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을 닦으며
-공초(供招)14

                                                                              - 허형만 -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였던 뽀오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시집 <공초>(1988)-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자아성찰적, 독백적

표현

* 일상적 행위에서 반성과 성찰의 계기를 찾음.

* 고백적 어조를 통해 화자의 치열한 자기반성적 태도를 드러냄.

일상적이고 구체적 대상인 '녹'을 통해 '과거의 부끄러운 삶'을 성찰함.

역사적 소재인 '전봉준 공초'를 끌어들여 화자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새로 이사를 와서 → 새로운 삶의 시작이자 반성의 계기가 됨.

    * 흑갈빛 대문의 녹 →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하는 매개체

    * 지독한 녹 → 세월의 흐름 속에 켜켜이 쌓인 부끄럽고 죄스러운 삶의 자취, 흔적

    * 부끄럽고 죄스러워 → 안주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

    * 대문의 녹을 닦으며 → 반성과 성찰의 노력

    *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

       → 지독한 녹 = 청산해야 할 민족의 역사와 자신의 부끄럽고 죄스러운 과거의 삶

    *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 지워지지 않고 뚜렷이 남아 있는(추상적 대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함.)

    * 바다 →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자 시련과 역경의 삶

    *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 힘겨운 삶을 견뎌 내려는 미약한 존재의 몸부림

    * 수많은 불면의 촉수 → 부끄러움에 대한 고뇌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시각화함.

    * 노을 앞에서 ~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 부끄럽게 살아온 삶 속에서 순수한 사랑까지 녹이 슬었음

    *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 문지르고 있었다. → 회한으로 가득찬 삶에 대한 치열하고 적극적인 자기반성

    * 공초 → 조선시대 형사 사건에서 죄인을 심문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 여기서는 전봉준의 공초 기록

 

제재 : 녹(삶의 부정성, 삶의 부끄러움)

화자 : 녹이 슨 대문을 닦는 행위를 통해 부끄럽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있음.

주제으로 가득 찬 부끄러운 삶에 대한 자기 반성과 새 삶의 의지

[시상의 흐름(짜임)]

◆ 1 ~ 3행 : 새로 이사를 와서 대문의 녹이 더럽다고 느낌.

◆ 4 ~ 6행 : 화자의 지나온 삶에도 녹이 슬어 있음을 생각함.

◆ 7 ~ 17행 : 녹을 통해 바라본 화자의 깊숙한 내면

◆ 18 ~ 19행 : 치열한 성찰과 자기 반성의 의지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65편으로 이루어진 공초 연작시 중의 하나이다. 대문에 슨 녹은 부끄럽게 살아온 화자의 삶을 형상화한 것으로 화자는 녹이 슨 대문을 닦는 행위를 통해 더럽혀진 자신의 인생을 반성하고 있다.

부제인 '공초'는 조선시대 형사 사건에서 죄인을 심문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죄인을 심문하는 것을 취초(取招), 자백을 받는 것을 봉초(捧招), 두 번 이상 심문하는 것을 갱초(更招), 죄상을 사실대로 진술하는 것을 직초(直招), 심문에 대하여 구술로 답변한 내용을 공사(供辭) 또는 초사(招辭)라 하고, 이 모든 것을 통틀어 '공초(供招)'라고 이른다. 공초의 경우 전문을 기록하기보다는 요약하여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에서의 '공초'는 전봉준의 공초 기록을 의미한다. 시인에게 전봉준의 공초는 민족의 비극적 역사와 이에 대항한 치열한 투쟁을 의미한다. 이런 공초를 떠올리며 시인은 대문의 녹을 닦는 화자를 등장시켜 자신과 민족의 삶의 현실을 치열하게 반성하고 있다.

공간의 변화가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음을, 이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외부와 내면을 연결시킬 수 있는 소재를 등장시켰고, 구체적 행위와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실천을 부각시켰다. 따라서 인식은 실천을, 실천은 다시 더 깊은 인식을 불러옴을 추리할 수 있다.

◆ 더 읽을 거리

이 작품은 모두 65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 '공초' 가운데 하나이다. '공초(供草)'는 조선 시대 형사 사건에서 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 '공초'는 동혁명의 주도자 전봉준의 공초 기록을 의미한다. 한말의 역사를 기술한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동학도를 비적(匪賊)이라 했고, 이후에도 동학란으로 규정했지만, 5 · 18 광주 항쟁이 일어나면서 그 동학은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한 걸음 역사 속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시인도 '공초'는 부패하고 무능했던 봉건 정부의 학정과 외세의 공공연한 침략으로 인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민중의 분연한 궐기를 증거한 역사의 기록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개인의 삶이 역사의 수레바퀴와 무관하지 않음을 인식하며 스스로를 성찰한다. 올바른 역사 인식을 통해 회한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대문에 낀 녹을 닦으면서 반성한다.

그때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하였던가. 비늘처럼 총총히 돋은 역사의 고비마다 그 정신과 동떨어진 곳에서 나의 보전과 안일만을 추구했던 건 아닐까. 언제 한번 혁명의 눈빛으로 세상과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더러는 부끄럽고 죄스럽기도 하는 것인가. 손가락이 부르터도록 온몸으로 녹을 문지르며 나를 반성하기는 해본 것일까. 몇 번 이사를 다니면서 집은 더 넓어지고 조명은 더욱 화려해졌지만 여전히 부정과 모순을 보지 못하고, 내 안의 녹을 외면한 채 수군대면서 공기에다 손가락질이나 해대는 건 아닐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