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 대길이

                                                                              -고 은-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 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 아이 세상에 눈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때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 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들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

 

         -<만인보(萬人譜) 제1권>(1986)-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민중적, 존재론적, 토속적

표현

* 소박하고 친근한 이야기의 어투(~지요)를 통해 친근한 분위기를 형성함.

* 시상의 점층적 전개(외면적인 대길이의 모습 → 내면적인 모습)

* 토속적인 시어의 사용으로 향토적이고 민중적인 정서를 전달함.

* '대길이'의 말을 직접 인용하여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냄.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상머슴 → 일 잘 하는 장정 머슴

    * 멱 → 목의 앞쪽

    *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 근면한 성품

    *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과 의지가 굳은 사람.

             밝게 깨어서 남의 어둠을 비추어 주는 존재.

    * 가갸거겨, 장화홍련전 → 한글과 옛날 이야기책을 가리키는 대유법.

    *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 세속적(이성)인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 사려 깊고, 이상을 간직한 인물.

    *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 가난한 처지

    *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 모든 인간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주의 정신(시인의 사상의 핵심)

                  시적 현실의 실감과 진실성을 강화함.

    * 불빛 → 삶의 본보기이자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 존재, 삶의 나침반.

                  어릴 때의 우상이자 화자(어린 아이)에게 참된 삶의 의미를 일러준 존재.

 

제재 : 머슴 대길이, 진솔한 민중의 삶.

주제함께 사는 삶의 아름다움

◆ '대길이'의 인물형

    *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소외당한 인물

    * 삶의 원초적인 모습으로서 삶을 긍정하며 이겨 나가려는 전형적 인물

    * 천대 속에서도 꿋꿋하게 일하며, 남을 위해 넉넉한 마음을 갖고,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상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힘세고 근면한 대길이가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 준 일

◆ 2연 : 인격적이고 생각이 깊은 대길이

◆ 3연 : 가난하지만 남과 함께 사는 대길이

◆ 4연 : 나의 영원한 스승 대길이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만인보(시로 쓴 인물사전)'는 시인의 말대로 자신이 이 세상에 와서 알게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면서, 사람에 대한 끝없는 시적 탐구이자 이름없는 역사 행위라 할 수 있다. '만인보'는 특정 인물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 사는 이야기'로 실명시(實名詩)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시 가운데 이채를 띄는 것은, 시인에게 삶의 올바른 지향을 감동적으로 일깨워 준 사람들에 관한 몇 편의 '성장시'다.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인물은 '꿈'과 '모험'의 이미지로 각각 대표되는 아버지와 외삼촌이며, '세상에 대한 전율적 개안(開眼)'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인물로 이 '머슴 대길이'를 들 수 있다.

그는 단순히 한글을 깨우쳐 주어 '장화홍련전 비오듯' 읽게 해 준 인물에 머물지 않고,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 새우는 불빛'과도 같은 존재이며, '어둠에 빛나는 먹눈'으로 시각적인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 있다. 또한 화자의 직접적인 상대자는 '가지고 있으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이며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라는 인용은 시적 현실의 실감과 진실성을 강화한다. 여기서 대길이는 '함께 사는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몸소 가르쳐 준 인생의 큰 스승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함께 사는 삶'은 단지 인간 사이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터전인 대지에 모여사는 모든 사물에까지 속속들이 적용되는 매우 폭 넓은 개념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온전한 의미의 이 같은 인간주의야말로 '만인보'를 힘차게 관통하는 시인 정신의 저류이다.

'대길이'와 같은 머슴은 소외받고 박해받는 인물군에 속한다. 이들은 크게 보아 역사 과정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소외당한 인물들이지만, 삶을 긍정하고 이겨 나가려는 민족적인 삶, 민중적인 삶의 원초적인 모습으로서 전형성을 지닌다. 천대받는 머슴살이 속에서도 꿋꿋하게 일하며, 남을 위해 넉넉한 마음을 갖고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상이야말로 이 땅, 수난의 역사를 이겨온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 [만인보]에 대해서

고은 씨는 그의 대표적인 연작시 <만인보>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에 의하여 조작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 제7호 특별 감방에 수감되었을 때 구상했다고 한다. 손 바닥만한 창 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그 무덤과 같은 방에서 그의 의식은 옛일의 회고와 추억을 자신의 삶의 유일한 탈출구로 삼았다. 만일 살아서 나간다면 지나간 삶의 길목에서 마주친 건강하고 올곧은 민중들의 모습을 시로써 되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986년에 실현된다. 그 사이 시인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은 뒤 사면, 석방되며 결혼하고 자식을 본다.

