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

                                                                              -문정희-

                                                       

 

 

 

저녁 현관문이 열리고

결혼이 들어온다

기다리던 남편이 퇴근했다

무더위 속에서도 굳건한 고려와 조선과

일렬횡대의 전주 이씨 족보가

우리의 든든한 서방님이 돌아오셨다

신사임당이 어우동에게

시(詩)를 숨기고 잠깐 나가 있으라 눈짓한다

신사임당이 소매를 걷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풋고추 도마 위에 난도질하여 찌개를 끓인다

오, 우리의 하늘이 전쟁터에서

오늘도 무사히 돌아오셨다

몇 가지 전리품을 챙겨 넣었는지

그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인다

종요로운 가화만사성 속에

찌개가 요동을 치며 끓어 넘친다

신사임당의 행복이 진된장처럼

보글보글 끓어 넘친다

 

 

 

어우동이 저만치 코를 막고 서 있다.

 

            -<문학과 경계>(2006)-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비판적, 냉소적

특성

① 긴장과 반어의 모더니즘적 기법을 동원함.

② 시어의 대립적 구도(신사임당 ↔어우동)를 통해 주제를 형상화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저녁 현관문이 열리고 / 결혼이 들어온다

   → 여성에게 가정이란 사랑이 넘치는 '이상'이 아닌 '현실'일 뿐임을 형상화한 구절이다.

* 결혼 → '남편'을 비유한 말

* 든든한 서방님 → 가부장제의 상징(반어법)

* 신사임당 → 가부장제 속에 구속된 여성(현모양처)

* 어우동 →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

* 시(詩) → 여성의 내밀한 욕망

* 풋고추 도마 위에 난도질하여 → 숨겨지지 않는 여성의 욕망

* 전쟁터 → 힘든 사회 상황을 상징

* 종요로운 가화만사성 → 위선적인 가정의 평화

* 찌개가 요동을 치며 끓어 넘친다 → 여성의 끓어 넘치는 내밀한 욕망을 형상화한 것임.

* 어우동이 저만치 코를 막고 서 있다

   → 된장찌개의 냄새 때문에 어우동이 코를 막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에서 억눌린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 드러나 있는 구절이다.(억압적인 가정의 모순 비판)

 

제재 : 가부장제 하의 여성

주제억압적인 가정의 모순

[시상의 흐름(짜임)]

◆  1 ~ 6행 : 남편의 퇴근

◆ 7 ~10행 :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가부장제의 여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 11~14행 : '하늘' 같은 남편의 귀가와 안쓰러움

◆ 15~19행 : 여성의 내밀한 욕망이 끓어 넘침.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남편이 퇴근하는 것과 동시에 어우동과 같은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신사임당과 같은 현모양처로 바뀌어야 하는 가부장제 속의 여성에 대한 담론을 드러내고 있다. 시의 표면에 그려진 가정의 모습은 '종요로운 가화만사성'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곳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이는 억압적인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반어일 뿐이다.

'굳건한 고려와 조선', '일렬횡대의 전주 이씨 족보', '우리의 든든한 서방님'은 면면히 이어온 가부장제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그러한 가부장제의 현실 속에서 여성은 시를 쓰고자 하는 꿈틀거리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든든한 서방님'이 퇴근한 이후로는 그러한 욕망을 감출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러한 욕망이 완전히 숨겨지질 않아 저녁 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풋고추는 '난도질' 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상징하는 찌개는 끓어 넘치기까지 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억압적인 가부장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 '부엌'의 상징적 의미

이 시에서 '부엌'을 공간적 배경으로 제시한 것은 가부장제 속에서 '부엌'이 전형적인 여성의 주요 활동 공간이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이 '어우동'에게 시(詩)를 숨기고 잠깐 나가 있으라 눈짓하며 들어가는 공간도, 풋고추 도마 위에 난도질하여 찌개를 끓이는 공간도 '부엌'이다. 특히 '어우동이 저만치 코를 막고 서 있'는 마지막 구절은 이러한 공간에서 드러나는 억압적 모순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부엌'은 불평등한 가부장제적 현실과 모순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남편과 아내의 대립 구도

이 시는 남편과 아내라는 대립 구도를 바탕으로 결혼이라는 가부장제 속에 갇혀 있는 여성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중년으로 보이는 여성의 내면에는 '신사임당'과 '어우동'이라는 두 개의 자아가 자리잡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남편이 들어오기 전까지 시적 화자는 '신사임당'과 '어우동'의 자아를 통합하고 조화를 이루었으나, 남편이 퇴근하여 들어오면서 억압받지 않았던 '어우동'의 욕망은 '신사임당'에 의해 저지당한다는 점이다. 어떠한 제도나 통념에 이해 구속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세계를 누렸던 '어우동'이 가부장 남편의 퇴근에 의해 내밀한 욕망을 죽여야 하는 '신사임당'과 같은 여성 자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 문정희의 작품에 그려진 '여성'

문정희는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삶과 현실, 소망을 정서적이면서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즐겨 사용한 시인으로, 최근에는 여성시의 시야를 확대함으로써 우리 시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다. 문정희는 이처럼 특유의 페미니즘적 세계 인식에 대한 천착으로 여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남성들이 지배적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 속에서 여성은 유령처럼 떠돌기 일쑤다. 문정희의 시는 그 여성에게 살과 피를 주고, 잃어 버린 욕망을 박탈당하는 존재이다. 여성 주체를 둘러싼 남성들은 끊임없이 그에게서 '잘라 가고', '도려 가고', '뺏아 간다'. 이처럼 여성은 빼앗기는 존재, 잃어 버리는 존재이다. 따라서 마침내 지워진 존재, 즉 '유령'이 된다.

-출처 : '해법 문학, 현대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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