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총기

                                                                              - 고진하 -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싶은

팔순의 어머니는

 

뜰의 잡풀을 뽑으시다가

마루의 먼지를 훔치시다가

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잡수시다가

먼 산을 넋을 놓고 바라보시다가

 

무슨 노여움도 없이

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습관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이젠 섭섭지 않다.

 

치매에 걸린 세상은

죽음도 붕괴도 잊고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죽음의 속도로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마른 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

 

 

 

팔순 어머니의 총기(聰氣)!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1990)-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상징적, 현실 비판적

표현 : 대조적 태도를 통해 주제를 부각시킴.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하얗게 센 듯싶은 영혼의 머리카락 → 순수한 영혼(백색의 이미지)

    * 무슨 노여움도 없이 → 무욕과 달관의 경지

    * 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세

    * 이젠 섭섭지 않다. → 어머니의 삶의 태도에 대한 이해

    * 치매에 걸린 세상 → 비정상적인 사회 현실

    * 죽음도 붕괴도 잊고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파멸로 향하는 세상

    * 마른풀처럼 시들며 → 육체적인 쇠약함(죽음)

    * 팔순 어머니의 총기 →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어머니의 지혜

 

제재

* 어머니의 총기(당신에게 곧 다가올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줌.)

* 치매 걸린 세상(변화와 개발만을 강조하는 사회는 곧 다가올 파멸을 부정한 채 끝도 없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줌.)

주제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순수한 영혼을 지닌 어머니

◆ 2연 : 평범하고 소박한 어머니의 삶

◆ 3연 :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시는 어머니

◆ 4연 : 파멸로 가고 있는 인간 사회

◆ 5연 : 어머니의 총기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우리의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오셨을까? 뜰의 잡풀을 뽑고 마루의 먼지를 훔치고 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먹고 때로는 먼 산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하고…. 어머니의 삶은 그토록 평범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아무 욕심도 없고 노여움도 없다. 그저 그런 일상의 연속에서 한 마디 불평 없이 살아왔기에, 돌아갈 때가 다가와도 더 이상 삶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자연의 섭리에 생을 맡긴 채 살아온 것이다. 이 시는 바로 그런 어머니를 제재로 하고 있다. 이 시의 어머니는 '치매 걸린 세상'과 극명하게 대조적인 삶의 자세를 드러낸다. 변화와 개발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자신이 병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앞만 향해 빠르게 달리는데, 어머니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유일한 꿈은 자기 복제와 자기 확장이라고 말한다. 이를 증명하듯, 물질 문명을 복제하고 자신만의 이득을 확장하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이것을 치매에 걸린 세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치매란 정상적인 정신 능력을 잃어 버린 상태를 말한다. 과거의 기억과 올바른 판단력을 잃어 버린 채, 맹목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세상이 바로 치매 상태라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아찔한 속도로 폭주하는 문명이 가져올 결과는 죽음과 파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지 않는 문명의 모습에서 위태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더 읽을거리 <퍼온 글>

고진하는 1987년 <빈 들>, <농부 하느님> 등을 '세계의 문학'에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래, 꾸준한 시적 이력을 축적하면서 네 권의 시집을 차곡차곡 세상에 내놓은 중견 시인이다. 그는 '성(聖)'과 '속(俗)'이 지상에서 벌이는 치열한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개신교의 사제 시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목사인 동시에 시인으로서 그는 '성'과 '속' 어느 곳에도 일방적으로 깃들이지 않고, 그 사이의 통합과 균형을 특유의 종교적 상상력으로 탐색하고 드러냄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세계를 줄곧 펼쳐온, 우리 시단에서 가장 이채로운 시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세상에 차례로 내놓은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민음사, 1990), 『프란체스코의 새들』(문학과 지성사, 1993) 그리고 『우주 배꼽』(세계사, 1997) 등의 시집에는 이 같은 종교적 상상력을 일관되게 추구하려는 그의 시적 욕망과 열정이 아름답게 담겨 있다. 그 세계를 단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편재해 있는 모든 신성한 존재들을 발견하고 만나며, 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화해하려는 일련의 '화목제'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우리 시단에서 가장 빈곤한 영역 중의 하나인 '신성'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추구하고 있고, 나아가 '초월'의지와 '현실'감각 사이의 접점을 형성하는 데도 남다른 열정을 바치고 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시인의 가장 독자적인 매력 중의 하나는 우리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발견하는 '신성'의 움직임과 힘이다. 그 대표적 형상을 그는 자신의 어머니 속에서 찾고 있다.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 싶은 / 팔순의 어머니는" 시인에게 있어서 '예수'이자 '밥'이다. 그런데 이처럼 세속성(밥)과 신성성(예수)을 통합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어머니가 보이시는 "뜰의 잡풀을 뽑으시다가 / 마루의 먼지를 훔치시다가 / 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잡수시다가 / 먼산을 넋놓고 바라보시다가" 하는 일련의 행동적 연쇄는 사실 의미없는 반복적 습관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무슨 노여움도 없이 / 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 습관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은 그분의 살아계심의 확연한 증거이어서 "섭섭지 않"다. "치매에 걸린 세상"과는 달리 "마른 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 / 팔순 어머니"야말로 참으로 "총기(聰氣)"로 가득한, 말하자면 신성이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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