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출토(出土)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사라진 손바닥>(2004)-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반성적, 성찰적, 비유적, 예찬적

특성

① 자연물에 인격을 부여하여 시적 의미를 드러냄.

② 대상을 향한 화자의 인식 변화를 통해 화자의 태도를 드러냄.(물질적 가치 → 정신적 가치)

③ 영탄법과 명사형의 종결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제목 → '출토'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을 파내다'의 뜻인데, 마치 땅 속에 묻혀 있던 귀한 유물이라도 발견한 듯한 화자의 심리 상태를 표현함.

* 뜻밖의 수확 → 호박의 가치를 물질적 측면에서 인식하는 화자의 태도가 드러남.

* 그녀의 젖 → 늙은 호박을 '그녀'로, 호박의 속살을 '젖'으로 표현한 것은, 흙속의 벌레들이 그것을 영양분 삼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 소신공양 → 불교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워 부처님에게 바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호박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벌레들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호박의 소신공양으로 표현함.

* 은밀한 의식 → 호박에 대한 화자의 인식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줌.

*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 덮어주는 행위는 화자가 호박을 의미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짐작케 함.

* 둥근 사리들 → 속살은 다 사라지고 한 움큼의 호박 씨앗을 '둥근 사리'로 표현함. '사리'는 원래 훌륭한 스님이 죽어서 다비를 하고 나면 나온다는 돌 조각으로, 호박의 희생을 긍정적이고 훌륭한 것으로 바라보는 화자의 시각이 반영됨. '고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를 뜻함.

 

제재 : 늙은 호박(깨달음의 매개체)

주제늙은 호박을 통해 깨달은 숭고한 희생정신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늙은 호박이 내민 젖을 오글오글 빨고 있는 벌레들이라니! 젖살 올라 통통하게 살찐 벌레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쟁쟁쟁 뜨겁게 달구지 않았다면 여름은 빈한을 면치 못하였으리. 여름이 가난한데 어찌 가을인들 식탁이 풍요롭겠는가? 벌레들 호박을 양식으로 삼지 않았다면 그녀의 종족은 아주 멸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것. 방치된 젖이 썩어 씨마저 썩지 말란 법 없지 않으니 말이다. 이를 두고 상생(相生)이라 하던가. (시인 이재무)

나희덕의 시는 따뜻함과 단정함의 미학으로 대표된다. 따뜻함이 모성적인 감성을 바탕으로 훼손된 것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드러낸 것이라면, 단정함은 삶과 사물에 대한 성찰적이고 자기 발견적인 윤리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나희덕 시인의 진정한 미학적 성취는 삶의 본질적인 어두움을 응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여러 겹의 마음을 읽어내고 삶의 깊은 기미들을 찾아내는 지점에 있다. 그는 생의 유한성과 적막한 슬픔 가운데서 재생의 이미지를 감각하는 시인이다. (시인 이광호)

 

◆ 정호승 시인의 말

호박이 수도자이시구나, 그렇구나, 호박이 부처님이시구나. 호박의 몸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둥근 사리는 사랑이구나. 우리의 삶이 이 호박만 해도 고통과 절망이 어디 있겠는가. 가을 들판에 홀로 썩어가는 거룩한 호박의 사리를 수습하러 가야겠다. 같이 가지 않겠는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