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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 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이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신전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뭇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지시 주고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대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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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들의 향기
- 시집 <거지와 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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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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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초록의 숲에 비치는 햇빛의 모습 ◆ 2연 : 나뭇가지들의 초록 기쁨 ◆ 3연 : 흙들의 싱그러움 ◆ 4연 : 흙, 하늘, 나무의 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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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밝은 햇빛이 초록의 숲에 비치는 광경을 예찬적으로 그리고 있다. 화자는 햇빛을 '꽃들의 왕관'이나 '비유의 아버지'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출렁이며 내려오는 햇빛의 살결, 그 햇빛으로 만들어진 왕관, 그 왕관을 저마다 쓰고 있는 초록과 꽃들의 모습, 스스로도 어쩔 줄 모르고 솟아나는 초록의 기쁨들을 떠올리면 어느새 여러분도 하나의 꽃이나 초록이 되어 그 생명의 향연에 동참하는 착각에 빠져들어 갈 지도 모른다.
■ 정현종의 작품세계 정현종은 고통의 한국 문학 속에서 기쁨의 언어를 노래해온 아주 예외적인 시인이다. 정현종의 기쁨의 언어는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거짓 행복과 거짓 화해의 세계에 함몰되는 데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이 기쁨의 언어는 제도화된 억압의 은폐를 민감하게 포착하되, 그 구속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데로 나아간다. "구속된 상태에서 구속에 대한 부정에 의해서만 예술은 자유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아도르노의 언술을 정현종의 기쁨의 언어는 한편으로 껴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성큼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1965년에 등단한 이래 4 · 19세대의 시, 한글 세대의 시를 대표하는 몇 안 되는 시인들 중의 하나로서 30여 년을 일관되게 수행해온 정현종의 시업은 이제 기쁨의 언어의 지극한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현종은 초기 이래로 바람의 시인이며 자유의 시인이었다. 바람이 자유의 바람인 것은 자연스럽다. 바슐라르의 말처럼 "바람의 환희는 자유"인 것이다. 그런데 정현종의 바람은 자기 자신만 홀로 자유로운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도 작용하여 타자를 변화시키는 능동적 존재이다. 그것은 생명의 우주적 숨결이 된다.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막힌 숨구멍을 터주어 숨을 잘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바람은 물 · 불과 함께 정현종 특유의 에로스적 상상력을 빚어낸다. 정현종의 에로스적 상상력은 인간과 사물,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 그리고 고체와 액체, 기체들을 소통시키고 융합시킨다. 시인은 그 소통과 융합의 장면 앞에서 경탄하며 신명들린 듯 기쁨의 언어를 토로하고 황홀에 도취한다. 대체로 자연은 그 소통과 융합의 현장이 되고 문명은 그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정현종은 단순한 문명 비판자요 자연 찬미자인 것이 아니다. 정현종이 비판하는 것은 문명 자체가 아니라 억압된 문명이며 찬미하는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억압 없는 자연이기 때문이다. 정현종은 억압 없는 세계의 이미지, 자유의 이미지를 자연 및 자연과의 교감으로부터 길어내는 것인데, 그 이미지를 문명에 투사할 때 문명은 그것이 은폐한 과잉 억압을 드러내며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시험받게 된다. 여기에 정현종의 해방의 시학의 요체가 있다.
