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풀잎

                                                                              - 유경환 -

                                                       

 

 

 

마른 풀잎 속엔

엽맥(葉脈)의 질긴 기도가 남아 있다.

끊기지 않던 가녀린 목숨 소리

하늘에 내뿜던 숨 멈춘 채

멈춘 그대로 버리지 못한 소망을

아름답게 날려 가며,

세우던 고개는 떨어뜨렸으나

짙푸름으로 적시던 기다림

당신의 뜻에 발돋움하자던

춤, 그 몸짓을 모르리라.

바람에 시달리고 짐승에 밟혔어도

어떻게 지금부터 시야에서

사라지는가를

하늘이 하얗게 흙을 덮어 내리면

알리라.

끝바람에 몸 부서져 바서지는 것도

온몸 소리내며 태우는 불꽃

와 주지 않아도 닿지 않아도

들판 가득히 일어서는 영혼과

그리고 어딘가에 묻혀 거름이 되는 것

봄으로 미루는 부활을

마른 풀잎 속엔

기억해야 할 기도가 남아 있음을

 

 

 

당신 한 분이라도

당신 한 분이라도.

 

    -<노래로 가는 배>(2004)-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성찰적, 구도적

표현 : 자연물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유추함.

              경건하고 구도적인 어조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엽맥 → 잎맥. 잎몸 안에 평행선이나 그물 모양으로 뻗어 있는 관다발

* 엽맥의 질긴 기도 → 잎이 삭거나 부서져 엽맥만 남은 형상으로, '버리지 못한 소망'을 뜻함.

* 끊기지 않던 가녀린 목숨소리 → 쉽게 끊어지지 않던 마른 풀잎의 목숨소리

* 하늘에 내뿜던 숨 멈춘 채 → 하늘을 향해 내뿜던 숨소리를 멈춘 채

* 버리지 못한 소망 → 목숨(생명)에 대한 소망

* 아름답게 날려 가며

   → 조락(초목 따위가 시들어서 떨어지는 것)하는 모습

       마른 풀잎이 그저 무의미하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생명에 대한 소망을 품고 떨어지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으며, 그러한 관점이 '춤, 그 몸짓'이라는 표현을 낳게 됨.

* 세우던 고개 → 시들어 떨어지기 전의 풀잎의 모습

* 짙푸름으로 적시던 기다림 → 한때(여름철)는 자신의 온몸을 짙푸름으로 적시며 뭔가를 기다렸고

* 당신의 뜻에 발돋움하자던 →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기 위해, 하늘의 푸르름을 닮고 싶어 하던

* 춤, 그 몸짓 → 잎의 조락

* 춤, 그 몸짓을 모르리라. → 시들어 떨어지던 그 뜻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 하늘에 ~ 춤, 그 몸짓을 모르리라 → 풀잎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조락과 목숨의 소멸)

* 바람에 시달리고 짐승에 밟혔어도 → 시든 풀잎이 바람에 상처를 입고 짐승들의 발길에 짓밟히지만

* 알리라 → 풀잎이 말라서 시들어야 하는(자연의 섭리) 뜻을 알게 될 것이다.

* 끝바람에 ~ 거름이 되는 것 →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는 풀잎의 구체적 과정을 표현함.

                                               목숨이 다 한 마른 풀잎의 운명을 구체적 과정으로 표현함.

* 끝바람에 몸 부서져 바서지는 것도 → 마지막으로 불어대는 바람에 풀잎의 몸이 부서져 산산조각이 남.

* 온몸 소리내며 태우는 불꽃 → 자신의 몸은 태우면서 밝은 빛을 내는 불꽃 같은 존재가 됨.

