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삼촌(1978) -현기영- |
◆ 소설 읽기 |
● 줄거리 |
서울 큰 회사의 부장 자리에 있는 나는 8년 만에 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여하러 비행기로 고향 제주도 서촌으로 간다. 나는 일곱 살 때 병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4 · 3 사건 전에 아버지는 경찰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 버렸기에, 큰아버지 밑에서 사촌과 함께 자랐으며, 뭍으로 건너와 공부하고 직장을 얻고 그럭저럭 15여 년을 보냈다. 8년 만에 찾아간 고향, 제삿날이기에 친척들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 쉽게 확보된다. 그런데 그 친척 중에서 꼭 있어야 할 순이 삼촌이 눈에 띄질 않았다. 이 고장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삼촌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내는 풍속이 있는데, 순이 삼촌은 나이 많은 여인으로 불과 두 달 전까지 1년 간 나의 서울 집에서 식모처럼 밥을 짓고 집을 봐주다가 어느 날 문득 내려간 터인데 그새 죽었던 것이다. 순이 삼촌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야기는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나의 집에 와 있을 적의 순이 삼촌의 여러 기행(奇行)이 차례차례 밝혀진다. 아무도 탓하지 않는데도 밥을 많이 먹는 식모라고 하여 자기를 흉본다고 화를 내고, 심지어는 생선 구운 석쇠까지 방 안으로 가져와 생선 부서진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님을 하나 하나 입증하는 결벽증을 보이는데 이것은 상식을 넘어서는 행동이었다. 그녀를 데리러 온 사위(출가한 딸이 있으나 순이 삼촌은 혼자 살았다)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이런 기행이 모두 환청 때문임이 판명된다. 있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고 우기는 이런 신경 장애의 원인을 차곡차곡 살펴 나가면, 1948년의 제주도 4 · 3사건의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여 년 전 그 해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그날은 유달리 바람 끝이 맵고 시린 날이었다. 별안간 밖에서 연설 들으러 나오라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보통 때와 달리 군인들의 수십 명 퍼져 다니면서 재촉하였다. 군인들 가족과 순경 가족, 이어서 공무원 가족이 나머지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때, 군중 속에서 별안간 불이 났다고 소리쳤다. 마을엔 삽시간에 무서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동요하는 마을 사람들을 군인들은 총으로 위협했다. 마을 사람들이 군인들에 의해 돼지 몰듯 하여 우리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잠시 후 총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차례 차례 사람들은 이유도 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작전 명령에 의해 소탕된 것은 대부분 노인과 아녀자들이었다. 제주도 부락민들이 5 · 10선거 때 몇몇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부화뇌동되어 선거를 보이콧했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남정네들은 밤에는 폭도에 쫓기고 낮에는 군경에 쫓겨 갈팡질팡하다 결국은 할 수 없이 굴 속으로 도피를 했던 것이다. 순이 삼촌도 행방을 알 수 없는 남편 때문에 도피자들 틈에 끼어 있다가 우리 할머니에게 맡겨 두었던 오누이 자식을 데리러 내려 왔다가 그만 화를 당한 것이다. 군경측의 무리한 작전과 이념에 대한 맹신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이었다.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마을을 태우는 불빛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날 밤 사람들은 한길을 피해 모두 교실로 몰려 들어가 불안한 밤을 새웠는데, 밤중에 우리들은 두 번 크게 놀란다. 한 번은 대밭이 타면서 터지는 소리를 총소리로 잘못 알고 놀랐고, 또 한 번은 죽은 줄만 알았던 순이 삼촌이 살아 돌아와 밖에서 유리창을 두드렸을 때였다. 삼촌은 총살을 당하기 전에 기절을 한 상태여서 다행히도 살아서 돌아온 것이었다. 그 학살 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이 삼촌은 그후 경찰에 대한 심한 기피증이 생겼고, 메주콩 사건으로 결벽증까지 생겼으며, 나중에는 환청증세도 겹치게 된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순이 삼촌 만큼 그날의 상처가 깊은 사람은 없었다. 평생 그날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 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 등을 골라내며 30년을 과부로 살아오다가 그날의 일을 환청으로 듣게 되고, 마침내 그 살육의 현장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게 된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30년이 지나고도 그 일을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한달 전에 자살한 순이 삼촌의 삶은 이미 30여 년 전의 시간 속에서 정지해 버린 유예된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
● 인물의 성격 |
