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물

                                                                              - 정호승 -

                                                       

 

 

 

길을 가다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누가 낮달을 초승달로 던져 놓았다.

길을 가다가 다시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쑥떡이 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홀로 기차를 타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다시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평화 시장의 흐린 형광등 불빛 아래

미싱을 돌리다 말고

물끄러미 네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너를 만나러 우물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보따리를 풀어

쑥떡 몇 개를 건네주셨다.

 

 

 

너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미싱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회상적, 애상적

표현 : 소외된 삶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작품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우물 → 성찰의 매개체, 과거의 체험을 환기시키는 장치

    * 1, 3, 6, 10행 → 표현 구조를 확장시키며 시적 의미를 변주하고 있음.

    * 낮달, 초승달 → 흰색과 여윈 이미지를 통해 쓸쓸함을 환기시키며 애상적인 분위기를 형성함.

    * 쑥떡이 든 ~ 어머니가 보였다. → 행상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림.

    * 미싱을 돌리다 말고 물끄러미 네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평화 시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너'를 떠올림.

    * 나는 너를 만나러 우물에 뛰어들었다. → '너'는 고된 삶을 살고 있는 노동자로, 우물에 뛰어드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의 감정을 표출하고자 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 미싱 돌아가는 소리 → '너'의 처지를 나타낸 말로, '너'의 고달픈 삶의 처지를 강조함.

 

제재 : 우물

주제가난하고 불행한 가족과 이웃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시상의 흐름(짜임)]

◆ 1~2행 : 분위기 환기(애상적)

◆ 3~5행 : 행상하시던 어머니를 떠올림.

◆ 6~9행 : 평화시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너'를 떠올림.

◆ 10~14행 : '너'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우물'의 이미지를 통해 가난하고 불행했던 가족사적 체험을 떠올리고 있다. 화자인 '나'는 우물을 바라보며 평화 시장 흐린 불빛 아래서 미싱을 돌리던 여공('너')과 쑥떡이 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혼자 기차를 타시는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너'와 '어머니'는 외롭고 춥게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변주로 볼 수 있다. 우물을 되돌아보는 반복적인 행위는 윤동주의 <자화상>을 연상시킨다. 윤동주가 '우물'을 자기 성찰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면, 정호승은 과거 환기의 장치로 이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더 읽을거리 : 『별빛을 벼리는 대장간의 푸른 불꽃』

                                                                         (2004년 문화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임준서-

1. 시(詩), 이미지의 대장간

정호승(1950~  )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중 하나이다.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6)에서 최근의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2002)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중적 호소력이 강한 서정시를 활발히 선보여 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대단히 제한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를 70, 80년대 '민중시인'의 계보에 편입시켜 취급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이 주어진 잣대에 들어맞지 않는 작품들을 희생시키기 쉽다. 그리하여 정호승 시의 진정한 뿌리, 그 근원적 상상력은 부각되고 확대되기보다 오히려 축소되고 단순화된다.

정호승 시의 본령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성적인 주제 비평에서 벗어나 이미지들의 궤적을 충실히 따라가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미지들의 이합집산을 관장하는 시적 상상력의 원리를 발견해야 한다. 정호승 시에 등장하는 단골 이미지는 별, 눈, 뿌리, 칼 등이다. 형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대지(大地)'의 이미지로 환원될 수 있다. 정호승 시에 나타나는 이들 이미지는 '흙'이라는 원관념을 변용한 보조관념들인 것이다. 흙의 영상은 우리에게 견고함과 내밀함의 느낌을 전해준다. 이러한 촉감을 통해 자연의 힘에 대항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추동한다. 그런 점에서 '흙'에 관한 상상력은, 바슐라르의 말처럼, '반항의 상상력'이자 '노동의 상상력'이다.

