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운동을 창작적으로 실천하기

                                      -'카프 시인집'에 대한 연구

Ⅰ. 준기관지인 부정기 간행물

1925년 8월 <염군사>와 <파스큘라(PASKYULA)> 계열의  사회주의 문예 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카프(KAPF)>는 무산 계급 운동을 예술 운동의 차원에서 실천하려는 의도로 창립된 프로 문예 운동 조직이었다. 이후 이 단체는 박영희와 김기진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던 자연발생적인 신경향파의 문예 운동을 목적의식적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 과정에서 <카프>는 1926년 준기관지인 '문예운동', 1927년에는 동경 지부에서 '예술운동' 1, 2호를 발간하였다. 1928년 '예술운동' 3호를 발간한 것으로 추정되며, 1929년에는 동경지부에서 <무산자사>를 설립하여 기관지 '무산자'를 간행하였다. 즉 <카프>는 단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발행하는 '동인지'와는 달리 문예 운동을 조직화하여, 자신들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선전할 수 있는 기관지를 갖고자 하였다.

이같은 문예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카프>는 1931년 당(黨)의 문학을 선전 · 선동하는 문학 작품을 적극적으로 창작하도록 조직원을 독려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창작된 작품들을 묶어낸 작품집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카프 시인집'을 비록하여 '농민소설집', '카프작가 7인집'의 간행이 그 예다. 이 작품집들은 기관지는 아니었지만 <카프>라는 문예 운동 조직의 지침에 따른 창작적 실천이라는 차원에서 동인지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카프 시인집'은 비록 정기적으로 발행할 의도를 보이는 기관지의 성격은 약했지만, 준기관지적인 성격을 지닌 '부정기 간행물(mook)'의 성격을 지닌 작품집이었다. <카프>가 주도한 문예 운동의 실천적 산물의 하나로, '조선푸로레타리아예술동맹문학부편'이라는 이름으로 <집단사>에서 출간되었다. 특히 <카프>의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 중에서 이 당시 문예 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된 예술 운동의 볼셰비키화라는 문예 운동 노선에 충실한 작품들을 선별하여 수록하고 있다.

즉, 김창술의 「기차는 북으로 북으로」등 4편, 권환의 「정지한 기계」등 7편, 임화의「다 없어졌는가」등 6편, 박세영의 「누나」, 안막의「3만의 형제들」등 2편 등 1929년 말부터 1930년까지 창작된 20편의 시를수록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집에 수록된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당시 <카프>의 조직과 이 조직의 예술 운동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Ⅱ. 예술 운동의 전개 과정

문예 운동상에서 제1차 방향 전환은 박영희에 의해 1927년 7월에 목적의식적인 방향 전환론으로 본격적으로 제기되며, 1926년 말부터 1927년 초반까지 <카프>의 두 이론가인 박영희와 김기진 사이에는 소위 '내용 · 형식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박영희가 주도했던 방향 전환은 일본에서 활약하던 <제3전선파>에 의하여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다.

이북만, 홍효민, 조중곤, 한식 등이 중심이 되었던 <제3전선파>는 박영희의 관점(무산 계급 의식과 그 인식에 대한 이론은 필연적으로 계급의 문학을 가져오게 되므로, 카프는 단지 예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제공하는 무산 계급 의식을 가져야 한다.)이 사회 운동 전반에 대한 몰이해, 예술 전체가 아닌 문학 영역에만 한정시킨 절충주의적, 공식주의적, 예술지상주의적인 것으로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이북만, '예술 운동의 방향 전환은 진정한 방향 전환이었든가'(예술운동, 1927. 11)]

