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바다로 가다

                                                                              - 김명인 -

                                                       

 

 

 

내 몸이 소금을 필요로 하니,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먹장 매연(煤煙)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여행 힘에 겹네.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면

한줌 낙엽의 사유라도 길바닥에 떨구면 따뜻하리라.

그러나 찌든 엽록의 세상 너덜토록

풍화시킨 쉰 살밖에 없어

후줄근한 퇴근길의 오늘 새삼 춥구나.

저기, 사람이 있네, 염전에는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는 소금 굽는 사람이 있네.

짜디짠 땀방울로 온몸 적시며

저물도록 발틀 딛고 올라도 늘 자기 굴헝에 떨어지므로

꺼지지 않으려고 수차(水車)를 돌리는 사람, 저 무료한 노동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듯 소금 보이지 않네

하나, 구워진 소금 어느새 썩는 살마다 저며와 뿌옇게

흐린 눈으로 소금바다 바라보게 하네

 

 

 

그 눈물 다시 쓰린 소금으로 뭉치려고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게 하네.

 

               -<소금바다로 가다>(2006)-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관조적, 성찰적, 의지적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소금 →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

    *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 고달픈 삶의 모습

    *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 → 썩어서 남을 이롭게 하는 존재

    * 내 몸이 소금을 ~ 힘에 겹네

         →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서 땀 흘리며 고달픈 삶을 사는 화자 자신의 현재 삶의 모습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 찌든 엽록의 세상 → 썩지도 못해서 남을 이롭게도 못하는 삶을 의미

   * 풍화시킨 쉰 살 → 화자 자신의 자괴감(남을 이롭게 하지도 못하고 소멸되어 가는 화자의 삶)

   * 오늘 새삼 춥구나 → 공허감, 무력감, 자괴감

   * 그러나 찌든 ~ 새삼 춥구나

        → 썩어서 남을 이롭게 하지도 못하고 소멸되어 가는 삶을 사는 화자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괴감이

                 '풍화시킨 쉰 살밖에 없어'라는 표현에 잘 나타나고 있다.

   * 소금 굽는 사람 → 화자 자신에 대한 객관화의 계기가 되는 존재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행하는 사람임.

   * 짜디짠 땀방울 → 힘겹고 고통스런 노동과 삶

   * 짜디짠 땀방울 ~  소금 보이지 않네. → 겉으로 보기엔 무의미하고 헛되이 보이는 삶

   * 굴헝 → 구렁

   * 하나 → 시상의 전환(반전)

   * 하나, 구워진 ~ 바라보게 하네

        → 무의미하고 헛되게 보이던 소금 굽는 사람의 삶에 대한 인식이 변하는 부분이다.

            무의미하게 보이던 노동의 결과물이 세상과 그 속의 존재들을 건강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자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과 세계에 대한 대결 의지가 나타나고 있다.

   * 그 눈물 다시 쓰린 소금으로 뭉치려고 /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게 하네.

       →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을 얻을 수 있으므로 새롭게 삶의 의지를 다짐.

           삶의 자세를 추스르고 삶의 의지를 회복하여 세상과 다시 대면함.

 

주제고된 일상 속에서의 올바른 삶의 자세에 대한 성찰

[시상의 흐름(짜임)]

◆ 1 ~ 2행 :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 3 ~ 7행 : 자신에 대한 자괴감

◆ 8 ~ 15행 : 소금 굽는 사람을 통해 본 자신의 삶의 의미

◆ 16~17행 : 삶의 자세를 추스리고 삶의 의지를 회복함.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고된 일상의 삶 속에서도 올바른 삶의 자세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는 땀을 흘리며 고된 삶을 살아가지만 일상에 젖어 썩어 가는 자신을 지탱하기가 힘들다. 자연스럽게 썩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을 신선하게 유지하지도 못한 채 그저 세월에 낡아갈 뿐이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 자괴감을 느끼던 차에 화자는 '소금 굽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저 무의미하고 헛된 삶을 산다고 여겼던 '소금 굽는 사람'의 행동이 세상과 그 속의 존재들을 건강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화자는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세상에 대한 대결 의지도 갖게 된다.

