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이야기

                                                                              - 박형준 -

                                                       

 

 

 

나는 장롱 속에서 깜박 잠이 들곤 했다.

장에서는 항상 학이 날아갔다.

가마를 타고 죽은 할머니가 죽산에서 시집오고 있었다.

물 위의 집을 스치듯 ―

뻗는 학의 다리가 밤새워 데려다 주곤 했다.

신방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오동나무 장롱처럼, 할머니는

― 잎들이 자개붙이에 비로소 처음의 물소리로 빛을 흔들었고,

차곡차곡 할아버지의 손길을 개어 넣고 있었다.

나는 바닥 없는 잠 속을 날아다녔다.

그리운 죽은 할머니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고추가 간지러워 천천히 깨어날 때,

 

 

 

마지막으로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장롱에서 ―

학의 길고 긴 다리가 물 위의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듣곤 했다.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1994)-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회고적

표현

* 회상적 어조

*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

* 감각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시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함.

* 무생물에 생명력을 부여함으로써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음.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나는 장롱 속에서 깜박 잠이 들곤 했다.

   → 폐쇄적 공간인 장롱은 어린아이었던 화자에게 안온함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여기서의 장롱은 어머니의 자궁과 유사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이는 어린아이의 모태 회귀 본능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 장롱 → 전체 시상을 이끌어가는 중심 소재로, 추억 · 전통의 의미를 지님. 할머니와 동일시됨.

* 장에서는 항상 학이 날아갔다.

    → 실제의 학이 아닌 장롱에 그려진 학이 꿈속에 살아 나타난 것

* 가마를 타고 ~ 할머니의 검은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 꿈을 통해 젊과 아름다웠던 할머니의 과거를 상상하고 있음.

        화자의 실제 체험이라기보다는 꿈을 통한 상상임.

* 죽산 → 지명 혹은 장롱에 새겨진 대나무 그림을 가리킴.

* 물 위의 집, 학의 다리, 잎들

   → 자개장(장롱)의 장식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소재

       할머니를 추억하는 화자의 꿈속에서 생명력을 얻으며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고 있음.

* 신방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오동나무 장롱처럼, 할머니

   → 할머니가 시집오면서 준비해 온 혼수로, 화자는 죽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신방을 차리던 시절을 꿈꾸면서 할머니와 장롱을 동일시함.

* 차곡차곡 할아버지의 손길을 개어 넣고 있었다.

    → 할아버지와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

* 그리운 죽은 할머니의 검은 머리칼

   → 화자의 꿈속에 나타난 할머니는 젊은 시절의 모습인 듯하고, 죽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화자는 할머니가 쓰던 장롱 속에 들어가 잠이 들고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꿈을 꾸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고추가 간지러워 천천히 깨어날 때

    → 오줌이 마렵다는 의미.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계기가 됨.

* 마지막으로 힘찬 울음소리 ~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듣곤 했다.

    → 실제의 학 울음소리가 아님. 꿈에서 막 깨어나면서 듣게 되는 화자의 환청임.

  

주제추억의 힘(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과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시상의 흐름(짜임)]

◆ 1~5행 : 장롱 속에서 잠들어 꾼 꿈

◆ 6~9행 : 할머니에 대한 추억

◆ 10~13행 : 학의 소리와 함께 깨어남.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오동나무 장롱에 얽힌 시적 화자의 유년 시절의 추억과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없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장롱 안에서 꾼,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할머니, 학과 대나무 숲, 호수, 나뭇잎 등의 다양한 이미지가 혼재되어 나타나는 꿈을 통해 이를 환상적인 분위기로 표현하고 있다.

 

■ 시인 박형준(1966~   )

시인 박형준은 196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家具의 힘」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1994)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 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2002)가 있다. 또한 『물 속까지…』로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박형준의 시에는 소멸해 가고 있는 것, 이미 소멸한 것들로 난무하다. 그의 시를 읽으면 우리가 미처 발견하거나 알아보지 못한 것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자각에 당혹스럽다. 우리들이 부의 축적이나 명예와 관련된 성과들에 연연하고 있을 때 박형준은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 하련다」)들을 보고 있었다. 이는 그가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시인은 유년 시절 가족의 죽음을 겪는다. 남동생의 죽음은 그에게 이면의 세상을 보는 시선을 갖게 했다. 그는 '허름한 가슴의 세간살이를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 다 떠나보내련다'(「나는 이제…」)라고 고백하며 소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흉터로 굳은 자리'가 또 다른 '새로운 별빛'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시인의 열망이 시를 쓰게 하는 힘인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