흙의 몽상 속에서 시인은 견고한 광석의 이미지들을 깎고 다듬어 현실에 응전하는 무기로 벼린다. 그때 시는 언어의 대장간이요, 시인은 언어의 대장장이가 된다. 정호승의 시는 이렇게 대지의 힘과 대결하는 대장장이의 망치소리 속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정호승 시의 변화무쌍한 이미지 다발에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적 힘을 '대장간의 상상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에 입각해 그의 시에서 대지의 질료적 이미지가 어떻게 굴절되고 변용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정호승의 시세계를 지배하는 상상력의 본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용해, 딱딱함과 연함의 변증법

정호승 시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별'이다. 그의 시집에는 온통 별이라는 단어가 사금파리처럼 자욱하게 뿌려져 있다. 등단작 <첨성대>(1973)부터가 별을 소재로 삼고 있다.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 (…) /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 (…) //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와 /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지고 / 나는 홀로 첨성대를 빙빙 돌면서 /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 (…) // 지게에 별을 지고 머슴은 떠나가고 / 할머닌 소반에 새벽별 가득 이고 / 인두로 누빈 베동정 같은 / 반월성 고갯길을 걸어오신다. // (…) // 오늘밤 어머니도 첨성댈 낳고 / 나는 수놓은 할머니의 첨성대가 되었다. / 할머니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첨성대>는 정호승 시의 호적부와도 같은 작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의 별 이미지에서 그의 시세계를 특징짓는 대지 이미지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별은 하나의 빛나는 '결정체'이다. 결정체는 액체의 질료가 시간의 힘에 의해 내부로 딱딱하게 응축됨으로써 탄생한다. 그래서 결정체는 견고함, 즉 강도를 가진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별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온다는 화자의 진술을 보라. 원관념으로서의 별은 싸락눈이라는 보조관념의 도움을 받아 부드럽고 연한 결정체로 묘사된다. 별은 액체에서 고체로 응고되는 과정의 젤라틴과도 같은 물렁물렁한 결정체를 환기시킨다. 부드러움과 견고함이 공존하는 별 이미지의 양면성은 시 전체의 구조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첨성대>를 지배하는 구조적 원리는 딱딱함과 연함의 길항작용이다. 시에서 별은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이자 '싸락눈'이다. 그리고 첨성대는 이 눈물의 결정체인 별이 퐁당퐁당 빠지는 '우물'로 묘사된다. 여기서 별과 첨성대는 각각 부드러움과 딱딱함의 성질을 드러내며 대척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결구에 이르러 와해되고 전도된다. 별은 마치 '낙과(落果)'처럼 소반에 담겨 식탁으로 운반되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뱃속을 통해 눈물의 화강암으로 환생한다. 부드러운 별은 화강암으로 전화함으로써 딱딱한 성질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첨성대는 추락한 별의 화신(化身)이 된다.

별은 할머니에 의해 눈물로 녹여지고 화강암으로 굳혀지면서 첨성대로 변용된다. 부드럽고 포근한 별은 단단하고 차가운 암석으로 응결되어, 다시 추락하는 별을 담는 주형(鑄型)이 된다. 이처럼 정호승의 시에서 별은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한 결정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별에 이러한 양면성을 부여하는 동인(動因)은 무엇인가. 그것은 할머니의 눈물, 즉 슬픔이다. 다시, 그렇다면 이 슬픔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시에 따르면, 그 슬픔의 기원은 별의 ‘추락’에 있다. 별의 낙하는 곧 천상적인 가치, 혹은 희망의 유실을 의미한다. 이 희망의 유실로 인해 슬픔이 생성되지만, 이 슬픔은 다시 단단하게 응결되어 희망을 관측하는 역설적 도구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슬픔의 결정체’로서의 별은 정호승 시에 있어 상상력의 원형질을 이루며 ‘꿀’이나 ‘뿌리’ 등 다양한 이미지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너는 너의 단 하나 목숨과 바꾸는/ 무서운 바늘침을 가졌으나/ 나는 단 한번 내 목숨과 맞바꿀/ 쓰디쓴 사랑도 가지지 못한다.// 하늘도 별도 잃지 않는/ 너는 지난 겨울 꽁꽁 언 / 별 속에 피는 장미를 키우지만/ 나는 이 땅에/ 한 그루 꽃나무도 키워보지 못한다.// 복 사꽃 살구꽃 찔레꽃이 지면 우는/ 너의 눈물은 이제 달디단 꿀이다./ 나의 눈물도 이제 너의 달디단 꿀이다.// 저녁이 오면/ 너는 들녘에서 돌아와/ 모든 슬픔을 꿀로 만든다. (‘꿀벌’ 일부,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중)

