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 포

병(病)에게 - 조지훈 -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 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 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허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 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게.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 <사상계>(1968) -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고백적, 담화적, 달관적, 관조적, 긍정적 ◆ 표현 * '병'을 의인화하여 친구처럼 친근하게 표현함. * 담담한 어조를 통해 인생에 대한 관조적인 깨달음을 나타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 불시에 찾아오는 병 * 그 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 '자네'라는 호칭과 '찾아오네'라는 다정한 말투를 통해 화자가 '병을 친근한 벗과 같이 생각함을 알 수 있다. 인생에 대한 화자의 긍정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 불길한 그림자 → 부정적인 병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 ~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 건강을 돌보지 않고 지냈던 지난 시간을 반성함. *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을 가르치네. → 병으로 인해 건강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됨. 병이 주는 교훈 *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 병이 주는 가르침이 정겹고 진실된 것임을 대구적 표현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 젊은 날의 열정을 되돌아봄. *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 겁없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을 마냥 아름답게만 본 화자의 모습 *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 화자는 병이 듦으로 인하여 오히려 건강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이유에서 병을 자신의 건강을 챙겨 주는 절친한 벗처럼 표현하고 있다. *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 →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림. *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하면 → 병과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임. * 그 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 병이 나음. * 잘 가게 이 친구 ~ 얘기해 보세그려. → 병을 정답게 대하는 데서 삶에 대한 관조적, 달관적 태도를 보임 ◆ 제재 : 병 ◆ 화자 : 나(병고에 시달리는 이) ◆ 주제 : 병을 통해 얻은 인생에 대한 관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자세
[시상의 흐름(짜임)] ◆ 1~2연 : 병이 찾아옴. ◆ 3~4연 : 병이 주는 교훈 ◆ 5~6연 : 병에 대한 겸허한 수용 ◆ 7연 : 병에 대한 달관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병'을 친근하고 다정한 벗으로 의인화하여, 죽음을 받아들이는 담담한 심경과 죽음을 가져오는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에 대한 달관의 자세를 진술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듯 인간은 생노병사의 고통을 지니고 산다. 그 중에서 '병'은 항상 인간의 마음을 나약하게 하고, 절망에 빠뜨려 삶의 자세를 흐트러지게 하곤 한다. 그러나 이 시는 병을 소재로 하여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1~4연은 화자인 나를 일관되게 지배하고 있는 병은 늘 나에게 휴식과 성실함, 그리고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갖도록 권한다. 5~6연에서 나는 삶에 집착하지도 미련을 갖지도 않지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여기며, 죽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7연은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병을 언제든지 친한 벗으로 대하려는 화자의 태도에서 병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초탈한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의 형식이 친구로 의인화된 병과 화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의식을 차분하고도 친근감 있게 해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인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 시는 조지훈이 <지조론>이란 글을 쓴 바 있듯이, 지사적인 삶을 지향해 온 그가 말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의 의지적 인생관을 고백저으로 그린 작품이라 하겠다. 만년에 병고(病苦)에 시달리다가 끝내 병사(病死)한 시인이 죽기 며칠 전(1968. 1.)에 쓴 시로서, 제목이 말해 주듯 병을 '다정한 벗'으로 의인화하여 말을 건네는 식으로 씌어진 대화체의 시이다. 전체 7연 31행의 비교적 긴 길이의 시적 긴장감이 없는 산문적인 진술로 이루어져 있는데, 죽음을 관조하는 담담한 심정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시에서는 병을 의인화하여 '자네'라고 부른다. '자네'는 친숙한 손아랫사람이나 친구를 부르는 말이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상을 이렇게 부름으로써, 화자는 병이란 대상에 대해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여유 있고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삶 속에서 고된 일손을 겨우 놓고 쉴 만하면 찾아오는 병은 삶의 뗄 수 없는 일부이며 바쁜 일상에 휴식을 권하는 친구이다. 병이 가르쳐 주는 것은 생에 대한 외경, 두려움 섞인 존경의 마음이면서 동시에, 그토록 애쓰며 고달프게 살아온 삶에 대한 허무이다. 젊은 날 화자는 겁없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생은 마냥 아름답기만 했다. 이제 화자가 늙어 갈수록 친구(병)의 모습도 늙어 간다. 오랜 병마에 시달리는 동안 친숙해진 병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지만 막상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자 병은 또 다시 떠나간다. 이렇게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닌 하나임을 항시 깨닫게 해 주는 병을 친숙하게 바라봄으로써 시인은 생에 대한 달관적 모습을 보여 준다. ■ 病과의 화해 또는 생의 畏敬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1] 【 꽃이 지기로서니 / 바람을 탓하랴 / 주렴 밖에 성긴 별이 / 하나 둘 스러지고 / 귀촉도 울음 뒤에 / 머언 산이 닥아서다 】라고 노래하던 시인 조지훈(1920 ~ 1968), 그는 1940년 <승무> <봉황수> <고풍의상> 등으로 '문장'지에 추천받은 이래 전원의 서정을 바탕으로 한국의 고전적 감수성을 계발하고 민족어를 완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이 땅의 큰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청록집」「풀잎단장」(1952),「조지훈 시선」(1956), 「역사 앞에서」(1959), 「여운(餘韻)」(1964) 등 다섯 권의 창작 시집과 「한국문화사서설」「돌의 미학」「시의 원리」(1953) 등의 학술서 등을 낸 시인이자 국학자이고, 또한 1948년 이래 고려대 교수로 1968년 작고하기까지 많은 제자, 후진학자, 문인을 길러낸 교육자였으며, 아울러 4 · 19 때는 한국교수협회중앙위원으로서 민주민권운동에 앞장선 우국지사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는 초기에는 자연에 대한 탐구에, 중기시는 역사와 현실 및 생명에 관한 탐구에, 후기시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응시에 힘을 기울였다. 