이런 논의를 통하여 <카프>는 대중들이 함께 하는 대중 조직이 되어야 하며, "금일의 예술 동맹은 예술 영역 내의 대중의 정치적 · 사회적 확대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이에 따라 <카프>는 1927년 9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재조직을 위한 강령과 규약(봉건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관념의 철저한 배격, 전제적 세력에 대한 항쟁, 의식적인 조성 운동)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에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 중앙위원회를 두고, 그 아래에 서무부, 조직부, 교양부, 출판부를 두며, 대중 조직화를 위하여 동경, 개성, 수원, 해주, 평양, 간도, 임실, 남원 등에 지부를 설치하게 된다. 또한 이후 조직 내부의 이론 투쟁을 통하여 <카프>는 '당문학'이어야 한다는 관점을 수립하게 되며, '예술운동'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여, 본격적인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방향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1927년 목적 의식기로 방향을 전환한 <카프>는 이후 1929년 말부터 1930년 초에 걸쳐 대중화 논쟁을 전개하면서, 문예 운동의 볼셰비키화라는 방향으로의 노선을 전환하게 된다. 특히 제1차 방향 전환을 계기로 <카프>가 문학 운동 중심에서 연극, 영화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백의극단>, <신흥영화동맹> 등의 아지(agitation) 프로(propaganda) 예술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또한 예술 운동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라 한위건, 양명, 고경흠 등이 도모했던 당재건 운동과 연결되게 된다. 즉 고경흠은 카프 동경 지부와 접촉하여 해체된 <조선공산당>을 혁명적인 노동자 ·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전위당으로 재건하려는 운동과 결부시킨다. 이에 따라 김두용, 임화, 권환, 안막 등의 소장파는 <카프>의 노선을 비판하는 한편, 조직의 개편을 요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29년 7월 '무산자' 2호에 발표된 김두용의「어떻게 싸울 것인가」이다. 이후 <카프>는 1930년 4월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중앙위원을 보선하고, 회비의 개정 및 조직 개편을 단행하여 1국 4부의 조직으로 판을 새로 짜게 된다. 이에 따라 중앙위원회 산하에  서기국(송영→ 박세영→홍우식→신응식), 조직부(윤기정), 교양부(박영희), 출판부(이기영), 기술부(김기진→권환)을 두고, 그 밑에 문학부(권환), 영화부(윤기정), 연극부(김기진), 미술부(강호), 음악부(결원)를 두게 된다.

이듬해 3월에는 <카프> 확대위원회를 개최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단체협의회)로 조직 개편하여, 상부 조직을 협의회 성격으로 하고 하부 조직을 동맹 형태로 하여 <조선프로작가동맹>(이기영), <조선프로극장동맹>(임화), <조선프로영화동맹>(윤기정), <조선프로미술가동맹>(강호), <조선프로음악가동맹>(결원)과 서기국을 두는 제2차 방향 전환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즉, 이 시기 볼셰비키화로의 대중화라는 방향성을 정립한 <카프>는 혁명적인 전위를 중심으로 하는 당의 문학을 표방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카프 시인집', '농민소설집', '카프작가 7인집'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국제 정세의 악화(일제의 파시즘 체제 강화와 대륙 침략 전쟁)로 인해 약화되는 운명을 맞게 되며, 내적으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창작 방법이 도입되지만 이를 창작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역량 부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내외적인 요건보다 직접적으로는 당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무산자' 배포 사건이나 '평양 고무 공장 파업'에 참여, 영화「지하촌」사건 등으로 인해 1931년 2월에서 8월에 걸쳐 <카프>의 문인들이 1차 검거를 당하면서, 실질적인 조직 운동이 곤경에 빠지게 된다. 또한 1934년 극단 <신건설사> 사건으로 인해 2차 검거가 단행되면서, 조직의 내분(김남천과 임화 간의「물」논쟁, 박영희의 전향 선언과 신유인의 탈퇴 등)이 일어나고, 일제의 조직적인 탄압과 전향을 강요받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김남천, 임화, 김기진의 협의하에 <카프>는 1935년  5월 21일 김남천에 의해 경기도 경찰부에 해산계를 제출하게 된다.