◆ 순이 삼촌 → 섣달 열여드렛날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한 신경 쇠약과 환청에 시달리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소박한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 ◆ 고모부 →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섣달 열여드렛날의 비극을 시국 탓으로 돌리고 숨기려 함. 현재는 도청 주사로 있으면서 밀감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인물 ◆ 길수형 → 어린 시절, 나와 함께 섣달 열여드렛날의 비극을 겪은 인물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는 인물 ◆ 나 → 작중 화자 |
● 구성 단계 |
◆ 발단 : 나의 귀향과 순이 삼촌의 죽음을 알게 됨. ◆ 전개 : 순이 삼촌의 평탄치 못했던 서울 생활 ◆ 위기 : 섣달 열여드렛날의 일을 회상함. ◆ 절정 :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순이 삼촌 ◆ 결말 : 순이 삼촌의 고통의 세월을 생각함. |
● 이해와 감상 |
◆ 이 작품은 1949년 1월 16일 제주도의 동쪽 마을 북촌리에서 500여명의 주민이 군인에 의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된 소위 '북촌리 사건'을 주요 배경으로 하고 거기에 작가의 체험을 함께 섞어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사실주의 기법의 작품이다. ◆ 이 작품에서 현기영은 군인의 대양민 학살의 현장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여 그 참혹상을 고발함과 동시에, 이 학살의 와중에 극적으로 생존한 순이 삼촌의 정신이 어떻게 황폐화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4 · 3 사건'의 여파가 지금까지 제주도민에게 어떠한 정신적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름없는 다수의 사람들, 짓밟히면서도 왜 짓밟히고 있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아픔을 작가가 대신 아파하고 분노의 목소리로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작품에서 마을 사람들은 밤에는 폭도들에게 입산하지 않는 자는 빨갱이라는 논리하에 대창에 찔려 죽고, 낮에는 약탈당하지 않은 집은 좌익 동조자라고 해서 취조를 당했다. 이런 흑백 논리 속에서 마을 소각이라는 참상이 놓여 있는 것이다. 즉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낳은 비극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4 · 3 사건의 고발이라는 작품의 의의에도 불구하고, 4 · 3 사건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보여 주지 않고 있어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 이념에 대한 맹신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순이 삼촌은 그 후 경찰에 대한 심한 기피증이 있었고, 또한 '콩 사건'으로 결벽증까지 생기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환청 증세도 겹치게 된다. 길수형은 그때 그 사건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밤에는 공비들이 출몰하고, 낮에는 순경이 출몰하여 "폭도에 쫓기고 군경에 쫓겨 갈팡질팡"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다. 순이 삼촌 역시 남편의 행방을 대라고 옷을 벗기우기도 하고 도리깨로 매질을 당하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양민을 폭도로 매도하는 고모부의 의견에 항의했다. 섬사람들이 30년이 지나고도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레드컴플렉스 탓이다. 순이 삼촌은 밭에서 뼈와 탄피를 보며 그날의 일을 환청으로 들었다. 그녀의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30년 전의 죽음인 것이다. 이 작품은 첫째, 제주사건을 민중적 시각에서 조명하려 했다는 점, 둘째, 서북청년단 출신 순경들의 작태를 고발하여 제주도에서 벌어진 반인륜적 행위를 폭로했다는 점, 셋째, 역사적 사실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가열한 비판의식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지나간 시대의 역사 속에서 왜곡된 부분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작가 정신과 치열한 참여정신이 돋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 핵심사항 정리 |
◆ 갈래 : 현대 중편소설, 사실주의 소설 ◆ 배경 * 시간적 → 과거(1949년 겨울), 현재(30년이 지난 지금) * 공간적 → 제주도 ◆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 특징 * 사투리를 사용하여 사실성을 확보함. * 4 · 3 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잘못된 역사에 대한 고발정신이 반영됨. * 내용상 액자소설로, 내부 액자와 외부 액자의 교차로 구성됨. ◆ 주제 *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의 비극과 순이 삼촌의 황폐화된 삶(트라우마:정신적 외상) * 제주도 4·3사건의 참상과 그로 인한 민중의 상처 ◆ 출전 : 창작과 비평 가을호(1979. 9) |
● 생각해 볼 문제 |