■ 가이아명상과 황홀경의 생태시학 -정현종 론- <문학비평가 -우찬제-> 정현종은 나무의 언어로 숨쉬는 우주의 아이처럼 보인다. 그의 가슴은 우주로 열린 채 투명하며, 그의 언어는 탈난 세상에 작란(作亂)을 일으키며 우주수(宇宙樹)를 식목하는 신바람이다. 그는 번뇌의 현실에서 열반의 우주를 꿈꾸는 천진한 숨결을 지닌 몽상가이다. 그에게 있어 삶과 숨과 시는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는 꿈꾸듯 살며, 꿈의 숨결로 시를 짓는다. 그 꿈결 속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시나브로 황홀경에 젖어들 게 된다. 그가 시 속에서 꿈꾸듯 황홀경으로 접어든다고 해서, 그의 존재의 둥지가 결코 안락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몽상은 오히려 실존의 반명제이기 쉽다. 한국 현대사의 고통스럽고 반생명적인 현실에서, 고통을 축제로, 불행을 행복으로 변형시키는 기술을 지닌 그는 자유로운 비상과 초월을 꿈꾸고 생명의 황홀경을 모색해 왔다. 그는 시적 대상 및 타자와의 내밀한 교감을 통해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했고, 자유로운 시정신 및 교감의 문법과 몽상의 시학으로 일컬어질 만한 여러 실험적 시도들로 생명의 구경(究竟)에 이르고자 했다. 또한 동양의 선(禪)적 직관으로 생명의 황홀경에 도달할 수 있었던 그의 시세계는 한마디로 동양적 정신주의의 한 극점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존재의 무거움은 시인을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타락한 권력이나 정치적 음모 등 지상의 고통은 생명 현상을 불가피하게 왜곡시킨다. 생명의 활력을 거세하고, 정신의 기운을 무력화시킨다. 이럴 때 사람들은 원초적 자아 안에 간직하고 있던 웃음의 에너지마저 잃어 버리기 쉽다. 이런 틈을 타고 세속 도시의 물질적 자본은 철면피가 되어 생명의 터전인 자연을 더더욱 훼손한다. 「들판이 적막하다」에서 시인이 불길함을 느끼는 것도 이런 사정과 연관된다. 시인은 벼가 익는 가을의 황금 벌판에 서 있다. 예전 같으면 메뚜기 나는 소리로 소란할 텐데, 들판이 온통 적막하기만 하다. 농약 살포로 메뚜기의 생존 경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얼핏 보더라도 이 시에서 "오 이 불길한 고요… / 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느니…"라고 애달파하는 시인의 연민의 근원을 우리는 짐작하게 된다. 사정이 이럴수록 시인은 생명에 대한 감각에 더 예민한 촉수를 들이댄다. 그것은 반생명적 문명에 의해 왜곡되고 일그러진 원초적 자아를 회복하고 생명의 숨결을 되돌이키기 위한 시인의 노력이다. 「느낌표」라는 시에서 그 노력은 나무며 꽃이며 새소리 같은 자연의 생명 현상에 살아있는 느낌표를 부여하는 의지적 행위로 나타난다. 자연적 대상과 그 대상에 작용을 가하는 동작의 서술어 사이의 호응이 수준 있는 유머 감각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결국 이 시에서 전경화되는 것은 천진한 느낌을 통한 자연동화에의 의지다. 이같은 의지의 염원에서 "모든 순간이 다아 / 꽃봉오리인 것을 /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 꽃봉오리인 것을!"('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과 같은 시인의 내면 의식을 우리가 발견해 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젠가 그렇게 다시 피어날 꽃봉오리를 위해 시인은 자연을 비롯한 뭇 타자들과 교감하며 타자에게로 폭넓고 깊게 스며든다. 자아를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자연 혹은 저절로 끌려가게 되어 있는 자연으로 돌아가면서 시인은 생명의 숨결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 무슨 충일(充溢)이 논둑을 넘어 흐른다."('나의 자연으로')라는 목소리가 주는 활력은 정현종 특유의 시창작 공간 ― 우주에서만 넘쳐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은 나아가 '초록기쁨'의 세계 혹은 생명의 황홀경의 세계로 이어진다. 초록 풀잎에서 우주적 환희를 발견하고 감동하는 시인의 열린 감수성을 우리는 「초록 기쁨」등 여러 편의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풀잎이라는 아주 작은 부분의 운동 궤적에서 우주 전체의 원리를 발견하는 시인의 퍼스펙티브를 따라가면, 독자들도 시인처럼 "기쁨이며 神殿"인 "하늘 전체"에서 향기에 도취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이 직관한 생명의 역동적 움직임을 따라 갈 때, 우리 또한 시인이 된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시인이 이처럼 생명의 황홀경에 젖어들고자 하는 까닭은 현실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 원리에 반하는 자본주의 문명과 물질의 폭력성, 그리고 거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의 소산이기도 한 것이다. 