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속에 젖어 드는 삶

-신경숙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카실러는 신화는 세계를 전망하는 한 방법, 곧 의식의 틀이며 그것은 인간의 유일한 능력인 상징성의 원리를 모태로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징성의 원리는 신경숙의 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경숙의 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 속에 들어나는 죽음에 관한 상징은 여러 인물에 걸쳐 표현되고 있다. 시간적 배경을 상징화하여 인물의 삶에서부터 죽음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내고 있는데, 이는 프라이의 이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프라이는 그의 유명한 저서 「비평의 해부」를 통하여 신화의 근본적인 원형을 자연의 사계의 신화에서 찾아내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인류는 사계절의 사계와 '출생-성장-사멸'의 순환을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경숙의 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 배경이 되고 있는 '가을' 역시 프라이의 이론에 따라 죽음의 단계를 상징하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징이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좀 더 면밀히 알아보고자 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대한 예감으로 흔들리는 화자 '나'가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며 갖가지 추억, 상념, 관찰을 젊은 과부 '윤희언니'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감자 먹는 사람들>의 전반에는 죽음이 깔려 있다. '나'의 아버지, 편지를 받는 대상인 '윤희언니'의 남편, 옆 병실의 막노동판의 남편, 고향 친구 유순이의 아이, 음반 기획자와 함께 만난 남자의 아이. 이렇게 <감자 먹는 사람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두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배경으로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가을과 병원이다.

 

나는 지금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을비는 병원의 뜰의 메말라가는 누런 잔디를 싸악, 훑어내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얼굴을 숨기려던 오래된 것들이 저 빗방울에 쓰라리겠습니다. 창문을 슬몃 젖혀 봅니다. 훅, 밀려드는 찬 공기 속에 섞인 비냄새가 쏴아, 창안으로 밀려 들어옵니다. 바람에 내 머리칼이 뒤로 휘날려서 갑자기 얼굴이 가볍게 느껴집니다. 가을이 왔군요. 산천에만 말고 이 병원에도.

 

이것은 <감자 먹는 사람들>의 서두이자 소설이 제시하고 있는 배경이다. 작가는 소설의 서두에서 죽음에 그림자를 복선으로 깔고 있는데, 이것을 상징하는 부분이 '가을비'이다. '병원 뜰의 메말라가는 누런 잔디'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 즉 나의 '아버지', 옆 병실의 '남편', 유순이의 '아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을비'는 '누런 잔디'를 훑어 내리고 있다. 그리고 가만히 얼굴을 숨기려던 오래된 것들이 가을비의 빗방울에 쓰라리다. 이런 표현들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가을비와 죽음의 상징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을비는 프라이의 사계의 원형 이론에 따라 가을, 석양, 죽음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다.

가을비는 소설의 배경일 뿐만 아니라 화자 '나'가 부른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다. 직업이 가수인 '나'의 첫 앨범의 노래가 바로 '가을비'인 것이다. "내 첫 앨범의 참담한 실패" 역시 가을비라는 제목의 상징의 영향력 아래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의 인물은 모두 하층민에 속해 있다. '나'는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고 그 복사본을 사온다.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과 신경숙의 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을 통해 회화와 문학이라는 이질적인 장르이지만 소설에 투영되고 있는 그림의 이미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고흐의 그림과 신경숙의 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의 공간을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고흐의 그림에서 그려진 공간은 어느 하층민의 농가이다. 이 공간은 대단히 음울하고도 초라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신경숙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음울한 공간으로서 병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병실의 분위기는 경직되고 칙칙한 온통 병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창조된 공간은 고흐 그림의 음울한 공간에 대한 현대적 변형태일 뿐이다. 또한 해석을 확장하자면 고흐가 정신병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듯이 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화자의 아버지가 치매 현상으로 머무르게 되는 공간 역시 병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또한 고흐의 그림 속 인물들과 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의 인물들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멀리서 보면 나는 하나의 실루엣에 지나지 않겠지요. 비가 내리는 병원의 창가에 서 있는 하나의 어두운 실루엣.

 