소금은 부패를 막아 주는데, 그것은 우리의 땀에도 눈물에도 들어 있다. 시인은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땀을 흘리지만, 일상에 젖어 들어 썩어 가는 자신의 삶을 그 부패로부터 막아 내는 일이 고통스럽다. 시인은 자연스럽게 썩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기 삶을 신선하게 유지하지도 못한 채, 세월과 함께 청춘의 푸른빛을 잃고 낡아 갈 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에 밀려 살아가는 시인에게 문득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이 그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염전에서 소금을 구우며 등만 보여 주고 있는 이 사람은 시인이 모범으로 여기며 살아야 할 어떤 사람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일상에 초연한 자세를 유지한 채 날마다 힘겹게 보람 없는 시를 쓰고 있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소금 굽는 사람도 시인처럼 일상의 수레바퀴 안에 갇혀 있다. 그는 쉬지 않고 수차를 밟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더 높아지는 것도 아니며, 다만 허무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일을 겨우 면할 뿐이다. 이 무료한 노동의 결실은 쉽게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눈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그도 역시 세월에 밀려 낡아가는 사람일 것 같다. 그러나 벌써 그가 땀으로 구워낸 소금은, 다시 말해서 시인의 시는 우리의 삶에 방부제가 되고 있다. 그 소금이 '썩는 살마다 저며' 오는 순간은 부패한 삶이 고통스럽게 반성되는 순간이다. 소금인 시는 우리에게 삶을 아프게 의식할 수 있는 힘을 주며, 게다가 이 아픔으로 흘리는 눈물은 또다시 소금이 된다. 이제 눈물이 향하는 '소금바다'는 세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통의 바다이다. 이 고통의 바다는 우리의 삶을 썩게 하지만, 그 방부제인 소금과 시를 만들 땀과 눈물이 바로 거기서 얻어진다는 점에서 또한 구원의 바다이다.

소금은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함을 의미하는, 이른바 관습적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시인은 이러한 소금이 되어야겠다는 의지로 넓은 세상에 뛰어듦으로써 자신의 노동이 썩는 것만은 아니라는 낙관적인 의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소금의 의미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지탱하게 하는 유일한 힘으로 이 시대의 어떤 정신적 가치가 되기도 합니다.

 

■ 시인의 시작 노트 : 소금바다 맹물바다

바다를 향한 나의 집착은 유별난 데가 있다. 동햇가 작은 어촌에서 소년기를 보낸 탓일까. 바다만 생각하면 미리 마음부터 설레곤 한다. 그런 만큼 내게는 바다를 형상화한 시가 몇 편 있다. 최근에도 나는 한두 편 바다의 시편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원고는 뜻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어떤 작품이든지 착상에서 완성까지는 언제나 처음인 듯 막막하긴 마찬가지이지만, 근작 바다 시편들은 끝끝내 미완인 채로 초고를 밀쳐 놓을 수밖에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기 바다는 어느덧 사람의 그림자가 증발되어 버린 쓸쓸한 허무의 공간이었다. 나는 바다의 그런 투명한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허무의 바다라니! 사실 바다는 오랫동안 내게 있어서 삶의 구체적 현실이었고, 그 제목이 되어 주었으며, 미지를 향한 열림의 표징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바다의 흥청스러움이 무작정 좋았고, 철들고 나서도 거기에 생업을 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훈기로 언제나 따듯한 자극을 받았다. 귓전에 부딪치는 해조음에 놀라 잠에서 깨어보면, 그 시간에도  캄캄한 밤바다로 어로를 떠나는 부지런한 발동선의 원동기 소리가 들려오고, 제 철에 맞추어 어구를 준비하는 늙은 어부의 노역 또한 희미한 호얏불 밑에서 밤을 밝히는 곳, 그런 곳이 내 시심 속의 고향이었고, 동해였다. 바다는 늘 평온한 듯 보여도 어느 순간에 돌변하는 광포한 힘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 자체가 외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내 시편 속의 바다에는 자연 속에 파묻혀 그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린 사람들의 구체적인 표정들이 육화(肉化)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다를 향한 나의 구체성에 추상의 옷이 덧입혀지기 시작한 것은 이태 전 미국의 서부 해안을 여행하면서 부터였다. 그때의 단편적인 체험은 오랫동안 내 속에서 잠자던 숙명적인 허무의 한 끝을 되살려내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두 주일을 작정하고 떠나 우리 가족의 세 번째 여행길은 워싱턴 주의 한 곳, 어느 울창한 원시림이 벌채되고 있는 넓은 벌판을 빗속에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벌판의 서쪽 끝, 다시 숲이 시작되는 곳에 '라 · 푸쉬'라고 묘한 지명의 팻말이 가리키는 포장도로가 나 있었다. 어림짐작에는 그쪽이 해안가, 곧 태평양의 연안쯤으로 믿어졌다. 지도를 펼쳐 확인하니, 태평양 연안을 끼고 뻗어 있는 반도의 가운데, 작은 곶(岬=갑)으로 돌출해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이었다.

