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

                                                                              - 최승호 -

                                                       

 

 

 

부패해 가는 마음 안의 거대한 저수지를

나는 발효시키려 한다.

 

나는 충분히 썩으면서 살아 왔다.

묵은 관료들은 숙변을 내게 들이부었고

나는 낮은 자로서

치욕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땅에서 냄새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수렁 바닥에서 멍든 얼굴이 썩고 있을 때나

흐린 물 위로 떠오를 때에도

나는 침묵했고

그 슬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한때 이미 죽었거나

독약 먹이는 세월에 쓸개가 병든 자로서

울부짖음 대신 쓴 거품을 내뿜었을 뿐이다.

문제는 스스로 마음에 뚜껑을 덮고 오물을 거부할수록

오물들이 더 불어났다는 사실이다.

뒤늦게 나는 그 뚜껑이 성긴 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물왕저수지라는 팻말이 내 마음의 한 변두리에 꽂혀 있다.

나는 그 저수지를 가 본 적이 없다.

물왕저수지로 가는 길가의 팻말을 얼핏 보았을 뿐이다.

그 저수지에

물의 법이 물왕의 도가

아직도 순환하고 있기를바란다.

그 저수지에 왕골을 헤치며 다니는 물뱀들이

춤처럼 살아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물과 진흙의 거대한 반죽에서 흰 갈대꽃이 피고

잉어들은 쩝쩝거리고 물오리떼는 날아올라

발효하는 숨결이 힘차게 움직이고 있음을

 

 

 

내 마음에도 전해 주기 바란다.

 

                   - <대설주의보>(1983) -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서정적, 환경생태적, 대조적, 서술적

표현

* 비유와 대조적 이미지 활용

* 파괴적, 반생명적 문명과 부정적 시대 현실 비판

* 생태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주제를 부각시킴.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부패해 가는 마음 안의 거대한 저수지를

   → 화자의 마음을 '저수지'에 비유함.

       그 저수지가 부패(부정적인 상황, 문제상황)해 가고 있음을 말함.

* 나는 발효시키려 한다.

   → 부패한 마음을 발효시키려 한다. 발효는 부패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어떤 '변화'를 의미함.

* 나는 충분히 썩으면서 살아 왔다.

   → 화자 자신의 지난날의 삶이 부정적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화자의 삶이 부패한 원인 중의 일부는 외부적인 것에 있음을 그 다음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 나는 낮은 자

   → 묵은 관료들이 숙변을 들이붓는 행위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나약한 존재'

* 치욕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 '치욕'은 묵은 관료들이 숙변을 들이붓는 것을 가리키고, 화자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현실을 수동적이고 나약한 모습으로 받아들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 멍든 얼굴 → 폭력적인 현실의 희생양

* 나는 침묵했고

   → 폭력이 난무하는 부정적 현실에 대한 화자의 지난날의 대응 태도

       부정적인 현실에 침묵하는 소시민적 삶의 모습

* 나는 한때 이미 죽었거나

   → 김수영의 <사령>에 나오는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구절을 떠올리게 함.

* 독약 먹이는 세월 → 자신이 살아온 현실을 '독약을 먹이는 세월'이라고 부정적으로 인식

* 쓸개가 병든 자

   → 우리가 흔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거나 자존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쓸개 빠진 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화자 자신의 나약하고 정신이 병든 모습을 표현한 것임.

* 문제는 스스로 마음에 뚜껑을 덮고 오물을 거부할수록 ~ 그 뚜껑이 성긴 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 더러운 내면을 감추고 덮으려고만 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드러남.

* 물의 법이 물왕의 도가 / 아직도 순환하고 있기를 바란다.

   → 작품의 후반부에 속하며 화자의 소망이 주를 이루게 됨.

* 왕골을 헤치며 다니는 물뱀들이 춤처럼 살아 있기를 바란다.

   → 화자의 소망으로, 화자가 바라는 저수지(내면)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남.

* 흰 갈대꽃이 피고 잉어들은 쩝쩝거리고 물오리떼는 날아올라

   → 화자가 소망하는 바로, 화자가 바라는 저수지(내면)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남.

* 발효하는 숨결 → 화자의 궁극적인 소망으로 위에 제시된 구체적인 소망이 수렴된 표현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자신의 썩고 부패한 지난 삶(저수지)이 '물왕의 도가 순환하고', '물뱀들이 헤집고 다니며', '갈대꽃', '잉어', '물오리떼' 가득한 순수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저수지)으로 변화했으면 하는 소망을 '동적 이미지'를 통해 드러냄.

