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의 작품들

이 겨울에

 

한파가 한차례 밀어닥칠 것이라는

이 겨울에

나 서고 싶다 한 그루의 나무로

우람하여 믿음직한 느티나무로는 아니고

키가 커서 남보다

한참은 올려다보아야 할 미루나무로도 아니고

삭풍에

눈보라가 쳐서 비까지 와서

살이 터지고

뼈까지 하얗게 드러난

키 작은 도토리나무쯤으로

 

그 나무 키는 작지만

단단하게 자란 도토리나무

밤나무골 사람들이 세워둔 파수병으로 서서

그 나무 몸짓은 작지만

다부지게 생긴 도토리나무

 

감나무골 사람들이 내보맨 척후병으로 나가서

마을 어귀 한구석이라도 지키고 싶다

싸리나무 잣나무 소나무와 함께

뿌리를 내리고

밤에는 하늘에 그믐달 같은 낫 하나

시퍼렇게 걸어놓고

한파와 맞서고 싶다

(「오늘의 시 4호」, 현암사)

 

그는 1946년 남도의 땅끝 해남에서 태어났다. 그리고는 광주에서 광주일고를 거쳐 전남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뒤바뀐 세상 민중 권력의 중심부를 이룰 KK(광주, 광주일고)의 막강한 실력자이며 배후조종자이기도 하다. 선생도 장래를 생각해서 미리 길을 좀 닦아놓으시지. 그런데 요상한 것은 김남주 시인이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이다. 가장 제국주의적인 항문[學文]에서 가장 민족해방적인 변이 나왔다는 점이다. 아마 중간에서 극복하고 뛰어넘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손자의 병법에 정통했기 때문이거나 할 것이다. 좌우지간 학교를 여차직 그만두고 농민운동과 민중문화운동에 투신하면서 그 유명한 파농의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이란 책을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1979년 이른바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자기의 땅에서 유배' 당해 15년의 형기를 선고받고 복역중이다가 꼭 10년 뒤인 1988년  자유의 몸이 된다. 아니, 이 땅의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이 땅의 해방을 갈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묶인 몸이 되는 것이다. 사실 그에 대한 이따위의 간략한 소개는 그의 아무것도 설명해 내지 못한다. 시인인 그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시뿐이다.

민중

 

지상의 모든 부

쌀이며 옷이며 집이며

이 모든 것의 실질적인 생산자들이여

 

그대는 충분히 먹고 있는가

그대는 충분히 입고 있는가

그대는 충분히 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결코!

그대는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먹고 있다

그대는 가장 많이 만들고 가장 춥게 입고 있다

그대는 가장 오래 일하고 가장 짧게 쉬고 있다

 

이것은 부당하다 형제들이여!

이 부당성은 뒤엎어져야 한다

 

대지로부터 곡식을 거둬들이는 농부여

바다로부터 고기를 길러내는 어부여

화덕에서 빵을 구워내는 직공이여

광맥을 찾아 불을 캐내는 광부여

돌을 세워 마을의 수호신을 깎아내는 석공이여

무한한 가능성의 영원한 존재의 힘 민중이여!

 

그대의 삶이 한 시대의 고뇌라면

서러움이라면 노여움이라면

일어나라 더 이상 놀고 먹는 자들의

쾌락을 위해 고통의 뿌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제 빼앗는자가 빼앗김을 당해야 한다

이제 누르는 자가 눌림을 당해야 한다

바위 같은 무게의 천 년 묵은 사슬을 끊어 버려라

싸워서 그대가 잃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쇠사슬 밖에는 승리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오늘의 시 4호」, 현암사)

 

참으로 분명한 시다. 실질적인 생산자가 실질적인 소비자가 되지 못하는 부당한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영원한 존재의 힘인 민중들의 일어섬으로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물며 싸워서 잃을 것이라곤 쇠사슬 바깥에 있는 승리의 세계인 바에야. 그의 시는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다. 돌려 어눌하게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딱 부러지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이야기한다. 다소 모가 나 있긴 하지만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불의의 시대와 동거하는 진리는 더욱 날선 모를 스스로 벼릴 줄 알아야 한다. 그는 한마디로 날선 칼과 뜨거운 피를 지닌 전사인 것이다. 전쟁터에서 죽는 전사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싸우는 싸움꾼 전사말이다.

전사1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나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 분 일 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몸처럼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은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않고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신분을 잊은 적이 없었다.

 

누구나 다 자기의 일이 있고, 자기의 영역이 있다. 하지만 그 치열함과 그 치열함 아래에 도도히 흐르는 역사에 대한 확신, 존재하는 혁명의 현실성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이런 전제 아래에서 시인 김남주가 살아가는 방법, 시를 쓰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남주가 차가운 머리만 있는 등걸처럼 메마른 혁명가만은 아니다. 아니 메마른 혁명가는 그 자체가 틀린 말이다. 결코 어떠한 혁명가도 메마를 수 없으며, 메마른 인간이라면 혁명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1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시인의 동지이자  동반자인 분에게 기다려 달라고, 비록 감옥 속에서 늙고 병들고 죽게 될지 모르나 사랑으로 인간의 사랑으로, 기다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