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눈

                                                                              -박용래-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월간문학>(1966)-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감각적, 관조적, 반복적

특성

① 축약과 반복을 통해 시상을 단순화함.

② 고유어만을 사용하여 향토성을 살림.

③ 근경에서 원경으로 시선이 이동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1행 → 겨울 저녁 눈발이 날리는 주막집의 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 2행 → 마굿간에 매어 있는 조랑말의 수선스런 움직임을 나타낸다.

* 3행 → 눈이 내리는 저녁, 말에게 먹일 여물을 써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 4행 → 빈터에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눈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주막의 모습에 대한 근경 묘사가 변두리 빈터라는 원경 묘사로 시선이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제재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풍경

주제눈 내리는 겨울 저녁 나그네의 애상적 정서

[시상의 흐름(짜임)]

◆ 1행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주막집

◆ 2행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마굿간

◆ 3행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여물 써는 풍경

◆ 4행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변두리 빈터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이미지즘 수법의 시들을 통해 생략과 여백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해 왔던 시인의 독특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시인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말집 호롱불', '조랑말 발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 등 네 장면의 제시 이외에는 동일한 구문의 4회 반복에 불과한 이 시는, '저녁 눈'을 통해 가려져 있는 것, 소외되어 있는 것, 그리고 잊고 있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효과를 보여 준다.

먼저 시인은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리듬의 효과와 함께 유랑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저녁 눈'은 물질적 현상으로 언젠가는 없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이다. 그와 함께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사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 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이제 그것들 위로 '붐비듯이' 늦은 저녁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애상적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사물들과 결합되어 더욱 을씨년스러운 겨울 저녁 풍경을 한 장의 사진처럼 묘사하고 있을 뿐,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4행시 형식의 행간 속에 그 감정이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문명의 거센 물결에 밀려 머지 않아 사라져 버릴 토속적 세계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눈발'로 환치되어 '붐비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의도적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붐비다'로 표현함으로써 적막한 분위기와 '소멸'의 이미지를 역동성의 눈발로 상쇄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은 그로 하여금 화려한 문명의 도시보다는 밀려나 있는 변두리, 즉 향토의 사물 위에 머물게 한다. 시간적 배경으로 제시된 '늦은 저녁'이라는 하강적 이미지와 '눈발'이라는 소멸의 이미지가 한 곳에 어우러져 이루어 낸 '저녁 눈'은 공간적 배경이 되는, 같은 이미지의 네 가지 사물들과 결합됨으로써 이 작품을 텅 빈 아름다움의 시로 만들어주고 있다.

 

◆ '저녁 눈'의 시적 화자의 태도

한 해가 저무는 겨울, 그리고 하루의 바쁜 일상을 마감하는 저녁, 온 세상을 흰 색으로 뒤덮으며 내리는 '눈발'은 나그네(화자)의 외로움, 회한, 애상을 자아내는 매개물이다. 그런데 화자는 붐비는 눈발 속에서 지나온 한평생을 돌아보고 감상에 젖기보다 무덤덤히 눈발을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화자의 눈에 비친 주막의 풍경은 바쁜 듯하지만 전혀 바쁘지 않다. 오히려 늦은 저녁의 함박눈을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더욱 강하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붐비다'란 말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에도 전혀 바쁘다는 느낌이 없이 평화롭고 적막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이런 한가함 혹은 여유는 전적으로 화자의 관조적이고 자연친화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 작품 내용의 서사화

겨울에 여행을 떠난 화자는 저녁 때가 되어 허름한 주막에 찾아든다. 저녁을 먹고 우연히 바깥을 바라보는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한가하던 주막은 갑자기 활기를 띠고 바빠진다. 주막임을 표시하는 희미한 호롱불과 마굿간에 매어 있는 조랑말의 수선스런 움직임, 온종일 짐을 지거나 주인들을 등에 태워 고단하고 시장할 조랑말을 위해 부산하게 여물을 준비하는 주인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화자는 분주함 속의 한가함 혹은 한가함 속의 분주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인적이 끊긴 허허벌판에서 휘몰아치는 눈발을 묘사한 마지막 연은 날이 새면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할 나그네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

마지막 연에 보이는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에 나타난 눈발의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다음 변두리 빈터에 붐비는 눈발이란 무엇일까? 밤이 깊어지면 다 늦은 저녁 때 귀가한 사람은 물론 여물을 먹는 조랑말도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결국 빈터는 고단한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가장자리일 것이며 그 빈터 속으로 내리는 눈발에는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푸근하게 껴안는 따뜻한 시인의 시선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선명한 형태로 선명하게 표현된 것이 아니라 은근하게 나타나 있다.

 

◆ 박용래의 시 세계

박용래는 향토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세계를 순수하게 그려 냈는데, 그의 향토적 정서와 아름다움의 추구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과 외경심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의 시세계가 지닌 특징은 자연의 정경과 시인의 정감을 조화시켜 토속적인 서정을 구현한다는 점에 있다. 일체의 인위적인 조작과 기교적인 언어를 배제한 채 근원적인 향토애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소박하고 맑은 심성이 근원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되, 그 정서를 시적으로 여과시켜 시어의 정수(精粹)만을 골라 형상화시키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시에서 언어의 군더더기를 일체 생략하고 시적 압축을 통해 섬세하고 간결한 함축미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