소에 다녀오면서 짠지 단지를 깨뜨리는 실수 때문에 하루 동안 가출을 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이 기억은 현실 속에서 어떤 계기가 마련될 때마다 '나'에게 재생되면서, 나의 현재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 사건을 자신을 주변인임을 깨닫게 만드는, 변두리 의식의 형성과 성장이라는 측면과 기억과 문학적 글쓰기의 연관성의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A. 그렇게 컸다.

소설 속에서 나는 미아리행 버스 안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그 기억은 '나'를 미아리로 밀고 가는 원동력인 동시에, 미아리에 가까워지면서 차창 밖 풍경이 익숙해질수록 더 선명하게 마음 속에 현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가 신풍의원 맞은 편의 동사무소 옆 골목길을 타고 올라가기 이전까지 기억은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재생되는 기억은 요의를 느끼고 변소에 갔다가 짠지 단지를 깨게 된 후, 세상의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 내용이다. '나'는 빠루의 모양까지 선명하고 또렷하게 묘사하는 등 기억을 슬로우 모션의 영화 장면처럼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는 '나'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강렬한 흔적을 남겼는지를 증명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가 이 사건을 이토록 강렬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사건이 화자의 정신적인 '피로함'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사태는 명백하고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나는 삭풍이 부는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 마당 가에 서서 힘이 쭈욱 빠져나간 두 어깨를 거느리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오, 하느님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중략>-

나는 어린애답지 않게 몹시 피로하다는 생각이들었던 듯하다. 그것은 내가 그 순간 헐떡이고 있었던 이유를 적절하게 해명해 줄 수 있었다. 피로하다는 것,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감 …… <중략> …… 동시에 그 피로감은 어쨌든 세상에 대한 것이라는 게 명백해졌다. 변소에서 오줌보를 비우고 돌아서기까지 나는 너무나 생생했고, 빠루를 밟고 나서 갑자기 피로감을 느끼기까지 불과 십여 초가 흐르는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피로감이란 육체적 고단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정신적 흔들림에서 우러난 것이 분명했다.

한편으로는 그 피로감은 물리치기 어려운 불길함을 품고 있었다. …… <중략> ……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피로감을 떨쳐낼 수 없을 것이라는 지루한 예감이 그날 어슴푸레한 새벽에 덮친 절망감의 핵심이었다. 문간통에서 두 번째 집구석에 사는 술주정뱅이 고물장수 순심이 아부지의 노상 흐느적거리는 두 팔과 술 때문에 항상 짓물러져 있는 눈자위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짠지 단지를 깬 사건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나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요강 터부 의식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요강이 깨지거나 금이라도 나면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동티가 생겨서 끔찍한 경우를 당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순심이 아버지의 불행 역시 새 여자가 스뎅 요강을 찌그려뜨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빠루를 밟고 난 이후 불과 십여 초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정신적 흔들림에서 기인하는 '피로'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절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절망을 느끼면서 '나'가 떠올리는 것은 고물장수 순심이 아버지의 모습인데, 피로하였기 때문이라는 측면에서 순심이 아버지에게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나는 '피로함'에 찌들어 순심이 아버지의 모습처럼 살아가게 될까봐 한편으로는 절망을 느끼고 있다. 이는 순심이 아버지가 새 여자가 스뎅 요강을 찌그러뜨린 것 때문에 피로와 불행을 겪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짠지 단지를 깨뜨렸기 때문에 앞으로 그에 응당한 정신적 피로에 끊임없이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요강에 대한 터부만을 강조했을 뿐, 어디에도 단지를 깨뜨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데도 불구하고, '나'는 자신이 단지를 깨뜨린 것 때문에 피로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린 아이였던 '나'에게는 요강과 단지는 그 형상이 유사한 것으로 '항아리를 깨뜨렸다.'는 같은 차원의 문제로 여겨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어린 시절의 '나'가잘못 인식을 하였고, '짠지 단지와 요강은 다르지 않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단지를 깨뜨렸기 때문에 이제는 피로함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믿고 절망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 사건의 기억이 '나'의 삶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기억의 나머지 반토막은 창이 형을 만나서 술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다가 떠오르게 된다.

 

"형, 늦은 신혼 재미가 어때요? 좋죠?"

순전히 술김이었다. 나는 돼지기름 때문에 더부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헹, 좋냐구? 너도 알다시피 내가 개를 오래 길러봐서 아는데 사실은 사람도 짐승하고 크게 다르지 않을 걸.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야만이면 야만인 대로 …… 그런데 사람한테는 어쩔 수 없이 미운 정도 있고 고운 정도 있는 거니까 그거 한 가지 다르다고나 할까 ……."

나는 으스스 끝에 몰려온 현훈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캄캄함 속에서 오래 전에 내가 깬 짠지 단지가 두둥실 떠올라주었다.