지난 86년과 88년 세 차례에 걸쳐 한 번에 3권씩, 9권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총 15권이 나온 <만인보>는 시인의 유년 시절 고향 사람들의 개성적이고 소박하며 진실된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부터 출발한다. 「굶는 집」에서 그려진 것은 "배고파서 / 하루 이틀 꼬박 굶고 / 물배만 채워 / 서로 얼굴 보고 앉았는" 궁상과 허기의 삶이지만, 민중들의 힘찬 생명력에 대한 시인의 굳은 믿음이 있기에 밝은 빛깔로 채색된다.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로부터 시작한 <만인보>의 여정은 시인의 가족과 친척, 고향 사람들을 두루 훑은 다음, 시인 자신의 편력에 따라서 이 땅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실제로 「서시」에 이어지는 「할어버지」에서는 가난하고 식솔을 굶기는 할아버지, 술마시면 인사불성 쓰러지는 할아버지, 쓰러지면 아들 셋이 떠메고 오는 할아버지. 그러나 그에게도 오기가 있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한 정신을 자손들에게 전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역할을 다한 것이 될 것이다. 밖으로는 한없이 허물어지지만 안으로는 튼튼한 사상의 뼈를 가진 그들은 자손들에게 풍요로운 물질보다 귀중한 자본이자 자원이었다.

「머슴 대길이」에서는 어느 시대에나 나라의 주인은 민중이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권력층의 권세가 제 아무리 서릿발 같은 시대에도 엄연히 주인은 민중이었으므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민중이 이 땅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머슴 대길이는 핍박받은 민중, 무식한 민중, 힘 없는 풀잎 같은 민중이었지만 가장 힘있게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었고, 다음 세대의 민중에게는 산 교육자였던 것이다. 어쨌든 <만인보>는 이 땅 위에 뿌리 박고 사는 우리 민중들의 건강하고 질긴 삶의 본질을 민족의 역사 속에 작가의 독특한 필치와 기법으로 야무지고 진솔하게 담아 내고 있으며, 여기에 민중시인 고은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 더 읽을거리

<만인보>는 연작의 원리를 시적 형상성을 위해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대작이다. 이 작품은 시적 테마의 확대와 심화를 위해 "서정시의 형식을 연작의 기법으로 확장"하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잇따라 읽으면서 인간과 그 삶의 현실에 대해 시인이 지니고 있는 관심의 폭과 깊이에 항상 감동한다. 그는 서정의 세계가 포괄할 수 있는 삶의 모든 가능성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민중의 다양한 삶과 그 총체적인 인식을 시적 테마로 다루고 있는 <만인보>야말로 삶의 언어 자체라고 할 수 있다는 <만인보>의 시적 상상력을 지탱하고 있는 두 가지 축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축은 언제나 동시적으로 나타나며 동시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욕망의 언어를 지향하고, 다른 하나는 운명의 언어를 지향한다. 삶의 욕망과 운명 사이에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감싸잡는 힘이 고은의 시적 상상력이다.

<만인보>의 시들은 서정적 양식의  범주를 넘나들 정도로 자유롭다. 시의 언어는 삶의 한복판을 떠나는 법이 없고 시인은 그 언어를 통해 삶의 현실에 집착을 드러낸다. 언제나 자기 내면에서 외적 현실을 향해 인식의 화살을 던지고 있다. 과녘에 꽂히는 화살처럼 시의 언어는 간명하며 그 느낌이 절실하다. 경험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의 언어를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나는 <만인보>의 시들을 읽으면서 그렇게 언어를 부리는 힘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다시 묻는다. 초월의 언어와 감성의 반응을 얼마든지 용인하고 있는 시에서 고은은 오히려 그 주관성의 가치들을 모두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제쯤이나 이런 언어로부터의 허허로운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출처:권영민(서울대), 『동아일보』1995.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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