이 시에서 꿀은 ‘눈물’의 결정체이다. 그 눈물은 벌의 눈물이며, 이것이 굳어져 꿀이 된다. 그렇다면 벌은 왜 눈물을 흘리는가. 화자에 따르면 벌의 슬픔은 ‘복사꽃 살구꽃 찔레꽃’이 지는 데서 비롯된다. 낙화(落花)는 사랑의 상실을 의미하는 은유이다. 별마저 꽁꽁 얼게 만드는 겨울의 찬 입김은 꽃나무의 잎을 떨어뜨린다. 꽃은 식물의 성기(性器). 꽃나무는 이제 성기를 잃고 생식기능 또한 잃는다. 벌은 더이상 나무의 깊은 음부 속으로 자신의 음경을, 바늘침을 꽂을 수 없다. 결국 벌이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실연(失戀) 때문이다. 벌의 바늘침을 ‘목숨과 맞바꿀 쓰디쓴 사랑’에 비유하는 시행이 이러한 의미를 함축한다. 요컨대 화자는 꽃을 찾는 벌의 생태를 이성간의 사랑에 비유하여 묘사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상실에서 오는 슬픔의 결정체가 곧 꿀에 다름아님을 말한다.

이 지점에서, 싸락눈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화강암처럼 견고한 정호승의 별 이미지는 연하면서도 농밀한 꿀의 이미지로 변주된다. 달콤한 꿀이 사실은 벌의 쓰디쓴 사랑의 결실임을 시인은 역설적인 화법으로 말한다. 이처럼 꿀의 원형질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슬픔의 촉매를 통해서야 비로소 꿀이라는 결정체로 화학변화할 수 있다. 사랑의 슬픔이 쌓이고 뭉쳐져 굳어짐으로써 꿀은 밀도(密度)를 획득하는 것이다. 별과 눈에 이어 꿀의 이미지로 자리바꿈하면서 정호승의 비극적 상상력은 강도(强度)와 밀도를 얻는다.

정호승 시에서 별의 영상은 다시 ‘뿌리’의 이미지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때 뿌리는 대지의 상상력이 갖는 속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 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 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뿌리의 길’ 일부,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중)

뿌리는 생명의 모태(母胎)이다. 나무를 지탱하면서 나무에 양분을 공급한다. 그래서 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억센 생명력을 가진 모성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이 내밀한 나무 뿌리가 지표면 위에 드러나 있다. 지하의 뿌리가 지상으로 드러난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아마도 늙고 노쇠하여 더 이상 대지의 자양분을 수확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의 기능을 잃었기에 뿌리는 ‘슬픔의 눈물’을 달고 있다. 그럼에도 뿌리는 ‘산을 움켜쥐고’ 결코 놓지 않는다. 비록 노동의 기능은 잃었지만, 나무를 떠받치는 버팀목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생명체의 절박한 안간힘, 그것을 시인은 지상에 드러난 뿌리의 모습에서 읽고 있다.

나아가 시인은 소나무와 뿌리의 관계에서 어린 아들과 자신의 관계를 읽는다. 그리하여 나무를 지탱하려는 늙은 뿌리의 안간힘과 같이 자신 또한 어린 아들의 미래를 위한 버팀목이 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호승의 시에서 뿌리는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대지의 속성을 표현한다. 별이 ‘천상에 박힌 뿌리’라면, 뿌리는 ‘지상에 박힌 별’이다. 그래서 별의 추락이 슬픔의 기원이 되듯, 뿌리의 돌출 또한 대지의 슬픔을 보여주는 표지가 된다. 슬픔은 부드러움의 마술적 힘을 통해 별과 뿌리를 더욱 견고하게 단련시킨다. 이처럼 정호승의 시에서 대지의 상상력은 별과 꿀과 뿌리의 이미지로 다채롭게 변용되면서 슬픔의 변증법적 용해(溶解)를 보여준다.

 

3. 연소, 밝음과 어두움의 변증법

별은 결정체이자, 동시에 ‘광원(光源)’이다.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빛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호승의 시에서 별은 빛나지 않는다. 빛의 상실로 인해 별은 슬픔의 정서를 더욱 심화시킨다.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 나씩 골고루 나눠 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하루 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짓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담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담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메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별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구두 닦는 소년’ 일부, 시집 ‘서울의 예수’ 중)

이 시에서 별은 구두에 비유된다. 먼지가 앉고 때가 낀 구두는 빛을 잃고 사위어가는 별과 의미론적 등가관계에 놓인다. 그렇다면 별이 빛을 잃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그것은 ‘사람들 발 아래 짓밟혀 나뒹굴기’ 때문이다. 꿈과 희망은 세속적인 욕망과 억압적인 정치현실 앞에 마모되고 더럽혀진다. 그리하여 화자는 구두를 닦듯 별을 소제함으로써 별이 다시 빛나기를, 희망이 소생하기를 염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소생한 희망을 사람들에게 다시 구두처럼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럴 때 보잘것없는 구두닦이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룩한 전도사로 변신한다.