1. 이 작품은 제주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4 · 3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의 소설화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말해 보자. ⇒ 대략 3백 명 정도 예상되는 좌익의 '무장 폭도'를 사냥한다는 목적으로 5만여 명의 양민까지 학살한 그 엄청난 사건을 기나긴 은폐의 장막을 걷어내고 폭로, 고발해 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미친 역사'에 의해 좌익 폭도와 토벌대 양자의 틈새에 끼여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한 '양민'들, 그 억울한 사연을 고발해 낸 정신은 문학이 중요하게 짊어져야 할 의무 중 하나였던 것이다. 2.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작가의 역사 이해에 대해 비판해 보자 ⇒ 이 작품의 '고발 정신' 속에는 지나간 사실을 그대로 복원하려는 정신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즉, 양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이 토벌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계기를 제공한 '폭도'들에게도 있다고 보고 있으며, 또한 섬사람과 육지사람들 간의 감정 대립도 중요한 하나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그것이 그야말로 지역 간의 감정 대립에서 그치는 것인지 아니면 배후에 또 다른 사회관계가 숨어 있는지는 밝혀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단계까지는 파고들지 못한 채 지역 간 대립을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 작품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
● 더 읽을거리 |
◆ 4 · 3 사건에 대해 1948년 4월 3일 제주 전역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 8 · 15 광복 직후의 혼란기를 틈타 남조선 노동당은 제주에 지하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제주인민해방군은 일본군이 숨겨놓은 무기와 화약을 찾아내어 무장을 하고 유격전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편,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 투쟁을 벌이던 제주도민에 대한 경찰 및 우익단체의 무차별한 테러가 극심하여 도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북 출신의 경찰관들이 제주에 파견되자 이를 계기로 좌익 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 반미 · 반경찰 · 반서북청년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민중 봉기를 주도하며,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미군정청은 경찰병력을 제주에 투입하여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군을 투입하여 제주도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약 9만 명의 이재민과 엄청난 재산 ·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제주도에서는 5 · 10선거를 치르지 못하였다. 비록 이 사건은 발발 1년 만인 1949년 5월 일단 종결되었으나, 봉기의 여파로 인한 완전 진압은 6 · 25전쟁을 거쳐 1954년에 가서야 가능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1978년 9월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의 중편소설이다. 제주도 공비 토벌 사건을 다룬 소설로, '나'는 8년만에 조부모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 제주를 방문하였다. 거기서 순이 삼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순이 삼촌은 작년 한 해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식모 노릇을 하던 그녀는 쌀 문제로 아내와 말다툼을 하게 된다. 결국 사위 장씨가 그녀를 모시러 왔던 날, '나'는 그를 통해서 순이 삼촌이 환청 증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4, 5년 전 이웃집에서 메주콩을 잃은 일로 싸운 적이 있는데, 이웃이 경찰서로 가자고 말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주저앉아 범인으로 오해받으면서 환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순이 삼촌의 파출소 기피증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음력 12월 18일 마을 사람들은 국군들에 의해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군인 가족, 경찰, 공무원, 대동청년단, 국민회 간부와 가족들이 차례로 분리되자, 마을에는 불이 질러지고 마을 사람 오륙백 명은 참살당했다. ◆ 제주도에서 '삼촌'이라는 호칭 현기영의 <순이 삼촌>에서 보면, 마을에 살고 있는 먼 이웃 여자 친척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제주도 사람들은 촌수를 그렇게 복잡하게 가리지 않는다. 육지 사람들이 숙부 · 숙모 · 외숙부 · 외숙모 · 고모 · 고모부 · 이모 · 이모부라고 부르는 반면, 제주도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로 통일하여 '삼촌'이라고 부른다. 외가나 친가를 막론하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같은 항렬이면 남녀를 구분하지도 않고 모두 '삼촌'이다. 꼭 남녀를 구분해야 할 경우에는 '여자 삼촌'이나 '예편 삼촌'이라고 부른다. 제주도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다 동원된다. 