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고요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면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곤대며 어루만져 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 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 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도화 아래 잠들다>(2003)-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감각적, 창조적, 개성적

특성

① 명사형 종결의 반복과 열거, 도치를 통해 시상을 전개함.

② 시적 대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하여 시상을 전개함.

③ 시적 대상에 대한 창의적 이미지를 통해 작가의 개성적 인식을 드러냄.

④ 감각적(주로 청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시적 대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마른 잎사귀에 ~ 멍드는 소리 → 도토리묵이 만들어지는 첫 번째 과정으로, 나무에 매달려 있던 도토리가 지상으로 떨어져, 한 데 모이게 되는 것을 표현한 부분이다. 의성어의 사용으로 청각적 이미지가 두드러짐.

* 멍석 위에 나란히 ~ 발 디디는 소리 → 채집한 도토리를 멍석 위에 널어 가을 햇볕에 말리는 과정을 형상화한 부분이다. 공감각적 표현(시각의 청각화)이 나타남.

* 먼 길 날아온 ~ 인사하는 소리 → 말려 놓은 도토리를 멧돌로 가는 과정을 형상화한 부분이다. 청각적 이미지, 시적 대상의 의인화 등의 표현이 나타남.

* 채머리 → '체머리'의 북한어.  머리가 저절로 계속하여 흔들리는 병적 현상, 또는 그런 현상을 보이는 머리

* 아궁이 불 위에서 ~ 엉기는 소리 → 멧돌로 갈아 얻은 도토리 가루를 물과 전분가루 등과 혼합하여 가열하는 과정을 표현한 부분이다.

* 식어가며 ~ 핥아 주는 소리 → 가열 과정을 거친 후 일정한 형태로 틀을 잡아 식히는 과정이다.

* 모든 소리들이 ~ 저토록 단단한, → 다 만들어진 도토리묵을 바라보며, 시적 화자의 개성적 인식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연약하고 무르며 화려하지 않고 밋밋한 모습을 하고 있는 도토리묵이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동안 도토리가 치열한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묵으로 완성된다는 점에 착안한 표현이다.

*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 시적 여운을 남김.

 

제재 : 도토리묵

주제도토리묵에 대한 개성적 인식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도토리묵이 만들어지는 과정

◆ 2연 : 완성된 도토리묵의 이미지

◆ 3연 : 도토리묵의 개성적 이미지 환기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우리가 흔히 무르고 연약하며, 밋밋한 것으로 인식하는 도토리묵을 의인화와 청각적 이미지 등을 통해 개성적으로 인식한 작품이다. 시인의 이러한 개성적 인식은 독특한 시상 전개와 표현 방식과 함께 산문적 리듬과 끊어 읽기의 호흡을 통해 한층 더 심화된 문학적 완성도를 보여 준다.

1연에서 시적 화자는 완성된 도토리묵이 아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특히 도토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묵이 되어 식혀지는 과정을 의인화된 표현과 청각적 이미지, 명사형 종결을 통해 개성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인화된 도토리는 멍들고, 말리고, 껍질 타지고, 소곤대기도 하고, 서로 어루만지며, 작별 인사도 하고 다시 엉기고 핥아 주는 가련한 대상으로 의인화된다. 그리고 2연에서는 1연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 도토리묵이 단독 연으로 제시되며, 1연의 복잡한 이미지들이 일시에,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된다. 그리고 마지막 3연에서는 도토리묵의 고요한 이미지와 함께, 1연의 이미지가 환기되며 시상이 마무리된다.

◆ 이 시의 표현 방식과 효과 ◆

이 시는 산문적 리듬을 가진 자유시이면서도 명사형 종결의 반복을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1연에서는 도토리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하는 소리'로 연결함으로써 각각의 과정이 지닌 이미지와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독자는 이를 알맞은 호흡으로 끊어 읽으며 운율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2연에서는, 1연에 제시된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도토리묵을 짧은 어구를 통해 제시함으로써 일시에 시상을 집약시키는 효과를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도토리'의 의인화와 감각적 이미지의 사용을 통해 시적 대상에 대한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 특히 시인이 사용하는 다양한 의성어와 청각적 이미지는 먹을거리인 '도토리묵'을 미각이 아닌 청각으로 표현하면서도 대상이 지닌 이미지를 더욱 정교하게 전달한다. 결국 이 시의 독자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통해 먹을거리인 '도토리묵'을 새로운 감각과 정서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러한 개성적 인식은 도토리묵을 '시끄럽고 단단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개연성을 부여한다.

◆ 이 시에 나타난 작가의 개성적 인식 ◆

이 시는 소재와 소재에 대한 인식, 표현 방식 등에서 작가의 개성적 면모가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 먼저 이 시의 소재 '도토리묵'은 우리 생활 주변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먹을거리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시적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시인은 이 평범한 대상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인식을 신선하게 뒤집는다. 막연히 먹을거리로만 인식하고 있던 '도토리묵'에 대해, 시인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집중하고, '도토리묵'을 맛과 감촉이 아닌 소리를 통해 대상을 표현한다. 결국 이러한 시인의 개성적 인식은 연약하고 무른 것이라는 '도토리묵'의 보편적 이미지를 '시끄럽고 단단한 것'이라는 개성적 인식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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