앞서의 작품과 같이 이 시 또한 역설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별은 그 빛으로 인해 천상의 영역에 속한 것이자 고귀하고 값진 가치를 표상한다. 반면에 구두는 육체의 최하층 계급인 발을 보호하고 있다. 시인은 이 상반된 이미지를 동일한 의미영역으로 결합한다. 그리하여 가장 어둡고 하찮은 것이 가장 밝고 고귀한 것이라는 역설적 인식에 이른다. 이는 또한 현실이 누추하면 누추할수록 이로부터 길어올리는 시는 더욱 빛나리라는 인식을 겹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렇게 볼 때 이 시의 화자인 구두 닦는 소년은 곧 시인(詩人)의 메타포이며, 별은 곧 시(詩)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정호승의 시의식을 대변해 주는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퇴색한 별빛을 되살리려는 시인의 노력은 ‘눈사람’이나 ‘명주실’의 이미지를 낳기도 한다.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길은 먼데 함 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 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길 러가고… (‘맹인 부부 가수’, 시집 ‘서울의 예수’ 중)

일평생 맑은 고치 하나 만들기 위해/ 점순이는 뽕밭 뽕밭길로만 걸어가고/ 눈물 많은 할머님 명주수건 하나 마련키 위해/ 점순이는 뽕밭 아지랑이만 따라갔다./(…)/ 오늘 보름밤/ 뽕 따는 점순이 치마폭에/ 누에실 같은 달빛이 그득하다./ 용팔은 아버님 흰고무신 한 켤레 사들고 지나가고/ 뽕나무 가지마다 걸린 달빛이/ 누에가 실을 뽑듯 실을 뽑는다 (‘뽕밭’, 시집 ‘서울의 예수’ 중)

첫 번째 시의 배경은 폭설이 내리는 노상(路上)의 밤이다. 폭설은 나그네들 앞에 떨어진 하나의 ‘재앙’이다. 그래서 폭설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환기하듯 눈물, 슬픔과 의미론적 등가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재앙으로서의 눈은 ‘눈사람’의 대두를 통해 희망의 표지로 변전한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눈이 가진 순백(純白)의 색깔에 있다. 눈은 굴려져 눈사람이 되고 어두운 길을 밝히는 불빛이 된다. 때묻지 않은 색깔의 집적을 통해 눈은 하나의 광원이 된다. 그 빛에의 염원은 다시, 노래가 되어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앞으로 이끈다. 그럴 때 눈사람은 초월적 존재로서의 구세주가 아니다. 눈과 같은, 사람들의 순결한 마음이 빚은 결정체이다. 시인은 이렇게 어두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도덕적 의지를 눈사람의 비유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백색 애호증’은 두 번째 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시에서 뽕따는 점순이의 모습은 명주실을 토해내는 맑은 고치로, 다시 ‘누에가 실을 뽑듯 실을 뽑는’ 달빛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점순이가 뽕을 따는 이유는 ‘눈물 많은 할머님 명주수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결국 명주실의 원관념은 눈물로, 이 눈물이 고치, 누에, 달빛의 보조관념을 만들어내며 시를 이끌고 있다. 그럴 때 누에실이 표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 해답은 명주실이 갖는 순백(純白)의 색깔에 있다. 그 순결하고 맑은 색깔을 통해 시인은 병든 현실을 연소시켜 무균질(無菌質)의 상태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정호승 시에 나타난 별의 이미지는 눈사람, 명주실과 같은 인접관념과 연합함으로써 현실을 세척하는 ‘순백의 윤리학’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슬픔을 녹여 맑고 깨끗한 빛으로 벼리려는 시인의 태도에서 우리는 따뜻한 입김을 느낀다. 정호승의 별에는 온기(溫氣)가 배어 있다. 그 온기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동시대의 서민들에 대한 시인의 애정어린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에서 별은 하나의 ‘시선(視線)’으로 작용한다.

