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르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초록 거미의 사랑>(2006)-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표현 : '몰랐다'와 '알았다'를 반복함으로써 화자의 내적 시련을 통한 성숙의 과정을 드러냄.

               역설적 표현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빈 의자 → 화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상대의 인고의 심정이 함축되어 있음

    * 빛 → 삶과 사랑의 희망

    *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 두 사람의 만남과 애정의 표현

    * 목덜미를 핥고 있는 → 진정한 사랑의 표현

    *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 원망의 표현

    *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 화자는 깊이 절망하는 때에 비로소 새로운 희망이 온다고 말함(역설적 표현)

    *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 관념(희망)의 구체적 형상화

 

화자 : 화자는 내적 시련을 통해 성숙의 변환 과정을 거치며, 깊이 절망할 때에 비로소 새로운 희망이

                        온다고 말함.

주제사랑과 삶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

[시상의 흐름(짜임)]

◆ 1연(1~9행) : 자신을 기다리던, 사랑했던 사람의 인고의 심정을 느낌.

◆ 1연(10~19행) : 진정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

◆ 1연(20~23행) : 희망은 절망의 희망임을 깨달음

◆ 2연 : '너'에 대한 진실한 사랑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 후, 후회와 절망 속에서 그 사랑의 애절함을 느끼며,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들로부터 의미를 발견한다. 이 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얻은 삶의 진실함에 대한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제18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으로 평론가의 평설을 들어보면,

"이 시는 얼마 전에 사별한 시인의 남편에게 전하는 추모의 시로 고백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상실 또는 부재로 말미암은 공백을 애닯아 한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상실 또는 부재로 말미암은 하나의 깨달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 깨달음은, 뺨이 빨간 사과의 성숙 뒤에는 '바람' 같은 자연의 힘, 또는 한 송이 꽃을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도록 보살피는, '꽃' 같은 생성의 힘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의 내용을 '꽃 속에 피는 꽃'이라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으로써 명명하였다. 그 깨달음은 시인에게 '의자'의 공백으로 아리게, 따갑게 소용돌이치는 '너'의 부재로부터 출발한다.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에서 시인은 남편을 'L.J.N'으로 호칭했다. 그 호칭으로 불린 인물은 아내 강은교와 <70년대> 동이을 결성하여 시작의 길을 나섰던 임정남이다. 젊은 시절의 그는 아내와 같은 길에 섰었던 만큼, 아내의 시에 자주 쓴소리를 쏟아놓기도 했었다. 그 점은 남편 - 아내 같은 가까운 사이에서도 극히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대학 동기이기도 한 그들은 같은 문학, 시인의 길을 걸었던 동지였으면서 연인이었고 동반자였다. 그들은 결혼 이후 아내의 생명을 건 긴 투병의 시간을 함께 겪어야 했고, 이른바 이상주의자였던 남편의 고초를 함께 겪기도 했다.

위와 같은 시인의 애정 곡선을 보면서 <초록 거미의 사랑>은 시인 강은교가 망부에게 보내는 추모시 몇 편을 담아낸, 곡진한 사랑을 그려낸 시집이다.

시 '너를 사랑한다'는 아마도 강은교의 시작 생애가 빚어낸 가장 큰 성과물의 하나로 평가하여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상찬의 뜻을 표하는 것은 그 시가 시인의 남편을 잃은 특수한 경우를 애닯게 그려낸 시이면서도, 또한 모든 사람, 목숨을 가진 모든 생물,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사에 두루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일반적 진실을 깊이 있게 그려낸 것으로도 부각된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시 '너를 사랑한다'는 시인 개인이 평생의 반려를 잃은, 특수한 아픔을 흐느낀 격조 놓은 연가, 애가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또한 그 시는, 모든 인간과 자연이 이룩한 성취에는 그 성취를 이루도록 보살핀 어떤 도움의 힘이 존재한다는 삶의 일반적 진실을 토로한 증도가(證道歌)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권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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