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야(雪夜)

                                                                    
          -  김광균  -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조선일보>(1938)-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이미지즘시. 회화적, 감각적, 주지적, 애상적, 감상적

표현 

* 감각적 표현 계열의 주지주의 작품

* 현재법을 사용하여 시적 긴장감을 지속시킴.

* 참신한 비유 : 눈 =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자취,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추억의조각, 싸늘한 추회

                       호롱불이 가물거리는 모습 = 여윔

* 시각적 심상과 공감각적 심상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그리운 소식 → 한밤 중 소리없이 흩날리는 눈

    * 호롱불 야위어 가며 → 호롱불이 가물거리는 모습(시간의 흐름)

    * 흰 눈 = 서글픈 옛 자취

    * 마음 허공 → 시인 특유의 내면공간의 조형 능력이 엿보이는 표현

    *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 비애(애수)의 차단을 시도한 행동

    *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소리

          → 낭만적인 시청각적 이미지(시각의 청각화=공감각적 심상)

              눈내리는 정경을 미세하게 울림하는 청각으로 변역

              눈내리는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이처럼 육감적이고 쓸쓸하게 나타낸 예가 없다고 함.

    * 싸늘한 추회(후회스러운 추억) = 눈 → 눈의 이미지가 직서적으로 표현됨.

    * 차단한 의상 → 추억의 여인의 옷(여인에 대한 추억이 '슬픔, 애수'와 연결되어 있기에)

                             냉정하기만 했던 여인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도 있음.

 

주제눈오는 밤의 정경과 심회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한밤중 소리없이 흩날리는 눈(=그리운 소식)

◆ 2연 : 서글픈 옛 추억이 담긴 눈

◆ 3연 : 비애(애수)에 잠김

◆ 4연 : 눈 내리는 소리(환상에 빠짐)

◆ 5연 : 후회스러운 추억

◆ 6연 : 눈에 서리는 슬픔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눈 오는 날 밤의 정경을 통해 지향없는 그리움과 상실감에서 오는 서글픔을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시인이 중요시하던 이미지의 조형보다는 '정서나 분위기의 표현'에 주력한 듯하다. 서글프고 서러운 밤에 내리는 눈, 그 눈이 도회인의 소시민적 감정에 잔잔히 물결치면서 부드러운 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마지막 두 줄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 내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에서 확인되는 것은 사물을 마주한 시인의 감정 상태이다. 눈은 정화(淨化)된 슬픔이다. 눈이 억누를 수 없는 슬픔처럼 마구 쏟아지지 않고 정화된 슬픔처럼 차분하게 내리는 것은 시인(혹은 화자)의 슬픔이 과거의 추억으로 은은하게 되살아 오기 때문이다.

눈이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 자취', '잃어진 추억의 조각', '차단한 의상'으로 비유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눈은 과거의 추억을 환기시켜 주고, 그 추억은 현재의 나를 슬픔에 젖게 한다. 그렇다면 '나'를 슬프게 하는 추억, 과거의 경험 내용은 무엇일까?

'여인'은 '나'의 추억의 중요한 부분이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단순한 감각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고, 다른 시행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것은 마지막 연의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 흰눈은 내려……'와 관련이 있으리라. 이것은 또 제3연의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과도 관계가 있을 터이다. 여기서 우리는 '홀로'와 '호올로'라는 두 개의 부사가 놓인 자리를 생각하게 된다. 나도 '홀로'이고 여인도 '호올로'이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외로움이다.

여인은 지금 내 앞에 있지 않고 '머언 곳'에 있으며, '차단한 의상'에서 암시되듯이 여인은 나에게 냉정하다. 여인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일방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추억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슬픈 추억이지만, 여인은 나에게 신비로운 존재다. '머언 곳에 여인이 옷 벗는 소리'는 부정(不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여인의 신비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김광균의 시를 이미지즘의 논리로 풀이할 때, 이 시는 그 자리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음을 보여준다. 자칫 '감상적'이라는 멍에를 뒤집어 쓸 수 있도록 다분히 나약한 면모를 많이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목표가 감정 전달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눈내리는 밤의 분위기가 과거의 후회스런 서글픈 추억과 결부되어 있으나, 그것이 주된 목적이었다면 슬픔이 그토록 모호하게 처리될 턱이 없는 것이다. 이 시는 무슨 대단한 의식이나 주의 주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오는 밤의 모습이 주는 한순간의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의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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