신경숙이 표현하고 있는 '어두운 실루엣'은 고흐의 그림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섯 인물 중, 등을 돌린 소녀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 등을 돌린 소녀는 어두운 실루엣으로 묘사되어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 속의 인물들은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분위기와 상통한다. 뇌 속에 석회질이 떠다녀 기억상실에 걸린 아버지, 농사일에 지쳐 버린 어머니, 가수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화자, 어린 시절 낙방과 가출의 기억을 안고 있는 오빠. 가족은 모두 음울한 초상을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다. 뇌를 다쳐 바보가 되어 버린 남편과 그를 간병하는 아주머니, 남편을 암으로 잃어 버린 윤희 언니, 아이가 소아 당뇨를 앓고 있는 유순이, 딸을 급류에 잃어 버린 중년 사내 모두가 상처받은 자이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는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을 소설의 제목으로 하고 있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림의 이미지를 소설에 인물로서 형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의 인물은 하층민으로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평생 농부로 늙으신 아버지,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던 아저씨 모두 하층민의 전형적인 인물들인 것이다. 이것은 고흐의 그림 속 하층민의 형상화다. 화자의 오빠 또한 어린 시절 고흐의 밀밭과 보리밭을 뒹굴던 농촌 태생의 인물이다. 이것은 이들이 일찍이 육체적 건강성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또한 죽음이 드리워 있는 다른 인물들을 가을로 표현해 내고 있는 반면 아버지의 젊은 시절, 즉 육체적 건강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 병실에 누워 남몰래 울고 있는 아버지가 한때 마을에서 가장 미남인 청년이었다고. 팽나무 밑에서 팔씨름을 하면 누구도 그 힘을 꺾을 수 없다던 청년이었다고요.  ……(중략)…… 사나운 장닭을 눈 깜박할 새에 잡아올려 목을 비틀 때 아버지 팔뚝에 불끈 치솟던 힘줄도 기억합니다.  ……(중략)…… 아아, 소리를 뽑아올리실 적의 아버지의 젊은 날들을 기억하지요.

-삼월 삼짇날 연자 날아들고 호접은 편편 나무나무 속잎나 가지꽃 피었다 춘몽을 떨쳐 먼산은 암암 근산은 중중 기암은 층층 매사니 울어 천리 시내는 청산으로 돌고 이 골 물이 주루루루루루루 저 골 물이 퀄퀄 열의 열두 골 물이 한테로 합수쳐 천방져 지방져 월턱져 구부져 방울리 버큼져 건넌 병풍석에다 아주 쾅쾅 마주 때려 산이 울렁거려 떠나간다 어디메로 가잔 말 아마도 네로구나 요런 경치가 또 있나 -

아버지의 탄력 있는 젊은 목에서 뿜어 올려지던 그 소리를.

 

건장한 아버지의 모습은 <감자 먹는 사람들>의 등장하는 인물들이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아버지는 농부였다. 현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병실에 누워 있지만 건강했던 당시는 노동을 했던 터이고, 뇌를 다쳐서 입원한 옆 병실의 아저씨 역시 전에는 막노동판, 노동의 현장에 있었다.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감자를 집는 손은 분명 노동에 지친 손인데, 이것 역시 그림 원형의 이미지에서 따온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삼월 삼짇날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에 대해 뚜렷한 이미지와 함께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역시 프라이의 사계 이론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데, 봄은 젊음을 상징하고 있어서 아버지의 건강한 모습을 더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봄, 삼짇날 아버지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을 쫓아 계절이 가을로 변하듯이 현재의 약한 아버지, 자신도 건사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는데, 이는 계절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아버지의 모습을 좀 더 뚜렷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작가는 프라이의 사계의 원형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좀 더 효과적으로 죽음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작가는 계절을 통해 죽음의 과정에 대해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농부였던 아버지의 직업도 놓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좀더 명확한 이미지로 '추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추수는 가을에 곡식을 걷어 드리는 행위이다. 이것을 아버지의 숨, 즉 혼이 거둬지는 것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벨이 울리고 어머니의 목소릴 확인하고 아버지한테 수화기를 건네 드렸더니 어머니를 향한 부친의 첫 마디는, / 고구마 …… 고구마는 캤는가? / 였습니다. 부친은 수화기를 귀에 바싹 대고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 안 캤으믄 기냥 놔두소. 내가 내리가서 캘 테니깨는. / ……(중략)…… / 나는 오늘같이 가을볕이 좋은 날, 밭에서 고구마를 캐다가 그렇게 갈라네. 늦봄 볕이 따사로운 날 감자를 캐다가 가만히.

 

아버지는 고구마를 캐겠다고 한다. 고구마를 캐다가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말이다. 고구마를 캐며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더라도 독자는 고구마를 캐는 행위에서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농부인 아버지는 자신의 삶 역시도 추수와 함께 거둬 드리기를 원한다. 작가는 추수라는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도 독자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보여주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은 죽음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계절은 순환의 법칙을 따른다. '추수'는 수확의 행위다. 수확은 새로운 파종을 의미하고 이것에서 죽음이 보여주는 새로운 생명력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신경숙의 <감자 먹는 사람들>은 가을이라는 배경을 제시하고 가을이 주는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죽음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가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병원이라는 공간적 배경의 상징, 또한 '추수'는 소설의 이미지를 또렷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본질적이고 어려운 문제를 계절에 삽입시킴으로써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고흐의 그림과 계절의 원형을 토대로 본질적인 문제를 파고들고 있다는 점에서 신경숙의 <감자 먹는 사람들>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