「가이아」라는 저서에서 J.E.러브록이 성찰하고 있는 핵심 개념인 가이아는 물리적 화학적 환경을 스스로 조절함으로써 지구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능력이 있는 자기조정적 실체로서의 생명권을 뜻한다. 이런 가이아 단위로 명상할 때, 인간과 미생물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모두 고유한 생명 가치를 지닌 채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생명체라는 점에서 등가일 따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오만하기 쉬워서 가이아 명상에 반하는 부당한 짓들을 저지른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본능적인 생명에의 의지를 시인이 직설적인 목소리로 강조한다. 가이아 명상으로 인간과 생명권을 성찰하고 있는 시인이기에 그의 시 또한 가이아다. 「한 숟가락 흙 속에」같은 시에서 가이아 현상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신비와 황홀감을 자연스럽게 형상화하는가 하면, 「좋은 풍경」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관능적 희열 속에서 새로운 가이아 지평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드러운 눈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축복 속에서 두 남녀가 숲속 밤나무에서 사랑을 나눈다. 엄격한 도덕률의 관점에서 보면 남녀상열지사쯤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이 장면을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교감과 호응 속에서 '좋은 풍경'으로 포착하고 있다. 숲 속의 상황이 두 남녀로 하여금 뜨거운 사랑을 자연스럽게 나누도록 작용했고, 또 그들의 행위가 밤나무 꽃을 빨리 피우게 했다는 생태학적 상상력은, ― 서로 순환하면서 상생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태초의 질서를 인식하는 데서 나온다. 그것은 곧 가이아 명상의 결과이기도 하며, 생명의 황홀경의 심화 정도를 나타내주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사례이다. 가이아 명상을 통한 시인의 꿈은 생명의 숨결과 우주혼의 원형을 따라간다. 사람들이 문명을 일으키고 물질적 도시를 세우면서 서서히 잃어 버린 생명의 넋을 되찾아 기리려는 생태학적 시혼(詩魂)이 거기에 신화처럼 스며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표현을 빌자면, '우주의 아이'인 정현종은 온갖 살아있는 자연 상태, 생명 현상으로부터 '아름다운 숨결'을 느끼고, '즐거운 자극'을 받는다. 시인이, "오늘은 내 즐거운 자극원에 몸을 기대련다. / 천둥과 번개 / 세상의 새들 / 지상의 나무들 / 꽃과 풀잎 / 이쁜 여자 / 터질 거예요 보름달 / 어휴 곤충들 / 저 지독한 동물들 / 너희 / 아름다운 숨결들."(「내 즐거운 자극원들」)이라고 노래했을 때, 우리는 거기서 시인의 시적 숨결이 움트는 순간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같은 '즐거운 자극원'들은 정현종 시에서 중요한 타자들이다. 이미 말했듯이, 시인이 이 타자들 속으로 퍼져나가고 또 타자들을 자기 숨결 속에 스미게 하는 과정을 통해 시가 창조되는 까닭이다. 타자들과 교감하는 과정에서 시인은 조건 없고 창조적인 자기 방기, 혹은 정신의 완전한 자유가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순간을 응축적으로 포착하여 강렬한 영원성의 시를 쓴다. 동양에서 말하는 선(禪)적 직관의 순간과 흡사한 이 시쓰기의 순간을 위해 시인은 종종 세상살이의 터널에서 의식적으로 빠져나와 눈부신 자연의 광원을 응시한다. 눈부신 광원 사이에서 그는 꿈결처럼 '가슴 두근두근 팽창'하는 우주의 "한마당 노래방"(「내 어깨 위의 호랑이」)을 훔쳐낸다. 그러고 나니 세상의 모든 것이 달리 감지된다. 「세상의 나무들」은 생명의 신명을 즐기는 우주수(宇宙樹)가 되어 하늘 높은 데로 오른다.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 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세상의 나무들」전문 정현종의 나무는 생명의 에너지로 충일해 있다. 