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는 폐허에서

                                                                              -김해강-

                                                       

 

 

 

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 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 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섰는 늙은이의

흰 수염만 날린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

 

               -<조선일보>(1927)-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저항적, 기구적, 의지적

특성

① 봄의 정경과 대비로 쓸쓸함의 정서를 부각함.

② 마지막 연에 시적 화자의 분명한 목소리가 드러남.

③ 공간적 배경이 시의 주제와 긴밀하게 관련됨.

④ 자연과 현실의 불일치로 인한 고뇌가 드러남.

⑤ 시상의 전환을 통해 화자의 의지를 강화시킴.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봄비 → 계절적 소재

* 고요히 깃을 걷는다. → 비가 그치는 것을 새가 날개를 걷는 것에 비유함.(활유법)

* 아즈랑이 → 아지랑이, 계절감

*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 → 일제치하의 조국

* 2연 → 1행과 2행이 서로 대비됨.

* 새검파리 → 깨진 사기그릇의 조각

* 두셋의 어린아이 → 세상 물정 모르고 노는 아이들

* 무너진 성터 → 폐허, 망국의 국토

* 한숨지고 → 조국의 상실감(맥수지탄), 무상감

*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 두보의 시 '춘망'을 연상시킴.

*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 조국 광복의 뜻을 헛되이 보낼 것인가.

* 오 ―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 부는 바람에 뜻(조국 광복에의 의지)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 솟는 눈물이여! →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

* 그러나 → 시상의 전환

*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 동무

   →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독립운동가), 나약한 화자와 대비되는 존재

* 철벽 → 장애물

* 새 빛 → 희망, 밝은 미래, 조국의 광복

* 오 ―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

   → 조국광복을 향한 간절한 소망, 화자의 목소리가 분명히 드러남.

 

제재 : 봄

주제밝은 미래(조국의 광복)에 대한 간절한 소명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봄비가 그침.

◆ 2연 : 봄의 풍경 속에서 느끼는 쓸쓸함.

◆ 3연 : 양지쪽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

◆ 4연 : 무너진 성터에서 한숨짓는 노인의 모습

◆ 5연 : 봄이 찾아온 폐허에서 느끼는 회한

◆ 6연 : 동무가 실어올 새 빛에 대한 소망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망국의 국토인 '폐허'의 공간에서 화자가 느끼는 쓸쓸함과 밝은 미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시의 전반부는 봄이 찾아온 폐허의 정경을 주로 드러내고 후반부는 화자의 심리를 주로 드러내고 있다.

◆ 더 읽을거리

김해강은 활동 초기 프로문학 운동이 왕성할 때에는 동반 작가로서 경향적인 시를 많이 발표하였으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순수 서정 시인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통한 한국의 전통적 서정 세계를 주로 노래하였다. 이 시는 그의 초기 시세계를 잘 보여주는 경향적 작품이다.

1~2연은 간밤의 봄비가 그치면서 봄빛이 가득한 세상을 보여 준다. 그러나 봄비는 지리한 밤과 함께 새벽바람에 물러가고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땅 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을 돌아본 시적 자아는 그저 쓸쓸함을 느낄 뿐이다. 이때, '옛 뒤안'은 단순히 집 뒤의 공터라는 의미보다는 그동안 식민지 시기의 온갖 고난과 역경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3~4연에서 시적 자아의 시야는 집 밖의 세상으로 확대된다. 그곳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놀고 있는 한가로운 장소이지만, 회한에 잠겨 '한숨지고 섰는 늙은이'의 흰 수염이 바람에 날리는 '무너진 성터'로서, 봄을 맞는 폐허의 구체적 공간적 배경이 된다. 그러나 이때의 '무너진 성터'는 폐허의 대유적 표현이며, 이는 곧 나라를 잃은 망국의 국토를 상징한다.

5~6연에서 시적 자아의 현실 인식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시적 자아는 그대로 폐허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다시 찾아온 봄에 의탁해 막연하나마 희망을 실어보낸다. 그러나 정면으로 맞서지도 나서지도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은 고작 두근거리는 가슴 속에 눈물을 삼키는 회한으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그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봄으로써 이러한 막연한 희망에서 구체적인 현실적 방법의 모색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 동무는 아마도 남몰래 노동 운동을 하거나 지하 정치 운동을 하는 젊은이리라. 시적 자아는 드디어 '철벽을 깨뜨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를 '가슴을 바쳐' 기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이 작품은 '이 폐허에도 봄은 찾아 왔건만'의 표현에서 보듯 두보의 시 <춘망(春望>)의 모티프를 연상시킨다.

이 시는 전반부의 봄을 맞는 비관적 정조에서 벗어나 주체의 현실적 자각을 획득함으로써, 현실을 뚜렷이 응시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마지막 연의 '그러나 나는'에서 보듯, 시상의 전환과 함께 분명하게 시적 자아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는 점은 이러한 현실 인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경향시의 대표적 특성인 것이다.

이는 후기 임화를 필두로 하는 '단편 서사시'라고 명명되는 갈래와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인다. 단편서사시의 경우는 서사성을 갖춘 산문시의 양식으로써 시 전반에 서정적 정서가 아닌 경향적 정서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즉 1920년대 전반에 한국문학사에 주류를 이루었던 낭만주의적 서정성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리얼리즘적 경향성이 덧 데인 과도기적 성격을 보이는 시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출처:양승준, 양승국 공저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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