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빌려  

                                                        
- 원통에서 -                  -신경림-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 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 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집 <길(1990)>-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묘사적, 서사적

표현 : 사물의 의인화

              모순된 경험을 제시하여 삶에 대한 태도를 경계하고자 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장자 → 『장자』'추수편'에 '큰 앎은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살핀다.'는 글귀가 있음.

    * 노령 노래 → 생활을 위해 러시아 영토로 떠나가는 참담한 실정을 노래한 함경도 민요.

                          조선 말기 함경도 남자들은 생활이 어려워 흔히 러시아 지방으로 품팔이를 나갔는데, 이 민요에는 그러한 절박한 상황, 즉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떠나야만 하는 애달픔, 남편을 보낼 수밖에 없는 여인들의 슬픔, 조국에서 살 수 없어 국외로 가야 하는 현실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제재 : 세상 보기

주제단순하기도 복잡하기도 한 삶에 대한 깨달음

[시상의 흐름(짜임)]

◆   1 ~ 8행 :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라본 세상과 삶의 모습

◆   9 ~17행 : 속초와 원통에서 바라본 세상과 삶의 모습

◆ 18~20행 : 삶에 대한 깨달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인이 오랜 민요기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찾은 마을, 그리고 바라보고 지나친 바다와 산을 툭 터놓은 마음으로 노래한 시들을 모아 놓은 시집 <길>에 수록된 작품이다. 시인은 스스로 낮고 외로운 인간과 사물과 함께 서고, 나아가서 그것들 속의 하나가 되는 데서 시의 참길이 열린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이 시는 화자가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라본 모습과 속초와 원통에서 바라본 모습을 대조시켜 시적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산 위에서 바라볼 때에는 세상이 단순해 보이고 세상을 속속들이 이해할 것도 같았는데, 속초의 중앙 시장과 원통의 뒷골목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사람들의 삶이 복잡하여 이해하기 어렵다는 모순적 경험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삶을 너무 쉽게 또는 너무 어렵게 바라보아 다른 쪽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경계하는 의도를 전하고 있다. 즉, 삶은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기 때문에 두 관점을 모두 취하여 살펴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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