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를 훈련시키면 말을 할 수 있을까

-인간 언어의 창조성-

 

일반적으로 언어는 사람만이 지닌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서 말하는 앵무새나 구관조 따위를 흔히 볼 수 있다. 또 영리한 개가 훈련을 조금 받으면 ‘앉아’, ‘일어서’, ‘손 내놔’ 같은 말을 알아듣고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그밖에 말이나 돌고래 등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언어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드는 동물은 사람이 기르는 것만이 아니다. 야생 동물인 늑대는 귀, 입술, 꼬리 등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고 한다. 꼬리를 구부리는 모양 하나만으로도 ‘자신감, 위협, 낙심, 방어, 복종, 무관심, 항복’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따져 보면, 우리는 언어란 과연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칼 폰 프리시는 꿀벌의 통신 방법을 세밀한 실험으로 관찰하여 1973년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꿀벌은 놀랄 만큼 정교한 통신 수단을 갖고 있다고 한다.

10㎞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꿀을 발견한 벌은 동료들이 있는 벌집으로 돌아와 그 앞에서 춤을 춘다. 그러면 그 춤을 본 다른 꿀벌들이 그 먼 거리를 날아가 정확하게 꿀이 있는 곳에 도착한다. 꿀을 발견했다고 춤을 출 때, 꿀이 있는 방향과 거리를 빈틈없이 알려주는 것이다.

프리시의 관찰에 의하면 꿀이 있는 곳의 방향은 각도를 이용하여 알린다. 태양과 벌집을 똑바로 잇는 직선에서 얼마만큼 각도에 위치해서 그쪽으로 가면 맛있는 꿀이 있다고 일러주는 독특한 춤을 춘다. 꿀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춤의 빠르기로 나타난다. 춤이 빠를수록 가까운 거리이고 느릴수록 먼 거리이다. 약 15초에 열 번 돌면 100m, 여섯 번 돌면 500m, 네 번 돌면 1500m 가량을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약 11㎞ 떨어진 거리까지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다고 한다.

꿀벌의 통신 수단에서 더욱 신기한 것은 발견한 꿀의 품질이 어떤가도 전달한다는 점이다. 춤추는 날갯짓이 힘차고 씩씩하면 꿀의 품질이 기막히다는 뜻이고, 그렇지 않으면 별것 아니라는 뜻이라고 한다.

프리시의 관찰 결과는 꿀벌에게도 사람 뺨치는 정보 전달 방법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그가 행한 다음 실험의 결과는 우리의 이러한 기대를 어긋나게 한다.

벌집 위 50m되는 곳에 나뭇대를 세우고 그 위에 꿀을 가져다 놓았다. 꿀벌이 맛보게 한 뒤 벌집으로 돌아가게 했더니 다른 꿀벌들에게 그 위치를 가르쳐주지 못했다.

수평적인 거리는 10㎞까지도 춤을 춰서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었지만, 50m밖에 안 되는 수직적인 거리는 전달해 줄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꿀벌의 정보 전달 능력이 전혀 창조성이 없는 본능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의 경우에는, 아무리 어린 꼬마라 해도, 10㎞ 떨어진 곳에 꿀이 있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정도라면, 불과 50m 위에 꿀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꿀벌에게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본능적인 것일 뿐, 사람처럼 창조적인 의사표시를 하는 언어가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20세기 초, 독일 베를린에 폰 오스텐이라는 수학 교사가 있었다. 그에게 한스라는 말이 있었는데, 아주 영리하여 수를 계산할 줄 안다고 소문이 났다. 주인이 “셋 더하기 넷은 얼마인가?” 하고 물으면 앞발굽으로 땅을 일곱 번 치고, “열 빼기 다섯은 얼마인가?”하고 물으면 땅을 다섯 번 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소문이 자자해지자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과학자들이 조사해 보았더니, 한스는 셈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정답을 맞혀낼 수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셋 더하기 넷은?”하고 주인이 물으면 한스는 땅을 한 번씩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일곱 번을 치고 나면, 구경꾼들이 긴장을 하게 되고 얼굴 표정이 바뀐다. 그러면 이때, 영리한 말 한스는 땅을 두드리는 동작을 멈추었던 것이다.

질문자가 한스의 귓가에 대고 “둘 더하기 셋은?” 하고 속삭이자, 말은 계속 땅을 두드리며 멈출 줄 몰랐다. 구경꾼들이 정답을 모르고 있으므로 그들의 표정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한스도 언제 땅을 그만 두드려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의 맨 앞에서 얘기한 앵무새가 말을 하고 개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도 모두 영리한 말 한스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다. 앵무새나 개가 “안녕하세요?”, “앉아” 따위의 말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훈련받은 대로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것 뿐이다. 음식을 주지 않고 종소리만 울려대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와 다를 것이 없는, 거듭된 훈련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 중에 가장 지능이 뛰어나고 사람을 닮은 것으로는 침팬지, 고릴라, 원숭이 등이 있다. 이런 영장류들은 늑대보다 더 많은 감정을 표현해 낼 수 있어서, ‘위협’, ‘분노’, ‘위험’, ‘순종’ 등을 음성이나 몸짓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적으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없는 본능적으로 타고 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동물심리학자들은 재미난 실험을 여러 차례 했다. 그것은 학자인 부부가 갓 태어난 침팬지를 데려다가 마치 자기 아이를 키우듯이 집안에서 사람과 똑같이 키우면서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면 침팬지가 과연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험이었다. 이러한 실험이 성공한다면, 그건 바로 인간만 언어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실혐의 가장 성공한 예로는 1970년대 침팬지 사라를 키운 프리마크 부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들 부부는 침팬지가 인간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발성 기관이 인간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린 플라스틱 카드를 이용하여 사라에게 언어를 가르쳤다.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사라에게 보여주면, 사라는 이것을 이해하고 그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실험의 대상이었던 침팬지 와쇼는 두 개의 카드를 서로 이어서 “네가 마셔라(You drink)”, “내 아기(baby mine)" 따위의 의사 표현을 천 가지가 넘게 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침팬지들의 언어는 거듭해서 훈련받은 것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뿐이어서, 자기 의사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인간의 언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은 과거나 미래의 일도 표현할 수 있고, 추측하거나 상상한 내용을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거짓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들은 현재 자기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만 표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전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고, 읽은 적도 없는 표현을, 즉 훈련받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표현을 할 수 있다.

“나는 어제 서울역 앞 시계탑 위에서 빨간 옷을 입고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외눈박이 황새 한 마리를 보았다.”

사람은 훈련받지 않고도 위와 같은 새로운 문장을 창조해 낼 수 있으며, 또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침팬지는 결코 이런 문장을 창조해낼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현대의 유명한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는 “침팬지가 언어능력을 지녔다고 증명할 가능성은, 날개 없는 새를 사람이 가르쳐서 날게 할 수 있는 가능성과 같다.”고 했다.

결국 아직까지 창조적인 언어능력을 지닌 동물은 사람 말고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겠다. 언어의 창조성은 오직 사람에게만 있다. 동물의 언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인간의 언어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에는 이러한 창조성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일반적으로 언어는 사람만이 지녔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