 

나는 창이 형에게 순전히 술김에 신혼 생활에 대해 물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신혼 생활의 달콤함이나 행복함을 그 대답으로 예상하지만, 창이 형은 예상과 어긋나는 대답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세상과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실존주의 소설에서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는 주인공이 구토 혹은 현기증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자신이 처음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느꼈던 사건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깨진 단지가 욕쟁이 함경도 할머니의 것임에 걱정하다가 하나의 꾀를 내게 된다. 깨진 단지를 눈사람 속에 숨겨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에 나는 눈사람 속에 감춰진 비밀이 드러날 오후를 대비하여 하루 동안의 가출을 한다. 나는 주로 더러운 곳 - 개똥 천지인 돌산길,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시장거리, 연탄재가 뒹구는 좁은 골목, 음산한 텍사스 거리 - 만을 골라서 다니는데, 이는 매와 꾸지람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탄 집게로 맞을 것을 두려워하며 저녁께에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눈사람도 없고, 깨진 짠지 단지도 없었으며, 사람들은 웃고, 엄마도 야단을 치지 않는다. 여기에서 나는 안도감이나 아무도 사실을 알지 못하는 기쁨, 야단 맞지 않은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하는 강한 의문을 느끼고 곤혹스러워 한다. 자신의 짐작과는 다른 현실 세상에서 완전한 이방인, 주변인으로서의 자신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짐작하고 또 생각하는 세계하고 실제 세계 사이에는 이렇듯 머나먼 거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거리감은 사실 이 세계는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깨달음, 그러므로 나는 결코 주변으로 둘러싸인 중심이 아니라는 아슴프레한 깨달음에 속한 것이었다.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도 혼내지도 않는 세계가 너무도 괴물스럽고 슬퍼서 싱거운 눈물이라도 흘려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하긴 눈물 서너 방울쯤 짜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난 시래기 줄기가 매달린 처마 밑에 서서 몇 방울 떨구며 소리없이 울었다. 차라리 그 깨진 단지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혼은 나더라도 나는 혼돈스럽지도 불안해 하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내가 짐작하고 또 생각하는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의 거리와 세계가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가고, 나는 중심이 아닌 주변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나에게 혼돈과 불안을 안겨준 것이다. 내가 짠지를 깨뜨린 순간 느낀 '피로함'은 바로 짐작하는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의 간극 속에서 느끼게 될 '피로함'의 전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두 세계의 거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나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정신적 피로함을 느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주변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슬프고, 세계가 너무 낯설어서 눈물을 흘리지만, 어머니가 핀잔을 주며 나의 볼을 꼬집으면서 나는 이런 세계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하게 된다.

 

엄마가 물에 젖은 손으로 내 볼따구니를 야무지게 잡아 비틀며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음을 지었다. 그 얼얼함이 내 균형 감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아주머니들의 웃음 소리 사이에서 나는 울음을 딱 그쳤다. 그리고는 어른처럼 땅을 쿵쾅거리며 뛰쳐나와 이 골목 저 골목을 헤집으며 어딘가를 향해 가슴이 터져라고 마구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컸다.

 

이제까지 내가 야단을 맞을 것이라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현실에 돌아왔을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걱정해왔던 것은 현실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 불과했고, 어머니는 나를 야단치기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나의 볼을 꼬집은 것으로 내가 생각하는 세상과의 균형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나는 달리고 또 달린 후에 "그렇게 컸다". 나는 다른 두 세상 사이에서 그 간극을 메우며 살아가는 '피로함'을 안게 되면서, 어른으로 자라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른으로 자라났다고 해서 나의 이런 고민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두 세계 사이의 거리에서 오는 '피로함'을 언제나 가지고 있고, 변두리 의식, 주변인으로서의 자신을 끊임없이 느끼게 된다.

 

"영정으로 썼던 아버지 사진틀도 솜이불 보따리 틈새에 아직 박혀 있을 텐데……."

"그 생각은 잊고 꿈에도 하지 마라. 그 뱀의 허물 뒤집어쓴 것처럼 아물아물한 사진은 가져다 어디다 두려고? 애어멈이 그 형상을 보면 얼씨구나 하겠구나!"

"웬 찍다 남은 벼루를 그렇게 많이 두고 갔어? 어제 그저께까지만 해도 애들이 벽돌 틈새를 안 뒤지나 난리들이었어."

"그럼 뭘 해? 그깟 세멘또 덩어리 짐만 되지."

"그게 아니고 저 동네 집 다 부수고 나서 임자 잃은 개도 많고 하니깐 먼저 보고 때려잡는 놈이 장땡이지."

