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 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 리 천 리 또 천 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 아닌 봄을 불러 줄게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 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시학>(1939)-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서사적, 사회적, 애상적, 비극적, 체험적

특성

① 동병상련의 어조, 시인의 실제적 체험을 바탕으로 함.

② 토속적이고 감각적인 시어를 주로 사용함.

③ 서정적이면서도 북방의 정서를 잘 담아냄.

④ 전형적인 '이야기시'의 서술 형식을 갖춤.

⑤ 서사적 요소의 도입

    → 배경과 인물의 설정,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건의 기술

        시적 대상(청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대화체의 말투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알룩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 바닷가 출신

*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 가시내의 외양 묘사

* 발을 얼구며 → 발을 꽁꽁 얼려가며

* 무쇠다리 → 두만강 철교

* 함경도 사내 → 시적 주체(화자), 시인 자신의 모습을 투영함.

* 호개 → 오랑캐 개(만주 개), 만주인들의 노래(호가)

*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 힘든 삶도 인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 공간적 배경의 분위기(흉악하고 불안한 상황)

* 눈포래 → 눈보라(고난과 시련)

* 가시내 → 시적 대상(청자)

* 가난한 이야기 → 전라도 가시내가 북간도에까지 올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짐작케 함.(가난)

*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 고향을 떠나는 전라도 가시내의 슬픔을 형상화함. 두 낮 두 밤은 전라도에서 북간도까지의 소요시간.

* 불술기(불수레) → 해, 태양이라는 뜻의 함경 방언

* 유리창 → 간도로 오는 기차의 유리창

*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 가시내의 고향 전라도 바닷가와 연관 지은 표현임.(고향 회상)

*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 가시내의 싸늘한 웃음에서 세상에 대한 그의 냉소적 · 비관적 태도를 순간적으로 발견함.

*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 슬픔을 안으로 삭이는 모습(여인의 강인한 성격)으로, 시적 화자의 연민을 불러일으킴.

*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게

    → 그녀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위로해 주는 화자의 모습

*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 화자는 그녀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고자 함.

* 이윽고 얼음길,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 → 우리 민족이 처한 암울하고도 고통스런 역사적 현실

* 우줄우줄 나설게다 → 의태어를 통하여 비장하고 결연한 모습을 형상화함.

*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결의와 다짐

        날이 밝으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길을 향해 떠나야만 하는 화자의 처지

        비참한 우리 민족의 운명이 화자의 모습으로 통해 잘 드러남.

 

화자 : 고향(고국)을 떠나 북간도로 떠밀려 간 함경도 사내

주제 : 일제강점기하 북간도를 떠도는 우리 민족(유이민들)의 비극적인 삶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등장 인물의 제시 ― 가시내와 함경도 사내의 만남

◆ 2연 : 배경 제시 ― 북간도 술막의 험악하고 불안한 상황

◆ 3연 : 전라도 가시내의 그늘진 삶 이야기

◆ 4연 : 두만강을 건너던 석 달 전의 상황과 그때 여인의 심정

◆ 5연 : 가시내를 위로해 주는 함경도 사내(연민의 정)

◆ 6연 :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고통 극복의 다짐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북간도의 술집에서 남쪽의 여자와 북쪽의 남자가 만났다. 시의 화자는 추위에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인데, 그가 애틋한 사랑의 마음으로 보는 여자는 '눈이 바다처럼 푸르고, 까무스레한 얼굴'의, 술 따르는 주막 여인 '전라도 가시내'이다. 시절은 흉흉하여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데, 둘은 술상을 놓고 앉아 객수를 달래고 있다.

제3연까지는 위와 같은 대체적 정황이 제시되고, 제4연 이후는 같은 처지의 고국 여인에 대한 화자의 절절한 연민과 사랑이 표현되어 있다. 봄을 불러줄 테니,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화자의 말에는 애틋한 사랑이 잘 녹아 있고,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라는 구절에는 단신으로 압록강을 건너 온 여인의 강인한 품성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스스로는 '노래도 없이', '자욱도 없이' 사라지리라고 한다. 과시도 과장도 없이 낯선 이국 땅의 객소에서 만난 두 사람의 동족애와 사랑은 험한 시절을 살아야 했던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우리 앞에 또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이용악의 시적 언술 방법은 식민지 시대 우리 시의 한 성취를 보여준다. 그의 시는 손쉽지 않는 사실주의의 시적 수용을 독특한 방식으로 시험했고 그 성공적인 궤적은 우리 현대시의 한 흐름을 이루었다.

 

민중들의 현실적 생활을 다룬 시는 서사성을 도입하여 생활 현장의 구체성과 진실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서사성의 도입은 시 · 공간적 배경과 인물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의 행위와 관련된 사건들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서사성을 도입하여 일제 강점기 한 개인의 서글픈 삶을 형상화함과 동시에 이를 민족사의 아픔으로 확장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자기 삶에 굳건히 바탕을 둔 '이야기 시'를 지향했던 인생파 작가 이용악의 대표작이다. 이 시는 일제시대 때 살기 위해서 혹은 독립운동을 위해서 멀리 북간도로 떠났던 유이민들의 이야기다. 아마도 이 시에 등장하는 여인은 팔려간 여인인 듯하다. 전라도 가시내와 함경도 사내가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에서 만난다. 두 남녀는 술을 마시며 힘들고 고단했던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여인은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위안을 얻고 잊었던 고향에 대한 생각으로 하룻밤을 지샌다. 그러나 남자는 날이 밝으면 흔적도 없이 떠나야 할 사람! 남녀의 짧은 하룻밤 만남 속에서 어둡고 힘들었던 시대의 아픔이 읽힌다."

-시인, 최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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