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기(處署記)

                                                                              - 박성룡 -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렛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 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 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위 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 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은 깨어 있다가

저 우렛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벌레 소리가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그 맑은 아침에 비로소 잠이 들겠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나는 잠이 들겠다.

 

              -<현대문학>(1964) -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영탄적, 감탄적, 감각적

표현

* 성숙과 결실의 계절로서의 가을의 이미지

* 관조적 어조로 자연에 대한 경의와 애정을 드러냄.

*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자연 친화적 세계관을 드러냄.

* 처서의 깊은 밤에 느낀 '깨끗한 서늘함'을 형상화함.

* 자연시(자연친화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화자와 자연의 교감 내지는 일체화를 지향하는 서정시로, 자연시에서의 자연은 근대화로 파괴되기 이전의 자연 상태로, 단순한 향락의 대상이 아닌 삶의 근원으로서의 의미를 지님.)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처서 → 24절기의 하나로 8월 23일경, 입추와 백로 사이로 이 무렵부터 여름 더위가 가시기 시작함.

* 천지는 울리던 우렛소리

      → '생성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인고의 시간'을 뜻하는 것으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먹구름 속의 천둥'과 의미가 유사하다. '만물이 생성되는 인고의 시간'을 뜻함.

*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보다. → 여름이라는 인고의 시간이 끝나고 가을이 옴을 예감함.

* 고단한 꿈길 → 인고의 시간

*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 맑은 기운을 대표하는 이미지

* 벌레 설레이는 소리 → 가을을 예감하는 소리

*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 → 명주실처럼 가늘게 들리는 소리

* 재깍재깍 녹슨 가위 소리 → 어두운 사위를 잘라내는 듯한 굵은 소리

*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 → 단말마처럼 중간이 끊기어서 들리는 소리

* 깊은 우물, 개울물 소리 → 의미의 변용과 확산

* 저 우렛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벌레 소리가 /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 나는 잠이 들겠다.

      → 깨끗한 기운을 품고 있는 자연과 맑은 영혼의 교감을 나눈 후 잠이 들겠다는 것으로, 자연과 동화된 삶을 지향하는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시적 화자 : 서늘한 가을 기운의 깨끗함을 느낄 수 있으며, 가을이면 찾아오는 벌레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예민한 촉각의 소유자로, 자연에 대한 경외와 애정을 노래하고 있다.

주제청신한 가을 기운과 맑은 영혼의 갈구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처서 가까운 밤에 느낀 가을의 예감

◆ 2연 : 가을을 예감하게 하는 벌레 울음소리

◆ 3연 : 깨끗하고 맑은 자연의 이미지

◆ 4연 :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삶에 대한 지향

◆ 5연 : 자연과의 동화와 교감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때인 처서의 깊은 밤에 느낀 '깨끗한 서늘함'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시인은 관념을 거의 내비치지 않고 철저하게 이미지 중심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3연에 형상화되어 있는 벌레 울음소리는 '명주실, 녹슨 가위, 거미줄, 우물물, 개울물' 등의 시어를 통해 다채로운 이미지로 제시되어, 가을밤의 아름다운 이미지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처서'를 제재로 하여 청신한 가을의 기운과 그러한 자연에 동화되어 순수한 영혼을 갈구하는 마음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24절기 중의 하나인 처서는 조석으로 제법 신선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때인데, 시인은 이를 깨끗하고 서늘한 이미지로 담담하게 형상화하였다. 3연에서 다채로운 이미지로 제시되는 가을 벌레 소리들은 이후 4연에서 맑은 물의 이미지로 바뀌어 강으로 바다로 합쳐져 흐르게 된다. 이러한 축제가 마무리되면 시적 화자는 비로소 자연과 동화되어 조용히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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