시 <병에게>는 그가 기관지 확장증으로 작고하기 얼마전인 1968년 「사상계」1월호에 발표된 그의 최후작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시에는 생에 대한 달관과 화해를 바탕으로 병과의 친화와 극복의지를 노래하고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과 비애를 자아낸다. [2] 모두 7연으로 짜여진 이 시는 病(病苦)을 '자네'로 의인화하여 대화적인 어조로 시를 이끌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우선 '친구'로 의인화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병과 친숙하게 길들여져 왔다는 점을 말하며, 그 이면에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며 그와 싸워왔는가를 읽을 수 있다. 먼저 첫 연에는 발병의 시기를 얘기한다. 그것은 [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 ]와 같이 불시에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는 점을 말해 준다. 흔히 말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담은 이러한 속사정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둘째 연에는 병의 이미지가 제시된다. 그는 '우울한 방문객'일 수밖에 없으며, [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는 ]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 처럼 그러한 병고가 오랫동안 잠재해서 길들여져 온 친화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 잊어 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라는 구절과 같이 인생사의 번잡에 쫓겨서 그에 신경쓰지 못한 자신에 대한 탄식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연에는 병 또는 병고가 일깨워주는 교훈이 제시된다. 그것은 먼저 인생에 있어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실상 병이란 정신과 육신, 또는 자아와 환경 사이에 균형과 조화가 깨어지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속되는 삶의 과정에서 긴장과 스트레스가 축적됨으로써 생체 내에서 이러한 조화와 질서가 깨어지는 데서 병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상 마흔 여덟 길지 않은 생애 속에서 시인 지훈이 이루어낸 그 수많은 업적과 성취는 그로 하여금 휴식 없는 일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기에 병은 인간에게 생의 소중함과 휴식의 고귀함에 대한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인간이 병을 앓을 때 그는 비로소 건강이 얼마나 소중하고 인생에 있어 일과 함께 휴식이 또한 얼마나 긴요한 것인가를 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뒤에 그의 소중한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병은 인생에 있어 생의 재발견과 함께 허무의 발견을 성취하게 해 준다. 생의 본질은 허무, 즉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연에는 그러한 병이 주는 여러가지 고통 속에서 생에 관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 [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로서 제시되어 있다. 넷째 연에는 다시 병의 이미지가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熱(뜨거움)과 눈물(차가움)의 내면화된 이미지이다. 아울러 여기에는 병의 고통이 새삼 건강하던 지나간 날들, 특히 해결해야 할 삶의 조건과 문제들로 방황하고 번뇌하던 젊은 날을 회상하게 한다는 점이 제시된다. 그만큼 건강하고 아름답던 젊은 날이 병고의 고통 속에서 안타까운 회한과 추억으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특히 여기에는 [ 좀더 성실하게 좀더 성실하게 ] 살고자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했던 지난날에 대한 뼈아픈 후회와 탄식이 제시되어 있다. 실상 이러한 병고와 마주쳐서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이란 더할 나위없이 약해지게 마련이며 후회와 탄식에 젖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다섯째 연에는 생에 대한 달관과 체념 또는 초월의 모습이 제시된다. [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 이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한 달관과 초월의 몸짓이 얼마나 생에 대한 겸허하고 진지하지 못한 오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뉘우침의 정감이 금방 드러난다. [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라는 구절 속에는 목숨 앞에서 최후까지 겸허하고 진지해야만 한다는 뼈저린 깨침과 함께 생의 외경감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직도 병고 앞에서 어설픈 교만함이 남아 있는 인생의 어리석음과 가련함에 대한 자책과 탄식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여섯째 연에는 따라서 온갖 절망을 넘어서서 안심입명(安心立命)의 자세로 병을 대하는 겸허하면서도 진지한 자세가 제시된다. [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하면 /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피조물이자 일회적 인생으로서,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가 처한 수난과 시련에 겸허하고 진지하게 마지막까지 전심전력 최선을 다하는 자세뿐이다. 그러기에 마지막 연에는 다시 병고에 대한 수락, 즉 운명과의 친화와 교감의 자세가 드러난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비로소 병고를 길들이고, 친숙해지는 과정에서 인생의 참뜻을 깊이 있게 깨닫게 됐다는 말이다. 인생에 있어 병고란 생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며 운명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긍정하고, 그와의 친화와 교감을 통해서 병고를 극복하고자 하는 안간힘이 간절하게 표출된 것이다. [3] 병을 앓는 일이란 생노병사라고 하는 인간적 삶의 한 과정에 해당한다.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그가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자 운명적 시련에 속한다. 병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좀더 진지하고 겸허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더욱 깊어지고 성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러한 고통과 시련을 새로운 삶을 위한 하나의 부활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여 좀더 생에 외경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대로, 건강한 사람은 또 그들대로 좀더 삶을 경건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한 아픈 성숙의 과정에서 '고통을 통해서 영광으로'라고 하는 삶의 깊은 뜻, 참뜻을 소중하게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시는 병고 또한 생명의 자연스런 일부이자 과정이기 때문에 이를 수학하고 친화함으로써 그에 대한 초월과 극복을 성취할 수 있다는 아픈 깨달음을 제시한 작품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