우리 가족은 태평양을 보려고 그 우중에 해안으로 차를 몰았다. 한 시간 남짓 갔을까. 날은 어느새 개고 있었다. 비 끝이라, 여름인데도 살갗에 닿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언덕 아래로 망망한 바다가 펼쳐졌다. 조립식 이동 주택이며, 허름한 목조 건물이 드문드문 널려 있는 동네에는 낡은 트럭과 승용차가 몇 대 눈에 띄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구름이 씻겨간 해안 저편에서부터 하늘은 맑아 오고, 거기 어느새 낙조가 져 희끗희끗 뒤집히는 파도 위로 쓸쓸하게 스며들었다. 황혼의 빛은 원시림이 울창한 해안 만곡과 인적이 그친 마을, 그리고 작은 동산 크기의 섬들이 떠 있는 바다를 온통 적막하게 채우고 있었다.

아내와 딸아이들이 해안가에 밀려온 커다란 통나무 위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몇 커트의 사진을 찍는 동안에 나는 유난히 부드러워 모래가 흙먼지 같은 사장을 반 마장이나 혼자 걸어갔다. 여기가 어딘가. 수평선 위에 떠 있어도 희미한 흔적뿐인 석양이 비치는 그곳은 마치 세상의 끝, 북망이 있다면 그 북망인 듯 생각되기도 했다. 미국에 건너가서는 한동안 입 안에서 맴도는 모국어에 대한 갈증으로 마음이 메말랐었다. 그런 정황 속에서 만난 낯선 광경이었던 탓인지, 그 태평양 연안은 살아가는 일의 원초적인 쓸쓸함, 삶의 끝 간 곳에 가 닿았을 때 느껴질 법한, 무화되는 육신의 흩어짐과 같은 강렬한 허무를 불러 일으켰다. 황혼은 카메라 렌즈 위에 황갈색의 필터를 덧씌운 듯, 세상을 한겹 황토빛으로 덮고서 쓸쓸히 저무는 해를 한참이나 잡아두고 있었다.

지난 이월에 나는 잠깐 동햇가 고향집에 다녀왔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에 이종사촌 두 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둘 다 고향 부근에서 생업을 잇고 살았었다. 서로의 생활에 쫓겨 전혀 모른 채 하고 지낸 시절이 너무 넓어서 그런지, 우리들의 유년은 얼마나 각별했던가. 이제 겨우 마흔 중반에 든 그들은 둘 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한 사촌은 부인을 사별하고 홀아비로서 딸 둘 아들 하나를 십 년 가까이 혼자서 키웠다. 또 다른 사촌은 관광버스 운전기사였는데 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도 이혼으로 결혼생활은 끝냈고, 딸만 하나를 두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몇 년 사이에 나는 형님, 아버님을 비롯해서 가까운 여러 친지들의 죽음을 겹쳐서 경험한 셈이 된다. 그것들이 미국 서해안에서의 경험과 포개어져 어느덧 나의 바다에까지 사람 그림자를 걷어가 버린 것인지. 근래 들어 초절을 이야기하고 초월을 꿈꾸는 시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오히려 내 시에서 삶이 엷어져 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기조차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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