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

                                                                              -김영랑-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디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饗宴)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1939)-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상징적, 전통적, 현실참여적

특성

① 거문고를 기린에 비유한 것이 인상적임.

② 대상의 현재 상황을 부각하여 시적 정서를 형성함.

③ 기린과 '이리떼' '잔나비떼'의 대비를 통해 주제 의식을 암시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검은 벽 → 기린이 마음대로 울 수 있는 본연의 자유로움을 막는 시대적 상황 암시

* 기린 → 성인이 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동물, '거문고'에 대한 비유

* 향연 → 특별히 융숭하게 손님을 대접하는 잔치

* 외론 기린 → 외로운 기린, 시적 화자의 정서가 투영된 대상

* 하마 → 바라건대, 행여나 어찌하면

* 이리떼, 잔나비떼 → 기린의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 상황을 의미함.

* 문 아주 굳이 닫고 → 바깥 세상을 멀리하려는 화자의 자세, 일제 치하에 대한 내면적 저항

*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 주권 상실의 암담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주제국권 상실을 극복하기를 소망함.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소리를 읽은 거문고

◆ 2연 : 다시 울 날을 소망하는 외로운 거문고

◆ 3연 : 상실의 땅에서 정처를 잃은 거문고

◆ 4연 : 소리를 잃은 거문고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소리를 제대로 내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한 채 벽에 기대 선 '거문고(기린)'를 통해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자유를 빼앗긴 상태로 살아가는 시적 화자의 비애를 형상화하였다. 김영랑의 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시어와 낭만적인 감수성 대신 역사의식과 비판적 현실 인식이 두드러져서 작품 세계의 변모 과정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작품이다. 일제 식민치하라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보았을 때, 기린을 둘러싼 외부 환경은 기린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과 억압의 상황에서 자주민으로서의 자유를 구가하지 못하는 화자는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시대를 잘못 만나 제 곡조를 잃어 버린 기린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리떼', '잔나비떼'로 상징되는 일제와 그들을 추종하던 아첨꾼들이 득실거리는 식민지 치하의 '기린(애국지사와 선량한 국민들)'이 숨죽여 은거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이라 하여 거문고를 연주하던 주인을 굳이 '노인'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거문고의 유구한 역사성과 전통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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