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나 한 잔

                                                                              - 오규원 -

                                                       

 

 

 

커피나 한잔, 우리들께서도 커피나 한잔, 우리들의 함묵(緘默), 우리들의 거부(拒否)께서도 다정하게 한잔, 우리들을 응시하고 있는 창께서도, 창 밖에 날개를 비틀고 있는 새께서도 한잔. 이 50원의 꿈이 쉬는 곳은 50원어치의 포도덩굴로 퍼져 50원어치의 하늘을 향해 50원어치만 웃는 것이 기교주의라고 우리들은 누구에게 말해야 하나.

 

용납하소서 기교주의여. 기교주의의 시간이여 커피나 한잔. 살의 사실과 살의 꿈을 지나 살의 노래 속에 내리는 확인의 뿌리께서도 한잔 드셨는지. 저 바람의 비난과 길이 기르는 불편한 발자국과 그 길 위에 쌓이는 음울한 사자(死者)의 목소리를 지나 우리들께서는 그 무엇을 확인하시려는가. 우리들께서는 그 패배로 무엇을 말하시려 하는가?

 

 

 

 

풀잎은 이유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풀잎은 풀 때문에 흔들린다고 잠 못 드신 들판께서도 피곤하실 테니 커피나 한잔.

 

                               -<현대문학>(1999)-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비판적, 우회적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이 50원의 꿈이 쉬는 곳 → 50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휴식함.

* 50원어치의 포도덩굴로 ~ 50원어치만 웃는 곳 → 50원어치의 휴식에 만족해함.

* 살의 사실과 살의 꿈을 지나 살의 노래 속에 내리는 확인의 뿌리 → 삶의 뿌리에 대한 확인

* 저 바람의 비난과 길이 기르는 불편한 발자국과 그 길 위에 음울한 사자의 목소리

       → 죽음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고뇌

* 풀잎은 이유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 외적 요인으로 인한 갈등

* 풀잎은 풀 때문에 흔들린다 → 내적 갈등

* 풀잎은 이유 ~ 잠 못 드신 들판 → 존재에 대한 원초적 고통으로 잠 못 듦.

 

제재 : 커피 한잔

주제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도 가볍게 용해시키는 현실 풍자

           경박한 사회에 대한 풍자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50원어치의 휴식을 누리는 물질화된 삶

◆ 2연 : 삶의 본질과 고뇌를 커피 한잔으로 대신하는 경박한 삶

◆ 3연 : 존재의 본질에 대한 원초적 고통도 커피 한잔으로 대치하는 경박한 사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삶과 죽음, 존재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고통도 커피 한잔으로 가볍게 용해되어 버리는, 경박한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50원짜리 커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물질화된 삶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삶과 그에 순응하여 가짜 만족을 누리는 허위 의식을 비판하고 있다.

오규원은 이 시대의 가장 개성 있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무의미한 언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일상적 감각에 대한 거역'이라는 시적 방법을 추구하는데, 이것은 비슷한 경향의 시인인 이승훈이 비대상의 시를 추구하는 것이나, 정현종이 철저하게 개성적인 이미지에 의지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그는 사물의 존재를 감각적 인식에 따라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적는 것을 거부하는 동시에, 감각적으로 인식된 것을 뒤집어 놓음으로써 보이는 것을 감추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전도된 언어 속에서 역설의 원리에 따라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발견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감각이나 인습화된 개념을 벗어나기 위한 시적 방법으로, 결국은 그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도 관련된다.

 

<작가의 말>

"우리는 지금 꽃이나 시내나 초가집과 함께 살기보다는 아파트, 버스정류장, 분식집, 광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산업화된 도시의 삶을 지탱하는 도구화된 언어, 수단화된 언어들 속에서 말입니다. 역설, 반어나 우화적 접근 등 모든 시적 방법을 동원, 그 타락한 언어들을 뚫고 대상과 삶의 본질을 향한 것이 내 시입니다."

-중앙일보 1991. 5. 22-

언어의 본질을 부단히 탐구해 온 오규원 시인의 전집이 발간되었다. 회갑을 기념하는 의의도 담겨 있는 이번 전집 발간은 시적 실험을 게을리하지 않아 온 그의 의지와 노력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언어 실험 또는 탐구는 어떤 식으로든 고정된 것은 아니어서, 1970, 80년대 광고 언어로 대표되는 도시의 거짓 언어를 내부로부터 뒤집는 해체적 작업으로 치닫는가 하면, 근년에 들어서는 자연 속의 동식물과 일기의 변화 따위를 가능한 한 인간적 관념의 개입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댈 중계하려는 '무작위의 시'로 흐르기도 한다. 멈추지 않는 시인의 견본으로서 자리 잡은 오규원 시인의 기념서를 넘기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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