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정

                                                               - 박목월 -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경상도의 가랑잎>(1968)-

 

해           설

[개관정리]

성격 : 독백적, 상징적

중요시구

    * 지상 → 삶의 공간(현실세계)

    * 눈과 얼음의 길 → 얼음판을 걷듯이 아슬아슬하기만 한 고달픈 현실

주제 :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고달픔·연민과 가족에 대한 애정

[시상의 전개 방식]

○ 1연 : 현관에 놓인 아홉 켤레의 신발

○ 2연 : 고달픈 현실 속에서도 느껴지는 가족에 대한 애정

○ 3연 : 고달픈 삶 속에서 느끼는 가장으로서의 연민의 자의식

○ 4연 : 아버지로서의 서글픔 및 가족을 통한 위안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의 화자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으나 또한 고달픈 현실 생활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눈, 얼음, 연민, 굴욕, 굶주림, 추위' 등 힘겨운 현실을 드러내는 부정적 이미지의 시어와 '귀염둥아, 미소, 강아지' 등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 드러나는 시어가 교차되면서 생계를 겨우 유지해 가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 그리고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대조적 시어의 배치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비애와 행복이 섞여 있는 현실적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함으로써 서글픈 정감에 젖어 들게 한다.

 

◆ 더 읽을거리 :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김상욱 저-

이 시에는 오직 자신의 가족들만이 오손도손 잘 살고 있다. 겨울을 서성이는 다른 이웃을 위한 아랫목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만이, 막내에서 아버지까지 오직 그들만이 똘똘 뭉쳐 있다. 비록 아버지는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왔다 하나 그것은 자신의 고난을 과장하는 허세이기 십상이다. 어느 아버진들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겠는가?

흔히들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 순수하다고 말한다. 알전등이 밝혀진 가정을 노래하는 것도 순수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순수를 잘 들추어보면 역사니 사회니 이웃을 노래하지 않으면, 과연 무엇이 남을는지? 남는 것은 오직 고통스런 현실의 외면, 천박한 가족 이기주의, 무미건조한 형식주의, 욕망에 가득찬 사랑타령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계속, 줄곧 이들은 스스로를 순수하다고 주장한다. 마치 '순 진짜 원조 마포갈비 본점'처럼.

이미 그 마포갈비는 주인이 늙고 병들어 문을 닫고 말았는데, 빈껍데기들만이 모여 서로 옛날의 그집이라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 땅에서 순수한 것은 자신의 노동으로 땀흘리며 일하는 사람들과 그렇게 일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뿐인데, 노동을 멀찍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오직 자신들만이 기름냄새, 농약냄새 나지 않는 순수한 족속이라고 난 체를 하고 있는 꼴이다. 순수한 진짜 원조 마포갈비 본점의 주인들, 그대들은 구린 새우젓만 더욱 썩히지 말고 제발 그 간판짝들을 걷어치우고, 다른 일터로 나가시길.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고통의 한가운데로. 예전의 다른 가게의 영광에 기대여 땀흘리지 않고 돈 벌 생각하지 말고, 직접 부대껴서 흘린 땀만큼 일용할 양식을 얻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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