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해ㅅ살 피어 이윽한 후,
머흘머흘 골을 옴기는 구름.
길경(桔梗) 꽃봉오리 흔들려 씻기우고.
차돌부리 촉 촉 죽순(竹筍) 돋듯.
물소리에 이가 시리다.
앉음새 갈히여 양지 쪽에 쪼그리고,
서러운 새 되어 흰 밥알을 쫏다. |
|
|
|
-<문장>(1941)- |
|
해 설 |
|||
[개관 정리] ◆ 성격 : 감각적, 관조적, 묘사적 ◆ 특성 ① 절제된 표현을 통해 시적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② 자아를 감추고 풍경을 베끼듯이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③ 현실에서 어느 정도 비껴선 관조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④ 감각적 이미지와 의태어의 적절한 활용으로 아침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⑤ 1연 2행의 규칙적인 배열, 애상적이고 관조적인 어조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길경 → 도라지 * 갈히여 → 가리어 * 머흘머흘 → 구름이 뭉게뭉게 낀 모양(의태어) * 이윽한 → '이슥하다'의 방언, 시간이 꽤 지난 후 * 서러운 새 → 화자의 내면을 표현함. * 흰 밥알 → 화자의 초라한 처지를 나타냄.
◆ 제재 : 비 온 뒤 아침 풍경 ◆ 주제 : 비 온 뒤 아침 풍경을 바라보는 화자의 서글픈 심정 |
|||
[시상의 흐름(짜임)] ◆ 1~2연 : 외적 상황(원경) -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함. ◆ 3~4연 : 외적 상황(근경) - 대상의 동적 이미지 ◆ 5~7연 : 화자 자신 |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시인의 심경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폭압적 현실에 저항할 힘이 없는 절망적 상황에 놓인 화자의 초라함과 서글픔이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문장> 22호(1941. 1. 114~115쪽)에 발표하였으며, 『백록담』에 수록되었다. 이 시는 전체 7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연에서 5연까지는 아침의 정경을 인상적으로 묘사하여 하나의 시적 공간을 형성한다. 햇살이 피어오르고 구름이 이리저리 몰린다. 도라지 꽃봉오리가 바람에 스친다. 차돌부리가 마치 죽순이 돋듯 땅 위로 드러나 보인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소리가 들린다. 아침 햇살,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가벼이 흔들리는 도라지꽃, 죽순처럼 돋아 보이는 차돌부리, 차가운 물소리는 모두 아침이라는 시적 공간을 형성하는 감각적인 이미지들이다. 제6연과 7연에서는 이 시적 공간에 정물처럼 새 한 마리가 배치된다. 흰 밥알을 쪼는 '서러운 새'이다. 물론 이 새는 화자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 시인 정지용 (1) 생애 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게리 40번지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젊어서 중국에서 배운 한의술로 약재상을 경영하였으며, 그 덕택으로 어릴 때는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에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로 집과 재산을 잃어 버리고 한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9세 때 인근의 옥천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열세 살에 졸업하였다. 졸업하기 일 년 전에 충북 영동에 살던 송재숙과 혼례를 올렸다. 17세에 서울의 휘문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 성적은 전체 수석을 할 정도로 좋았으며, 이때까지도 집안 형편이 그리 나아지지 않아서 교비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함께 문학에 뜻을 둔 동급생 박팔양 등 8명이 모여서 '요람' 동인을 결성하고 동인지 <요람>을 등사하여 10여 호까지 만들었다. 휘문고보 2학년 때 3 · 1 운동이 일어나서 가을까지 수업을 받지 못했으며, 교내 문제로 시작된 휘문 사태의 주동으로 지목 받아서 무기 정학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에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투고하여 실리게 되었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23년 4월에 일본 교토의 동지사대학에 입학하였다. 그의 대학 학비는 휘문고보에서 부담했다고 한다. 대학에 다니면서 계속 시를 쓰다가 1926년부터 <학조> 창간호와 <신민>, <문예시대>에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지광> 등에 주로 시를 발표하였다. 1929년에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휘문고보의 영어과 교사가 되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시인으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1930년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과 '시문학' 동인을 결성하고 <시문학>지를 발간하였다. 