 

Ⅲ. 문예 운동으로서의 시 쓰기

'카프시인집'은 앞 부분에서 개괄적으로 살핀 10년 간의 <카프> 예술 운동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시기적으로 <카프>가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때였으며, 운동의 측면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예술 운동을 전개한 때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카프>는 조직이 와해되고, 더 이상의 조직적인 문예 운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카프>의 전성기에 보여준 창작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 운동의 전개 과정과 대응시켜 볼 때,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한 경향으로 규정할 수만은 없다. 한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지만 나름의 편차를 보인다. 즉 이 시집에 수록된 대표적인 프로 시인인 임화의 작품을 보더라도,「양말 속의 편지」(1930) 등은 대중화 운동의 차원에서 김기진이 '단편 서사시'라고 불렀던 「네 거리의 순이」나 「우리 오빠와 화로」(1929)를 임화 스스로 비판한 뒤에 창작한 시였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시를 먼저 살펴보자.

 

우리 오빠와 화로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든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여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이가

지구의 해가 비친 하로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여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적가락만이 불쌍한 영남이하고 저하고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 ―― 그 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고 들어가실 그 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을 세 개씩이나 피우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든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미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잘 알았어요

천장을 향하여 기여 올라가는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소리와 함께 ――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희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장에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뚜러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 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을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가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에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적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 ―― 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섧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밤을 새어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 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 동생-     

 

이 시는 노동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끌려간 오빠, 이 일 때문에 담배 공장을 쫓겨난 영남이라는 남동생과 제사 공장을 쫓겨난 누이 동생인 순이라는 노동 일가(一家)의 이야기로, 오빠와 자신들을 깨어진 화로와 벽에 걸려 있는 화젓가락이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비유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아울러 곤경 속에서도 계급적 연대의식을 고취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낙관적인 전망을 '피오닐'이란 형상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김기진은 이 시를 '단편 서사시'로 명명하여 우리 프로 시가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시를 두고, 시적 화자의 감상이 과장되어 나타났거나, 계급의식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다른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피압박 민중인 노동 계급의 현실 인식을 이야기와 편지 형식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처럼 김기진의 극찬을 받았지만, 정작 임화 자신은 이 작품이 예술 운동의 볼셰비키화라는 관정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임화는 볼셰비키적 예술 운동의 창작 방법에 따라 「양말 속의 편지」「제비」등을 창작하였으며, 이런 경향의 연장선상에 김창술의 다음 시가 놓인다. 이후 <카프>의 문예 운동이 심각하게 위축되면서 프로시 역시 쇠퇴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게 된다.

 

2월 ……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날에

 

한 동지요 연인인 그리고 남편인 당신을 그 눈속에서 보내었지요

원수놈의 그 날이었습니다

 

당신을 보내는 이내 마음이 어쩐 일인지 울렁거리었서요

마음이 아팠었고 가슴이 쓰라리었서요

당신과 당신의 동지들은 …… 실은 기차가 움직일 적에

…… 같이 듣기 싫게도 구을르는 바퀴의 음향에

 

나는 울었서요 너무나 분하여서 울었서요

그러나 내가 남편을 빼앗겼다고 울었다면은 죽일 년이에요

 

그보다는 더 한 동지를 빼앗김이 분하였서요

'우리는 부부의 사랑보다 동지로서 사랑하라고'

 

항상 당신께서 하시던 말씀을 잊지 아니했어요 한 평생 안 잊을 테에요

- 김창술, 「가신 뒤」의 일부

 

Ⅳ. 프로시가 다다랐던 골목길

이 시집은 볼셰비키적 대중화 또는 창작 방법에 충실한 경향의 시를 수록함으로써, <카프>의 문예 운동 노선을 선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프로시의 대표적인 시인 임화는 자신이 비판하면서 새롭게 제세했던 볼셰비키 대중화라는 목표를 다시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정구와의 '낭만성 논쟁'에서 이 시기의 '뼉다귀 시'라고 자아 비판하고 있다.

이 논쟁 과정에서 임화는 「우리 오빠와 화로」계열의 시를 다시 창작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오늘밤 아버지는 퍼렁이불을 덮고」(1933)이다. 이후 그는 '현해탄'에 수록된 「해협의 로맨티시즘」계열의 작품으로 내면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1935년대 후반에는 이용악, 안용만, 백석 등의 리얼리즘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보다는 '신문학사'를 서술하는 문학사가로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시집은 프로시 또는 카프의 문예 운동이 다다랐던 마지막 골목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카프>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이룩하고자 했던 프로시의 성과와 스스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시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