화자 : 지난 시절 치욕적이고 소시민적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건강하고 바람직한 삶을 회복하기를 소망하는 사람

주제부정적 현실의 거부와 건강하고 순수한 삶에의 소망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부패해 가는 마음을 발효시키려 함.

◆ 2연 : 썩으면서 살아온 그동안의 삶

◆ 3연 : 썩은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기를 소망함.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최승호의 시 세계는 현실의 폭력이나 세계의 광포함에 내던져진 존재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바람직한 삶에 대한 열마을 추구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비인간화의 상황을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그의 시세계는 결국 현대 사회의 병든 삶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환경 생태시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이 계열의 작품을 많이 생산했는데, 군사 독재 정권에서 서서히 벗어나 민간 정부로 바뀌고 구소련의 붕괴로 인한 사회주의 양극 체제가 무너짐으로써 대안적 상상력이 필요했던 점과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은 부정적 외부 현실에 대하여 침묵하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삶에 대한 반성과 '침묵'이 오히려 부정적 현실의 악화에 기여했다는 뒤늦은 자각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건강하고 활기찬 사회와 삶을 소망하고 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 마음을 저수지에 비유하여 마치 액자식 구성처럼, 혹은 시나리오의 오버랩 기법처럼 두 개의 내용이 포개어져 있다. 겉으로는 부정적 시대 현실이 내 마음을 오염시켰고(세뇌), 그 치욕적인 사실을 묵인하고 수용한 결과로 병든 몸이 되었다는 사실과 이의 치유에 대한 소망을, 다른 하나는 파괴적이고 반생명적인 현대 물질문명에 의해 자연(삶의 터전)이 얼마나 황폐하게 되었는가 하는 오염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내용이 겹쳐 있지만, 중심 내용은 화자 자신의 병든 마음과 몸의 치유, 즉 삶의 자세, 인생관 세계관의 변화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고 환경오염의 문제는 비유를 통하여 이를 빗댄 부차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주제와 비유가 맞물린 좋은 작품이지만, 화자의 적극적인 행동과 태도가 제시되지 못하고 다만 간절히 '바란다'는 진술로 마무리되고 있는 점이 아쉽게 남는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러하듯이 반성적 성찰의 자기 인식에 머무는 '관찰자'의 한계를 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 더 읽을거리

썩어가는 물이 고인 내 마음 속 커다란 저수지.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커다란 저수지에 비유하고 있다. 여러 곳에서 흘러 든 물이 저수지에 모이듯이, 우리의 정신은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부패해 가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충분히 썩으면서 살아 왔다.'고.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부패하는 이유를 군사 독재 치하의 암울한 현실에서 찾는다. '수렁 바닥에서 멍든 얼굴이 썩고 있을 때나 흐린 물 위로 떠오를 때'라는 표현은 아마도 군사 독재 치하의 억울한 죽음들을 말하고 있으리라.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를 규탄하다 눈에 최루탄이 박혀 죽은 김주열의 시신은 바닷속에 밀어 넣어졌다가 부둣가에 떠올라 4 · 19 혁명의 도화선이 됐지만, 1961년에서 1980년대에 걸친 군사 독재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이 소리없이 묻혀 버렸던가.

시인은 이런 억울한 죽음들 앞에서도 자신은 슬퍼했을 뿐 침묵했다고 말한다. '독약 먹이는 세월' 같은 긴 어둠의 시절에 그는 '울부짖음 대신 쓴 거품을 내뿜었을 뿐'이라 말한다. 그 암울한 시대에 '묵은 관료들'은 그의 마음 안 저수지에 묵은 똥을 쏟아 부었고, '낮은 자'인 그는 그 치욕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이제 시인은 이 썩어 버린 마음을 '발효'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마음 속에 쌓인 온갖 오물들이 '발효'되어 깨끗해지기를 바란다고. 이런 소망 속에서 그는 '마음 안의 거대한 저수지' 한 귀퉁이에 '물왕저수지'라는 팻말을 꽂아 본다. 어느 가문 날 버스 유리창 밖에 보였던 물왕저수지 팻말의 말뜻 그대로, 그는 자신의 마음 속 저수지에도 '물의 법', '물왕의 도'가 살아 있어 스스로를 정화시키기를 바라는 것이다.

저수지의 물이 발효 과정을 통해 정화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마음이 내적인 '발효' 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시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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