1939년에 이태준과 함께 <문장>의 편집과 독자 추천시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의 손을 거쳐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의 신인들이 <문장>의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1941년에 두 번째 시집 <백록담>을 발간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0월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46~1947년에 <경향신문> 주필을 맡아서 당시의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1948년에는 은거하여 서예를 하면서 지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정치 보위대로 끌려가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정지용의 행방은 공식적인 기록과 자료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전쟁 후 정지용이 월북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한국 근대시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은 지워져야 했으며, 그의 가족들도 월북자의 가족으로 분류되어 많은 고통을 겪었다. 1988년 정부의 납 · 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 조치와 함께 정지용의 이름과 문학도 복권되었지만 그의 월북과 사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남한에 살고 있는 정지용의 가족들은 그의 월북설이 허위 기사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2005년 3월 11일 방영된 KBS 1TV '인물 현대사 : 시대에 갇힌 천재시인-정지용'에서 정지용의 장남 정구관 씨가 월북설이 어떻게 조작된 것인지를 실증 자료를 들어서 밝히고 있다. 실제로 2001년 3차 이산가족 상봉 때 북한에 살던 정지용의 셋째아들이 상봉대상자에 아버지를 포함시킴으로써 그의 월북설에 대한 의혹을 더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전쟁 때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평양 감옥으로 이감된 후 1950년에 폭사(爆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작품 경향 그의 문학세계는 대략 3가지로 구분될 수 있으며, 섬세한 이미지 구사와 언어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보여준 것이 특징이다. 첫째는 1926~33년으로,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보인 모더니즘 계열의 시이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23년 경이었다고 하나, 발표되기는 1926년 <학조> 6월호에 실린 시 「카페 프란스」「마음의 일기에서」등에서 시작된다. 이어 이미지 시의 면모를 보여준「바다」(조선지광, 1927. 2)와「향수」(조선지광, 1927. 3)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이런 경향은 <시문학>의 향토적 정서, 섬세한 이미지 표현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 시기의 시들은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면서도 순수 서정시의 가능성을 아울러 보여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향수」1연)와 같이 곱게 다듬어진 우리말의 언어적 세련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형상화하고 있다. 둘째는 <가톨릭 청년>에 관여하던 1933~35년에 보여준 종교적인 시이다. 이 시기에는 절대적인 신에게 관심을 갖고 시대적 상황에 무력한 자신의 정신적 허기와 갈증을 신앙을 통해 메우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갈수록 열악해지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시인의 정신적 방황을 드러내는 것이며, 특히「나무」(가톨릭 청년, 1934. 3)의 "얼굴이 바로 푸른 하늘을 우러렀기에 / 발이 항상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한갓 나무만도 못한 욕되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참회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셋째는 1941년까지 발표한 동양적 전통과 정신에 바탕을 둔 산수시이다. 이 시기에 그는 동양적 정신과 산수의 풍경을 그리는 여행을 떠남으로써, 시적 소재가 「바다」(시원, 1935. 12)를 거쳐「옥류동」(조광, 1937. 11),「비로봉」(청색지, 1938. 8),「장수산」(문장, 1939. 3),「백록담」(문장, 1939. 4)으로 바뀐다. 바다를 거쳐 산으로 오르는 이런 시세계의 변모는 즉 일제강점기 말의 암울한 현실에 구애됨이 없이 자연에 몰입하고자 하는 시인의 정신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시어의 조탁과 섬세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독특한 시세계를 표현했는데, 이러한 성격은 한국의 서정시를 계승한 것으로서 이후 제자격인 청록파의 시세계로 이어졌다. 100여 편이 넘는 시 외에도 소설 「3인」(서광, 1919. 11)과 평론「조선시의 반성」(문장, 1948. 10),「문학으로 사는 길」(세계일보, 1949. 1.) 등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지용시선>(1946)과, 이론서로 <문학독본>(1948), <산문>(1949) 등이 있고, 1988년 민음사에서 <정지용선집>을 펴냈다. |
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