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의 빈 집이로다

                                                                              -정진규-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 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悲哀)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 의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 재산(全財産)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幼年)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國土)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 재산(全財産)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들판의 빈 집이로다>(1977)-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비극적, 상징적, 절망적

특성

① 고립된 자의 고독하고 쓸쓸한 내면을 형상화함.

② 단어와 어구의 반복을 통한 시적 구조의 안정성 및 의미를 강조함.

③ '~도다/로다'의 단정적인 어투를 사용하여 주제를 강조함.

④ '뜨거운 물'과 '차가운 술'의 대비를 통해 고독한 현실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어쩌랴 → 비애와 슬픔의 감탄사

*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 화자의 눈물을 암시함.(의인법, 감정이입)

* 음험한 비애의 어깨들 → 빗줄기, 흐느끼며 우는 사람의 들썩이는 어깨를 연상케 함.

*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 고독하고 쓸쓸한 화자의 처지

* 차가운 한 잔의 술 → 화자를 위로하는 유일한 대상

* 뜨락엔 ~ 전 재산이로다 → 가진 것이 없는 화자의 처지

* 내 유년 → 꿈을 가졌던 그리운 과거

* 캄캄한 늪 → 유년의 꿈이 현재와 단절되어 있음을 나타냄.

* 이무기 → 용이 되지 못함, 유년 시절의 꿈과 희망이 좌절되어 울고 있는 화자를 의미함.

*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 반복을 통한 한탄의 심리 강조

* 온 국토의 벌판을 ~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

   → 화자의 좌절된 꿈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의 것임을 드러냄.

* 어머니의 불 → 고독과 좌절을 어루만져 주는 존재

* 그리운 물 ~ 불의 살점들 → 따뜻했던 유년의 기억

* 또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 고독하고 차가운 현실 상황에 대한 재인식

* 들판의 비인 집 → 화자의 고독하고 공허한 감정을 상징함.

*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 감정 이입

 

제재 : 비인 집

주제좌절된 과거의 희망으로 인한 현재의 고독과 비애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현재의 고독에 대한 탄식

◆ 2연 : 좌절된 과거의 희망에 대한 탄식

◆ 3연 :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고독과 절망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1970년대 유신 정권하의 어둡던 현실을 배경으로, 희망이 좌절된 상황에서 화자가 느끼는 고독과 비애가 유년 시절의 따뜻했던 기억과 대조를 이루면서 드러나고 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자의 파멸감이 이 시의 비애감에 깊게 배어 있는데,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떠올리며 '때가 아니로다'를 외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불로 지피어진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을 떠올리지만, 과거의 따뜻함이 없어지고 차가움만 남은 현재의 상황을 '들판의 비인 집'과 '차가운 술'로 형상화하고 있다.

 

◆ 더 읽을 거리

정진규의 시집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는 그의 60년대를 지배하던 방황을 모태로 하고 있다. 그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던 방황은 점점 더 그를 일방적인 한 곳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마침내 가족으로부터도 추방당한 극단에서 그의 절창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가 쓰여진다.

추방당한 자의 비애감이 이 시의 격정적 어조를 드높이고 있다. 빈 들판에서 오로지 혼자 차가운 술을 마시는 고립되고 소외된 자, 그리하여 마침내 버려진 자의 격앙된 비애는 '때가 아니로다'와 같은 탄식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게 만든다. 때를 만나지 못한 이무기가 과연 자기 자신인가. 왜 그 이무기는 때를 만나지 못하고 온 국토의 벌판을 기어가는가. 그는 한 가마솥의 물을 덥히던 어머니의 불을 왜 그리워하는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자의 절망감이 이 시의 비애감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떠올리며 '때가 아니로다'를 외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어머니의 불로 지피어진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로 삶의 모든 허물을 씻어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지만 음산한 하늘, 뜨락에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홀로 있게 만드는 그의 처절한 자의식은 아마도 그에게는 이무기처럼 운명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고립된 자의 고독하고 쓸쓸한 내면은 '들판의 비인 집', 뜨락의 '작은 나무 의자 하나', '온 국토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 등의 서글픈 이미지를 통해 잘 형상화되어 있다. 비어 있고 버려졌으며 조그맣고 혼자인 존재, 더구나 그 뒷모습은 뼈저린 고통을 겪은 자의 것일 터이며, 그가 있는 곳은 춥고 황량한 장소임이 분명하다. 비 내리는 들판의 비인 집에서 차가운 한 잔의 술로 혼자인 자신을 위로하는 그에겐 지금 한줌의 따뜻함이 얼마나 간절히 그리울 것인가.

그는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따뜻한 기억을 품고 있는 아늑한 시간일 것이다. 잃어 버린 꿈인 듯 시인의 유년에는 한 마리의 이무기가 살아남아 울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과 아궁이에 지펴지던 어머니의 불이 있다. 뜨거운 물과 불이 있는 유년은 비와 차가운 술밖에 없는 현재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춥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시인은 뜨겁게 불타오르던 과거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 어머니가 지피던 불을 다시 타오르게 할 수는 없다. 지금은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직 혼자일 뿐이며, 한 잔의 술만이 전 재산이기 때문이다. '~로다(도다)'의 단정적이고 고압적인 어투는 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절망적인 현실을 더욱 벗어날 수 없는 속박으로 느끼게 만든다.  [해설 :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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