저마다 지닌 기량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담을 쌓고 물을 긷기도 하고, 기둥을 세우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기둥을 세운다. 지붕을 잘 이는 사람은 지붕을 이는 일을 하면서 집을 짓는다. 협동 정신을 통해 험난한 세파를 헤쳐 온 제주도 사람들의 슬기로움이다. 또, 제주도 사람들은 집을 지을 적에 방위를 따지는데, 그것은 동부자(東富者) · 서가난(西家難) · 남장수(南長壽) · 북단명(北短命)이란 속신 때문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동쪽과 남쪽은 부를 주거나 오래 살게 해 주는 방위이고, 서쪽과 북쪽은 불길한 방위로 여긴다. 그런 연유로 집안 살림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지도 않는다. 솥은 부엌 앞문 쪽에 깨끗한 돌을 골라낸 뒤에 걸고, 솥을 앉힌 안쪽 끝에 깨끗한 물독을 둔다. 그리고 솥을 건 천장 쪽에는 '씻부개기' 또는 '부개기'라 부르는 씨앗 주머니를 매달아 두며 천장은 부엌 뒷문 쪽에 두었다. ◆ 의의와 평가 <순이 삼촌>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자신이 일구던 밭에서 생을 마감한 '순이 삼촌'의 자살 원인을 찾아 나아가는 '의문 ― 추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형식은 어둠 속에 묻혔던 제주도 4 · 3 항쟁의 실상에 대한 객관적 탐구의 첫 걸음인 이 작품의 의의를 집약한다. 이 형식은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 금제에 막혀 왜곡되고 은혜되었던 우리 근현대사의 안쪽에 대한 객관적 탐구를, 나아가서는 금기를 뚫고 진실의 규명에 나아가려는 모든 지향을 추동하는 실천의 형식이다. <순이 삼촌>의 이 '의문 ― 추적'의 형식은 지난 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과거 탐구의 작업과 금기의 해체 작업을 앞서 이끄는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순이 삼촌>은 현기영 소설의 문체 변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현기영 초기 소설의 문체는 현기영 문학에 대한 일반적 통념과는 다르게 대단히 화려한데, 이 같은 문체적 특성은 <순이 삼촌>을 경계로 현저하게 약화되고 대상의 사실적 재현에 주력하는 절제된 건조체가 지배적인 문체로 자리잡는다. 이 또한 숨겨지거나 왜곡된 진실을 탐구해 드러내어야 한다는 작가정신의 소산일 것이다. ◆ 신문 기사문 1978년에 발표된 현기영(55) 씨의 중편 <순이 삼촌>은 30년 동안 묻혀 있던 4 · 3의 진실을 거의 최초로 공론화한 문제적 소설이다. 비록 이 소설로 인해 작가 자신은 보안사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책도 발매 금지되는 고초를 겪었지만, 이 작품이 지닌 문학사적 · 역사적 의의는 그로 인해 더 한층 막중해졌다.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의 제사에 맞추어 고향인 제주 서촌 마을에 내려간 '나'를 화자로 내세운 소설은 30년 전 향리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을 통해 4 · 3의 아픈 역사를 고발하고자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되기도 한 순이 삼촌(제주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히 삼촌이라 부른다.)은 30년 전의 학살 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인물이지만, 평생 그 사건으로 인한 충격을 떨쳐 버리지 못하다가 그예 자살을 택하고 만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소설 <순이 삼촌>은 48년 음력 섣달 19일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질 양민 학살 사건을 모델로 삼고 있다. 이날 아침 이 마을 어귀에서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하자 군인 2개 소대 병력이 마을로 들이닥쳐 3백여 동의 가옥을 불태우고 수백 명의 양민을 학살한 것이다. 마을의 남정네들이 군 · 경에 학살당하거나 토벌대를 피해 입산함으로써 여자만 남게 되어 한동안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리기도 한 북촌은 함덕 해수욕장과 지척 거리에 있는 전형적인 제주 마을이다. 검은 돌담과 샛노란 유채꽃, 기와지붕 가녘의 흰색 테두리와 옥빛 바닷물이 현란한 색채의 잔치를 연출하는 이 마을에서 반세기 전의 비명과 유혈을 떠올리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일주도로 변의 북촌 초등학교 운동장은 어김없이 그날 마을 사람들을 소집한 군대가 학살 대상자를 정하기 위해 군 · 경 가족을 가려내던 그 장소요, 웃자란 마늘 줄기들로 시퍼런 학교 뒤 옴팡밭은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던 바로 그 학살터임에 분명하다. "적어도 내 상상 속에서 나의 향리는 예나제나 죽은 마을이었다. 말하자면 삼십 년 전 군 소개 작전에 따라 소각된 잿더미 모습 그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북촌이 비록 현기영 씨의 고향은 아니지만, 소설 속 '나'의 목소리를 작가 현 씨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바람에 날려오는 유채꽃의 비릿한 향내에서 죽은 자들의 시취(屍臭)를 맡고, 화산암의 거무튀튀한 색깔에서는 완벽하게 불타 버린 반 세기 전 제주도를 연상하게 된다고 현 씨는 말했다. "작가로서 내가 4 · 3에만 매달리는 것은 편협한 지방주의 때문이 아니라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는 문학적 전략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 3에 응축되어 있는 민족적 · 민중적 모순을 통해 보편성에의 요구에 응하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글 최재봉 / 한겨레신문 1996. 04. 16 |