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시

                                                                              -  박용래  -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枾)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강아지풀>(1975)-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향토적, 묘사적, 시각적

◆ 표현 : 단 두 개의 문장을 14연으로 배열함.

              언어의 절제와 간명한 표현

              회화적 심상을 통해 한 폭의 생동하는 소묘를 연상케 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비름 잎에 / 꽂힌 땡볕 → 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녹색의 비름 잎에 내려꽂히듯 쏟아짐을 표현

    * 여름 한낮 / 비름 잎에 / 꽂힌 땡볕이 / 이웃 마을 / 돌담 위 / 연시로 익다

         → '여름'과 '가을', '땡볕'과 '연시', '나'와 '이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존재한다는 시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구절(윤회론적 사고의 반영) 

    * 한쪽 볼 / 서리에 묻고 → 늦가을에 내리는 서리를 맞고 감이 익어감을 표현한 것

    * 눈오는 어느 날 / 깨어나 → 겨울은 일상적으로 생명을 위축시키는 공간이지만, 여기에서는 역설적

              공간으로 설정됨. 즉, 제상에 놓인 연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를 기약하는 하나

              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 심지 머금은 / 종발로 빛나다 → 심지 머금은 종발이란 '꼭지를 달고 있는 감의 형상'을 나타낸

                  것인데, 이것을 기름을 종발에 담고 그 속에 심지를 놓아 불을 밝히던 옛날의 등잔불에

                  연결해서 표현함.

 

주제생명감으로 충만한 연시의 아름다움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3연 : 여름의 땡볕

◆ 4연 ∼ 6연 : 땡볕에 익어가는 연시

◆ 7연 ∼ 9연 : 서리를 맞으며 익어가는 연시

◆ 10연∼11연 : 시간의 경과(시상 전개의 변화)

◆ 12연∼14연 : 젯상에 놓인 연시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시의 내용은, 감이 한여름의 땡볕에 붉어지고, 가을 서리에 익어서, 눈 오는 겨울 어느 날 밤 제상(祭床)에 오른 것을 노래하고 있다. 내용과 형식이 매우 간결해 보이는 이 작품은 그 구성면에서는 상당히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의미상 단락을 구분지으면, 1·2·3 / 4·5·6 // 7·8·9 / 10·11 / 12·13·14 //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10,11연의 위치가 전체 시상 전개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런가 하면 1∼6연의 주어는 '땡볕'이요, 또 7∼14연의 생략된 주어는 감인데 서술어는 '빛나다'로 되어 있어, 1∼6연의 주어인 땡볕에 연결되어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하나의 풋과일이 한여름 땡볕 속에서 성숙한 결실을 맺게되는 과정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포착해 내고 있다. '땡볕-연시'로 옮겨지는 붉은 색의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면서, 익기 이전의 감과 비름잎이 지닌 푸른 색의 이미지와 선명한 색채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한여름 땡볕을 받아 붉어진 감(연시)이 서리를 맞아 익어서 눈오는 어느날 밤 젯상에 오르게 된다는 독특한 발상의 표현을 통해, 상당한 시간의 경과를 거쳐 인간과 자연이 만나게 되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하나의 미립적 자연 현상마저도 범연히 보아 넘기지 않는 날카로움과 자연의 신비를 해독한 지혜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시인의 깊은 애정과 외경심, 그리고 세심한 관찰력에서 오는 듯하다.

 

■  <박용래의 시세계>

박용래는 향토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세계를 순수하게 그려냈는데, 그의 향토 정서와 아름다움의 추구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과 외경심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자연 현상조차도 예사로이 넘기지 않는 관찰력으로, 향토의 사물들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포착해 내고 있다.

박용래의 시는 중심이 아나리 주변부에 속하는 것, 힘차게 약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러져 가는 것 등에 보다 큰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생명 가진 존재 일반에 대한 깊은 외경의 마음,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등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용래 시의 형식적 특성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언어의 절제와 표현의 간명함이다. 한 행이 두 단어 내지 세 단어로 이루어져 있는 '연시'에서도 확인되는 이같은 특성은 느릿느릿 흐르는 유장한 호흡과 상호작용이 어떤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고 대상의 안쪽과 대상이 지닌 아름다움을 정밀하게 관조하는 시인의 태도를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또한 회화적 심상을 많이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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