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끓이기

                                                                              - 정 양 -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 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비판적, 반성적, 성찰적, 상징적

표현 : 비판과 반성의 어조

              선인들의 글의 내용을 차용하여 화자 자신의 소시민성을 비판함.

              물을 끓이는 행위에 함축적 의미를 부여하여 화자의 의도를 전달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국수나 삶으려고 → 시 창작의 계기가 되는 행위

    * 끓어오르다 → '그릇의 물이 끓어서 올라오다'와 '어떤 감정이 솟구치다'의 중의적 의미의 표현

    *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대한 분노

    *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

        → 부조리한 현실에 불만을 터트린다고 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세상

    * 냄비 속 맹물

        → '맹물'은 원래 바보의 의미로 쓰이는 관용적 표현으로, 세상의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는 항거하지 못하고,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나양한 소시민을 상징함.

    * 혈식을 일삼는 ~ 열받게 한다

        → 정약용의 한시 '증문(憎蚊, 미운 모기)'을 인용한 부분

            이 시는 뱀이나 구렁이 같은 거대한 권력의 횡포에 대해서는 저항하지 못하고 말단 관리의 횡포에 대해서는 크게 반응하는 자신의 좁은 속마음을 자조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소시민적 기질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산은 그 허물이 결국은 사회 구조적 모순의 해결에 나서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반성하고 있다.

    * 모기 → 현실적 삶 속에서 작은 불편을 주는 대상, 말단 관리의 횡포

    * 호랑이, 구렁이 → 큰 억압을 초래하는 대상이나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상징, 거대한 권력의 횡포

    * 오물수거비 ~ 부끄럽던 →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인용한 부분

                                             화자 자신의 비겁한 소시민성을 비판함.

    *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 열받는 놈만 쑥스럽다.

         → 세상의 부정과 불의에 대해 분노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김.

    *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

         → 화자가 원하는 세상, 분노해야 할 것에 분노하고 그것이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상

    *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 택시, 아내, 담배, 모기, 미친 개는 사소한 것에 해당하고, 호랑이는 사회 구조적 모순에 해당함.

    *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 작은 것이건 큰 것이건  상관없이 분노해야 할 모든 대상

    *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

         → 화자가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 분노할 것에 대해 당당하게 분노할 줄 아는 모습

  

제재 : 물 끓이기

화자 : 자신에게 내재된 소시민성을 반성하고, 당당하게 끓어오를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희망함.

주제소시민성에 대한 반성과 현실 비판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끓어도 넘치지 않는 열 받은 냄비 속 맹물

◆ 2연 : 분노하는 사람만 우스워 보이는 세상

◆ 3연 : 끓어올라 넘쳐도 부끄럽지 않는 세상에 대한 소망

◆ 4연 : 당당하게 끓어올라 넘칠 줄 아는 삶에 대한 소망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화자는 끓는 물을 보면서 끓어오를 일이 많지만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을 비판하고 마음 놓고 끓어오르지 못하는 자신의 소시민성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나아가 마음 놓고 끓어오를 수 있는 세상과 당당하게 끓어오를 수 있는 자신을 소망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분노, 스스로의 소시민성에 대한 반성을 노래하고 있다. 흙탕물을 튀기고 간 택시, 부주의하게 문을 여닫는 아내, 좋아하는 담배를 팔지 않는 가게 주인 등에 대한 '끓음'이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화자는 그러한 현실 속의 '끓음'과 '열받음'이 다소 넘치더라도 부끄럽지 않고 쑥스럽지도 않은 당당한(당연한, 자연스러운) 세상을 꿈꾼다. 그 꿈은 4연에서 마음 놓고 끓어 넘치고 싶은 냄비 속의 맹물을 통해 압축적으로 제시된다. 화자는 작은 것들은 물론, 큰 것들(호랑이, 구렁이)에 대해서도 마음 놓고 끓어 넘치는, 또 그렇게 한껏 끓어올라도 당당한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끓어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참고, 겁이 많아 지레 몸부터 도사리고, 지은 죄가 많아 고개를 숙이고 다니며, 불의를 보고도 용기가 없어 외치지 못한다. 도대체 열받을 줄 모르고 살아간다. 언뜻 보면 모두 화평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며 사는 듯하다. 시인은 그래서 더 열받는다. '열받는다'는 신세대 언어를 이순(耳順)의 시인이 굳이 쓴 까닭은,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며 시인이 열받았다는 뜻이다. 격정없이 굴러가는 이 세상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다는 뜻이다.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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