 

나에게 미아리는 과거의 기억이 그대로 살아숨쉬는 구체적인 현실이자 기억의 육체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미아리는 재개발되어져야 하는 곳 혹은 무엇인가를 남겨두고 떠나는 곳이다. 미아리가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나에게는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나의 기억을 담고 있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기억의 육체이고 중심인 곳이 타인에게는 여전히 주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미아리를 떠나면서 미아리의 기억을 담고 있는 사물들도 함께 버리고 떠난다. 영정으로 썼던 아버지의 사진, 솜이불, 미아리에서 함께 가족처럼 키우던 개, 생계를 유지하던 벼루 등을 모두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나에게 미아리는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현재도 정신의 중심이자 자신의 정체성의 중심인데, 타인에게는 버려진 곳이자 없어졌으면 하는 곳, 변화되었으면 하고 떠나고 싶은 곳이 되는 데에서 나는 또다시 한번 자신의 중심이 세상에서는 주변이라는 의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면적으로는 신도시에서 아이들의 가장으로 직장을 다니면서 잘 살고 있는 '나'이지만, 내면상으로는 끊임없이 짐작하는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갈등, 자신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현실에서는 주변으로 밀려나는 주변 의식, 피로함들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B. 배설로 문학을 기억하다.

미아리로 향하는 '나'의 기억 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유년 시절의 나는 부뚜막에 올라가 천장에 얹힌 소쿠리 안에 든 부침을 집어먹는 마냥 어린애였다. 이 보통의 어린애였던 '나'가 어느 날 저녁에 먹은 나박김치로 인해 새벽에 오줌을 누러감으로 인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 한 발자국 몸을 들여놓게 된다. 차라리 몰랐었음 편했을 경험을 함으로써 유년 시절을 나는 그날 새벽 짠지 장독을 깨뜨림으로 인해 성장하는 내내 그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유년 시절을 보낸 '나'는 사라져가는 미아리를 돌아보며 배설의 욕구를 느끼게 되는데, 과연 이것이 작품 속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낡은 털신 밑에서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성큼성큼 무릎을 들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홉 가구가 함께 쓰는 변소 문을 열고 문턱에 올라 두 번씩이나 푸드덕푸드덕 몸서리를 치며 오줌을 갈겼다. 이빨을 위아래로 서너 번 맞부딪치며 뽑아내는 오줌 줄기가 원뿔형으로 딱딱하게 굳은 언 똥에 둔탁하게 달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따스한 오줌 세례를 받은 언 똥이 물컹물컹하게 녹아내리는 소리를 눈을 지그시 감고 듣다가 김이 되어 무럭무럭 콧속을 파고드는 지린내에 코를 쫑긋거리며 돌아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나'가 미아리로 향하면서 처음에 회상하는 유년 시절의 배설은 나박김치 국물 때문에 생긴 생리적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 예시문 '푸드득푸드덕 몸서리를 치며 오줌을 갈겼다.'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배설을 하며 생리적 쾌감을 느끼고 있다. 이 배설의 모티브는 성장한 현재의 '나'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는데 '나'는 창이 형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갑자기 다시 배설의 욕구를 느끼고 있다.

 

잠시 주춤거리는 새에 마침 세로로 절반쯤 깨진 큼직한 항아리가 눈에 띄었다. 그 안에는 아마 그 항아리의 반을 깨고 들어왔을 한 뼘짜리 벽돌이 들어 있었다. 크기를 봐서는 한 열 명쯤 되는 식구는 좋이 먹여 살렸을 장독 같았다. 나는 누렇게 마른 소금기 자국이 얼비치는 옹색한 항아리 안을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가 벽돌과 깨진 장독 쪼가리 디디고 서서 허리띠를 풀었다. 귀밑이 달아오르도록 용을 쓰느라 기침이 터졌다. 기침이 끝나자 나는 서러운 아이처럼 입초리가 비죽비죽 위로 치켜져 올라가는 걸 알았다. 울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구린내가 나는 두 가라이 사일 고개를 바짝 쑤셔 박고 굵은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굵은 황금빛 똥을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미아리에 다시 돌아온 것과 창이 형과의 만남은 '기억의 재생'이라는 측면에서 유년 시절에 겪은 배설의 욕구를 느끼게 한다. '나'가 회상하는 유년 시절의 배설을 기억 그대로 다시 재생하는, 기억의 재생으로서의 배설이다. 소변과 대변이라는 차이점은 있으나 똑같이 배설이라는 점에서 '나'는 기억 속의 '나'가 되어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메우는 장치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똥을 누는  배설의 기억의 재생은 과거의 기억이 현실로서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배설을 하며 '뿌듯한' 생리적 작용인 쾌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울고 싶은 모양이었다'라고 말하며 어떤 서글픔을 느낀다. 이 서글픔은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메우는 장치로서 존재하던 기억이 이제 과거가 (나가 살던 미아리 동네가 사라짐) 완전히 상실됨으로써 그 기억이 이제 더 이상 현실로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타나는 서글픔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아. 하지만 여태껏 나를 지탱해왔던 기억. 그 기억을 지탱해 온 육체인 이 산동네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이렇게 감상적으로 만드는 게. 이 동네가 포크레인의 날카로운 삽질에 깎여가면 내 허약한 기억도 송두리째 퍼내어질 것이다. 그런데 나는 기껏 똥을 눌 뿐인데 …… 그것밖에 할 일이 없는데 …….