그 우주의 나무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기운을 연결하며 생명의 환희로 모든 것을 춤추게 한다. 또 상승과 확산 운동을 통해 세상의 가슴을 첫사랑의 가슴처럼 만든다. 이 같은 나무 이미지는 상승 지향의 소망을 격정적으로 담고 있었던 정현종의 바람의 꿈이 심화되고 자연 상태에서 구체화된 결과라 하겠다. 생명과 사랑의 나무들과 숲에서라면 거친 문명에 지친 영혼들도 안식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터이다. 게다가 푸드득, 새들이 날개 소리까지 듣게 된다면 그 기쁨은 더해질 것이다. '소리의 무한'으로 우주를 열고(「새소리」), "한없이 열려 / 퍼지는 푸르름"(「날개 소리」)으로 우주를 무한 팽창시키는 그 소리의 비상에 시인은 그만 취하고 만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까치에게 "창 밖으로 네가 /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다닌 걸 /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 가벼워지겠느냐."(「까치야 고맙다」)며 헌사를 바친다. 이런 나무와 새와의 교감은 마침내 잃어 버렸던 우주혼의 둥근 기억을 되찾게 한다. 우주로 통하는 무한한 시의 길은「이슬」에서 막힘없이 유장하고 현묘한 생명의 숨길이 된다. 강물, 바람, 흙은 각각 우리들의 피, 숨결, 살이 된다. 구름, 나무, 새는 곧 우리들의 철학, 시, 꿈이 된다. 이런 교감으로 '길의 무한'은 열린다. 하여 "나무는 구름을 낳고 구름은 / 강물을 낳고 강물은 새들을 낳고 / 새들은 바람을 낳고 바람은 / 나무를 낳고……"(「이슬」)의 경지에 이른다. '나무-구름-강물-새들-바람-허공'의 둥근 생성과 변화의 움직임은 전설의 고고학처럼 둥근 기억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둥근 기억이 영원한 생성과 영원한 변모를 직관하는 토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정현종 시는 이 영혼의 순진성에 대한 동경이요, 꿈이다. 정현종 시에서 새에 대한 가없는 동경은 인간적 현실에 대한 전면적 반성과 통한다. 비상의 꿈으로 통하는 새는 확실히 땅에 붙박힌 채 기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눅 들 게 하는 구체적인 오브제이다. 솟아오르지 않고서야 어찌 둥근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니체의 가벼움의 철학이나 바슐라르의 상상력도 새에 관한 명상과 통한다. 새는 땅위의 존재들에게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반성의 계기를 부여한다. 문명의 흐름 속에서 부정적 형질로 치달아 왔던 현대적 삶의 감각을 되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우리 삶과 의식을 커다란 우주적 질서, 원초적 자연적 질서로 되돌려 놓자는 것, 그 되돌려진 질서가 자기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게 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시인이 바로 정현종이다. 문제는 잃어 버린 우주의 둥근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것은「0」라는 시에서 뚜렷한 의미를 얻는다. "0은 처음이며 끝 / 0은 인생의 초상 / 0은 다 있고 하나도 없는 모습 / 꽉차고 텅 빈 모습"이다. 또한 "공기의 숨결"인 "0은 생명의 거울 / 0은 사랑"(「0」)이다. 시인 정현종은 그 같은 '생명의 거울'을 응시하면서 우주의 큰 질서 안에서 시적 비전을 획득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주적 숨결 속에 스며들어 세상살이의 막힌 숨길과 숨통을 틔워보고자 하는 시인이기에, 더욱 신명나는 어조로 저간에 잃어 버린 우주적 둥근 기억을 재생해내며 매우 웅숭깊은 생태학적 상상력을 노래한다. 웃음과 신명의 분위기 속에서 정현종의 생태학적 상상력이 직조해낸 일련의 이미지들은 근원적 진실과 근본적 생명의 빛을 향해 튀어 오르려는 것들이다. 그 결과 정현종의 시들은 대개 교감과 통화를 통한 동일성의 세계를 즐기는 형상으로 우리에게 비쳐진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이러니로 읽힌다. 반생명적 현실에 대한 아이러니의 시적 담론이라는 것이다. 정현종의 유연한 아이러니는 현묘한 웃음의 해학미를 이끌어내면서 매우 독특한 에코토피아를 지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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