점자로 쓰는/ 사랑의 편지./ 점자로 읽는/ 어머니의 편지.// 어둠 속에서만 별은 빛나고/ 마음의 눈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눈이라고/ 마음의 눈으로 가장 아름다운/ 별을 바라볼 수 있다고// 선생님과 우리들은/ 달빛 아래 모여 서서 편지를 읽으며/ 서울 시내 하수구에 빠지는 사람들이/ 멀쩡히 눈 뜬 자들이라고/ 까르르 웃으며 달만 쳐다보았다.

(‘국립서울 맹학교’ 일부, 시집 ‘서울의 예수’ 중)

이 시에서 별은 ‘눈(眼)’의 이미지와 등가관계를 이룬다. 그렇게 볼 때 눈을 잃은 맹아들은 별을 잃은 하늘과 같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표면적 의미를 살짝 뒤집는다. 별의 진정한 의미는 ‘육체적 시각’이 아니라 ‘정신적 시야’에 있다는 것이다. 화자는 ‘마음의 눈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눈’이며, ‘마음의 눈으로 가장 아름다운 별을 바라볼 수 있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진술이 가능한 것은 별이 ‘어둠 속에서만 빛나기’ 때문이다. 밝은 대낮에 그 누가 별을 볼 수 있겠는가. 이 지점에서, 감추고 싶은 흉터로서의 육체적인 실명(失明)은 정신적인 개안(開眼)을 나타내는 빛나는 훈장이 된다. 그런 점에서 맹아들은 두 눈을 잃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게 된 신화적 인물, 오이디푸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정호승의 이 오이디푸스적인 인물들은 비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모습엔 따뜻한 웃음이 배어 있다. 그것은 시인 특유의 역설적 어조 때문이다. 화자는 ‘서울 시내 하수구에 빠지는 사람들’은 ‘멀쩡히 눈뜬 자들’이라고 진술한다. 멀쩡한 사람들이 오히려 정신적인 불구자라는 역설적 의미매김으로 인해 이 시는 우스꽝스럽고 유쾌한 분위기를 획득한다. 이렇듯 시인은 이미지의 조작과 상식적 의미의 전복을 통해 현실을 풍자하면서 감싸안는다. 풍자와 위안의 이중효과가 가능한 것은, 근본적으로 현실을 보는 시인의 시선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별은 이제 하나의 시선으로 작용함으로써 인간적인 온도(溫度)를 획득한다. 별의 온도는 다음의 시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 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별들은 따뜻하다’ 일부,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 중)

화자는 캄캄한 겨울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하늘에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눈은 ‘눈(眼)’의 의미로 읽힌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의 눈’이 은유하는 것은 곧 ‘별’임을 알 수 있다. 캄캄한 겨울에도 별이 초롱초롱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의인화된 까닭에 별빛은 차갑지 않고 따뜻하다. 아울러 보리밭을 덮고 있는 ‘눈(雪)’의 이미지 또한 ‘가난의 하늘’과 대조되어 따뜻함의 느낌을 배가시킨다. 이처럼 동음이의어인 ‘눈(眼)’과 ‘눈(雪)’의 절묘한 연합을 통해 시인은 별의 이미지에 인간적인 시선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냉혹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의 따뜻한 징표를 제시하고자 한다.

요컨대 정호승 시의 별은 희망을 비추는 광원이자, 때묻은 현실을 닦는 순백의 세척제이며, 가난한 삶을 감싸안는 따뜻한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별은 구두, 눈사람, 명주실, 눈동자 등의 보조관념으로 다채롭게 자리바꿈하면서 이러한 의미를 구현한다. 슬픔의 질료가 연소되고 휘발됨으로써 별은 명도(明度)와 온도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4. 담금질, 창조와 파괴의 변증법

정호승 시에 있어 별은 슬픔의 결정체이자, 순백의 광원이다. 그리하여 별은 지상의 절망적 현실에 대한 희망의 표지로 작용한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별은 현실의 폭력에 응전하는 보다 능동적인 ‘힘’의 메타포로 전화된다. 이러한 별의 역학은 구체적으로 ‘칼’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난다.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 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해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 이라는 것을 알았다. (‘슬픔을 위하여’ 일부,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중)

별은 사람들에게 슬픔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별은 눈물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빛을 따라 걷는 길은 ‘슬픔으로 가는 길’이다. 사람들은 슬픔의 액체를 굳혀 별을 만들고, 슬픔의 고체가 내뿜는 빛을 쐬며 삶의 고통을 잊는다. 슬픔은 사람들을 가두는 감옥이자, 사람들을 보호하는 집이 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슬픔의 윤회(輪廻)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슬픔은 운명이 된다. 그러나 화자는 결구에서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별의 이미지는 다시, 격렬한 화학변화를 겪는다. 부드럽고 따뜻한 점액질의 별빛은 딱딱하고 차가운 점토질의 금속 이미지로 급전한다. 수동적이고 여성적인 기질 대신 능동적이고 남성적인 기질이 들어선다.

