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장정일 -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시집<길 안에서의 택시잡기>(1988)-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패러디적, 해체적, 풍자적

표현

* 냉소적 어조

* 패러디를 통해 시인의 의도를 풍자적으로 표출함.

쉽게 끄고 켤 수 있는 '라디오'를 통해 사랑의 진정성을 잃은 현대인의 인스턴트식 사랑을 비판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단추 누르기 →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사랑(교감)을 나누고자 하는 행위

    * 라디오 → 꺼져 있어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단순한 기계나 사물

                     단절된 현대인의 인간 관계

    * 전파 → 교감의 대상이면서 사랑의 감정 그 자체를 나타냄.

                  정상적으로 회복된 인간 관계

    *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 고독하고 삭막한 현대인의 내면의식

    *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 누군가로부터 사랑의 신호를 받고 싶어하는 소망을 나타냄.

    * 사랑 → '라디오를 켜고 끄는 것'에 비유함.

    *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의도된 시상의 뒤틀림이 이루어지는 장면으로 극적 반전이 일어남.

                 현대인의 인스턴트식 사랑(편리하고 쉽고 일회적인 사랑)을 나타냄.

                 현대인의 가벼운 만남과 쉬운 이별에 대한 풍자

 

제재 : 라디오(김춘수의 시 <꽃>)

주제현대인들의 가볍고 경박한 세태에 대한 풍자

           편리하고도 인스턴트식 사랑을 하는 현대인에 대한 비판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단추를 누르기 전의 무의미한 라디오.

◆ 2연 : 단추를 누르자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된 '그'

◆ 3연 : '그'의 전파가 되고 싶은 나의 소망

◆ 4연 : 가볍고 편리한 사랑을 원하는 우리의 소망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하여 새롭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패러디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풍자를 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꽃>에서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은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이를 라디오의 '단추 눌러주기'로 바꾸었다. 또, <꽃>에서의 '꽃'을 이 시에서는 '전파'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결국 추상적이고 정서적인 행위인 사랑을, 라디오를 켜고 끄는 것과 같은 행위로 표현함으로써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산업 사회의 비인간적인 측면을 비판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 속 '꽃'의 의미를 작가 특유의 방법으로 뒤집어 현대 사회의 풍속도를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현대인이 타인과의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 않으며, 애정을 나누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상대가 곧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김춘수의 시가 사실적인 존재가 아닌, 관념적인 존재인 '꽃'을 소재로 등장시켰다면, 이 작품은 가시화될 수 있는 사물이면서 생필품의 하나처럼 된 라디오를 소재로 등장시킨다. 라디오는 단추로 작동되고, 또 그제야 전파를 통해서 방송을 들려 줄 수 있는 물건이다. 다시 말해 단추를 누르지 않으면 라디오는 그냥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화자는 그렇게 자신이 라디오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자신도 그 누군가에게로 가서 그의 전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의 단추를 눌러주면 서로가 서로에게 전파가 되고 이러한 전파에 의해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4연의 마지막 2행에서 의도된 시상의 뒤틀림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꽃'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진지하고 친밀한 인간관계가 오늘날에도 감동과 갈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느냐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 라디오는 끄고 싶을 때 언제든지 끄고 켜고 싶을 때 언제든지 켤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편의나 실용성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의 사랑이 라디오와 같은 것이라면 그 사랑은 일회적이고 편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또 순간 순간의 실리에 의해 그 사랑이 움텄다가 다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김춘수의 시가 지극히 진지하고 묵직하게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노래했다면  이 시는 그와 반대로 가볍고 감각적인 어투로 사랑의 세태를 풍자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랑의 의미를 그저 편하고 가볍게만 받아들이고 사랑 자체를 일회적으로 소비할 수 잇는 것으로 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풍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디란, 어떤 작가의 작품을 모방하여 그것을 풍자적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기법을 의미한다. 김춘수의 작품 <꽃>은 장정일이라는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패러디되고 있다. 김춘수의 <꽃>에 나오는 '꽃'은 장정일의 작품에서 '라디오의 전파'로 패러디되었고, 원작품의 '이름 불러주기'는 패러디 작품에서 '단추 눌러주기'로 바뀌었다. 이렇게 패러디는 원작품을 의도적으로 일정한 패턴에 의해 바꿔주는 기법을 의미한다.

패러디는 보통 권위를 갖고 있는 대상을 풍자하고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급 인사의 언행을 풍자하여 만든 인터넷 신문 '딴지일보'가 이러한 패러디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정치인들의 비리, 그들의 허위의식은 욕설과 조롱을 통해 우스꽝스럽게 되어 버리고, 신문을 읽는 대중들은 쾌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패러디는 모든 성역과 권위에 도전하는 일반 대중들의 적극적인 공격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반면, 패러디가 비판의식을 상실하고 단지 모방을 통한 웃음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패러디이다. 광고에 사용된 패러디는 주로 유명한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하여 자신의 상품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데에 쓰인다. 여기에서는 패러디의 고유한 정신인 비판의식이나 풍자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패러디가 웃음을 유발하고 관심을 주목시키는 단순한 기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장정일의 작품은 김춘수 작품의 패러디를 통해 현대 사회의 사랑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쉽게 만나 쉽게 헤어지는 현대인의 사랑을 라디오 켜기와 끄기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정일의 작품은 기법적 측면에서도 패러디라는 현대적 면모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도 현대인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 참고 ]

오규원의 <꽃의 패러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금잔화, 작약, 포인세치아, 개밥풀, 인동, 황국 등등의

    보통명사가 수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 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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