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영  -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창작과 비평>(1968)-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상징적, 주지적, 의지적, 참여적, 역동적

◆ 표현

* '눕다' ↔ '일어나다', '울다' ↔ '웃다'라는 네 개의 동사가 반복적인 대립 구조

* 동일한 통사구조의 반복

* 대립적 심상의 반복

* 반복을 통한 시의 역동감과 리듬감을 획득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풀 → 여리고 상처받기 쉽지만 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

               권력자에 천대받고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불의에 저항해온 민중(민초)들

    * 눕는다 → 풀의 여리고 나약하고 수동적인 모습

    * 동풍(바람) → 반민중 세력, 억압, 독재 권력, 가혹한 현실,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힘(정치 경제적 권력)

                           풀과 대립적인 심상

    * -보다 → 풀과 바람의 대립적 국면을 좀더 확실하게 하는 기능을 함.

    * 울었다 → 무력한 굴복. 짓밟힘을 당함.

    * 날이 흐려서 → 억압하는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현실

    *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 겁을 먹고 미리 굴복함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민중의 각성.  억압을 뚫고 저항하는 행위

            나약한 존재의 의미를 지닌 풀이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전환되는 계기가 표현됨.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풀의 모습으로 전환되는 부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풀의 넉넉함과 너그러움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현재의 상황을 표현한 구절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현실인식

    * 풀뿌리 → 민중을 억누르는 더욱 가혹한 억압과 그 억압을 뚫고 일어서는 더욱 거센 저항의 몸짓을 연상케 하는 표현임.

 

주제 : 민중의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풀의 수동성(나약함)

◆ 2연 : 풀의 능동성(강인함)

◆ 3연 : 풀의 강인한 생명력(의지력)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풀'은 김수영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시다. 때문에 그의 시세계가 이 시에 축약되어 있는 것으로 보려는, 그럼으로써 '풀/바람'의 암호를 풀려는 노력은 계속 있어 왔다. 풀은 여리고 상처받기 쉽지만, 동시에 어떤 힘에 의해서도 죽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이다. 김수영의 시세계 전체를 볼 때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우리는 바람이 불고, 풀은 그에 따라 흔들리기만 한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는 시인의 발언은, 풀/바람이라는 대립구도로 짜여진 이 시에서, 모든 서술어(눕는다, 울었다, 누웠다, 일어난다, 웃는다)의 주체가 풀이라는 데서부터 잘 드러난다.

풀과 바람의 싸움은 이 세상에 있는 연약한 민중들의 굳센 생명력과 그것을 억누르고 괴롭히려는 세력의 싸움인 것이다. 이 싸움을 노래하면서 시인은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생명의 끈질김이야말로 어떤 불의한 외부의 억압도 이겨내는 힘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에서 역사의 흐름이 비관적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이 시는 아주 일상적인 자연물인 풀과 바람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한 것이다.

시인이 보기에 풀은 자신의 삶과 생명력을,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다. 좁은 땅에 뿌리박고 지루한 삶을 견디며 자유로운 바람에 희롱당하는 것 같지만, 기실 풀의 생명력은 무엇보다도 강인하다. 그것은 자기 삶을 훌륭하게 견뎌낸다. 때로 그것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먼저 일어나는 예언자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쓰러졌을 때 먼저 일어나고 울 때 먼저 웃는 인고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시는 김수영의 참여 시인으로서의 면목을 엿보게 한 작품이다. 시인이 참여시의 옹호자로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대목은 단순하게 사회 현실을 고발하고 그 사회의 모순 구조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포괄적이고 정교화 되어 있다. 시인은 통제된 질서보다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돈이 시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 더욱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시라는 형식을 통해 더 많은 자유의 획득을 부르짖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38선을 뚫는 힘이 되고,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힘이 된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이런 시의 축적을 통해 진정한 민족의 역사적 기점이 이룩되는 것이다. 그는 이 점에서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규정했다.

 

■ 더 읽을거리    - 김상욱 -

짧고 서정적인 이 한 편의 시는 지금껏 우리 시가 이룬 가장 높은 봉우리 중의 하나이다. 쓰여진 언어도 모국어의 기초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만으로 채워져 있으며, 형식 또한 전통적인 서정시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풀, 바람, 비라는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자연현상을 눕다, 일어나다, 웃다, 울다 등 흔히 쓰이는 동사의 현재형으로 진행함으로써 꿈틀거리는 힘을 당차게 얻어내고 있다. 눕고 일어나는 반복적인 동작 속에서 섬세한 묘사는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풀과 바람이 지니고 있는 폭넓은 상징적 의미로 인해 이 시는 그 어떤 시보다 넓고 깊은 의미를 지닌 채 우리의 정서에 다가오고 있다.

이 시는 보는 눈에 따라서는 단순히 바람에 풀이 눕고 일어서는 풍경에 대한 시적 형상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수영의 시는 초기에 매달려왔던 소시민적 삶에 대한 치열한 자기비판에서 시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자각으로, 마침내 역사에 몸담음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그의 시적 세계와 함께 바람과 풀이 서로 엮어내는 대립적인 정황은 이 시를 이 땅, 이 시대의 진정한 주인인 민중의 삶에 대한 형상화로 읽어야 마땅하다.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기어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의 형상은 끊임없이 쓰러지나 옹골찬 고개짓으로 다시금 몸을 바투는 민중의 거센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은 김수영의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다른 형식으로 확인된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인이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 쓴 시는 내용에도 형식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로우며, 어떤 그럴싸한 거대한 것에 기대임 없이도 민족과 인류의 문화에 공헌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수영의 '풀' 이후 조국의 산천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은 연약하나 그 강인한 생명력에 어울리는 정당한 사랑과 애정을 받으며 더욱 푸르게 바람에 눕고 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김수영의 시와 산문은 자신의 얼굴과 삼위일체가 되어 김수영이란 한 시인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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