별은 남성의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힘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별 이미지의 연금술적 성(性)전환을 가능케 하는 동인(動因)은 무엇인가. 화자는 그것을 ‘평등과 화해에 대한 기도’에서 찾고 있다. ‘평등과 화해에 대한 기도’라는 진술은 역설적으로 평등하지도 화해롭지도 못한 현실을 암시한다. 이때문에 폭력과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에 응전(應戰)하여 화해와 평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힘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언어의 숫돌에 별빛을 간다. 슬픔의 감정을 벼려 날을 세운다. 폭력의 해소를 위해 폭력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고통은 다음의 시에서 보다 여실히 드러난다.

칼날 위를 걸어서 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는 나지 않는다/ 눈이 내린다/ 보라/ 칼날과 칼날 사이로/ 겨울이 지나가고/ 개미가 지나간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 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 수 있다.

(‘칼날’ 전문,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중)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이라는 대목은 이 시의 전언을 함축한다. 현실이 폭력적일 때 현실의 힘에 대적할 유일한 길은 스스로 폭력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폭력의 객체에서 폭력의 주체로 자리바꿈을 할 때 나와 현실의 기울어진 역학관계는 균형을 되찾는다. 그러나 이 폭력의 내면화 과정은 불가피하게 희생을 수반한다. 맨발로 칼날 위를 걷기 위해서는 피흘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은 고통스럽다. 칼에 대적하기 위해 스스로를 예리하고 뾰족하게 깎는 고행. 그 고행이 낳은 의식의 칼은 결국 현실의 폭력을 해체하는 기능을 한다. 그때 칼의 폭력은 ‘성스러운 폭력’이 된다. 슬픔의 칼은 현실의 파괴를 위한 무기가 아니라, 현실의 환부를 절개하는 치유의 메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잠든 새벽 거리에/ 가슴에 칼을 품은 눈사람 하나/ 그친 눈을 맞으며 서 있습니 다./ 품은 칼을 꺼내어 눈에 대고 갈면서/ 먼 별빛 하나 불러와 칼날에다 새기고/ 다시 칼 을 품으며 울었습니다./ 용기 잃은 사람들의 길을 위하여/ 모든 인간의 기억을 흔들며 울 었습니다.// 눈사람이 흘린 눈물을 보았습니까?/ 자신의 눈물로 온몸을 녹이며/ 인간의 희 망을 만드는 눈사람을 보았습니까? (‘눈사람’, 시집 ‘서울의 예수’ 중)

현실 응전의 상상력은 이 시에 이르러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앞서 지적했듯이, 눈사람은 정호승 시의 중심 이미지인 별의 환유(換喩)이다. 그런데 앞서의 경우와 달리 이 시에서 눈사람은 공격적이고 위협적이다. 눈사람은 ‘가슴에 칼을 품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눈사람은 ‘용기 잃은 사람들의 길’을 위하여 울고, 그 눈물로 온몸을 녹여 희망을 만든다. 이러한 비유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눈사람은 지난 시절 투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시인은 눈사람의 메타포를 통해 동시대의 절망적인 현실을 돌파하는 능동적인 민중의 힘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눈물을 굳혀 별을 만들고, 별을 깎아 칼을 만들고, 다시 칼을 눈사람의 가슴에 심음으로써 시인은 자신의 윤리학을 완성한다.

이처럼 정호승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새벽편지’). 그 피는 말할 것도 없이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지불해야 할 불가피한 희생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정호승의 별이 피묻은 칼로 변할 때 아이러니컬하게도 별은 희망의 의미를 상실한다. 아무리 ‘성스러운’ 폭력이라 할지라도,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낳는 범죄일 수밖에 없다.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는 그 어떠한 희망의 전언도 허구적이다. 그리하여 이제 시인은 섣불리 희망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희망이었다”(‘강물’,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고 고백한다. 과장된 절망의 포즈와 손쉬운 희망의 구호를 넘어선 자리에서 이제 시인은 조용히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자 한다.

