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문(石門)
                                                                              - 조지훈 -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조지훈 전집>(1973)-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산문적, 고백적, 상징적, 낭만적, 무속적

표현 : 천년 한을 지닌 하소연의 어조.

             담화의 요소를 갖춤(화자, 청자, 말하는 행위와 내용)

             설화를 제재로 삼음.

             서정주의 <신부>와의 비교 읽기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열릴 돌문 → 임에 대한 지극하고 오랜 기다림.(기다림의 돌문)

    *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 → 화자의 위치를 말함. 전설과 관련시키면 신방(新房)이 될 것이고, 뭇사람과의

             대비에서 생각해 보면, 화자의 정신적 위상을 드러내는 말이다. 뭇사람들의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의 높이를 드러내는 말이기도함. 이 시가 지니는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드러내는 말.

    *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임이 오지 않았음을 의미함.

    * 촛불 → 기약없는 기다림의 표상.

    *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 → '한'이 서서히 응결되고 있음을 나타냄.

    *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 → 기다림에 지친 눈물

    * 푸르러 가는 입술 → 화자의 슬픔을 드러내는 모습.

    *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 절개를 지키겠다는 매서운 의지를 나타냄.

    * 열리지 않는 돌문 → 임에게조차 열리지 않을 굳건한 문으로 의미가 변화됨.(원한의 돌문)

    *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앚아 기다리라고, → 한을 전가하는 심리(보상심리)가 드러남.

 

주제끝없는 기다림과 한, 풀리지 않는 원한

[시상의 흐름(짜임)]

1연 : 당신의 손끝만 닿아도 굳게 닫힌 문이 스르르 열릴 정도로 화자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화자의 사랑은 당신을 일방적으로 향한다. 뭇사람들이 조바심치며 화자를 향해도 임에게만 열어 드릴 문이다. 그러나 임은 오지 않는다.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는 화자가 있는 곳이다. 전설과 관련시키면 신방이 될 것이고, 뭇사람과의 대비에서 생각하면, 화자의 정신적 위상을 드러내는 말이다. 뭇사람들의 조바심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의 높이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 시가 얼마간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도 이것과 관련될 것이다. 그러나 그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고 말았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당신은 결코 오지 않았다는 그것이다.

2연 : 영원히 꺼지지 않을 촛불을 밝혀 두고 있다. '촛불'은 기다림을 표상한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기약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슬픈 영혼'이라 표현했다. '천년'을 기다리겠노라는 데서 한은 서서히 응결되고 있다.

3연 : 기다림에 지친 눈물, 그것을 당신이 남긴 도포자락으로 씻으렵니까? 세월은 흘러도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지만 기다림과 한숨에 입술이 푸르러진다. '입술'은 화자의 슬픔을 드러내는 말이다.

4연 :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당신의 따스한 손길이 와 닿으면 그때 한 줄 티끌로 사라지겠다고 한다. 지독한 한의 표출이다. 당신이 오실 때까지 천년을 기다렸다가는 이내 사라지겠다는 것에서 그리움의 절대성, 그로 인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5연 : 한을 전가하는 심리가 드러난다. 위에서의 '돌문'의 의미는 이제 변질된다. 이제는 당신에게조차 열리지 않을 굳건한 문으로 표상된다. 화자가 천년을 기다리며 한이 맺혔듯, 이제는 당신이 화자를 기다려 다시 천년을 앉으라고 하는 원한의 전가가 보인다. 그것은 보상 심리이다. 이렇든 저렇든 당신은 나타나지 않고 화자의 한은 더욱 옹골차게 응결되어 간다.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조지훈이 그의 고향 경북 영양 일월산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지는 전설(일월산 황씨 부인당 전설)을 소재로 하여 풀리지 않는 원한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서정주의 <신부>와 매우 흡사하다. 그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처녀는 그녀를 좋아하던 두 총각 중 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신혼 첫 날 밤 잠들기 전 화장실을 다녀오던 신랑은 신방문에 비친 칼 그림자를 보고 놀라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 칼 그림자는 다름 아닌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신랑은 그것을 연적(戀敵)이 복수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고 숨어 든 것이라고 오해한 것이었다. 신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깊은 원한을 안고 죽었는데, 그녀의 시신은 첫날 밤 그대로 있었다. 오랜 후에 이 사실을 안 신랑은 잘못을 뉘우치고 신부의 시신을 일월산 부인당에 모신 후 사당을 지어 그녀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감상을 위한 읽을 거리] : 김태형, 정희성 엮음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에서

제1연에서부터 제3연까지 격앙되어 오던 정서는 제4연에서 갑자기 톤(tone)을 달리한다. 제4연부터는 미래에 있을는지도 모를 해후(邂逅)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1연과 제5연을 따로 떼어 읽을 때 시상이 상반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어조의 변화에서 온다. 제3연에서 '어찌합니까?'는 푸념처럼 들리는 한편 제4연에서 '사라지겠습니다.'는 절개를 지키겠노라는 매운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원한'이란 주제의 일관성을 가지면서도 첫째 '자신의 힘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는 하소연, 둘째 '당신이 오면 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상반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제5연에서는 현재까지도 '열리지 않는 돌문'을 보여 줌으로써 그 원한이 신화적 시간대에 미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감상을 위한 읽을 거리] : 양승준, 양승국 공저 『한국 현대시 400선』에서
이 시는 5연으로 이루어진 산문시로서 의미상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앞 단락은 1∼3연으로 풍상에 시달려온 돌문의 모습을 통해 천년의 한을 간직한 신부의 서러움을 노래하고 있으며, 뒷 단락은 4∼5연으로 미래에 있을지 모를 '당신'과의 해후(邂逅)를 그리고 있다.
1연에서는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인 '돌문'이 제시되고 있다. 검푸른 이끼가 내려앉도록 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오로지 '당신'의 따스한 손끝만을 기다리고 있는 돌문에게서 신부인 화자의 지극한 사랑과 간절한 기다림을 엿볼 수 있다. 2연에서는 '꺼지지 않을 촛불'을 통해 '천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신부의 슬픈 영혼을 보여 주고 있다. 3연에서는 '눈물과 한숨'으로 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돌문의 애틋한 모습을 '어찌합니까?'라는 체념 섞인 어조로 나타내고 있다. 4연에서는 지금까지의 격앙된 분위기를 일신하고 강한 어조로 절개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당신'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순간에야 한 줌 티끌로 사라질 것이라는 서러운 비원을 말하는 한편, 그렇게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눈물 없이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라며 '당신'에 대한 원망을 감추지 않고 있다. 5연에서는 또다시 천 년을 비바람에 낡아가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돌문을 통해 원한이 사무친 신부의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1연에서의 돌문이 '기다림의 문'이라면, 5연에서의 돌문은 '원한의 문'으로 신부의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열리지 않는 돌문으로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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