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도·잎사귀

                                                         - 장만영 -

 

 


순이,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호젓하구나.

 

               -<시건설>(1936)-

 

해             설

[ 개관정리 ]

성격 : 서정적, 회화적, 관조적, 주지적 

표현

* 시각적 심상, 공감각적 심상 등 신선한 이미지의 사용이 돋보임.

* 가을 달밤의 서정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견고하고 투명한 심상을 통해 보여줌.

* 한국의 전통적 정서가 지성의 통제를 받아 이미지와 적절히 조화를 이룸.

* 문답의 형식을 통해 화자의 정서에 독자를 참여시키는 효과를 가져옴.

 

◆ 중요시어 및 시구

* 순이 → 토속적이고 순진무구한 모성을 상징하며, 시상을 열고 닫는 기능을 함.

              시 전체의 분위기를 섬세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이끌어가는 역할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돈호법)

* (고풍한) 뜰 → 이 시의 공간적 배경, 사물들을 수용하고 흡수하여 생성과 성숙을 빚어내는 공간

* 동해 바다 물처럼 / 푸른 / 가을 / 밤

      → 독특한 시행 배열로 대상의 의미 강조 뿐만 아니라, 시각적, 음악적, 함축적 효과를 동시에 거둠.

* 달빛에 호젓하구나 → 화자의 정서가 이입(移入)된 구절

 

◆ 주제 → 가을 밤의 정취, 가을 달밤의 서정(정적미)

소재 ① 달 → 한국문학의 전통적 소재로, '생명력, 성숙, 풍요로움'을 상징

            ② 포도 → 생성, 성숙, 풍요의 이미지

[ 시상의 흐름(짜임) ] 

◆ 1연 : 달빛이 비치는 고풍한 뜰(동적) 

◆ 2연 : 달의 모습과 향기(정적)

◆ 3연 : 깊고 푸른 가을 밤(정적)

◆ 4연 : 달빛을 먹고 익는 고운 포도(정적)

◆ 5연 : 달빛 아래 호젓한 포도 잎새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장만영의 '달.포도.잎사귀'는 1936년 <詩建設>지(창간호)에 실린 모더니즘 기법의 시입니다.   이미지 제시에 충실한 작품입니다.  '도시와 기계 문명의 비판'이라는 서구 모더니즘의 정신과는 상관 없이, 이 시는 느낌의 고향, 꿈의 고향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모더니스트의 전통 창조적 낙원의  한 전형으로서 이 시는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원형적 심상으로 보아도 달빛 넘치는  아름다운 정원은 낙원을 표상합니다. 이 시를 현실의 공간과 낙원의 공간으로  대비해 보면, 이 점은 선명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신비감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서정과 호젓한 분위기가 넘치는 시입니다. 첫째 연에 등장한  '순이'라는 여성의 이름은 다섯째 연 첫째  줄에도 제시되며, 詩想을 열고 마감하는 이중적 기능을 맡고 있습니다.  이 호칭은 순진 무구하고 토속적인 여성의 이름이어서, 서정적  주인공의 고독을 씻어 주며, 안온한 분위기 조성에 이바지합니다.   여기서 서정적 주인공이 여인을 부르는  수사적 기교는 자아의 고독한  서정의 세계에 독자를 동참시키는  내적 대화의 기법에 해당합니다.  내적  대화이므로 순이의 반응과 대답도 내면화하여 은밀한  정적 속에 묻힙니다.  순이는 침묵하는 존재이므로 이 시에 실제할 수 있습니다.  서정시가 독백이고, 독자는 단지 엿들을 뿐이라고 한 J.S.  밀의 말이 새삼 생각나는 장면입니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은 뜰입니다.  벌레의 영롱한 울음 소리가 투명한 청각 영상을 자극하는 고풍한 뜰, 수용과 생성의 태반인 이 신비한  공간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왔음을 경이롭게 감지하는 순간, 그  빛의 원천인 달은 고요히 정지해 있는 존재로 의인화해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의 만남이 촉발시킨 정적(靜寂)의 표상입니다.

우는 벌레나 밀려오는 달은 뜰의 적막을 돕는 배경음과  그런 이미지 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달은 과일보다 향기로울 수 있습니다.  특히 셋째 연의 형태미는  축소 지향으로 '밤'에 수렴되고 있으나, 시의 공간은 오히려 '동해 바다'로 확대 되어 있습니다.  넷째 연에서 포도의  내적 성숙이 감미롭도록 낭만적이고, 마지막 연에서 불러 보는 '순이'의  표상은 달빛에 젖은 정원의 아름다운 향연에  은밀히 초대된 소중한 이름이 됩니다.

이 시는 '한국의 전통적 정서(소재선택, 정적미)'에다 '모더니즘 기법(참신한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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