강가에 초승달 뜬다/ 연어떼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그네 한 사람이 술에 취해/ 강가 에 엎드려 있다/ 연어 한 마리가 나그네의 가슴에/ 뜨겁게 산란을 하고/ 고요히 숨을 거 둔다 (‘사랑’,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중)

이 시에서 우리는 정호승의 시의식을 지배하는 대지적 상상력의 종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종점은 연어의 귀소본능을 통해 암시된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다. 그때 연어를 고향으로 이끄는 힘은 사랑이다. 사랑의 힘을 입증하기 위해 고향으로 귀환하는 연어의 생태. 그것은 ‘술에 취해 강가에 엎드려 있는’ 나그네에게 마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술에 취한 나그네는 삭막한 현실 속에서 감정의 마비상태를 겪고 있는 동시대인의 모습을 함축한다. 나그네의 닫힌 가슴은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의 힘찬 몸짓, 그 뜨거운 마사지에 비로소 활짝 열린다. 그리하여 연어의 산란을 보며 나그네는 ‘뜨겁게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정호승의 별은 연어의 산란, 뜨거운 알의 이미지로 변용됨으로써 마침내 ‘사랑’의 의미를 획득한다. 변화무쌍한 이미지의 사슬을 따라 자리바꿈하던 별의 상상력은 대지모신(大地母神)의 자궁 속으로 귀환한다. 별이 하늘의 수정란이라면, 수정란은 대지의 별인 것이다. 이렇게 별→칼→알의 변용과정을 통해 정호승은 대지적 상상력의 연금술을 완성한다. 슬픔을 빚어 별을 만들고, 별을 구부려 칼을 만들며, 칼을 녹여 다시 사랑을 산란한다. 그런 점에서 정호승은 뛰어난 이미지의 대장장이다. 나아가, 그 이미지의 대장간에서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시인은 끝없이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슬픔의 결정체, 별을 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별을 벼리는 대장장이이자, 동시에 별을 채집하는 광부가 된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 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일부, 시집 ‘서울의 예수’ 중)

떠나기 위해 머물러야 하고 머무르기 위해 떠나야 하는 별의 대장간. 그 안에서 시인은 진정한 사랑의 변증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요컨대 정호승의 시에서 별은 무수한 대지적 이미지로 변주되면서 폭력적인 현실에 맞서는 ‘사랑의 권력’으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정호승 특유의 상상력, 노동과 반항의 상상력은 완성된다.

 

5. 승화, 장인은 쇠의 마음을 헤아린다

‘별’에서 시작된 정호승의 상상력은 긴 변용과정을 거쳐 황금빛 ‘알’의 상태에 이른다. 별의 질료인 슬픔의 정서는 화학변화를 거듭하며 사랑의 정서로 승화된다. 그런 점에서 정호승의 시는 대장간의 상상력이 빚은 연금술의 결과이다. 대장간은 대지의 질료를 길들여 ‘인간화’하는 곳이다. 정호승의 시는 광물(별), 식물(뿌리), 동물(연어)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대지의 이미지를 구부리고, 자르고, 펴고, 때린다. 상상력의 용광로 속에서 슬픔의 정서는 다양한 대지의 질료들과 함께 용해되어 별, 칼, 알로 부활하는 것이다. 이때 대지의 이미지는 탄성(彈性)과 경도(硬度)를 획득한다. 언어의 망치질 속에서 이미지는 둥글면서도 곧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양가적 속성을 얻는다. 곡선 속에 응축된 직선.

상상력의 제련과정을 통해 비로소 시인은 수동적이고 여성적인 정조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남성적인 힘을 체득하는 것이다. 정호승의 시세계가 이른바 ‘민중시’로 운위되어온 소이가 여기에 있다. 정호승의 시를 지배하는 대장간의 영상은 자연스럽게 노동과 반항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정호승의 시는 상투적인 구호를 동원해 시대고(時代苦)를 표출하는 투사들의 시와 구별되어야 한다. 그보다는, 섬세한 이미지들의 합주를 통해 시대의 고통과 절망을 미적으로 승화시킨 서정시로 읽힘직하다. 정호승의 상상력이 대장간의 상상력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념의 측면보다는 감각의 측면에 더 밀착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장장이는 쇠의 용도에 앞서, 쇠의 마음을 헤아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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