 

또한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서글픔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신을 과거와 현재로까지 이어준 기억의 근원이 송두리째 사라질 위기에 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단지 검은 항아리밖에 떠올리지 못하며 그곳에 똥을 누는 행동밖에 할  수가 없다는 무기력함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배설의 행위를 '글쓰기'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흔히 글을 쓸 때 '표출한다. 발산한다.' 등 밖으로 무엇을 내보낸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배설은 '글쓰기 작업'과 연관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글쓰기로 볼 수 있는 근거를 살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는 자신이 시집올 때 가져온 그 난초 무늬 서기 요강에 대핸 엄청난 터부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깨지거나 혹은 금이라도 가는 날이면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동티가 생겨서 끔찍한 경우를 당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여기서 나타난 요강은 배설물을 담는 것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기는 더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작품 속에서 요강은 흠집이 생기면 집안이나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생기고 마는 것으로 여겨져 정초에는 아예 모셔두기까지 한다. 요강에 어떤 영적인 것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강에 담는 배설물도 여기서는 더러운 것이라는 의식보다는 한 개인의 소산물로써 정신적인 영이 담긴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배설을 하는 것은 기억을 다시 재생해 보는 것으로 기억의 재생에 의한 글쓰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나'가 깨진 항아리에 똥을 누며 독백하는 대목은 앞으로 '나'의 글쓰지 작업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기껏 똥을 눌 뿐인데 …… 그것밖에 할 일이 없는데 ……"는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먼저 글쓰기로의 다짐으로 볼 수 있다. 기억의 재생에 의한 글쓰기를 하는 나에게 재개발로 인한 미아리의 사라짐은 기억의 근본적인 장소가 사라짐으로써 위기를 맞게 된다. 미아리의 사라짐은 '나'의 창작의 원천이 말라 버린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가 항아리에 똥을 누는 행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그 아픔의 기억을 바탕으로 계속 소설을 쓰겠다는 하나의 다짐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나'의 배설의 욕구와 그 배설 행위는 기억의 근원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글쓰기 뿐이다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무기력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마치며

지금까지 인물, 구성, 사건, 모티브 등 작품 속의 모든 요소들이 어떻게 주제를 구현하고 있는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보았다. 작가는 단어 하나의 낭비 없이 작품 속 모든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주제를 구현시킨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모두 살펴봄으로써 작가가 작품 속에서 나타내려 한 바를 보다 잘 파악해 볼 수 있었다.

작가는 주인공을 유년 시절을 보낸 기억의 메카로 보냄으로써 회상의 방법으로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 기억을 '되살려 내기'의 측면에서 서술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현재 '나'가 껴안고 있는 중심이 아닌, 변두리를 맴도는 주변인으로서의 의식이라는 '나'의 내면을 보여준다. 또한 배설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어쩌면 작가의 화신이라고 볼 수 있는 화자이면서 주인공인 '나'의 글쓰기의 근원을 밝히고 있다.

작가 김소진의 전체 작품 흐름을 보면, 가난한 유년시절이나, 어렸을 때 우연히 접하게 된 성적인 경험, 아버지, 학생 운동 시절의 경험, 기자로서의 체험, 마지막으로 어머니라는 여성 체험까지 다양한 김소진의 삶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작품은 마지막으로 발표된 단편소설으로 그동안의 작품 속에 나타난 기억의 근원이 무너짐을 보여줌으로써 곧 기억의 글쓰기의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그것은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가 기억의 글쓰기의 최종 지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 토론 거리

1. '나'가 여성을 보는 시각을 다음 제시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소설 속에 나타난 깨진 항아리에 빗대어 보았을 때, 제시문에서 드러나는 여성을 보는 시각은 어떻다고 생각되는가?

2. 깨진 항아리에 배설을 한 후, '나'의 울고 싶어짐과 동시에 왠지 모르게 뿌듯했던 감정을 어떻게 해석해 볼 수 있을까?

3.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과거 기억 속의 공간으로 '미아리'라는 가난한 철거촌의 삶을 그리는 것을 통해 사회 모습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사회와 이 소설을 연결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연관지어 볼 수 있을까?

4. 깨진 항아리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