* 와 주지 않아도 닿지 않아도 / 들판 가득히 일어서는 영혼과 / 그리고 어딘가에 묻혀 거름이 되는 것

   → 아무도 와 주지 않고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아도 봄이 되면 들판 가득히 일어날 새로운 생명과 함께 어딘가에 묻혀 거름이 되는 것

* 온몸 소리내며 태우는 불꽃, 들판 가득히 일어서는 영혼, 어딘가에 묻히는 거름

   → 목숨이 다 한 풀잎의 운명.  부서져서 거름이 되는 풀잎

* 봄으로 미루는 부활 → 마른 풀잎의 소망과 기도의 실체(시상이 집약된 부분)

* 기억해야 할 기도 → 봄으로 미루는 부활에 대한 기원

* 당신 한 분이라도 / 당신 한 분이라도 → '알리라'의 주어.  마른 풀잎의 조락과 죽음의 의미를 아는 존재

 

제재 : 마른 풀잎(조락과 소멸의 이미지,  현재의 소멸을 통해 미래의 부활을 기약하는 존재)

              과거(짙푸름) → 현재(마른 풀잎, 춤 그 몸짓, 불꽃, 영혼, 거름) → 미래(봄의 부활)

 

주제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

           자연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인생의 참된 의미

[시상의 흐름(짜임)]

◆ 1~10행 : 바람에 날리는 마른 풀잎의 아름다움

◆ 11~21행 : 부서지며 거름이 되는 마른 풀잎

◆ 22~25행 : 봄의 부활을 소망하는 마른 풀잎의 기도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가을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서 자연 현상에 인생론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작품이다. 비록 아름답고 화려하고 짙푸르던 봄과 여름의 모습은 사라져 간다 해도 당신(조물주나 절대자)의 섭리에 순응하며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하여 거름이 되어 가는 낙엽의 모습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생론적 교훈을 터득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마른 풀잎'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그것은 겉보기엔 숨을 멈춘 듯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새로운 성취를 위한 몸짓을 하면서 '질긴 기도'처럼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들어 가는 마른 풀잎은 겨울이 되어 찬 바람에 시달리고 짐승들에게 짓밟히는 수모와 시련을 당하겠지만, 그것을 오히려 숙명으로 받아들여 사라지는 법을 알고 있다. 나중에 흰 눈이 내리는 날이 되면,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바람에 몸 부서져 소멸함으로써 새로운 생명 탄생을 기약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마른 풀잎이 어딘가에 묻혀 거름이 되었다가 순리대로 찾아오는 봄이 되면 다시 부활을 하는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참다운 지혜임을 깨달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마른 풀잎 속엔 당신 한 분이라도 기억해야 할 기도, 곧 깊은 진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른 풀잎은 생명을 잃고 사라져 가는 가을의 자연의 모습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이 마른 풀잎에서 생명의 소멸이 아닌 부활을 감지해 낸다. 풀잎의 잎맥은 생명의 탄생과 성장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는 생명에 대한 강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풀잎은 그 소망을 간직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봄과 그 때의 부활을 위해 기꺼이 소멸하게 된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풀잎의 모습에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고 있다.

 

유경환(1936 ~ 2007. 6. 20.)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이며, 황해도 장연 출신인 유경환 씨는 '산노을', '혼자 선 나무' 등 50여 권의 시집을 통해 평자들로부터 '간결한 이미지로 압축한 맑고 따스한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미 10대 때부터 소년 세계, 새벗, 학원 같은 잡지를 통해 문명(文名)을 날렸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시절에 조선일보 신춘 문예와 '현대문학' 추천을 거쳐 시단에 데뷔했다.

유경환씨는 또 월간 '사상계' 기자로 시작, 사상계 편집부장, 조선일보 문화부장, 소년 조선일보 주간, 조선일보 논설위원 겸 시사편찬실장, 문화일보 논설위원 등 40년 동안 언론계에 몸담았다. 언론인과 문인 생활을 모두 한 까닭에 2003년 시집 <낙산사 가는 길3>으로 제15회 지용 문학상을 받았을 때, "이제야 문인으로서 이력서를 쓸 자신이 생겼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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